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그녀의 몸이었다. 그녀의 몸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의 몽환적인 모습, 수증기 사이를 빠져나오던 하얀 항아리 같은 그 모습, 몸을 수그리고 엎드려있을 때 머리를 말리는 하얀 항아리같은 모습, 마치 하얀 달빛이라도 받은 듯 창백하게 빛나는 몸으로 물끼가 흘러내리는 순간, 그리고 푸릇한 멍자국. 너무나 오랫동안 내게 남은 유일한 생각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에 홀로 남겨졌을 때, 이 텅빈 방, 텅빈 집에서 이방 저방을 오가면서 생각했던 유일한 생각이라고는.

 

그러한 집착때문에 나는 나자신의 인격, 나의 고귀한 인격-나는 적어도 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을 무너뜨리고 그녀에게 굴복하고 간청을 했다. 굴복의 자아는 익숙하지 않는 몸에서 나의 얼굴에서 그리고 내가 내뱉은 언어에서 구불구불 어색하게 새어나왔고, 사랑에 눈 먼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사실 그녀의 눈에서 나의 모습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그녀가 대답하는 모습에서 나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을 기쁘게 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의 무엇을 없애버릴까?"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자문을 했다. 그렇다고 없애버릴 수 있을지 나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그녀를 나의 아내 숙을 잡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니까.

 

"서초역까지 데려다 주실래요?" 떠나는 날도 그녀는 나에게 어떤 요청을 했다. 작은 요청이든 큰 요청이든 그녀는 뭔가 부탁하고 몇초간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오초도 되기전에 "물론이야" 했었다. 그리고 그 날도, 그녀가 나를 떠나던 그날도 그랬다. 그녀는 가방을 두 개를 싸고 나에게 말했다. "저 루비통 가방은 당신이 선물로 준거니까 가져갈께, 당신은 샘소나이트 블랙이 있잖아..그래도 되지?" 1초 2초 "어 물론이야" 나는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나도 주고 싶었다. "나도 가져가." 나는 속으로 외치듯 말하고 있었지만 입술만 씰룩이고 말았다. 그녀의 단호한 표정, 단호한 거절, 그것을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그녀만의 화법이 있었다.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좋을대로 해, 난 상관없어, 원하는대로 해." 그녀는 항상 다른 쪽 문을 내게 보여주었고, 그녀가 향하는 문은 항상 다른 쪽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바꾼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문이 어느 쪽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말을 내뱉고 난후에야. 그리고 그 문은 한번의 예외없이 내가 선택한 문과는 반대 쪽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초내에 그녀의 뜻에 따르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뭐 마시고 싶어?" 내가 물었다.

"어, 아니...우유 한잔 줘." 그녀는 아침마다 우유를 마시는 것이 습관이다.

"그럼 나도 마실까?" 나는 냉장고 쪽으로 일어나 걸어갔다.

"난 됐어" 그녀가 말했다.

"왜? ...그럼 차 한잔 줄까?..나도 차를 마시지 뭐" 나는 포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식탁에 희미한 무늬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고 있었다. 식탁위에 그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식탁에 닿을 지경이었다.

"....그럼 우유마실께"

 

그녀가 말하는 화법과 주저함은 나를 더욱 욕망하게 만들곤 했다. 그것이 우리 사이에 문제였을까? 그녀가 나에게 끌리지 않았던 것은 신혼초부터 였을것이다. 아니 내가 그녀에가 주도적이되지 못했던 시점은 정확하게 신혼 초부터였다. 나는 너무 말이 많거나 혹은 침묵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녀의 주저함을 먼저 앞서 침묵의 공간을 의도적으로 채우려하거나 혹은 채울 수 없는 침묵의 공간에 몇마디의 말이 그저 풍덩풍덩 반응없이 빠져들때 나는 그만 자신감을 잃고 내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녀의 화법은 나를 욕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나를 좌절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지나치게 완벽하게 말하거나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말의 변비를 앓기라도 하는 듯이 말하고 있어 지속적으로 그녀 주위를 맴돌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에 대해서 좀 더 면밀하게 알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도 그랬을 것이고, 짧은 연애 후에도 그녀를 좀 더 관찰하고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공통된 뭔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더라면 필요한 만큼의 인내심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업으로 바빴고 그녀는 너무나 한가했던 것이다. 그녀는 온갖 상상력으로 오전을, 오후를 그리고 저녁시간을 채웠을 것이고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으며 온종일 이리 저리 뛰어 다녔던 것이다. 다른 모든 한국 남성이 그러하듯이. 

