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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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번역가, 신화연구가로 유명한 이윤기. 그가 써낸 여러 권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유난히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얘기하고 다 들었지만, 결코 재미없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다. 읽다보면 이 사람이 저 사람같고, 아까 그 애가 얘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고 다 기억할 수도 없거니와 헷갈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방식에 변화를 준 것이 이윤기식 신화 읽기다. 이윤기식 그리스 로마 신화는 테마가 있다. 4권으로 나와있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각 권마다 한 가지 테마로 12개의 이야기를 엮어놓았다.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화적 상징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거는 회화, 조각, 혹은 건축물을 하나씩 제시하고, 그 대상에 묻어 있는 신화의 의미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추적하는 새로운 신화 읽기'가 이 책의 테마다.

 

수많은 회화, 조각, 건축물을 만날 수 있는 유럽, 그 곳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지 못하면 유럽을 반도 이해하지 못한다. 소위 '서양'이라고 말하는 유럽은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시간이라는 양분을 흡수하며 거대하게 자랐다. 도시나 산, 강의 지명을 비롯해 공원 앞에 서 있는 조각상도 상징을 지닌 곳이 유럽이다. 상징은 '표지는 표지이되 이것과 서로 통하는 다른 어떤 것을 연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상징으로 가득한 유럽, 유럽 여행을 가야 한다거나 유럽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할 한 가지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유난히 회화가 많다. 그리고 수많은 조각상과 건축물이 연이어 등장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샘솟게 했는지 근대 이전의 회화나 조각상은 신화에 기반을 둔 작품이 많다. 그만큼 책에도 많이 등장한다. 거기에 간혹 문학 작품도 인용하고, 성경도 나온다. 이 모든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져 복잡할거라 지레 겁먹지 말자. 할머니가 해주던 옛날 이야기는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뒤가 궁금할 정도로 재미있다. 신화 또한 옛날 이야기다. 이야기를 하다가 설명이 필요하면 잠시 다른 이야기를 끌어오고, 지루하다 싶으면 우스개 소리도 덧붙인다. 여기에 학자들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상상력'이 더해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너무 당연한 진리,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는 만큼 유럽 문화가 보인다. 거기에 우리네 이야기도 담겨있다.

 


신들 이야기, 영웅들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그 시대에 어울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는데, 그 변주의 흔적은 문화의 모습을 하고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신화를 이해하면 언제 어디에서건 회화나 조상彫像이나 구조물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말은 통역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나라 신화가 되었든 남의 나라 신화가 되었든 신화라는 것이 벌써 세계어에 편입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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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 나이트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8
리처드 F. 버턴 지음, 민규하 그림 / 인디고(글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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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 나이트, 천일야화, 세헤라자드' 등 귀에 익은 단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다윈의 진화론이나 맬서스의 인구론은 굳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처럼 고전은 모두 알고 있지만 정작 읽은 이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고 했던가. 이쯤에서 고백을 하자면 '어린 시절 누구나 읽는다'는 아라비안 나이트 동화책조차 읽지 않은 사람이 나라는 걸 말해야겠다. 익숙한 책이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인디고에서 나온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는 동안 한번도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도서관에서 여러 권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꽂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매우 긴 이야기라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인디고에서 나온 <아라비안 나이트>는 300여 편에 달하는 이야기 중 9편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여기에 민규하 작가의 일러스트가 만나 이야기에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더해졌다.

 

이야기의 시작은 진노한 샤리야르 왕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하는 샤라자드(다른 표기로는 '세헤라자드'라 하는)로부터다. 목숨을 건 연인도 있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연인도 있다. 지고지순하게 사랑을 이어온 연인도 있으며 끝내 사랑인지 깨닫지 못하고 보낸 연인도 있다. 9가지 테마에 맞춰 9편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모습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이슬람 문화에 속한 중동권이다 보니 기존에 읽었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절대자의 여인과 아슬아슬한 만남을 이어간다거나 마신이 등장해 알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새로웠다. 그리고 대다수의 등장인물이 왕이나 왕자, 무희였으며 상인이 많이 등장해 중동 지역이 옛날부터 상업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 구전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묶은 책이다 보니 익히 알고 있는 비슷한 이야기도 나와 신기한 생각도 들었다. ('선녀와 나뭇꾼'을 연상시키는 미리암 공주와 하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는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시리즈다. 이렇게 말하면 내용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내용 또한 나쁘지 않다. 이번 <아라비안 나이트>외에도 이전에 나왔던 시리즈를 보면 번역에 충실한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인디고의 <아라비안 나이트>는 이야기가 가진 에로티시즘을 조금 순화하면서 적절한 수준에서 이야기를 이어간 노력이 엿보인다.

