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0
막심 고리키 지음, 이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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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자적 사랑

 

 

                                      카르마

 

 

밤새도록 들판을 헤매던 영혼

가엷고 어리석은 삶의 나날 다 지나고

오랫동안 찾고 있던 사람을 만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커다란 달로

탄생을 받아내는

고요한 아름다움을 보아라

 

얼마나 좋으면

색색의 넓은 점토층을 이루는 가파른 절벽

아직도 흐릿한 새벽 강물 푸른 상류로 

찬란하게 즐겁도록 

팔딱팔딱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하고 여린 

빛의 파편을 

 

하아, 오랜 감정 북받쳐

숙명같은 몸서림 칠 은둔자의

동물적 생존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번식이 아니더라도 

영육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작은 먼지로 사라질

기절하는 세상

 

누군가 이 세상을 만든 사람도

하찮은 작은 먼지들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P. 163)

 

2014. 09. 10.

 

(일상의 모든 소리)...이 모든 소리는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하루의 노동이라는 음악 속에 뒤섞인다. 이 모든 소리는 격렬하고 불온하게 떠올라 항구 위 하늘을 나지막이 덮고 있고, 주변의 모든 것을 가차없이 뒤흔들며 둔중하게 울어대는 소리와 먼지에 쩔어버린 무더운 대기를 찢는 날카로운 굉음 따위가 새로운 소리의 파도를 일으키며 대지 위로 거듭 솟아오른다.... 먼지 투성이 누더기를 걸치고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허리가 꺾인 왜소한 군상들이 무더위와 소음 속에서 구름 같은 먼지 사이로 분주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P. 24)

  

첼카시는 도둑이지만 돈을 뺏으려고 자신을 공격한 가브릴라에게 오히려 돈을 던져주며 아무런 응징도 가하지 않는다. 먼지에서 시작하여 나름의 세계관을 갖게되는 방향, 인간이라고 하는 한낱 먼지만도 못한 인간이 강렬하게 거칠게 살아가는 방식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짐작하게하는 부분이다.

 

"그런 어부들이요? 물론이죠! 제멋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죠,"

" 네게 자유가 뭔데? 그래, 넌 자유를 좋아하나보지?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는 거잖아요. 가고 싶은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그보다 좋은 게 어디 있어요! 그저 어디 매이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게 최고죠! 아무 생각 없이 맘대로 사는 거죠. 하느님만 잊어버리지 않느다면야..."(p. 33)

 

이렇듯 먼지처럼 사는 하찮은 인간이지만 '자신보다 형편없이 못하다고 생각했던 자가 자신과 흡사하거나 자신과 똑같은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불쾌해한다. 서로 질투하고, 갈등하고, 다투고, 무시하고 그리고나서는 자연에서 고요한 자유를 얻는다. 

 

그는 이렇게 어둡고 광활한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그 끝없이 펼쳐지는 자유롭고 힘찬 모습에 결코 질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좋아하는 바다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따위로 대답하는 것에 화가 났다. 선미에 앉아 배의 키를 잡고 있으면 그는 비로드 같은 바다를 따라 멀리멀리로 나아가고만 싶은 마음에 말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바다에만 나오면 그의 마음은 넉넉하고 따뜻해졌다. 바다는 영혼을 사로잡아 일상의 비루함을 다소나마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을 훌륭하다 여기며 바다에 나와 있기를 좋아했다. 바다에 나와 숨을 쉬면 삶에 대한 생각과 삶 자체를 대하는 마음이 우선 너그러워지고 그다음에는 모든게 다 부질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밤이되면 바다 위에는 바다의 잠든 숨결이 부드럽게 유영하듯 떠다녔고 그 다함없는 소리에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사악한 욕망을 온화하게 가라앉히며 강력한 희망의 꿈을 불러일으켰다....(p. 43)

 

자연에서 그와 같은 평화를 얻고도 삶으로 돌아온 첼카시는 먼지같은 도둑질을 하고 가브릴라는 그것에 얻은 이익을 나꿔채고 첼카시를 죽인다. 그리고 "첼카시가 쓰러졌던 자리의 붉은 핏자국도 첼카시와 젊은이가 서 있던 흔적도 금세 비와 파도에 씻겨나갔다. 그리하여 그 황량한 해변에 두 사람 사이의 작은 드라마를 추억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르길 노파의 추억에서도 그렇다. 활달한 한 사내와의 사랑도 그가 멀리 도망가자고 하자, " 하지만 난 이미 그때쯤 싫증이 나기 시작했어. 노래 부르고 키스하고 그런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미 지겨워졌던 거야." 라고 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 그리고 또 터키 사람하고도 사랑했지. 스크타리에 있는 그자의 집에서 일주일을 살았는데 별게 없더라고. 그냥 지루했지....여기도 여자, 저기도 여자. 온통 여자였어...여덟 명의 여자가 있었어..."

