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헤르타 뮐러의 글들은 쉽지 않다. 숨그네와 마음짐승이라는 두 권의 책들을 읽으며, 이미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쓰여진 이야기들은 나를 편안하게 이야기 속에 잡아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앞에서도 수 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그 안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만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앞서 경험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를 마주하던 순간에도 나는 어느 정도의 각오를 해야만했다. 이 책이 나를 편안하게 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써내려간 그 많은 단어들과 문장들은 여느 글들과는 다르게 무거운 저 깊은 아래로 자꾸만 가라앉을 것이며, 나는 또 그 말들과 의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을 들여,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각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미 내가 먼저 읽었던 헤르타 뮐러의 다른 작품인 <숨그네>와 <마음짐승>보다 훨씬 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만큼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깊고 깊은 이야기였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혹은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은 아디나와 클라라라는 이름의 두 여인이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일을 하고 있는 아디나와 비밀경찰의 일을 하고 있는 애인을 두고 있는 친구 클라라. 친구이기도 한 이 두여인은 서로 각자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디나는 체제의 억압과 힘에 정면으로 맞설수는 없지만 그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클라라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힘을 몰래 업어서라도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쪽을 선택한다. 절친한 친구인 아디나에게조차 비밀로 해야할 만큼 당당하지 못한 비밀을 가진채 말이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다른 모습은 억압과 감시라는 당시 루마니아의 모습과 더해져 이들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다.

노동영웅이 추앙받는 그들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매일매일을 고된 노동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압박은 아디나가 가르치는 아이들조차도 피해가지 않는다. 국가가 힘으로 시대를 억누르고 무작정 강요하는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라고 그 힘을 피해갈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아디나는 노동의 대상으로 간주되어버린 아이들에게 그저 착취만을 당하지 않도록 나름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작은 저항을 하고, 자신만의 한 조각 양심을 지켜간다. 그리고 대신 체제에 저항하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더욱 치밀하지만 더욱 공포스러운 감시의 대상으로 선택되고야 만다. 은밀하고도 공포스러운, 그러나 숨기려 하지 않은 거대한 힘 앞에서 점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결국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감시의 눈초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매일매일 쫓기며 살아야 하는 힘없는 여우를, 사냥꾼의 덫에 걸린채 몸부림 칠 수록 고통스러워지는 그 시대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 클라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그녀가 얻고자 하는 아주 작은 혜택을 위해 절친한 아디나에게조차 비밀로 해야할만큼 은밀한 비밀을 등에 업는 쪽을 선택한다. 비밀경찰인 애인을 얻고, 그와의 관계를 통해 몇가지 혜택을 얻는 것으로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선택한 클라라.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은밀한 애인의 관계가 아디나에게 알려졌을 때 그녀들에게는 '우정'이라 불리우는 관계마저도 허락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끝없는 감시의 공포에 시달리는 자와 감시를 하는 자의 연인 사이에 우정이란 그 누가 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클라라와 아디나의 모습은 그래서 친구라 말하는 이들에게조차 믿음을 남겨주지 않는 시대의 잔인함이기도 하다. 또한, 비록 미비하고 연약한 저항이라 할지라도 나름의 방법으로 체제에 저항하려 움직인 아디나와 비밀경찰인 애인을 둔 클라라의 사이는 그렇게 당시 루마니아에 존재했던 수 없이 많은 군중의 모습과, 그 시대에 존재했던 억압과 감시, 그리고 가난이 인간들을 얼마나 하찮은 것들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양심을 버리고 무릎꿇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 그 모습이기도 하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안에서 그녀들이 살아갔던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녀들 뿐만이 아니다. 그녀들과 함께 같은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강압과 감시, 가난과 허기가 사람들을 얼마나 처참하게 몰고가는지를 끝없이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보다, 그의 목을 걸고 있는 한 가닥의 줄이 자신에게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가늠한다. 또, 힘을 가진자의 잘못은 언제든 무슨 방식으로든 타인에게 전가될 수 있으며, 그 힘으로 그 어떤 것이든 손쉽고 당당하게 얻을 수 있음을, 힘을 가지지 못한 자는 언제나 위태롭게 한 순간 한 순간을 버티며 살아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공장 곳곳에는 노동자와 같은 수의 절도범들이 존재한다 결론짓고, 감시와 압박을 정당화 한 세상. 자유와 의지보다는 타인에 대한 압력과 복종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들이 한때에는 지녔을지도 모를 희망과 열망 대신 무기력만을 채워넣고 시대가 강요하는 대로 가난의 고통과 감시의 공포에 무감각해진다. 그리고 그 무기력과 무감각 속에서 삶을 유지하고자 한다. 

