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청목정선세계문학 4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성구 옮김 / 청목(청목사) / 198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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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감정에 일생을 바친 한 우울한 영혼과 그의 주변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웨더링 하이츠와 트러시 크로스 저택에 기거했던 두 집안의 가족사이다. 모든 일의 시발은 힌들리 언쇼가 히드클리프라는 한 사내애를 집으로 데려오면서부터였다. 그후 히드클리프와 캐더린 언쇼가 서로 좋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결국 비참하게 모든 인물들이 헛되이 죽어 가는 것을 가정부이자 유모였던 덴 넬리의 회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또 마무리된다.

고전을 읽을 때면 가끔씩 느끼는 것이지만, 그 당시 인간의 생활공간이란 얼마나 협소했던가 싶다. 많은 소설들이 좁은 마을에서 친척이나, 근방 지주의 청춘들을 만나서 사랑하고, 시련을 겪고, 대개는 불행하게 끝이나고 마는 내용이다. 그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리타분하고 정적이고, 지루한 감을 주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 좁은 무대(배경) 위에서 공연(소설)을 올리려고 하자니 마치 희곡처럼 제약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작가들은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좇거나 운명에의 도전 혹은 순응이라는 테마가 당연히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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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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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제는 5월 8일 어버이날. 돼지껍데기를 안주 삼아 오랜만에 아버지와 소주를 한잔 마셨다. 빳빳하게 달구어진 돼지껍데기에 콩가루를 잔뜩 묻혀 와사비가 풀린 간장에 잠시 적셨다가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소주를 한잔 털어 넣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술 마시는 행위를 증오했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무던히도 술을 즐기는 나이지만, 한때는 내게 그 술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고, 평생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던 어린 날이 있었다. 구체적인 까닭이야, 물론 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단 한번 꺼냈던 적이 있는 얘기다. 허나 지금 그 사람은 내 옆에 없다.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은 인간의 최대 욕망인 흔적 남기기를 주제로,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한국문학사에 천재작가로 각인된 이상(李箱)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문단에서 영원한 이방인 같은 냄새를 짙게 풍기며 난해한 시와 소설을 남긴 채 동경에서 쓸쓸히 죽어간 천재 이상과,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을지도 모르는 인간 김해경이라는 두 가지 존재의 면모를 견주어 인간으로서 삶의 추구에 대한 물음을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일단 미스터리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이 소설은 그 뒤에 남겨진 일을 추측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소한 해프닝에 그칠지도 모르지만, 숨겨진 이야기는 항상 호기심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세 편의 연작으로 장편서사를 구축하며, 세 명의 각기 다른 시선으로 이상의 데드마스크와 있을 거라 추측되는 작품(오감도제16호)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사라진 원본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 인물들 자신에게 더 깊이 있게 다가오는 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자아의 인식이다. 인간으로 최대의 욕망인 영원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는 이상이란 인물이 옳다고도,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에만 만족을 느끼며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는 삶을 옳다고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할 것인가가 고민거리가 됐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놓고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그 죽음마저도 특별하다면, 최근 자살한 장국영이나 커트 코베인처럼 내 이름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혹은 책 어느 귀퉁이에라도 남는다면... 나는 나를 버리고 그 흔적에 내 전부를 내던질 수 있을까. 어차피 인간이 걷는 길의 종착점이 없을지도 모른다면, 크게 용기를 내 그 대열에 동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버지와 나란히 걷는다. 그가 걷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누군가가 우리 부자(父子)의 뒷모습을 보면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나만의 삶을 산다는 건, 그 얼마나 어려운 얘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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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가장 인간적인 소통의 형식 - 소설의 이해
김민수 지음 / 거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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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훌륭한 소설론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다른 부분보다 가장 좋은 점은 역시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이야기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의 생성 근원부터 그 뒤로 지금껏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라고 통칭될 수 있는 모든 것들ㅡ신화, 전설, 민담부터 고대의 서사시, 중세의 로맨스, 근대의 소설에 이르기까지ㅡ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하나씩 설명해주고 있다.

