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생각 해보면 우리는 그렇게 오랜동안 미안해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오랜동안 사랑하지도

그렇게 오랜동안 슬퍼하지도

그렇게 오랜동안 기다리지도

그렇게 오랜동안 기뻐하지도

그렇게 오랜동안 행복해하지도

그렇게 오랜동안 불행하지도

그렇게 오랜동안 한결같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

오늘과 내일이 다르기를 기대하고

새로운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미래는 너무 기대할 수 없어서

과거는 집착하고 생각하기 싫어서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그 다음의 현재가 왔을 때

또다시 그것에 충실하기를 기대하는 존재이다.

우리라고 하는 존재는

그렇게 허망해서

예술에서

문학에서

종교에서

또는 건축물에서

영속적인 것을 기대하고 바라지만

끊임없이 변화하여

기억해야하는 것 조차 제대로 기억못하고

미안해야 하는 것에 미안해하지 못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하지 못하고

슬퍼해야 하는데 슬퍼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존재란..

그렇게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현재에 존재하면서도

그렇게 지리한 삶을 이어나가는 존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상을 먼저 떠나는 사람들, 그들은 늘 멋대로 떠난다. 32살의 여인이 있다. 7년 전에 남편과 사별했고 3년 전에 재혼했다. “다미오씨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이고,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도모코도 저를 잘 따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는 아내와 젖먹이를 버리고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에게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말을 걸고는 합니다.” 그녀가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제는 슬픔이 맑게 가라앉아 있어 그것을 가벼운 힐난에 실어 말할 수도 있게 된 사람이구나, 그러니 그와 다다미방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어도 이쪽이 힘들어질 일은 없겠구나, 하고.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환상의 빛>(서커스, 2010)의 도입부다.

내용은 이렇다. 그와 그녀는 꼬맹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가난해서 둘 다 중학교까지만 다녀야 했다. 그런 일에서조차도 “둘이서 작은 방에 들어간 것 같은” 설렘을 느낄 정도로 둘은 정겨웠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어쩌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해도 좋을 때의 어느 날에, 남편은 전차의 선로를 걷다가 달려오는 열차를 피하지 않고 죽어버린다. 그녀는 그 이후 껍데기처럼 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는 왜 갑자기 죽어버린 것일까. 그 생각에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날,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작은 바닷가 마을로 시집을 간다. 그곳에서 어느 날 한 남자가 그날 밤의 남편이 그랬을 법한 뒷모습을 한 채로 걷는 것을 무작정 따라가다가 그녀는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59쪽) 그녀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옮기지 말자. 그저 이 뒷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출발한 소설이라는 것만 말하자. 이 소설에 몇 개의 뒷모습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뒷모습이 주인공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인간의 뒷모습이 곧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그래서 타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고 허둥대는 것이다. 사람의 뒷모습이 대개는 쓸쓸하다면 그건 인생이 늘 얼굴을 찌푸려서인 거겠지.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행복한 가족의 어느 가장이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문득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그냥 보여줄 수밖에,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줄 수밖에. 비트겐슈타인은 말했지.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44) <논리-철학 논고>의 후반부다.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522) 이 철학자가 반대할지도 모르겠지만, 문학의 언어만큼은 그 ‘스스로 드러남’의 통로가 된다고 할 수 없을까.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 중 하나를 고요하게 보여주는 소설. 한 사람의 표정들을 모두 모은다고 그 사람의 얼굴이 되지는 않는다. 한 소설이 건드리는 ‘작은 진실’은 독자적인 것이고, 과학이나 철학이 제시하는 ‘큰 진실’(진리)의 한낱 부분들이 아닐 것이다.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들의 세계이니까 소설이란 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진다. 삶의 진실이라는 게 이렇게 미세한 것이구나 싶어 겸손해지고, 내가 아는 건 그 진실의 극히 일부일 뿐이구나 싶어 또 쓸쓸해지는 것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이 아름다운 소설 앞에서 나는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졌다. ‘순수문학’이라는 이상한 명칭이 이런 소설 앞에서는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신형철에게 가능한 것들
  •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나는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다. 많은 상처를 주었고 적은 상처를 받았다.