 

모든 사실이 드러나고도 그녀는 너무나 담담했고, 말하는 순간에는 주저했다. 나의 서툰 질문에 나의 초조한 말투에 그녀는 망설이며 말했다. " 우린 아닌것 같아. 그렇지?" 그녀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게 누구야?" 그렇게 묻는 나의 질문은 사실 "나는 도데체 당신한테 뭐야?"의 실패한 질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할수록 그녀는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만났는지, 어디가 도데체 뭐가 좋았는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 것을 안다고 해서 그녀가 나에게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떠난 것은 벌써 그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 나오던 그날 머리를 말리기위해서 엎드린 그녀의 둔부 바로 밑 허벅지에 있던 작은 멍자국. 하얀 항아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멍자국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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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2차 세계대전 종전후,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한 악이 전후에 정당화를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전쟁이 역사적으로 남겨준 유산이 어떤 식으로 남아야하는지, 그리고 어떤 교훈으로 남아야하는지 한 소년의 시각에서 펼쳐나가고 있는 작품이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어릿광대 삐에로가 모리스 파퐁의 재판을 지켜보고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또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진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아무도 말하지 않고, 과거가 있다고 해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소년이 아버지에 대해서 가스똥 삼촌에게 듣고 난 후에 아버지의 어릿광대 놀음에 대한 집착을 이해하게 된다. 소년의 시각은 가스똥삼촌의 이야기를 듣기 전과 듣고 난 후가 다르다. 진실이 밝혀지고 과거의 기억을 누군가의 회상으로 재생되며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을 이해하게 될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 역할을 떠맡은 사람이 소년의 아버지와 가스똥삼촌이다. 이 사회에선 누구나 작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것의 역할은 누가 시킨다고 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이다. 소년이 아버지에 대해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끼는 것은 그가 삐에로로 분장을 하고 그의 공연을 요청하는 곳은 어디든지 가서 어릿광대의 우스꽝스러운 공연을 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릿광대를 보면 울고 싶어졌다. 어릿광대를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절망감과 쓰라린 고통과 수치심을 느꼈다....

 

...숫총각이 진한 화장을 한 창녀와 마주쳤을 때 느끼는 순진한 공포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순결한 처녀가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예기치 않게 발기한 난쟁이 조각상과 부딪쳤을 때 진땀이 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아버지의 어릿광대 역할에 대한 집착은 강렬하지만, 가족의 동의를 얻으려하는 절차에서 작가는 가족들의 감정이나 아버지의 감정, 그리고 그것을 묘사하는 소년의 감정을 섬세하게 잘 드러난다. 

 

아버지가 어릿광대로 무대에 서려고 집을 나서는 과정은 언제나 똑같아 거의 전통이 되다시피 했다. 아버지는 집을 나서기 전에 우리의 의견을 눈빛으로 물었다. 아버지는 집을 나서지 못한 채 망설였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를 희생시키는 것이 괴로운 척했다. 그리고 그는 여행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아니야, 아니야!" 하며 우리를 버리고 가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기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야단법석을 떨면 할 수 없이 우리도 그가 벌이는 연극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무대에 올라가,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괴로운 척해야 했다. 

 

결국에 그리고 언제나 그리고 아마도 열렬히 아버지는 어릿광대의 역할을 하기위해 갈 것이면서도 그 과정에 깃든 망설임, 시간을 두고 뜸을 들이는 과정은 아버지가 하고자 하는 것이 성공의 욕망을 위해 철로위의 기차처럼 어떤 방향으로 무지막지하게 나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가 선택한 길이 단호할지라도 무지막지하고 거침없는 일방통행식의 결행은 아니라는 점에서 섬세하다. 

