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느끼는 낙타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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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사건들은 세상 어느 길에서도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일들이다. 특별한 의미도 없고 기록해 둘 만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백년 인연이 쌓이면 배를 같이 타고, 천년 인연이 쌓이면 부부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와 악수를 나눈 손 하나하나, 찬란한 미소 하나하나, 평범한 말 하나하나를, 어떻게 옷깃을 스치는 바람처럼 무심히 흘려보내고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 31p.

 

<흐느끼는 낙타>는 국내에서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싼마오의 산문집이다. <사하라 이야기>를 읽고 싼마오를 사랑(?)하게 된 뒤, 그녀의 두번째 산문집은 일찌기 구입을 마친 상태였다. 이미 일 년도 전에 구입한 책을 왜 이제서야 읽었느냐 묻는다면 아끼느라 그랬다고 답할 수 밖에 없다. 게으른 독서가의 서투른 핑계처럼 들리겠지만(사실 그런 이유도 있긴 하다) <흐느끼는 낙타>를 읽으며 한 장 한 장 줄어두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 현재 국내에서 그녀의 다른 책이 언제 나올 지 모르는 상황이다. 싼마오의 꾸임없고 화려하지 않아 가슴에 더 깊이 스며드는 그런 문장을 만날 수 없는 아쉬운 현실에 일 년여를 묵힌 것이다. 제일 맛있는 부위는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놓는 어린이의 심정으로 말이다.

 

<사하라 이야기>에서는 싼마오와 호세가 결혼해 사하라 사막에서 정착하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였다. <흐느끼는 낙타>에서도 여전히 이기적이지만 그래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하라위족 이웃들과 살고 있는 싼마오와 호세가 있다. 하지만 당시 서사하라의 불안한 정세가 글 속에 묻어난다. 총 8편의 글이 실린 <흐느끼는 낙타>는 앞의 5편은 서사하라에서 뒤의 3편은 서사하라를 떠나 스페인령의 카나리아 제도에 정착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사막을 사랑한 싼마오가 그녀를 위해 사막으로 먼저 떠난 호세와 함께 사랑하는 사막을 등지고 나와야 하는 상황이 아쉬웠다. 표제작이기도 한 '흐느끼는 낙타'에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서사하라의 국내 상황과 서사하라를 둘러싼 나라 간의 긴장 상태가 싼마오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비극적으로 나타난다. 사막을 대표하는 낙타가 흐느끼는 서글픈 상황은 여전히 어지러운 서사하라의 상황을 보니 끝나지 않았나 보다.

 

싼마오의 글을 읽다 보면 '구름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떠돌지만 결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강하고 있는 자에게는 강하지만, 어리고 약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싼마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싼마오호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에 대한 애정'에 기반한다. 길에서 만난 인연 하나가 소중하고 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직접 작사한 시가 세상에 남겨지지 않는 사실에 안타까워 하는 싼마오의 마음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카나리아 제도 중)고메라 섬의 휘파람 말은 아직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지 모르지만 그런 말이 있었다는 사실은 싼마오를 통해 전해진다. 이웃 나라간의 전쟁으로 사람들은 사막을 떠났지만 그 곳에서 낙타와 양을 키우고 옆집 일에 참견을 잘하는 이웃들이 살았던 사실은 싼마오의 글에 남아있다.

 

싼마오호세는 이 땅에 없지만 여전히 사막을 동경하고 바다를 사랑한 사람들로 내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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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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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까? '카오산 로드'라는 장소보다는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하며 사람을 말하고 있는 여행기다. '박준'이라는 여행 작가의 너무나 유명한 책. 이제서야 만났지만 늦게 만나고 일찍 만나고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EBS에서 방송한 동명의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었다. 방송을 보지 않은 상태라 뭐라 평하긴 힘들지만, 여행 작가들의 이런 작업들이 현재도 꾸준히 여행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하고 책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지 싶다.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와 장소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일. 혹자는 그렇게 해서 그 장소에 관광객이 모여들고 고유의 문화나 분위기가 파괴된다고 하는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 세상에 결국 알려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는 장소가 몇 곳이나 되겠는가? 저 바다 깊은 심해나 남극점이라면 모를까. 세상 구석구석을 알리는 게 여행 작가에게 부여된 소임이라 생각한다. 직접 가지 못하고 이렇게 집에서 책으로 느끼며 위안을 삼는 독자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추정하건대 '카오산 로드'라는 장소가 부각된 시점은 박준의 프로그램과 책이 나온 이후가 아닌가 싶다. '장기여행, 배낭여행, 태국의 카오산 로드'라는 단어가 일반인 사이에서 회자된 시점 말이다. 이미 오랜 여행 경험을 축적한 여행자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책 속에 커다란 배낭을 맨 여행자가 가득하다 보니 유독 독자에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끔 충동하는 책, 왜 당신은 떠나지 않느냐고 채근하는 책이다. 읽는 동안 나 또한 그랬다. '장기여행 어려울 게 없잖아. 난 지금 여기 앉아서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라는 생각을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집에서 몸 사리며 나약한 핑계를 대는 중이다. 커다란 배낭을 멘 카오산 로드의 여행자들이 부럽지만 말이다.