    이 불균형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오로지 나의 삶을 나의 글로 덮어버리기 위해 썼다. 문학이 아니었으면 정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은 단정하고 다정한 문학평론가다. 그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칭찬의 용법은 과장도 상투도 없이 읽는 이를 열락으로 이끄는, 이를테면, ‘죽고 싶다는 욕망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내전을 벌이는 시를 쓰는 사람에게 이름이야 별 무소용일 것이다. 그는 그저 끊임없이 흩어졌다 모이는 몸, 부단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혼의 이름 없는 주인 같다(‘강정’, 2007)’같은 것이다. 나는, 그가 김민정 시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쓴 ‘삶의 어느 법정에서건 나는 그녀를 위해 증언할 것이다’같은 선언들 앞에서 들뜬다.  신형철은 예리하며 유려하다. ‘기소와 선고를 위한 문장을 쓰고 나면 나는 거의 고통스럽다. 나는 여전히 한 문장도 두려움 없이 쓰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가 써내는 언어는 불가피하다. 끊임없이 그는 혹독하게 맑은 눈으로 작품의 결을 열고 포착한다. 그의 안내로 한국 문학의 크고 작은 산맥을 등정한 이가 적지 않다. 그가 꿰뚫는 작품의 내면은 정확하고, 이를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내는 참신한 묘사는 적확하다. 작품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하는 권능이, 그에게는 있다. 권혁웅 평론가는 그를 “지식이 해박하면 문장이 거칠고, 문장이 유려하면 논리가 성글고, 논리가 치밀하면 애정이 결여된 저 비평과 비판의 악무한 속에서 신형철의 글은 단연 빛난다”고 평한다.

그는 서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5년 봄부터 문학평론을 쓰기 시작해 2007년에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이 되었고 ‘제2의 김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8년에는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출간, 8쇄를 찍었다. 평론집으로는 이례적인 기록이다. 현재 그는 세 군데의 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강의하며 여전히 평론과 칼럼을 쓰고 있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라고 말하는 이의 이력이다. 

최근 그는 여기에 첫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출간을 추가했다. 이 책은 그가 2006년 봄부터 2009년 겨울까지 쓴 글을 추린 것이다. ‘몰락의 에티카’ 출간 즈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을 핑계 삼아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얼마간 머뭇거리다 다소의 체념을 섞은 목소리로, 그러나 공손하게 “지난번에 못해드렸으니까요… 이번에는 해드려야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신중한 글을 오랫동안 읽어온 나는 그러한 망설임마저 어쩐지 그답다고 생각했다. 

 

정문정 기자 tiger@naeil.com 사진 임민철 STUDIO ZIP

  • 하나밖에 없는 것을 만드는 야망

     

    첫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가 출간되었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저의 일상은 읽고 쓰는 것이어서, 그걸 어느 정도 정리할 때가 되면 책을 내는 거예요. 감회가 새롭다기보다는 마무리를 잘 했다는 느낌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낼 거라서 일부러 이번 책에 원고를 쓴 연도를 적었어요. 이번 책이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쓴 원고를 묶은 것이니 다음에는 또 2010년부터 쓴 원고를 모아야죠.

     