 

광대의 무대에 섰을 때 아버지는 전혀 다르다. 아버지는 어릿광대로서의 역할에 대해서 아무런 망설임없이, 인류를 구원하기라도 할 듯이, 스스로 학대하듯이, 혹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기라고 하려는 듯이, 어릿광대의 희생과 고통을 혼자서 견뎌내는듯 보이는 것이다. 그 어릿광대의 우스꽝스러운 역할에 소년의 아버지는 너무나 열심이었기 때문에 소년은 "인류가 안고 있는 부끄럽고 어두운 부분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무대에서 아버지는 혼자서 따귀를 때리고 혼자서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시늉을 하며 눈물이 나도록 고독한 원맨쇼를 했다. 그는 우주의 은하계와 지구의 어리석은 인류를 구하러 온 얼빠진 전사나 흰 칼을 찬 사무라이 같았다.

 

어느날 가스똥 삼촌이 말해준 아버지와 가스똥 삼촌의 과거는 소년이 아버지에게 가졌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그는 (가스똥 삼촌) 자신의 삶 전체의 문을 나에게 열어준 것이다. 삼촌은 내면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던 전부를, 잔인한 발자국들로 짓밟혀 피범벅이 된 처절한 정원을 나에게 내어 주었다.

 

아버지와 가스똥 삼촌은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레지스탕스 세포조직에 가담을 했었고, 두에역에 변압기를 폭파한다. 얼마 후 독일군에 잡히게 되는데 잡힌 이유도 독일군이 이들에게 혐의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조기 축구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누군가의 고발로 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 둘은 진범이 아니라고 진술을 했지만 일단 잡혔기 때문에 진범이 나타나지 않으면 총살을 당할 입장에 놓였고 앙리와 에밀이라는 다른 무고한 사람들과 깊은 웅덩이에 갖히게 된다. 진범은 가스똥 삼촌과 소년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다른 진범이 나타날리가 없었다.

    

갖혀있는 네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그중에 누군가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사는 방법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고, 소년의 아버지와 가스똥 삼촌이 실제로 변압기를 폭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둘은 자신 둘중에 한사람이 진범이라고 고백하고 나머지 셋을  살리겠다는 것을 의논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감시하던 군인인 베르나르는 아래처럼 말한다. 

 

죽고 사는 일을 타인의 손에 맡기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대가로 자신이 살아난다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악의 편에 있는 독일 군복을 입고 있는 나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야.  

 

베르나르는 그들에게 샌드위치나 빵을 던져주기도 한다. 나중에 베르나르는 자신의 직업이 어릿광대라고 고백을 한다. 소년의 아버지가 말한 것 중에 선생님으로서 그의 마음가짐이 의미가 있어 밑에 옮겨본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야. 그럼 자네와 나는 똑같이 어린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 거네. 그런데 왜 우리를 풀어주는 거지?

 

그들이 풀려난 이유는 누군가가 변압기를 폭파했다고 자수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짜 범인을 만들어 낸 것은 순전히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그럴듯하게 이야기가 되는 듯한 구성방법에 의존한다.

 

그 (범인의)부인은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새신랑이 생사의 기로에 있었어. 그녀의 새신랑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했다. 그 부인은 죽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가 이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뜻 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독일장교를 찾아가 남편이 변압기를 폭파시킨 범인이라고 고발을 했단다.

 

독인군은 그 부인의 말을 믿고 범인으로 몰렸던 네사람은 풀려나게 된것이다. 그런데 그 부인의 새신랑은 무고하게 그 폭발에 사고를 당한 전기공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남편은 두에 역의 전기공이었고, 변압기가 폭발하는 바람에 화상을 입었거든. 그 사람은 뼈속까지 화상을 입었다. 바로 우리가 그 사람을 죽게 한 것이지.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우리를 구해준거야. 우리는 그가 역에 있는 줄도 모르고 변압기를 폭파시켰던 거였어.