 

자신을 포함해 15명의 여행자를 만나 이야기하고 영상과 글로 만들었다. 작가가 만난 이들은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씩 여행 중인 장기여행자들이다. 여행은 여름 휴가 며칠에서 유럽의 경우 한 두 달이 전부인 줄 알았던 세상이 갑자기 변한 느낌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여행이 가능한가에서부터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오지랖스러운 걱정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여행을 일탈이라 말하지 않고, 무엇을 찾아서 떠났기 보다 일상에서 더 잘 살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책을 읽고 15개의 다른 세계를 만난 느낌이다.

 

'박준'이라는 여행 작가에게 내가 가장 기대하는 부분은 바로 인터뷰다. 그의 책을 두 번째로 보는 것인데, 첫 권에서 인터뷰가 가장 인상에 남았기 때문이다. 역시 그의 인터뷰는 남다르다. 트레이시아는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내게 나눠주려 애썼다. 자기 인생의 보석 같은 걸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말하는 대신 그 보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눠주었다.(272~273p) 라고 쓴 문장이 있다. 난 이 문장을 작가에게 돌려주고 싶다.

 

자신의 보석 같은 인터뷰를 책에 녹여냈다. 그리고 그런 인터뷰가 독자의 마음을 건드린다. 지금 떠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혹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떠나기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떠나라'고 다독이는 책. 그게 바로 이 책이 지닌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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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 - 뜨겁고 깊은 스페인 예술 기행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
최도성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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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스페인의 첫 만남은 고등학교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새로운 과목에 허덕이고 있을 때, 제2외국어라는 난제가 앞을 가로 막았다. 당시 제2외국어 과목으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가 있었다. 이 중 2개의 외국어를 선택하면 되는데, 설마 선택한 2개 외국어를 모두 배우게 될 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결국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제3외국어로 스페인어를 배워야 했다. 배웠다고는 하지만 제3외국어였던 스페인어는 일주일에 한 시간 그것도 1년만 배웠기에 기억 나는 건 거의 없다. 다만 가장 많은 나라에서 쓰는 언어가 스페인어이고, '스페인어는 야하다(?)' 정도만 기억 날 뿐이다. 