 

하나의 커다란 형식을 향해 인생이 향해가지 않는다면, 어떤 거대한 목표가 내게 주어졌으리라고 생각하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생은 아마 이렇게 먼지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어떤 방향을 가지고 살고 악전고투 한다고 해도 인생은 그렇게 결국 먼지 만도 못한 것일까? 노파가 하찮게 살았던 그렇지 않았던, 나이들면 지혜가 생긴다고 착각하듯이, 삶에 대한 관조의 능력이라고 생긴 것일까. 노파는 "요즘 사람들은 진짜 사는 게 아니라고 그냥 흉내만 내고 있어. 그저 흉내만 내느라 허송세월을 보내고 말지. 세월을 다 보낸 다음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운명을 탓하며 징징대고 운명이란 게 대체 뭐야. 제 운명은 제가 만드는 거야! 요즘엔 아무리 봐도 진짜 강한 사람이 없어!" 라고 한다.

 

사실 무엇이든 아름다운 것은 우리같이 거친 사람들에게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아니 그 보다도, 아무리 우리가 바보같이 거세된 황소처럼 강제 노동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역시 여전히 인간이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뭐가 됐든 그 무언가에 경배를 올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 121)

 

인간의 본질에는 누군가를 숭배하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나보다. 그리고 그것은 존경심과는 분명히 다르다.

 

인간은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짓밟고 더럽히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사랑을 쏟아부을 대상을 필요로한다. 때로 인간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까운 사람의 삶을 질식시키기도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알다시피 존경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냐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p. 122)

 

축축한 지하실 크렌델리 제빵소에서 빵을 만드는 스물 여섯명의 죄수들조차 누군가를 사랑해야 했고 숭배해야했던 것이다. (여기서 고리끼는 분명히 '존경심'은 다른 목록에 넣어 구분하였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서 나온 어떤 속성을 발현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며 어쩌면 더 깊이에는 다른 목적조차 있는지도 모른다. 고리끼의 인간에 대한 통찰은 아프기까지하다.

 

진실은 투박한 생각들에 더 많은 법이다. ...(생략)...물론 사람들은 경제의 사슬에 묶여 있다. 경제 유물론은 명확한 학설이고 다른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외부로부터 강제된 기계적인 관계이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에는 이런 관계를 참아내지만 불리해지면 발톱을 드러내고 이제 안녕. 친구여! 하는 것이다. (생략)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염려는 그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자신 주변에 두어서 그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힘으로 자신의 이념과 지위와 명예를 세우려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젊은 지식인들이 정말로 민중을 사랑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 공학이고 대중에게로 이끌려들어가는 힘일 뿐이다.(p. 245)   

 

인간이 경제의 사슬에 묶여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나 젊은 지성인에 대한 통찰에 더 나아가서 텅빈 영혼의 인간에 대해서 고리끼는 절망적이다. 그리고 그런 영혼으로 종교에 의존하려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잘 읽어 볼만하다.

 

영혼은 절망적으로 텅 비어서 그 공허를 종교라는 솜으로 채워넣으려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자기가 알고 있던 어떤 여자처럼 (자신을 속이고 배신했지만 그녀에게 너무 익숙해져 다른 여자에게는 아무 느낌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그래서 이제 버릴 수 없는 그런 여자처렴) 생각한다. 하지만 신은 없다. 신이 있다면 왜 사람들이 저런 꼴이겠는가. (p. 251)

 

고리끼가 바라보는 혁명가에 대한 관점은 혁명가에 대한 충언에 가깝다.