    지금까지 내신 책들의 제목이 굉장히 개성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지으세요? 제목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걸 짓겠다는 마음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는 사람에게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을 만든다는 야망이 필요한 것이죠. 저는 정말로 제목에 신경을 많이 써요. 제목은 첫 문장이기도 하지만 글을 끝까지 읽고 한 번 더 보게 되니까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 거예요. 처음이자 마지막 문장을 무성의하게 쓴다는 건, 글쟁이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 책을 읽고 독자들이 어떤 느낌을 공유하면 좋겠다, 생각하신 것이 있을 텐데요. ‘느낌의 공동체’라는 제목은 이상이고 희망이에요. 책을 통해 제가 느낌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생각은 없어요. 바라는 것은 이 책을 읽고 제가 언급했던 책을 손에 쥐신다면 좋겠다는 거고요. 욕심을 더 부리자면, 이 책을 쓰는 중에 제가 가장 솔직해졌을 때 전하고 싶었던 감정이 슬픔인데요. 슬픔은 인간의 근원적 감정인 것 같고, 슬픔처럼 솔직하기 어려운 감정도 없는 것 같고, 슬픔처럼 공감하기 어려운 감정도 없는 것 같고요. 가장 나누기 힘든 이 감정이 조금이라도 전달된다면 제일 어려운 걸 한 거니까 보람 있을 것 같아요. 

     

    글마다 문체가 다 달라요. 평하시는 작품마다 푹 빠졌다 나와서 글을 쓴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요. 좋아하면 그렇게 돼요. 문장 스타일이 좋으면 자연스럽게 따라하게 되고요. 문태준 시인에 대해 쓸 때도 그 시인의 말투를 기분 좋게 따라가며 썼어요. 평론은 논리적으로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지만 산문은 그때그때 받은 느낌을 받아 그대로 쓰는 거니까요. 그런 글은 설득력은 다소 약하더라도 작품을 읽으며 제가 느낀 감정은 독자에게 전달이 더 잘 될 것 같아요.

     

    선생님의 책을 읽다 보면 분명히 과장하는 수사가 아니고 담백한데도 읽다가 몸이 달아오를 정도로 뜨겁고 아름다운 칭찬이 많아요. 칭찬을 어떻게 그렇게 기발하게 하세요? 저는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칭찬하고 싶어요. 저는 그런 방식으로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흠을 잡을 땐 특별한 능력이 필요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허물을 보고 한 목소리로 비난하기도 할 만큼 단점은 바로 눈에 보이니까요. 그런데 좋은 칭찬은 상대를 깊고 정확히 알지 않으면 하기 힘들어요. 설득력이 없으면 과장으로 보이고 호들갑을 떠는 것 같죠. 뛰어난 비평가들은 정확해요. 벤야민이 보들레르를 칭찬하거나 김현이 이청준을 칭찬하는 문장은 정확하지요. 저는 이것이 뛰어난 능력이라 생각해요. 제가 누구를 칭찬한 문장이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고 공유되면 좋겠어요. 가장 정확하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방식으로 칭찬을 함으로써 한 작품을 그 비평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할 수 없게 하고 싶어요.

     

    비판을 하실 때는 굉장히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내가 아는 바와 믿는 바를 쓰겠다’는 전제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하시곤 합니다. 그런 모습이 과도한 자기 검열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자기 검열해요. 기본적으로, 저는 비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비판하는 데 쓸 시간이 없어요. 제가 쓸 글은 한정되어 있어요. 비판해야 할 때는 나는 과연 이 비판에서 자유로운가, 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남에게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고 결함이 있잖아요. 비판하는 문장을 쓰는 순간 그 말이 제게 돌아오는 것 같아서 힘들어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는 나는 올바르고 정의로워서 이런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죠.

     

    하지만 평론가의 주요한 업 중 하나가 비판이기도 한데요. 비판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존중해요. 저도 전혀 안 하는 건 아니고요. 신인 작가에게는 잘 안 하지만 고은, 신경림 같은 어른께는 가끔 해요. 그분들은 제가 비판해도 별로 상처 받으실 것 같지 않아서요. 어쨌든 저는 무엇보다 제가 괴로운 글을 쓰고 싶지 않아요. 저는 사명감이나, 옳고 정의로운 자리에 서서 평가를 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계신데요.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강조하는 선생님인지 궁금합니다. 학생을 가르치고 있지만,‘멘토’ 같은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저도 아직 시행착오를 하며 살고 있어서요.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문학을 통해 배우라는 것이죠. 저는 가르칠 자격이 없지만, 좋은 책은 해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해요. 예를 들어, 저는 ‘무엇은 무엇이다’같이 용감하게 정의하거나 ‘무엇 해라’하고 명령하는 제목 좋아하지 않고요. 한 단어로 된 제목 좋아하지 않아요. 더 잘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성의 없게 보여요. 두 어절이나 세 어절로 된 제목을 좋아하는데 두 어절의 제목은 두 단어만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놓은 것과 하고 싶었던 것의 간격을 보여 줄 수 있어서 화두를 던지기 좋은 것 같고, 세 어절은 한국어의 리듬이 가장 잘 살 수 있는 것 같이 느껴져요.

