무진기행 필사북 - 이동진 평론가 추천!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건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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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그림책을 보며 생긴 습관이 있다. 책을 읽기 전 앞뒤 표지를 쫙 펼쳐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앞표지만 봤을 때보다 흥미롭고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커진다.

<무진기행 필사북>은 좀 색다른 경험이었다. 앞뒤로 펼치기 쉬운 필사책이라 힘들이지 않고 마치 무용수가 다리를 일자로 찢듯 펼쳐 들었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무진의 안개'라는 문구와 뿌연 해안가를 걷는 누군가의 뒷모습. 이 표지를 보고 난 무엇을 기대해야 마땅할까. 익숙해지지 않는 낯섦에 한동안 표지를 넘기지 못한 채 벌받는 심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가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을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갸,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기행 필사북, 16쪽

"소설 쓰기를 시작하는 이라면 한 번은 반드시 <무진기행>을 필사해야 한다."

모든 소설가와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의식이 있다고 한다. 문장이 막히고 자신이 쓴 글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 혹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한국어의 정수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싶을 때 조용히 원고지와 펜을 꺼내 들고 마주하는 단 하나의 텍스트. 바로 작가 김승옥의 문장이다.

<무진기행>은 1964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중년 남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시대와 상황에 걸맞은 만남과 대화가 이어진다.

'백이 좋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남자는 장인 어른의 든든한 지지를 받으며 승진을 앞두고 있다. 오랜만의 고향행을 제안한 것은 그의 건강을 염려한 아내였다.

"당신 안색이 아주 나빠져서 큰일났어요. 어머님의 산소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무진에 며칠 동안 계시다가 오세요. 주주 총회에서의 일은 아버지하고 저하고 다 꾸며놓을게요. 당신은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쐬고 그리고 돌아와 보면 대회생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되어 있을 게 아니에요?"

무진은 바다와 가까이 있는 농촌 마을이다. 이렇다 할 명산물 하나 없지만 오륙 만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무진이 고향인 남자에게 무진하면 떠오르는 것은 '안개'다.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같은,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바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람들의 힘으로는 헤쳐 버릴 수 없는. 무진의 안개 앞에 무력하지 않을 자 누구인가.

"세상에 착한 사람이 있을까?"

나는 방으로 불어오는 해풍 때문에 불이 꺼져버린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며 말했다.

"절 나무라시는 거죠? 착하게 보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착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우리가 불교도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착한 분이세요?"

"인숙이가 믿어주는 한."

무진기행 필사북, 102쪽

인숙이라는 여자가 등장하면서부터 불안했다. 설마,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지만, 남자와 여자는 만난 지 하루 만에 '사랑'을 이야기했다. '님'과 '남'은 점 하나 차이라지만 이건 아니지.

무진을 떠나고 싶었던 여자에게 서울 냄새 나는 남자는 자신의 탈출을 도와줄 구명 보트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에게 여자는 무엇이었을까. 성악을 공부한 음악 선생님이 부르는 '목포의 눈물'에는 작부들이 부르는 노래같은 꺾임과 그 특유의 청승맞음이 없었다. 자살한 술집 여자의 시체를 향하여 이상스레 정욕이 끓어오른다는 이 남자는 누구인가.

남자에게 무진은 '일탈'을 꿈꾸게 하는 곳이었다. 뒤죽박죽 엉뚱한 공상이 가능한 곳이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무진에서만큼은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남자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 소설은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시작한다. 또 무진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끝난다. 무진으로 들어갈 때도, 무진에서 나올 때도 버스는 덜컹거린다. 우리의 인생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딪친다. 그 나약함을 들키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남자가 믿는 것은 무진의 안개였는지도 모르겠다. 정의롭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가릴 수 있는.

1960년 대, 한국 문학계에 김승옥이라는 청년이 등장했을 때 평단은 그를 두고 '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김승옥은 최초의 한글 세대로 한글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감각적인 현대적 문체를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명사와 형용사의 신선한 결합, 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단락 전체를 관통하는 쓸쓸하면서도 매혹적인 호흡. 김승옥의 문장을 손으로 써 내려가다 보면 작가가 단어를 고르고 배치할 때 느꼈을 짜릿한 '창작의 순간'과 심장 박동을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정중한 독서법인 필사의 유익함이다.

나만의 필사 공책이 있다. 책을 읽다가 도저히 따라 쓰지 않고는, 남겨두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문장을 만날 때 보물을 묻어두듯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쓰곤 한다. 그것을 오래 묵혔다 어느 날 꺼내 보면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더해질 때가 있다. 아마 내 삶의 무게만큼이겠지. 50대가 되어 읽을 <무진기행>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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