 

혁명가에게 필요한 것은 단시 열광과 자신에 대한 믿음뿐이다. 내적 삶의 다양함에 대한 관심은 어떤 면에서 혁명가에게 해로운 것이다. 이 다양함 속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그것은 가시덤불 속에 갖힌 어린아이와 같은 꼴이다. 분열된 사람의 삶은 조급하게 날아오르는 제비와 같다. 물론 총체적인 사람이 더욱 유용하지만 나는 두번째 유형에 가깝다. (p. 257)

 

누구나 혁명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인생에서 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혁명가가 될 수 있을지라도 모든 인간이 저토록 오랜동안 집중하여 열광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있더라도 너무나 드물어 그런 사람은 그 분야에서 분명 추앙받아 마땅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먼지같이 살고 먼지같이 죽어간다. 그러므로 누구나 혁명가가 될 수도 없는 운명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 속에서 고리끼의 쓰기에 대한 혜안은 모든 인간에 대한 해답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들렸다. 모든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정작 행하지는 않을지라도..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은 매력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에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내게 소중한 누군가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날 잘 이해하고 모욕하지 않으며 불쌍하게 여겨주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다. 글을 쓰게 되면 자신이 좀더 현명해지고 더 훌륭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스로 도취시키는 일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었을 때와 같다. 이 작가는 정말이지 자기 자신에게 흠뻑 도취한 작가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 생각에는 독자까지 도취하게 한다.) 광적이며 눈보라 같은, 초이성적인 자기 상상력의 놀음에도 도취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자기 자신 속에 집어넣고 장난하는 놀음에 도취한 작가다...(생략) 그는 자신을 불태울 수 있었고 자기 영혼의 뜨거운 즙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완전히 짜낼 수 있었다. 작가가 갑자기 자신의 책상 위에, 원고 더위 위에서 쓰러져 죽는 경우는 없을까? 틀림없이 있었으니라. 작가는 마지막까지, 삶의 마지막 불꽃까지 자신을 다 써내고 사라지는 존재다. 내가 이전에 이런 도취할 만한 일에 매달려보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p.268)

 

 

그러므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행위는 분명히 고상한 일로 여겨지는 것임에 틀림없고 책을 사서 책장에 주욱 꼽아두는 일이나, 이 책을 읽었노라 저 책을 읽었노라 자랑질하는 것도 지적인 행위로 여겨질 것임에 틀림없다. 무조건 동의할 일임에도 고리끼는 다른 관점을 다시 제시한다.

 

영혼의 갈증을 책으로 틀어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 갈증을 더욱 넓고 깊게 만드는 사악한 책들도 있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림자를 갖고 있으며 모든 진실과 진리 역시 그에 덧붙은 부가물을 -당연히 인여인- 벗어버리지 못한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바로 이 그림자들은 진리의 순결함에 대해 의심을 품게한다. 금지되거나 아니면 부끄러운 것, 말하자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의심 말이다. 의심을 품은 사람은 항상 미심쩍게 그래, 여기 이 진실에는 그림자가 없단 말이지, 라고 생각한다. (p, 279)

 

그러므로 얼마나 바빠지는가, 책도 읽어야 하지, 사람도 만나야하지, 글도 써야하지, 기타등등 기타등등...이 모든 행위와 더불어 사랑도 해야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최초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랑이라는 느낌, 영혼이 생명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그 황홀한 경이로움을 끊임없이 다시 경험하고 싶어하고, 그러한 추구나 그와같은 유사 경험을 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빛나게 하지 않는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삶은 얼마나 즐거운가? 얼마나 창의적이며, 작은 것이나 사소한 것에도 얼마나 커다란 행복감에 빠지는가? 고리끼에게 사랑은 (작고 사소한) 감각에 대한 감성적인 리얼리티, 내면과 감각에 대한 포착이다.  

 

아주 어린 시절 언젠가, 현실의 경계 저 너머 아득한 곳에서 아주 강렬한 영혼의 폭발을, 달콤한 전율의 감각을 체험한 적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어떤 조화의 예감 같은 것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침에 아주 환하게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기쁨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의 신경 에너지의 행복한 폭발이 뜨거운 충격으로 내게 전해지면서 나의 영혼이 창조되고 나의 영혼이 생명을 향해 최초로 불타오르기 시작했을 때의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평생 여자에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고대해마지 않았던 까닭은 어쩌면 어머니와 관련되어 이 황홀한 행복의 느낌과 기억 탓이었을 것이다.