 

삶은 서로 묘하게 인연을 맺으며 죽음으로 이끌어진다. 그 과정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잔잔하게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 작가 미쉘 깽의 작가적 역량이 아닐까. 강렬하지 않아도 의문을 던지는 그 망설임과, 주저함, 그러면서 단호한 역할 수행, 그것은 전기공 부인에게서 다시 느낄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많은 사람들이 레지스탕스 요원이나 순교자로서 자신의 이름이 거리의 이름으로 정해져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랐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그러나 그 부인은 남편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겠다는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하더구나.

 

사실 감동은 어떤 보상을 취하지 않는 것에서 일어난다. 모리스 파퐁의 재판에 나타난 어릿광대는 아버지의 아들, 그 소년이 어릿광대의 분장을 하고 아버지의 여행가방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비시 정부는 실재로 존재했고 반이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던 모리스 파퐁의 재판을 아버지의 여행가방을 들고가서 경청함으로서 나치의 처벌에 대해서 단호하고 예외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 부하로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모리스 파퐁의 변명은 충분하지 않다. 구덩이에 빠졌던 네사람이 처해 있던 상황은 부하로서 명령에 복종해야하는 상황보다 더 극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극한에 처한 네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는 궁리를 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작가는 아주 중대한 순간, 심각한 순간, 총살을 당할 순간에 인간의 의식은 사소한 것에 고정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령 총살을 당하는 순간에 '시선이 피클 병에 고정되었다' 거나 '옛날에 나를 좋아하던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하는 엉뚱한 생각, 처절한 정원에서 사소하고 평범한 것, 혹은 사소해 보이지만 선한 것에 의식을 고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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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서 존재자로 현대사상의 모험 11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서동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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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에 '있음' 혹은 그대가 거기에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있음'이라고 하는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위해 레비나스는 존재자가 없는 존재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한다.  

 

(존재)그것은 존재자라고 하는 아무것도 떠맡지 않은 익명적 존재, 존재자들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 끊임없는 '소란' 블랑쇼의 은유를 다시 쓰자면, '비가 온다', '밤이다' 등과 같은 비인격적인 '있음'이다. 이 '있음'은 하이데거의 '있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라니, 이건 무슨 말인가. 내 존재와 나의 있음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또는 왜 존재자를 구분하라는 말인가. 그 구분의 시도는 한없이 그리고 처음부터 회의적이다. 깊은 회의에서 시작한 이 책의 독서는 처음부터 잘 읽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번역에서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있는 듯하고, 철학에 대한 나의 독서력에 문제가 있기도 하겠고, 흥미나 관심과도 관련이 있는듯하다. 하여간 읽기 어려운 문장의 연속에서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날 지경이 되었다. 그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에 겨우 안도를 느껴야 할 것인가. 레비나스 역시 이 문제에 현기증이 난다고하니 말이다.

 

존재한다라는 동사의 공허함에 몰두할 때 사유는 현기증 같은 것을 느낀다. 이 동사는 오로지 그것이 분사적 형태(존재자)를 띨 때만, 즉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만 언급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19 쪽)

 

존재를 지배하는 존재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사건, 존재 일반이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존재를 현재의 시간개념과 자리의 장소개념과 연관을 시키고 존재의 일반 개념을 그 비인격성속에서 접근하려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인간 정신성에서 본질적인 사실은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들과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 정신성에서 본질적인 것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 및 이 단순한 사실의 꾸밈없음과 우리가 지금부터 유지하는 관계를 통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생겨난다는 것 등이다. (24쪽)

 

레비나스의 존재의 사유는 하이데거의 비극적인 존재와는 좀 다르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인간의 내던져진 유한성, 아무것도 없음 즉 무에 존재한다는 것에서 비극적인것이고, 존재의 불안은 이 무에 대한 이해로 비롯되므로 불안이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설령 불안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무한한 존재이며 이것이 그의 '존재와 무의 변증법'과 관련한다.

반면에 레비나스의 존재는 우리를 전적으로 부여잡고 있어서 생기는 두려움과 죽음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감추고 있는 존재에 대한 고찰이라는 면에서 차이가 있는 듯하다.

