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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ㅣ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195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요네하라 마리는 가족이 체코슬로바키아로 건너간 1960~1964년사이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녔다. 각 나라 공산당의 이론 정보지인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일본 공산당 대표로 편집위원이 된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체코슬로바키아에 간 것이다. 그 곳에서 러시아어를 배운 요네하라 마리는 1965년 일본으로 돌아와 남은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러시아어를 이수해 동시통역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동시통역을 하면서 겪었던 일을 책으로 엮었으며, 프라하에서 보냈던 그 시절 친구들을 1995년에 만났다. 그녀들과의 만남과 추억이 담긴 책이 <프라하의 소녀시대>다.
'소비에트', '공산당' 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무슨 공산주의 이론서가 아닌가 싶어 흠칫한 이도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아니다'. 요네하라가 타국에서 언어습득의 어려움을 느끼며 학교생활에 적응하던 중에 만난 소중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소비에트 학교는 소련에서 직접 운영하는 간부자제 전용학교로 선생도 소련에서 직접 데려왔고, 한 반 정원도 20명이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소련을 포함해 30개국의 학생들이 한 반에서 수업을 받았다. 서로 이질적인 문화 배경에서 자랐지만 공통점이라면 비합법시대(2차세계대전 이전 공산당이 합법화되기 전 시대)를 험난하게 거쳐왔던 부모를 뒀다는 점이다. 요네하라의 아버지 또한 일본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 모든 걸 버리고 공산당원이 되어 16년간 지하생활을 했다고 한다.
책에는 그리스에서 온 낙천주의자 리차, 루마니아에서 온 거짓말쟁이 아냐,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야스나 이야기가 들어있다. 나라도 다르고 배경도 달랐던 소녀들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닌 이후 나라의 운명과 함께 각자 다른 길을 걷는다. 이들에게는 급작스러운 변화가 자주 찾아왔다. 우선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있었고,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동유럽 국가는 해체와 독립이라는 전쟁을 겪는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고와 슬로바키아로 나뉘고,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유지해오던 연방제도가 사회주의 붕괴 후 민족주의와 종교라는 화두에 휘말려 내전과 인종청소를 거듭했다. 이런 나라의 변화가 리차와 아냐, 야스나의 삶을 바꿔놓는다.
그리스의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던 리차는 결국 독일에서 의사가 됐다.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리차가 의사가 된 것도 의외의 일이다. 아버지가 정권 간부였던 아냐는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던 루마니아가 아닌 영국에서 영국인과 결혼했다.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간 야스나는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1960년대면 냉전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 자신의 체제를 내세우며 우방국 벽쌓기에 골몰했고, 무기 경쟁에 돌입했다. 1960년대를 체험한 건 아니지만, 이 책을 보고 있으니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매해 6월이면 '반공'을 주제로 웅변대회가 열렸고,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반공 포스터에 북한 인공기를 그린 친구들 스케치북에 모두 X자를 했던 담임도 생각났다. 반공 교육을 얼마나 열심히 받았던지 당시 난 북한 사람이 늑대인 줄 알았다.(반공 만화를 보면 북한 사람은 늑대, 남한 사람은 양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는 꿈도 자주 꿨었다. 돌이켜보건대 '반공'이라는 미명 하에 '다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런지. 소련이 붕괴되어 러시아가 되었고 동유럽으로 여행이 가능하고 중국도 바뀐 마당에 오로지 남과 북, 우리만 변하지 않은 느낌이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높은 벽에 다른 생각은 무조건 배척하는 모습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념과 사상을 한꺼풀 벗겨 생각해보면 위정자가 권력을 모으기 위한 수단의 하나가 아닐까? 사회주의 체제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녀시대를 보낸 소녀들이 (반공 교육에서 그리도 나쁘다고 말했던 그 사회주의 체제의 소녀들이) 나와 달라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민족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전쟁을 겪었기에 이념과 사상에 대해 쉽게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단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쟁이 일어난 것일까? 김일성과 이승만이라는 위정자들의 정권을 잡을 욕심과 이기심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소련, 미국, 일본, 중국의 이해관계도. 단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사회주의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은 미약하다는 말이다.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가정은 가정일 뿐이지만) 조금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알게된 건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거닐다>의 작가가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고 동유럽 여행을 계획했다는 글 때문이었다. 나도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보니 그처럼 프라하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너무 아름다워서 '하얀 도시'라 불린 베오그라드가 보고 싶어졌다. 나와 다르지 않았던 그녀들의 소녀시대가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