 

고리끼를 읽으면서 삶의 지혜를 보는 하나의 안경을 얻는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이것은 각각의 단편이 한 마을 또는 한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웃한 누군가의 경험을 독자가 간접경험해보면서 생겨나는 성취일 것이다. 각각의 단편이 주는 경험을 올바르게 느끼고, 삶의 느낌과 자유롭게 정직하게 연결하여 삶을 통찰할 수 있다면, 무엇인가에 정열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되 눈멀지 않는 자신만의 영혼의 시각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고리끼를 읽으면서 생각해 낸 그나마 간단한 결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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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진짜이야기
노병천 지음 / 바램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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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독점? 왜? 어떻게?

- 사회적 현상에 대한 비평적 관점 연습해보기 -

 

독점(獨占, monopoly)은 어떤 경우에든 긍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나는 너를 독점하고 싶어.” “공급 독점,” “독점 규제,” “독점 자본주의,” “독점 판매" 등 공기어(co-occurring words), 즉 함께 등장하는 단어를 살펴보면, 독점은 경쟁자가 없는 상태이며, 규제의 대상이고, 연애할 때조차 경계해야할 대상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독점’은 다른 존재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게 하고, 그것이 사회적 선의에 기반을 두는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이에 부정적인 답변하게 한다.

 

최근 <명량>(김한민 감독, 빅스톤 픽처스 제작)은 일일관객 100만을 넘기면서 그 광풍적 열기(?)에 힘입어 대기업형 영화산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명량>은 5일 만에 600만 관객(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 기준)을 가뿐히 돌파했다. 그러나 국내 전체 영화관 총수 2584개 중에 거의 절반인 1500~1600개의 영화관에서 <명량>만 틀어준다면 <명량>을 지난 주말에 본 사람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남아있을까?

 

<명량>을 보고서 ‘감동이야,’ ‘안보면 친일이야’ ‘아직도 안 봤어?’ ‘기대와는 다르지만, 볼만해’..., 대체로 반응이 이렇다면야 누구든 보고 싶지 않으랴. 개봉 후 86%의 좌석 점유율을 차지했다면 예매를 하고 영화를 봐야한다는 뜻이기도 해서, <명량>의 스크린 독점은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대기업형 영화사가 궁극적으로 영화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할 것이고 결국 대기업형 영화사를 위해 일하는 중소 배급사나 영화사에도 그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막연히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down effect)를 기대한다는 것은 안일한 낙천주의일 것이다. 의식 있는 지성인이라면 <명량>의 스크린 독점에 대한 논란을 대할 때, 그 영화에 대한 열기나 애정 또는 관심을 일단 접고, 다른 각도에서 이 현상에 주목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장논리에 따른 자연독점(Natural Monopoly)이라면 수요가 점차적으로 꾸준히 증가하므로, 그와 같은 경쟁적 시장에서 수요자는 가격인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의 영화 흥행으로 승부를 거는 영화 산업은 수요가 점차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늘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맹점이다. 그러므로 ‘독점’하는 대기업형 영화사는 거대 마켓파워(Market power)를 갖게 된다. 이 경우 ‘스크린 독점’이 소비자에 미치는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비합리적인 가격 상승과 서비스 품질 저하 이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파지티브 피드백(positive feedback)을 바탕으로 대형 기업이 독점을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소비자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여 시장의 우위를 차지한 대기업이 그 메커니즘에 적극 활용하고 지속적으로 시장의 우위를 차지하여 독점적으로 시장을 지배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대기업형 영화사의 스크린 독점의 경우, 영화소비자는 가격에서나 품질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므로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대기업이라서 합리적인 가격이나 고급한 서비스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잠금효과(lock-in)를 발휘하여,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자그마한 노력, 신생 영화사, 잔잔한 감동을 주는 소규모 영화들이 경쟁의 무대로 진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스크린 독점이 관객에게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관객이 문화적 다양성을 접할 기회가 차단되는 폐해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기업은 이윤 극대화(profit maximization)를 추구하고 있고, 한 편의 영화에 거대투자를 하고, 그 영화가 흥행하여, 후속 영화를 만드는 추가적 비용이 발생해야, 이윤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대기업형 영화사는 자사에 더 많은 이윤이 돌아가도록 비즈니스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따라서 비즈니스만을 추구하는 대기업형 영화사가 독점하게 될 경우 중소 영화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영세하지만 재능 있는 중소영화사, 창의적이지만 마켓파워를 얻지 못하는 독립영화 제작사, 이제 막 시작한 신생 영화사, 이들은 대기업형 영화사와의 무한경쟁에 진입조차 불가능하다. 이것을 진입장벽(entry barrier)라고 한다.