 

아직까지 '아라비안 나이트'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더해진 인디고의 <아라비안 나이트>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매력에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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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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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는 '바다로 간 연인 처지를 비관해 동반자살', '6년 간의 불륜, 00때문에 들통나다', '경찰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도둑?'과 같은 자극적인 단어가 난무하는 사건, 사고 기사로 가득하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기사를 들여다봐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알 수가 없다. '~라고 생각한다'는 기자의 사견과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라는 주변인의 추측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영하 작가의 신간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처럼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김영하라는 유명작가가 6년 만에 들고 온 단편집이라는 사실 하나로 매우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얼마나 관심이 높은 지는 포털 사이트에 작가 이름만 쳐봐도 알 수 있다. 한 달 이내 이뤄진 작가 인터뷰만 해도 여러 건이고 신간을 알리는 신문 기사와 올라오는 책 리뷰만 해도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지금껏 김영하가 쓴 책 중 에세이만 읽은 독자로서 궁금증이 일었다. 왜 김영하의 책이 이토록 화제일까? 그의 소설에는 대체 어떤 내용이 있는 것일까? 하는 단순한 물음표가 책을 구매하고 읽는 행위를 이끌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제목은 여운을 남기고 물음표를 불러온다. 어떤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지가 궁금했다. 그럼 책을 읽어보면 어떤 문장으로 마칠 지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책을 덮은 뒤에도 뒷문장은 어떤 게 적절한 지 알 수가 없다. 읽기 전에는 '모른다'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읽은 뒤에는 '궁금해하지 않는다'가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작가의 의도는 독자가 알아서 자신의 느낌을 넣으라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13개의 단편이 한 권을 이뤘다. 청탁을 받은 원고가 아니라 내킬 때 아무 때나 펜을 들고(실은 컴퓨터를 켜고) 쓴 단편들이다. 그래서인지 형식이나 내용이 자유롭다. 그런데 일련의 공통점이 있다. 저 위에 쓴 자극적인 단어가 난무하는 신문 기사의 속사정처럼 그런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로봇>의 수경은 자신을 로봇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기꾼에게 당한 여성이고, <여행>의 한선은 결혼을 앞둔 신부를 납치한 무뢰한으로 신문에 실렸을 지 모를 일이다. <조>는 비리 경찰로 결국 꼬리가 길어 잡혔고, <바다 이야기1>의 나는 어려움에 처한 남자를 외면한 무정한 시민으로 신문에 나왔을 법 하다.

 

하지만 이렇게 요란하게 어떤 일이 일어났더라도 누구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결국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만은 타인에게 그렇지 않을 거라고, 나만은 타인에게 관심이 많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나뿐 아니라 타인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누구나 자신을 벗어난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그런 사람들의 오만과 오류를 꼬집는 거울처럼 느꼈다. 실은 무심하고 자신밖에 모르지만 '관심'이라는 가면을 쓴 나에게 '가면을 벗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원래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하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라고 재촉하는 듯 하다.

 