가난은 피할 수 없고, 허기는 익숙해졌지만, 더 가난하고, 더 배고프지 않기 위해 그들은 훔치고 숨긴다. 다른 이들이 모두 훔치기에 자신도 훔친다. 또, 그들보다 조금 더 힘을 가지기 위해 훔치는 타인을 감시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모두가 훔치고 모두가 감시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다. 권력이라는 힘 앞에서 힘없이 늘어진 여우였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서로를 감시하는 더욱 거대한 사냥꾼이 되어 서로를 향한 덫을 놓고, 서로가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 하기를 기다리는 공포스러우리만치 무감각해진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마치 그것만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라도 된다는 듯이 망원경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서서 숲을 보는 사냥꾼처럼...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익숙해진 상태로 시간을 살아가던 사람들은 세상이 변화하고 달라져도 다시 힘을 얻지 못했다. 분명, 여우의 머리가 잘리기 전 도망한 아디나는 시골로 숨은 뒤 TV를 통해 그들을 억압하고 감시한 세상이 종결되었음을 알게 되지만, 세상의 변화를 느끼지는 못한다. 여전히 세상은 억압당하고 감시당했던 그 때처럼 흙색이다. 벽의 사진들은 사라지고, 벽보는 더 이상 붙지 않지만, 억압과 감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여전히 그 세상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욕조 위에 떨어진 해바라기 씨 껍질이 이제는 차창 밖으로 내뱉어질 뿐, 더 이상의 변화는 없다. 이미 아디나와 클라라가 살았던 세상에서 억압과 감시는 사냥꾼이 아닌 여우 그 자신들이 서로를 향해 하고 있었기에, 사냥꾼이 사라진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여우의 모습을 한 사냥꾼만이 남아있을 뿐이니 말이다. 

 

아마도 헤르타 뮐러는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번 잘못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또, 그렇게 흘러가 오랜 시간 굳어져버린 잘못된 시대의 모습에는, 이미 돌아갈 제자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수 없이 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그리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말하,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의 강인함을 퍼트리지만, 실제로 그녀가 경험한 고국 루마니아가 겪은 시대의 고통은 그렇게 한 순간 사라지지 않았음을.. 현실은 해피엔딩을 준비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는 않는 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이 이야기를 통해 한번 잘못 들어선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단언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더욱 시대가 강요하는 가치의 중요성을, 잘못되어서는 안되는 시대의 흐름을 역설하고자 한 것일테다. 그녀 자신이 그 잘못된 시대와 공포의 시간들을 버티며 살아온 산증인으로 옹이진 상처를 끌어안은 채 여전히 그 시대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헤르타 뮐러 그녀의 시대를 아디나로써 살아왔다. 또한 그녀는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의 클라라처럼 비밀을 간직한 채 자신에게 왔던 친구를 두고 있기도 했다. 그녀 자신이 경험했던 배신과 의심, 공포와 두려움을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속에서 보여주고 잘못된 시대가 인간을 얼마나 바닥으로 끌어내리는지를 보여주면서도, 한 켠에는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속의 클라라가 아디나에게 집단체포에 대해 알려주는 것으로  마지막 신의를 지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은, 여우와 사냥꾼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치졸해졌던 인간에게도 그 어딘가에 희망이라는 것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그녀의 바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경험한 현실이 아무리 냉혹하고 잔인했다 하더라도, 그 현실을 벗어날 방법 또한 사람에게서 밖에는 찾을 수 없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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