 

헐리우드의 영화가 그랬듯이 스크린의 흡인력은 영화수요자들의 정신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선동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산업이다. 어쩌면 ‘스크린 독점’을 추구하는 대기업형 영화사는 우리의 감성과 욕구와는 무관하게 시나리오를 더 자극적으로, 더 유혹적으로 바꾸어 영화수요자들의 입맛을 저렴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한 영화에 길들여진 영화 수요자들은 영화의 소비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어쩌면 그들의 영화욕구를 컵라면식으로, 삼각김밥이나, 햇반식으로 저렴하게 동시에 저급하게 해소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선의의 발전적 경쟁이 많은 경우에 긍정적 효과를 끼치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스펙터클하고 거대 투자를 한 대형 영화에 짜릿한 감동을 받지만, 소규모의 투자지만 기발한 아이디어와 공감을 일으키는 잔잔한 스토리를 가진 영화에도 깊이 감동한다. 우리는 멋진 차에도 감동하고 부러움의 시선을 떼지 못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성실한, 어쩌면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한 청년의 자전거 페달 움직임, 그 청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도 감동한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가치기준으로 각각의 감성과 문화적 욕구를 다르게 가치평가(valuation)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명량>의 경우처럼 ‘스크린 독점’하는 영화를 이미 보았다면, 그들의 다른 가치에 대한 추구, 다른 감성에 대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체 영화가 공존하여, 다른 감성의 영화에 대한 욕구 해소방안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무적인 상영일수를 두는 스크린쿼터 제가 아니라 특정 영화가 극장 상영 전체의 30% 이상을 점유하지 못하도록 하여 관객들이 상연되는 작품을 골고루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수 있도록 좌석제한 쿼터제의 도입이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정부의 중소 영화사, 신생 영화사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고려해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에 많은 것을 결정하고 실행해나갈 젊은이들의 시각은 어쩌면 더 예리해야 하고, 어쩌면 더 치밀해야한다. 스크린 독점과 같은 사회현상을 바라볼 때 자신을 훈련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스크린 독점? 왜? 어떻게? 이렇게 질문해보면서 말이다.

 

2014. 09.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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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시간 관리 - 내 인생의 꼭 맞는 속도를 찾는 8가지 방법
라마 수리야 다스 지음, 안희경.이석혜 옮김 / 판미동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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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속도

 

 

                            카르마

 

 

나는 그대의 옆에 누워

그대의 고요한 심장

시간이 뛰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대의 심장은 가슴속 깊은 영역에서

허둥지둥 끓는 피를 따라다니며

동요없이 말해줍니다.

더 늦지도 않고

너무 이르지도 않게

진실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의 속도에 대하여

 

이대로 이 순간에 집중해보면

이 가치로운 24시간에 가만히

존재하는 개별적인 새벽과 자정의 리듬 

나는 그대의 옆에 누워

그대의 고요한 심장

시간이 뛰는 소리를 듣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반대로 해보면

그대의 따스한 미소처럼, 현재가 주는 선물은

'느긋해지는 위대함으로 존재하기' 입니다.

 

현재의 뼈마디에

헐렁한 주머니와 층계참이 

지문처럼 고유한 자아로 이미 있었으므로 

과거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가 입고 다니는 외투에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이 식욕없는 삶에서

끊임없이 배란(排卵)하고 싶습니다.

쓸모를 기다리는 식탁에

느닷없이 찾아온 그대여

 

나는 그대의 옆에 누워

그대의 고요한 심장을 따라 

진화하는 척추를 만집니다.

침묵의 시간,

모든 근육의 움직임이 철저하게

우리가 함께한 나날의 속도로 

나를 버리는 이 평안한 시간 

저를 자꾸만 기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때서야 오십니다.

 

2014. 08. 16.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을 가지게 된다.

붓다가 말하는 시간의 관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면서

자연이 주는 거룩한 침묵 속에 미소짓고 숨을 쉬며 긴장을 풀어 보자고 가르친다.