스페인과의 두번째 만남은 처음 읽은 여행기에서다. 여행기 혹은 여행 에세이라는 장르를 처음 접했을 때 공교롭게도 첫 책이 '스페인 여행기'였다. 처음으로 읽었기 때문인지 당시 상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집에서 여행기의 마지막 부분을 넘기며 배달 음식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날 따라 왠일인지 음식은 오지 않고, 결국 시킨 지 1시간 만에 확인 전화를 걸었다. 들려온 답은 '주소를 잘못 들어 배달원이 집을 찾지 못했다' 였다. 2시간 만에 음식을 받아들면서 짜증조차 내지 않았다. 스페인 여행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급하게 사는가'를 느끼며 '지금 순간만큼은 짜증내지 말자'라는 나름의 다짐을 세운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페인과 세번째 인연을 맺었다. '일생에 한번은' 시리즈이면서 <파리 그 황홀한 유혹>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최도성 작가의 스페인 예술 기행인 <일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를 만난 것이다. 최도성 작가의 장점은 여행의 흔적을 쫓기에 바쁜 여타 여행기(혹은 여행 에세이)와 달리 여러 번 그 나라를 방문한 기억을 토대로 그 나라의 문화와 그 곳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깊이 있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화 작품은 물론이고 미술, 음악, 음식, 풍습,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풍성한 이야기를 끌어내 독자가 보다 흥미롭게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돕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지역 감정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다. 선거를 앞뒀을 때 항상 불거져 나오는 '지역 감정'이라는 단어를 매번 부정적이고 부패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는 잠잠하다가도 선거만 앞두면 정치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지역 감정'이고, 이를 이용해 자격 없는 사람들이 지방자치 단체장이나 국회의원, 대통령까지 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의 이런 지역 감정은 그 정도가 매우 낮은 단계라 여겨질 정도로 스페인의 지역 감정은 그 골이 깊고 역사가 길다. 인종적으로 다르고 문화와 풍습, 심지어 언어까지 다른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카탈루냐,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여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서로를 미워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 불리는 '스페인 내전'에서 불거졌고, 내전 끝에 결국 카스티야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나라로 묶인다. 프랑코 군부 정권 아래에서 획일화를 강요당했던 각 지역은 1981년 프랑코 군부 정권이 무너지면서 숨통이 트인다. 이런 '다른' 문화가 결코 '틀린' 문화가 아닌 각 지역의 독특함으로 오늘의 스페인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건설업을 부흥시켜야만 나라 경제가 살아난다'는 해괴한 경제 논리 앞에 온 국토에 삽질을 해대고 결국 어느 곳이나 똑같은 아파트 숲과 빌라촌만 존재하는 국내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각 지역의 특색을 살리자는 핑계로 똑같은 축제를 개최하고(심지어 어디에서나 똑같은 기념품을 파는 나라가 한국말고 또 있을까?) 무조건 커다란 청사만 지어대는 지방자치단체도 같은 수준임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스페인의 '다름'이 왜 다른 지에 대해 그리고 그런 '다름'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스페인의 매력에 흠뻑 빠지는 시간이었다. 굳이 비행기 타고 떠나지 않아도 스페인만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기회, 책 속에 있다.

 

골목은 줄줄이 이어졌고, 그 사이로 사람들은 엇갈려 지나쳤다. 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옛날 무슬림이 걸었고 기독교인이 걷던 돌길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밀려왔다. 얼굴빛도 다르고 말도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며 남겨놓은 역사의 이끼를 훑으며 걷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대가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65p

 

스스로 '스페인은 모래 줄로 엮어진 나라'라고 자조하는 말을 하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오랫동안 이어져 온 갈등이긴 하지만, 현재는 점점 국력 증강과 더불어 그 간격을 좁히고 있으며 그것을 문화적 특성으로 승화시키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 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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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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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뭔가를 흥얼거린다는 김영하 작가의 <랄랄라 하우스>는 인터넷에 기록해 둔 글의 모음집이다. 여기서 '랄랄라'는 노래를 항상 흥얼거리는 사람이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 부분을 대체로 "랄랄라....."로 때우기 마련이라며, 그처럼 정색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글이라는 뜻이다. 이와 달리 정확한 가사를 알려주는 부류도 있다고 설명하는데, 나란 인간은 그냥 '내 멋대로' 개사해서 부르곤 한다.

차례를 보면 Free Talk와 사진첩, 방명록을 나뉘며 Free Talk는 방울이와 깐돌이, 길 위에서, 문학 앞에서로 나뉜다. 방울이와 깐돌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작가 심상치 않다'라고 생각했는데, 중간중간 팡팡 터질 정도로 재치있는 문장이 일품이다. 또한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부분에서는 낄낄거리며 웃기 바빴다. 그리고 소설을 쓰기 위해 떠났던 여행과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이나 과정 등이 소개되어 새로운 사실을 알기도 했다.

아직 김영하 작가의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이 그를 만나는 첫 단추였는데 느낌이 좋다. 

 
독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독서에도 일정한 훈련과 의식적인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분명한 대가를 받는다. 소설은 춤과 같아서 처음에도 즐겁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더 큰 즐거움을 준다. 아는 작가가 많아지고 출판사나 번역자에 따라 책을 고르는 요령들을 터득해감에 따라 취향은 분명해지고 만족감도 커진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책을 사야 할지 알 수 없던 대형서점이 자기 방 서재처럼 친숙해지는 순간이 온다. 동시에 소설을 읽는 목적도 달라진다. 감정이입을 통한 즉자적 수준의 감동보다는 텍스트 자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형태로 바뀐다. - 208p


작가가 생각하는 독서법 중에서 돈이 가장 많이 든다는 '현장 독서법'보다 내 눈에는 이 글이 가장 눈에 띄었다. '지금 나는 어느 과정을 지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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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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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요네하라 마리는 가족이 체코슬로바키아로 건너간 1960~1964년사이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녔다. 각 나라 공산당의 이론 정보지인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일본 공산당 대표로 편집위원이 된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체코슬로바키아에 간 것이다. 그 곳에서 러시아어를 배운 요네하라 마리는 1965년 일본으로 돌아와 남은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러시아어를 이수해 동시통역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동시통역을 하면서 겪었던 일을 책으로 엮었으며, 프라하에서 보냈던 그 시절 친구들을 1995년에 만났다. 그녀들과의 만남과 추억이 담긴 책이 <프라하의 소녀시대>다.