 

있음이 우리를 전적으로 부여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와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으나 여전히 두 가지 이유로 두려움에 떤다. 무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존재 안에 연루되어 있음을 표시해줄 뿐이다. 존재의 유한성 때문이 아니라, 존재 바로 그 자체 때문에 죽음이 해결할 수 없는 비극을 존재는 자기 안에 감추고 있다. 

 

존재란 무엇인가?하는 존재에 관한 물음은 존재의 낯섦 속에서 존재에 대한 경험 자체이다. 그러므로 물음은 존재를 떠맡는 방식이다. 이런 까닭에 존재에 대한 물음은 대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대답없이 존재하는 것이고 대답을 계획할 수도 없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존재와의 관계를 현시하는 자체이다. 존재자와 결합 전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낯선 것이며 우리의 이해를 거역하며,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존재의 악이라 규명한다. 만일 철학이 존재에 대한 물음을 한다면 철학은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서 권태를 살펴본다. 권태란 무엇인가. 권태는 존재자를 거부하고 싶은 망설임이며, 존재함에 대한 거부의 현상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존재에 빛이 한번 빛나는 것과 같은 한 순간의 시간이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 순간에 그 곳에 거하는 존재자는 뭔가 '하고있음'이며, 어떤 열망이며 그것을 거부하고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 권태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한다. 무엇인가 착수하고 열망해야한다. 판단하기를 중지해 버린 채 행위하고 열망하기를 기권해 버리는 완전한 회의론자의 그릇된 미소에도 불구하고 존재함에 대한 그 계약의 의무는 피할 길 없고 해야한다는 형식으로 부과된다. 반드시 무엇인가 행위하고 착수해야 한다는 점의 근본에 위치한 어떤 영혼처럼 현재는 이 행위와 착수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태는 이 궁극적인 의무에 대한 불가능한 거부이다. 권태 속에서 우리는 더욱 아름다운 곳을 동경하면서, 존재의 이런저런 모습들 가운데 하나로부터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부터 도피하고자한다. 여행 안내서도 없고 기한도 정해지지 않은 도피, 그것은 어느곳엔가 정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도피에서는 보들레르가 말하는 진정한 여행자처럼 오로지 떠나기 위한 떠남이 관건인 것이다.(35쪽)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수록된 '여행'에서 그는 "그런데 진정한 여행자들은 떠나기위해 떠나는 자들이다."라 했다. 존재에서 떠나는 존재자의 모습에 우리는 권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무기력은 차이가 있다. 무기력은 한가함이나 주저함이나, 혹은 휴식과는 다르다. 무기력은 아침에 일어나야하는 의무와 침대밑으로 다리를 내려놓는 일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레비나스는 설명한다. 이는 힘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육체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도 아니며 다만 일어나 다리를 내려놓은 수고를 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무기력은 시작할 수 없음이다. 또는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무기력은 시작의 달성이다. 아마도 무기력은 형성되어 가고 있는 행위에 내재한다. 그것은 분명 잘못 포장해 울퉁불퉁한 도로 위에서처럼, 각각이 다시 시작되는 그런 순간들을 통해서 흔들거리며 굴러가는 샐행이다. 일은 진행되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으며 자꾸 중단된다. 아 자꾸 중단되는 것, 즉 불연속성이 아마도 일의 본성 자체일 것이다. (37쪽) 

 

존재자의 열망은 '해야만 한다'가 핵심이며 이는 '존재해야만 한다'가 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에 알아챔과 동시에 행위가 시작되며 행위는 존재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압도적인 의무는 피로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피로, 특히 쉽게 말해서 신체적인 피로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선 어떤 경직됨, 어떤 둔감해지는 마비, 어떤 식이든 움추려들게 하고 마비하게 하는 어떤것이다. 수고와 노동속에만 피로가 있다. 손으로 뭔가를 잡고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지 않기위해서 부여잡는 것에는 피로가 있다. 그 나른함으로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포기하고 나른함, 그 피로에 몸을 맡기게 되면 신체적으로는 잠이 드는 것이고, 손에 들것은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며, 애인은 떠나보내게 된다. 이렇게 잠을 통해서 존재를 중지시키는 힘이 구성될 수 있다. 

