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그녀의 몸이었다. 그녀의 몸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의 몽환적인 모습, 수증기 사이를 빠져나오던 하얀 항아리 같은 그 모습, 몸을 수그리고 엎드려있을 때 머리를 말리는 하얀 항아리같은 모습, 마치 하얀 달빛이라도 받은 듯 창백하게 빛나는 몸으로 물끼가 흘러내리는 순간, 그리고 푸릇한 멍자국. 너무나 오랫동안 내게 남은 유일한 생각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에 홀로 남겨졌을 때, 이 텅빈 방, 텅빈 집에서 이방 저방을 오가면서 생각했던 유일한 생각이라고는.
그러한 집착때문에 나는 나자신의 인격, 나의 고귀한 인격-나는 적어도 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을 무너뜨리고 그녀에게 굴복하고 간청을 했다. 굴복의 자아는 익숙하지 않는 몸에서 나의 얼굴에서 그리고 내가 내뱉은 언어에서 구불구불 어색하게 새어나왔고, 사랑에 눈 먼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사실 그녀의 눈에서 나의 모습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그녀가 대답하는 모습에서 나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을 기쁘게 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의 무엇을 없애버릴까?"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자문을 했다. 그렇다고 없애버릴 수 있을지 나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그녀를 나의 아내 숙을 잡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니까.
"서초역까지 데려다 주실래요?" 떠나는 날도 그녀는 나에게 어떤 요청을 했다. 작은 요청이든 큰 요청이든 그녀는 뭔가 부탁하고 몇초간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오초도 되기전에 "물론이야" 했었다. 그리고 그 날도, 그녀가 나를 떠나던 그날도 그랬다. 그녀는 가방을 두 개를 싸고 나에게 말했다. "저 루비통 가방은 당신이 선물로 준거니까 가져갈께, 당신은 샘소나이트 블랙이 있잖아..그래도 되지?" 1초 2초 "어 물론이야" 나는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나도 주고 싶었다. "나도 가져가." 나는 속으로 외치듯 말하고 있었지만 입술만 씰룩이고 말았다. 그녀의 단호한 표정, 단호한 거절, 그것을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그녀만의 화법이 있었다.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좋을대로 해, 난 상관없어, 원하는대로 해." 그녀는 항상 다른 쪽 문을 내게 보여주었고, 그녀가 향하는 문은 항상 다른 쪽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바꾼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문이 어느 쪽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말을 내뱉고 난후에야. 그리고 그 문은 한번의 예외없이 내가 선택한 문과는 반대 쪽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초내에 그녀의 뜻에 따르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뭐 마시고 싶어?" 내가 물었다.
"어, 아니...우유 한잔 줘." 그녀는 아침마다 우유를 마시는 것이 습관이다.
"그럼 나도 마실까?" 나는 냉장고 쪽으로 일어나 걸어갔다.
"난 됐어" 그녀가 말했다.
"왜? ...그럼 차 한잔 줄까?..나도 차를 마시지 뭐" 나는 포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식탁에 희미한 무늬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고 있었다. 식탁위에 그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식탁에 닿을 지경이었다.
"....그럼 우유마실께"
그녀가 말하는 화법과 주저함은 나를 더욱 욕망하게 만들곤 했다. 그것이 우리 사이에 문제였을까? 그녀가 나에게 끌리지 않았던 것은 신혼초부터 였을것이다. 아니 내가 그녀에가 주도적이되지 못했던 시점은 정확하게 신혼 초부터였다. 나는 너무 말이 많거나 혹은 침묵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녀의 주저함을 먼저 앞서 침묵의 공간을 의도적으로 채우려하거나 혹은 채울 수 없는 침묵의 공간에 몇마디의 말이 그저 풍덩풍덩 반응없이 빠져들때 나는 그만 자신감을 잃고 내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녀의 화법은 나를 욕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나를 좌절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지나치게 완벽하게 말하거나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말의 변비를 앓기라도 하는 듯이 말하고 있어 지속적으로 그녀 주위를 맴돌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에 대해서 좀 더 면밀하게 알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도 그랬을 것이고, 짧은 연애 후에도 그녀를 좀 더 관찰하고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공통된 뭔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더라면 필요한 만큼의 인내심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업으로 바빴고 그녀는 너무나 한가했던 것이다. 그녀는 온갖 상상력으로 오전을, 오후를 그리고 저녁시간을 채웠을 것이고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으며 온종일 이리 저리 뛰어 다녔던 것이다. 다른 모든 한국 남성이 그러하듯이.
모든 사실이 드러나고도 그녀는 너무나 담담했고, 말하는 순간에는 주저했다. 나의 서툰 질문에 나의 초조한 말투에 그녀는 망설이며 말했다. " 우린 아닌것 같아. 그렇지?" 그녀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게 누구야?" 그렇게 묻는 나의 질문은 사실 "나는 도데체 당신한테 뭐야?"의 실패한 질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할수록 그녀는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만났는지, 어디가 도데체 뭐가 좋았는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 것을 안다고 해서 그녀가 나에게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떠난 것은 벌써 그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 나오던 그날 머리를 말리기위해서 엎드린 그녀의 둔부 바로 밑 허벅지에 있던 작은 멍자국. 하얀 항아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멍자국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