 

'소비에트', '공산당' 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무슨 공산주의 이론서가 아닌가 싶어 흠칫한 이도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아니다'. 요네하라가 타국에서 언어습득의 어려움을 느끼며 학교생활에 적응하던 중에 만난 소중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소비에트 학교는 소련에서 직접 운영하는 간부자제 전용학교로 선생도 소련에서 직접 데려왔고, 한 반 정원도 20명이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소련을 포함해 30개국의 학생들이 한 반에서 수업을 받았다. 서로 이질적인 문화 배경에서 자랐지만 공통점이라면 비합법시대(2차세계대전 이전 공산당이 합법화되기 전 시대)를 험난하게 거쳐왔던 부모를 뒀다는 점이다. 요네하라의 아버지 또한 일본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 모든 걸 버리고 공산당원이 되어 16년간 지하생활을 했다고 한다.

 

책에는 그리스에서 온 낙천주의자 리차, 루마니아에서 온 거짓말쟁이 아냐,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야스나 이야기가 들어있다. 나라도 다르고 배경도 달랐던 소녀들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닌 이후 나라의 운명과 함께 각자 다른 길을 걷는다. 이들에게는 급작스러운 변화가 자주 찾아왔다. 우선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있었고,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동유럽 국가는 해체와 독립이라는 전쟁을 겪는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고와 슬로바키아로 나뉘고,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유지해오던 연방제도가 사회주의 붕괴 후 민족주의와 종교라는 화두에 휘말려 내전과 인종청소를 거듭했다. 이런 나라의 변화가 리차와 아냐, 야스나의 삶을 바꿔놓는다.

 

그리스의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던 리차는 결국 독일에서 의사가 됐다.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리차가 의사가 된 것도 의외의 일이다. 아버지가 정권 간부였던 아냐는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던 루마니아가 아닌 영국에서 영국인과 결혼했다.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간 야스나는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1960년대면 냉전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 자신의 체제를 내세우며 우방국 벽쌓기에 골몰했고, 무기 경쟁에 돌입했다. 1960년대를 체험한 건 아니지만, 이 책을 보고 있으니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매해 6월이면 '반공'을 주제로 웅변대회가 열렸고,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반공 포스터에 북한 인공기를 그린 친구들 스케치북에 모두 X자를 했던 담임도 생각났다. 반공 교육을 얼마나 열심히 받았던지 당시 난 북한 사람이 늑대인 줄 알았다.(반공 만화를 보면 북한 사람은 늑대, 남한 사람은 양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는 꿈도 자주 꿨었다. 돌이켜보건대 '반공'이라는 미명 하에 '다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런지. 소련이 붕괴되어 러시아가 되었고 동유럽으로 여행이 가능하고 중국도 바뀐 마당에 오로지 남과 북, 우리만 변하지 않은 느낌이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높은 벽에 다른 생각은 무조건 배척하는 모습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념과 사상을 한꺼풀 벗겨 생각해보면 위정자가 권력을 모으기 위한 수단의 하나가 아닐까? 사회주의 체제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녀시대를 보낸 소녀들이 (반공 교육에서 그리도 나쁘다고 말했던 그 사회주의 체제의 소녀들이) 나와 달라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민족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전쟁을 겪었기에 이념과 사상에 대해 쉽게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단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쟁이 일어난 것일까? 김일성과 이승만이라는 위정자들의 정권을 잡을 욕심과 이기심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소련, 미국, 일본, 중국의 이해관계도. 단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사회주의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은 미약하다는 말이다.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가정은 가정일 뿐이지만) 조금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알게된 건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거닐다>의 작가가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고 동유럽 여행을 계획했다는 글 때문이었다. 나도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보니 그처럼 프라하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너무 아름다워서 '하얀 도시'라 불린 베오그라드가 보고 싶어졌다. 나와 다르지 않았던 그녀들의 소녀시대가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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