     

    선생님이 대학 때는 어떤 학생이셨어요? 노래패 활동한 것밖엔 없어요. 아마추어 수준으로 작사랑 작곡, 노래하면서 1학년 때부터 대학원 때까지 살다시피 했어요. 문학이야 평생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책 읽는 것이 생활이었고요. 문학을 평생 하겠다고 확신한 이유는,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어요. 잘할 자신 없이 좋아만 했다면 안 했을 거예요. 짝사랑은 슬픈 거잖아요. 조금씩 깊이 바꿀 수 있는 일이 보람 있고 생산적이라는 생각을 했고, 제 자신의 한계와 역량에 비춰봤을 때 이 일이나마 제일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선생님 삶에 비추어봤을 때, 평론가가 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해주세요. 문학 작품을 읽어낼 수 있는 깊이가 있어야 할 텐데, 저는 그 깊이는 살아온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 제일 크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평탄하게 자기 삶을 꾸려온 사람이라면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등장인물의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적어지겠죠. 그런 사람일수록 이론에 과도하게 의존할 것이고요. 저도 제가 살아온 한계 안에서밖에 못 봐요. 문학의 한 측면만 간신히 잡고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평론가는 많을수록 좋은 거예요. 그런데 저는 대학생에게 어떻게 살지 조언하라면 해줄 말이 없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시행착오를 거치고 상처를 주고 또 받고 실수를 하면서 밖에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그나마 시행착오를 덜 해보자고 책을 읽어서 누군가 상처받은 기록을 보고 인생에 대해 느끼겠지만 그건 직접 경험한 것과 다르잖아요.

     

    그렇다면 선생님은 인생에서 난관을 겪을 때 상처에 열려 있으려 노력하는 편이신가요? 첫 책 머리말에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내가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이라 썼어요. ‘이건 정말 제 진심이에요’,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많지가 않아요. 저는 ‘여러분,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없어요.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저는 비관적이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분명히 상처를 받을 거고, 그때 그 난관을 아주 이기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할 거예요. 그리고 결국 돌파하겠죠. 인간이니까. 나중에 아프게 그때를 돌아보게 될 것인데 그때, 뭔가를 배울 거예요. 그 순간에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한 단계 올라가는 거죠.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졸렬한 사람이구나 깨달으면서 점점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생기는 거죠. 그때가 되면 아름답고 정의로운 문장은 쓸 수 없고 내가 겪었던 것들을 돌아볼 때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장이 나올 테지요. 그런 경험 거치면서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쌓여서 글쟁이가 되겠고요. 저도 아직 멀었어요. 4,50대가 되면 더 많이 보이겠죠.

     

    지금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미약하나마 독자와 작가를 계속 연결해주고 싶어요. 작가에게 힘을 주는 좋은 글을 쓰고, 제가 가진 생각을 탐구하면서 밀고 나가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서요. 다음에 나올 책의 가제도 정했는데요, ‘가능한 불가능’이에요. 3,4년 뒤에 2번째 평론집을 낼 텐데, 문학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고 밀어붙이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첫 평론집의 주제와 이어지는 말인데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지 생각 중이에요.  또 앞으로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연작 비평을 해보려 해요. 주제가 ‘항의’거든요. 좋은 문학 작품들은 다 세계질서에 저항하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내용으로 비평을 쓰려고 준비 중이에요.