김영하 작가의 인터뷰 중에 "책을 쓰는 동안 작가는 즐거웠다"라는 구절이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이 가장 즐겁고 독자는 이야기를 읽는 순간이 가장 즐겁다. 각자의 영역에서 즐거웠다면 이야기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하는 행위는 그저 그런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순간 '김영하의 신간이 이렇고 저렇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는 건 아마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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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이 함께 읽는 근현대사
아사히신문 취재반 지음, 백영서.김항 옮김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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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오꾜오에서도, 서울에서도, 뻬이징에서도 역사는 기념비나 기념관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인은 3 1운동이 자기 안마당에서 시작된 것을 알고 있을까? 중국인은 5 4운동의 원동력이었던 조선인들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한 나라의 역사라는 벽을 넘어섰을 때, 사람과 사상의 네트워크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같은, 정말로 중요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 130p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이 함께 읽는 근현대사'라는 부제가 달린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은 일본 아사히신문이 지난 2007년 6월부터 2008년 3월까지 매달 한면씩 연재한 「역사는 살아있다 : 동아시아의 150년」이라는 특집기사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여기에 지난 2008년 4월 19일에 개최한 국제 심포지엄 '역사화해를 위하여'의 개요와 국내판에는 한국과 대만의 학자가 읽은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해설 대담이 실려있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 150년간 동아시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열가지 사건은 어떠한 기준에서 뽑았을까? 아사히신문 취재반은 그러한 연구에 관여한 전문가를 중심으로 20명의 지식인을 찾아다니며 10대 사건을 추천해달라 요청했고, 20인이 고른 10대 사건을 가지고 겹치는 사건을 참고해 10개 테마로 압축했다. 동아시아의 근현대는 아편전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 책의 특징은 역사가의 전문서적이 아니기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의 구성도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 위한 흔적이 엿보인다. 우선 당시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에서 시작한다. 아편전쟁의 시작은 청국의 관리였던 린 저쒸가 광저우에서 아편을 몰수하고 영국상인을 추방하면서이다. 따라서 광저우에서 글을 시작한다. 역사적 사실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살았던 사람들을 찾아내 인터뷰를 하고 이를 연구하는 역사가를 만난다. 또한 현재까지 남아있는 흔적을 찾아 헤맨다. 이는 사료를 바탕으로 서술하는 역사책과 차별되는 부분이다. 어디까지나 신문기자들이 쓴 특집기사이기에 인터뷰와 취재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일본, 중국, 한국, 대만의 교과서를 비교하며 이러한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고 편집자의 인터뷰를 실었다. 마지막으로 일반 대중매체 혹은 소설이나 영화 등 대중문화가 이 150년의 집단기억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다뤘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청나라와 일본은 힘의 역학 구조에 변화를 갖는다. 한국이 빠졌다고 서운해하지 말자. 중국 중심의 중화체제가 붕괴를 맞은 건 메이지 유신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 국가의 면모를 갖춘 일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청과 러시아, 일본 사이의 알력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번졌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동아시아 최고의 국가라는 일본의 자만심은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만들고 이후 중일전쟁으로 번지며 동아시아 모두가 고통받는 국제 전쟁으로 커진다.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면서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모든 전쟁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 본토는 국민군과 공산군으로 나뉘어 내전을 치르고 결국 패한 국민군은 타이페이섬으로 건너가 중화민국(대만)을 세운다. 이념의 날을 서로를 향해 날카롭게 세웠던 한반도는 1950년 6월 25일을 기해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이념 대립이라는 하나의 칼날과 소련, 중국, 미국, 일본 각 국의 이해가 얽힌 결과물이 50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휴전'상태의 한반도다. 가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한국군이 참여했던 것은 베트남전쟁이다. 1960년대는 소련과 일본,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가 차례로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자국민들의 목소리는 국가라는 장벽에 막혀 조용히 사라진다. 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1979년 대만에서는 반정부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한 메이리따오 사건이 일어나고,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계엄군에게 죽어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1987년 한국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제를 담은 민주화선언을 이끌어냈으며, 대만에서는 38년 2개월 만에 계엄령 해제를 이끌어냈다. 1978년 중국은 떵 샤오핑 주도하에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로는 드물게 국내개혁과 대외개방 정책을 실시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경제성장을 거듭하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위에 열거한 역사적 사실 중에서 한국관련 부분을 제외한다면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중국과 일본의 힘의 역학 구조에서 한국과 대만 그리고 오끼나와는 주변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게 불편한 까닭은 내가 그동안 배웠던 역사가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사관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건 우리가 지금껏 배워왔던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사관에서 탈피해 '교류'와 '연쇄'라는 관점에서 동아시아 근현대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대만의 민주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 것인가. 명성황후를 죽인 것은 일본인이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한국 또한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인을 학살한 전례가 있지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대륙은 초토화되다시피했다. 죽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으며, 이념과 민족주의로 이후에도 여러 번 고통을 받아야했다. 이런 과정은 각국의 역사서술에 있어 '다름'을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 프랑스와 독일은 각 국 학생이 함께 읽을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들었다. 중국과 한국,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가까운 나라지만 근현대사에서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이웃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대립만을 반복한다. 미봉책으로 어설프게 해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오랜 시간이 들더라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자세로 자국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런 시간을 거쳐 합의점을 찾는다면 동아시아에서 살아갈 아이들에게 함께 읽는 역사 교과서를 선물하고 싶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미래'라는 선물을 주고 싶다. 그 시작이 이 책이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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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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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앞으로 태어날 애서가들을 위하여 최고의 구절들마다 연필로 살그머니 표시를 남겨둘 생각이에요. - 91p, 1952년 12월 12일 헬렌프랭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 이어준 또 하나의 책. 미국 뉴욕에서 유명하지도 않고 돈도 없는 글쟁이 헬렌 한프와 영국 런던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위치한 마크스&Co. 중고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이 20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다. 1949년 희귀 고서적에 관심이 많은 가난한 작가 헬렌은 대서양 건너 영국 런던에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이렇게 시작한 인연은 1969년 프랭크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너무 깐깐하고 성질 급한 불친절한 고객 헬렌은 자신이 갖고자 하는 책을 내놓으라며 항상 프랭크를 다그친다. 성실하고 친절한 중고서점 직원 프랭크는 그녀의 요구에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영국 런던은 당시 배급제를 실시해 식료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헬렌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마크스 중고서점 직원들에게 식료품을 보내며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마크스 중고서점에서 헬렌에게 편지를 보낸 이는 사실 프랭크 만은 아니다. 프랭크 외에 세실리와 메건 등의 서점 직원과 프랭크의 아내 노라, 옆집에 사는 노부인까지 헬렌에게 편지를 보낸다. 비록 대서양 건너라는 물리적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편지 내용을 보면 이들이 그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영국이라는 나라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온지 100년도 넘은 책이 중고서점을 다니며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그런 책을 찾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결국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헬렌은 그토록 원했던 영국 행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들을 이어준 끈은 다름 아닌 '책'이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책으로 전해진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 145p, 1969년 4월 11일 헬렌캐서린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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