달성해야할 목적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위해 수고하고 노동을 하는 강요와 강제를 갖게되고 우리는 노동에 자신을 묶어두게 된다. 우리는 그 작업에 우리의 존재를 맡기기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자유에도 불구하고 수고는 인간에게 형벌을 가하게 되는 것이고 이때 존재는 피로와 아픔의 갈등을 겪는 것이다. 피로는 존재함에 대해서 존재자가 지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연은 현재에 구성된다. 피로는 존재에서 존재자의 출현이다. 그렇다고 피로가 존재함의 중지가 아니라 이 머뭇거림은 순간에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포착하게 하는 순간인 것이다. 수고는 존재의 예속화라는 점에서 피로와 차이가 있다.

 

수고는 분명히 유죄 판결이다. 왜냐하면 수고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현재로서 순간을 떠맡기 때문이다. 수고는 이 영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하나의 불가능성이다. 왜냐하면 수고는 전적으로 순간을 떠맡고 있고, 순간 속에서 수고는 영원성의 진지함에 직면하기 때문에 즉 수고는 유죄 판결인것이다. ---보들레르에게 존재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자 동시에 고통 속에 내던저진 것으로 나타난다. 끝없는 고통의 신음! 아마도 우리는 어떤 미지의 고장에서 다루기 힘든 땅을 파헤치고 우리는 헐벗고 피 흘리는 발 아래 무거운 가래를 박아넣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수고란 주인이 노예에게 속박의 표시를 남기기 위해 선호하는 그런 형식인 것은 아니다. 노동에서 가장 자유로운 동의가 있으며 가장 자발적인 수고 안에 누가 대속할 수 없고 모면할 수 없는 사건이 있는 것이다. 수고를 노예의 특성으로 만드는 것은 수고가 내포하고 있는 아픔이 아니다. 수고는 그 수고의 순간에 예속화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아픔을 내포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를 떠맡는 일을 의미하며 존재자의 출현과 동일시 하게 된다면, 존재자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행위이다. 따라서 심지어 비활동적일지라도 존재자는 행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하는 것, 전적으로 욕망에 몰입하는 것, 욕망에 무섭도록 솔직한 것, 욕망의 대상이 있는 것은 존재자가 가장 존재를 잘 떠맡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허기와 혼동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에게서 체험하는 괴로움은 경제적인 용어로 소유라고 불리는 것에 선행할 뿐아니라, 소유 그 자체 속에서 다시 발견된다. 난잡한 애무에는 (사랑하는 자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고백이 담겨있으며, 폭력은 실패하고 소유는 거부된다. 또한 키스와 물어뜯음 속에는 '먹는다'는 행위의 흉내(시뮬라크르)라는 어쩌구니없는 비극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이 욕망의 본성을 무엇보다도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허기와 혼동하여 잘못 이해해 왔으며 또 그런식으로 욕망의 본성을 없음에 대한 허기로 발견해 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욕망의 주체이며 욕망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존재를 잘 떠맡는 방법일지라도 잘 존재한다는 것은 지향이다. 후설에 따르면 이 존재의 지향은 소유를 향하지만 소유물에 의해서 매몰되어 버리지 않는다. 자아는 대상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며 지향을 향유와 구별하게 해주는 보류의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소유, 양손을 자유롭게 한 상태에서의 소유가 지향의 지향성을 이룬다고 한다. 욕망의 존재가 은밀하게 존재할 때 살짝 나타나는 존재의 모습은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옷을 입지 않은 존재는 그의 존재가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이면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잠옷 사이에 젖가슴이 내비치고 있을 때 깜짝 놀라는 것처럼 존재한다. 