     

    글을 쓸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쓸 수 있는 단어는 줄어들고 할 수 없는 말은 많아지잖아요. 그럼에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글을 쓰는 존재들은, 글에 대해 가장 많이 회의하지만 가장 많이 의존하고 위안받는 사람들이에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글만큼 저를 행복하게 하는 게 없거든요. 체험이 있으니까 계속하는 거죠. 인간은 내버려두면 알아서 행복하게 살아가요. 행복한 길을 찾아가는 게 인간 같아요. 지금 저는 행복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 거죠… 그렇지 않을까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마지막 말은 동의를 구하는 것 같기도 했고 확신하는 것 같기도 했고 의심하거나 다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단정하는 말마다 조심스러워 하며 ‘나도 아직 멀었다’’나는 할 수 없다’같이 전반적으로나 부분적으로 한계를 규정하는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습관인 것 같은 이 평론가는 불가능의 가능성만을 신뢰한다. 신형철에게 가능한 것은 이토록 도저한 언어들에 대해 말하는 일이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이다

    Shin Hyung Cheol

     

     

    사랑할수록 문학과 더 많이 싸우게 된다.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신형철 문학평론가

반성하는 시인보다는 엄살떠는 시인이 더 애틋하다. 간만에 제대로 된 엄살의 기록을 읽었다. 시인 심보선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70년에 태어나 1994년에 등단했지만 오랫동안 휴업 상태로 있다가 몇 년 전 시인으로 돌아왔다. 고대했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펴냄)가 나왔다. 표제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런 문장도 있다.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간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슬픔의 진화’) 치욕을 잊어버린 시대에 영혼이 뚱뚱해진 시인이 슬픔에 익숙해진 채로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속물의 시대에 차마 주먹질은 못하고 멱살만 잡고 떤다. 이 슬픈 신경질이 감미로울 정도로 생생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은 여기서 끝이 난다”(‘식후에 이별하다’)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 사랑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도 끝이 난다. 그 끝의 순간을 노래한 시다. 아마도 남녀는 죽을 먹고 있었을 것이다. 숟가락으로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죽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이제 이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한 생을 ‘휘젓지’ 못하는 이 “고요한 풍경” 같은 연애가 피로했을 것이다. 이 식사가 끝나면 사내는 이별을 고하리라. 이 “이상한 기근”이 초래한 이별을 연애의 그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이 환멸과 허기는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이제 멸망한 지 오래다”라는 저 깨달음의 산물일 것이다. 시인은 ‘지금 여기’와 이별하고 있는 것이다. “뒤돌아보면/ 강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옛 애인/ 기적처럼 일어났던 사랑을 잃었다/ 꿈과 현실/ 둘 다.”(‘미망 Bus’) 이 이별 뒤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소설 이론 쪽에는 ‘문제적 개인’(루카치)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제 시 쪽에서는 ‘문제적 자아’라는 개념을 발명해보자. 반성하고 감동하고 배려하는 자아 말고, 시비 걸고 자학하고 투덜대는 자아 말이다. 우리는 시의 ‘나’가 반드시 ‘자아’와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 편이지만, 이런 문제적 자아의 시는 인텔리겐치아와 프티부르주아의 틈새에서 고해성사처럼 쓰이기 때문에 죄의식이 물컹물컹 배어나와 아프다. 요즘 시에서 이런 ‘자아’가 드물고, 이런 자아의 ‘육성’이 듣기 쉽지 않고, 육성으로 울려오는 ‘엄살’을 만나기도 어렵다. 이 모든 것이 이 시집을 “빛나는 폐허”(‘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로 만든다.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적 자아의 엄살’에는 계보가 있다. 5·16 이후 김수영의 시가 그랬고, 10년 전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펴냄·1998)가, 최근에는 장석원의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펴냄·2005)가 그러했다. 이 시인들의 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자(聖者)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그래서 ‘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나, 형의 기분 알 거 같아요, 저도 이 시대가 지긋지긋해요, 그 ‘빛나는 폐허’에 나도 끼워줘요. 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