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는 5월 8일 어버이날. 돼지껍데기를 안주 삼아 오랜만에 아버지와 소주를 한잔 마셨다. 빳빳하게 달구어진 돼지껍데기에 콩가루를 잔뜩 묻혀 와사비가 풀린 간장에 잠시 적셨다가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소주를 한잔 털어 넣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술 마시는 행위를 증오했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무던히도 술을 즐기는 나이지만, 한때는 내게 그 술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고, 평생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던 어린 날이 있었다. 구체적인 까닭이야, 물론 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단 한번 꺼냈던 적이 있는 얘기다. 허나 지금 그 사람은 내 옆에 없다.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은 인간의 최대 욕망인 흔적 남기기를 주제로,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한국문학사에 천재작가로 각인된 이상(李箱)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문단에서 영원한 이방인 같은 냄새를 짙게 풍기며 난해한 시와 소설을 남긴 채 동경에서 쓸쓸히 죽어간 천재 이상과,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을지도 모르는 인간 김해경이라는 두 가지 존재의 면모를 견주어 인간으로서 삶의 추구에 대한 물음을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일단 미스터리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이 소설은 그 뒤에 남겨진 일을 추측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소한 해프닝에 그칠지도 모르지만, 숨겨진 이야기는 항상 호기심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세 편의 연작으로 장편서사를 구축하며, 세 명의 각기 다른 시선으로 이상의 데드마스크와 있을 거라 추측되는 작품(오감도제16호)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사라진 원본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 인물들 자신에게 더 깊이 있게 다가오는 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자아의 인식이다. 인간으로 최대의 욕망인 영원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는 이상이란 인물이 옳다고도,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에만 만족을 느끼며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는 삶을 옳다고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할 것인가가 고민거리가 됐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놓고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그 죽음마저도 특별하다면, 최근 자살한 장국영이나 커트 코베인처럼 내 이름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혹은 책 어느 귀퉁이에라도 남는다면... 나는 나를 버리고 그 흔적에 내 전부를 내던질 수 있을까. 어차피 인간이 걷는 길의 종착점이 없을지도 모른다면, 크게 용기를 내 그 대열에 동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버지와 나란히 걷는다. 그가 걷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누군가가 우리 부자(父子)의 뒷모습을 보면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나만의 삶을 산다는 건, 그 얼마나 어려운 얘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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