현대는 우왕좌왕, 허둥지둥하다가 하루를 보내게 되는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일에든 중독되어 사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제의 것을 거꾸로 해보고, 동시에 일어나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시간에 따라서 퇴색하는 지혜가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이 주는 선물에 의식과 에너지를 집중함으로서 생겨나는 여유로움을 얻어 보자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느긋해지는 것이 위대한 작업일 수도 있다. 지금 현재에 진정하게 열렬히 존재하는 것이 현재의 삶을 사는 방식이라면 그 현재에 존재하기를 느긋하게 해서, 좀 더 자비롭게, 좀 더 기다릴 줄 알면서,  침묵의 미학을 기르는 시간보내기로 시간을 관리 해보자는 방법론의 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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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의 진실

 

 

 

                                  카르마

 

 

 

일요일 오후처럼

평화롭고 슬픈 것이 있을까

평범하고 슬픈 것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휴식이고

누군가에게 기다림이 되는

누군가에게 낮이고

누군가에게 밤이듯이

 

당신에게 가봐야겠어요

험한 길이 될 것이므로

이제 다시는 저를 떠나지 마세요

앞으로 절대로 강해지세요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강력한 위로

가장 부드러운 맹세

 

모든 이의 삶에는 황혼이 올 것이고

누군가의 새벽조차

삶의 필연인 것을

모든 이들의 꿈은

고개만 돌리면 바라보이는

여름날의 달콤한 사탕

새하얀 솜사탕

 

미안합니다.

같은 순간을 다시 해야 한다해도

똑같은 크기의 사랑이여

삶의 희망이여

하루 종일 스스로를 바쁘게하면

물 속에서 스스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꽃, 나의 수호천사여

 

2014. 08. 03.

 

* 한 순간의 진실은

진실은 한순간에 있으며,
현재의 몸과 마음에 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있어도
한순간들이 모여서 지속되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조금 전에 있던 순간은 지나가고 현재가 되며,
현재라고 하는 순간은 이미 과거가 된다.

이러한 한순간의 진실은
일어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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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카르마

 

 

아무것도 기약하지 않으리라

구애하지도 않으리라

가까이, 그리고 멀리 날아가

둥지를 트는 새들처럼

침묵의 커튼을 이 산과 저 산

이 생과 저생의 사이에 걸쳐두고

남은 나날 손꼽으며 기도하는

시들어가는 노을처럼

 

우리는 한 줄의 문장으로

이 생에 닻을 내리고

새벽마다 가까이 파도를 매만지는

온갖 작은 생물들

어디든 빈틈으로 기어들어가

슬픔은 각질밑에 곱게 말아 감추고

울고 웃는 낯으로

미움과 사랑으로

 

우리는 서로의 등대

조난 신호처럼 서로의 눈빛을 찾아다니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

그러므로 나를 데려가주세요.

가보지 못한 곳으로

모든 길의 시작으로

누군가의 희망이 되는 곳으로

우정이 되고 결혼이 되는 곳으로

 

 

 

- 그녀가 정말 그 사실을 잘 안다는 걸, 그(녀)와 함께라면 다 괜찮을 거라는 걸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바로 조해너 같은 사람이었다. 기꺼운 감사의 마음이 밀려왔다. 고맙다는 마음이 특히 상대방이 그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부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걸 그는 이제 깨달았다. 뭔가 새로운 변화를 내부로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게 내게 필요한 변화였어. 그는 전에도 늘 이런 말을 하곤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이 말이 진실임이 입증될 것 같았다. 따뜻한 겨울, 상록수 숲의 향기와 익어가는 사과들.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 (75p,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  데려가 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다른 데로 가요 대신 그녀는 다른 데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했다. 모험, 그리고 결정권의 이전. 완벽한 모험과 결정권의 이전. 다른 데로 가요라고 말했다면 자기가 먼저 시작한다는 점에서 모험은 여전히 존재했겠지만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포기는 없었을 터이고 그 순간의 에로틱한 흥분 역시 모두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역시 선택권을 포기하며 다른 곳 어디요?라고 물었다면 그 경우 역시 에로틱한 긴장감은 모두 증발하고 말았을 터이다. 그는 그때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대답해야만 했다. 알았어요라고. (319p, 기억)

 

2014. 07. 15.

  

   

앨리스 먼로, 출판사 뿔, 서정은 역, 2013 노벨 문학상, 우리 시대의 체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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