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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동 사람들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2월
평점 :
나는 이런 스타일의 소설을 진짜 좋아한다. 수많은 화자들이 등장해서 자신들의 상황과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들이 하나의 사건에 연결되는 그런? 누쿠이 도쿠로의 <난반사>가 생각난다. 그런데 <잠실동 사람들>은 그것과는 좀 다른 게 어떤 하나의 특정 사건에 인물들이 연결되진 않는다. <잠실동 사람들>은 잠실이라는 한 공간 안에서 각 인물들의 일상을 그들의 시점에서 이야기한다. 하나의 사건에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 그들의 일상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점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설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작가는 각 화자들의 상황, 생각들을 정말 세세하게 관찰하여 묘사한다.
<잠실동 사람들>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아이들의 교육에 열성적인 즉, 치맛바람 쎈 엄마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남편,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몸을 파는 대학생, 학원 상담원, 과외 교사, 가정부 아주머니, 원어민 강사, 초등학교 교사, 그 아파트 단지 상가의 카페 주인, 학습지 교사, 초등학교 교장, 온갖 학원을 다 다니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등장인물 각각의 입장과 상황에 맞게 세세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논술학원은 태어날 때부터 대기 걸어놓아야 들어갈 수 있다더라, 초등학생인 아이들의 일과가 새벽 3시에 끝난다더라 하는 사실은 놀라울 뿐이었다.
기억나는 부분이 많지만 두 군데 꼽자면, 첫 번째는 원어민 강사 지미 더글러스가 여자 친구 세미와 우리나라의 수능시험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다. 지미 더글러스가 한국에 올 때 수능 때문에 비행기 시간까지 늦춰졌었다며 뉴스를 보며 이야기하면서 대화가 시작되는데 원어민 강사 눈에는 수능이 시험이 아니라 게임 같아 보인다고 말한다. 온 나라가 참여하는 게임. 그걸 듣고 세미가 맞다고, 게임이라고 아니 경마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며 아이들을 경주마에 비유한다. “부모와 일가친척들이 자식이라는 경주마에게 엄청난 돈을 베팅하는 거지. 이 베팅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돼. 아니다, 요즘엔 그 연령대가 더 낮아진 것 같아. 너도 엊그제 잠실의 네 살짜리 애 하나 가르치게 됐다 그랬지? 걔도 경주마야. 아주 어릴 적부터 길러지는. 베팅엔 여러 종류의 자본이 들어가. 돈은 물론이고 부모의 시간, 정보력, 노동력, 사교력, 여가까지. 최근 몇 년 동안엔 경마 판에 등장하는 관계자들의 다양화가 일어나면서 그들 사이에 자리싸움과 분파, 합종연횡 현상이 숨 가쁘게 일어났어. 그러면서 판돈이 어마어마하게 커졌고. 사설 학원이 대표적인 관계자고, 출판사, 교재 전문가, 시험 출제위원, 광고대행사, 학원 광고를 받아서 먹고사는 신문사, 그 신문사 기자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정치인...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이 판에 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는 실정이라 판이 개선되거나 축소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볼 수 있지. 사실 우리도 그 판의 관계자라 할 수 있고. 그 판이 아니었으면 네가 지금 여기 와서 이렇게 많은 돈을 벌 것 같아? 내가 고등학생들한테 영어 가르치면서 학원에서 월급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잠실동 사람들, p.123) 이 부분을 읽는데 뭔가 목이 타고 씁쓸했다.
두 번째는 p.338부터 p.377까지의 부분인데, 십년 만에 만난 스승 김미하와 제자 이서영이 각각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똑같은 장소에서 서로 이렇게나 다른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재밌게 읽었다. 몰입도 높은 소설이었다.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