 

따라서 주체는 이미 모든 대상에서 자유로와야한다. 어떤 사건속에 얽혀들지 않는 힘을 유지하면서 사건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며, 대상에서 물러서는 방식이며, 모든 것에서 떨어져나와 오로지 자기로 머물수 있음이다. 이렇게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에 존재함에 있어서 머뭇거림이며 간격이다. 우리의 의식에 대해, 스스로를 중지시키는 의식의 힘에 대해서, 무의식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무의식에서 조차 자신을 연기하는 방식에 대해서 존재론적 모험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존재함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행동, 변화, 흐름, 명사가 되는 사건이 존재자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을 쪼개어 그 한 순간에 빛의 한번의 번쩍임처럼 일어나는 사건이다.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는 이미지, 흐름의 이미지는 시간이 존재에 작용한 것이지 시간 자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는 항상 예외적이며, 그 현재의 상황속에 우리는 순간의 이름을 부여할 수 있고, 그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을 명사로 사유하며 그 지향적 특성이 있는 이 사건의 주도자이거나 혹은 부인하거나 거부하거나 피로해하거나 무기력해하거나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인 하는 것,' '거부하는것,' '피로,' '무기력,' 그리고 '욕망'이 존재자를 분석하고 또는 이해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순간은 그것에 선행하거나 후행하는 다른 순간들과 관계를 맺기 이전에 존재를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각각의 순간은 하나의 시작이며 탄생이다. 우리가 엄밀히 현상적 차원에 집중하고 말브랑슈가 순간 속에서 발견한 초재적 관계는 제쳐둔다고 해도 순간이 그 혼자만으로 하나의 관계, 하나의 정복이라는 점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이때 이 관계는 미래나 과거와 관계하지 않으며 이 과거나 미래 속에 자리잡은 어떤 존재나 사건과도 관계하지 않는다. 시작이자 탄생으로서의 순간은 하나의 독자적인 관계, 존재와의 관계, 존재에로의 시작이다.   

 

그렇게 해서 어떤 잘게 부서진 한 순간의 시간에 그리고 한 존재에 존재자가 거하게 되면 존재자는 정립하게 되며 정립된 존재자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연역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립을 통해 익명적인 '있음' 익명적인 '존재'는 그것이 가졌던 있음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존재자 즉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다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존재자는 존재의 숙명을 지배하게 되는것이고, 존재는 존재자의 속성이 된다. 존재하는 누군가가 존재를 인수하고 떠맡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존재는 그의 '존재,' 즉 그의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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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김 지하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참으로 이제 가겠다.

손짓해 부르는

저 큰 물결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망망한 바다

바다로

 

없는것

아득한 바다로 가지 않고는

끝없는 무궁의 바다로 가는 꿈 없이 없는 것

검은 산 하얀 방 저 울음소리 그칠 길

아예 여긴 없는 것

 

나 이제 바다로

창공만큼한

창공보다 더 큰 우주만큼한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만큼한

끝간 데 없는 것 꿈꿈 없이는

작은 벌레의

아주 작은 깨침도 있을 수 없듯

가겠다.

 

나 이제 가겠다.

숱한 저 옛 벗들이

빛 밝은 날 눈무신 물 속의 이어도

일곱 칩 영롱한 낙토의 꿈에 미쳐

가차없이 파멸해 갔듯

여지없이 파멸해 갔듯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백방포에서 가겠다.

무릉계에서 가겠다.

아오지 끝에서부터라도 가겠다

새빨간 동백꽃 한 잎

아직 봉오리일 때

입에 물고만 가겠다

조각배 한 척 없이도

반드시 반드시 이젠 한사코

당신과 함께 가겠다

혼자서 가지 않겠다

 

바다가 소리 질러

나를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의 이슬

이슬 가득 찬 한 아침에

그 아침에

문득 일어서

우리 그 날 함께 가겠다

살아서 가겠다

아아

삶이 들끓는 바다, 바다 너머

저 가없이 넓고 깊은, 떠나온 생명의 고향

저 까마득한 화엄의 바다

 

가지 않겠다

가지 않겠다

혼자서라면

함께가 아니라면 헤어져서라면

나는 결코 가지 않겠다

 

바다보다 더 큰 하늘이라도

하늘보다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라도

화엄의 바다라도

극락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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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나는

 

                         김 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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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성숙으로 가는 능선을 넘는 것이다. 많을 것을 볼 수 있기도 하지만,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계를 맺는 것이기도 하지만 관계에 소원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관계를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이지만, 관계를 통해 존재가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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