그 외에도 물론 소설이론서답게 소설 이해를 위한 구조적인 분석ㅡ인물, 플롯, 시점 등등ㅡ이 이루어지는데, 이도 국내작가의 문학작품을 근거로 들어 예시를 들고 있어 이해가 쉽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사문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한 본질, 매혹에 대해 쉽게 풀어주고 있다는 점이 이 이론서의 변별점이다.

한때 난 인간으로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최적이자 최고의 수단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만큼 인간이 살아있다고 강렬히 느낄 때가 또 있을까. 하지만 사랑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욕망충족의 대체수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가 그 중 하나의 대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존재와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을 꿈꾸게 마련일 테고, 그렇다면 이야기는 꽤나 효과적인 자기표현의 수단일 수 있고, 원초적 욕망 해소에 일조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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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서
이동하 지음 / 세계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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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의 소설집 『문 앞에서』를 읽고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건 책 뒤에 평론을 쓴 정호웅의 말처럼, 좋은 국어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듯 적확하고 정확한 문장들이 소설을 튼실히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문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글쓰기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맞춤법에도 어긋나는 문장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요즘의 소설현실을 비추어볼 때, 그 정확한 문장만으로도 하나의 성취를 이루고 있는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열편 남짓의 단편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90년대 들어 급격하게 바뀐 생활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정작 그 속도에 취한 채 아무 반성 없이 지나가는 것들에 대해, 소시민적인 인물들이 작가의 분신으로 나타나 고민하고 있다.

작가가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인 듯하다. 정신없이 달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어느 낯선 곳에 서 있는 듯한 느낌. 그래서 문득 여기가 어딘지 낯선 세계 앞에서 갈길 몰라 하며, 그제서야 지나온 길들을 천천히 되짚는 과정으로 대부분의 소설이 구성되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의 호흡이 급하지 않고 여유가 있다. 그래야만 이 인물의 삶을 되돌아볼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유장하다고도 느껴지는 그 느린 호흡 속에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 또한 이 소설집의 특징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해답은 치밀한 이야기 구성에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적절한 위치 지정으로 자칫 지루하게만 흘러갈 수도 있는 단선적인 이야기들에 역동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다루어온 연륜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끝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면, 소설에서의 결론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결론이 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완결된 구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명확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으리란 추측이 어렵지 않은 채 종결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작가의 인생관을 노출시키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는 작가가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이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결론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ㅡ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들ㅡ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격려를 표하는 작가의 태도 속에서, 그 자신도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소설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진정성을 찾아나가는 모습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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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馬화 문학과지성 시인선 250
유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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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의 『천일馬화』는 전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에 비해 일단 말이 지나치게 많다. 말(言)을 찾기 위해서 말(馬)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간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질식할 듯 넘치는 말(馬)의 무리 속에서 진정한 말(言)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생을 '나아감'이라는 범주로 상정하고, 시집의 1부처럼 거침없는 말들의 질주를 노래하는 '천일馬화'와 2부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로 이분해 노래하고 있다. 현재의 욕망들이 모여서 부딪치고 결국은 쓸쓸히 퇴행하는 공간인 '경마장'과 은빛의 바퀴를 무(無)로 승화시키는 '자전거'로써, 현대의 욕망을 까발리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시인은 이 한 권의 시집 안에 고스란히 담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너무 많은 말을 남발해버린 몇 편의 시에서 그 싱싱한 경주마의 역동성은 죽어버리고, 나른하면서도 꾸준한 자전거의 원운동마저도 힘을 잃고 있다. 게다가 유럽을 비롯한 곳곳의 명소 앞에서 지은 듯한 시들은 단지 멋있어 보이려는 장식효과를 알게 모르게 의식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물론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는 만화의 제목으로 연작시를 만들어내는 유하의 키치적 상상력은 아직 건재하다고 판단되지만 초창기 '무림일기'에 서려있던 그 검의 독기, 광기들엔 미치지 않다고 보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시인 유하에게는 미처 다 만나지 못한 욕망들의 뒤를 쫓는 것보다는 하루살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 광대무변의 축제에 동참하기도 하는 그런 마음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질주하는 말들의 순간을 포착하기보다는 느리게 걸어가는 코끼리 떼의 걸음을 오래도록 음미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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