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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김현구 옮김 / 현실문화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생태위기’에 관한 새삼스러운 고발
- 서평 :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존 벨라미 포스터, 현실문화연구, 2001)
얼마 전 MBC뉴스에서는 “서울에 ‘열대 과일’ 자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간 적이 있다. 뭐 사실 이런 류의 기사가 새로운 것은 아니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긴 하지만, 유독 이 기사가 ‘황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 있다. 바로 방송 맨 마지막에 인터뷰를 한 농촌진흥청 연구정책국장이라는 사람의 발언 때문이다. 이 사람 인터뷰 직전까지 세계 평균에 비해 한반도 기온이 2배 이상 빠르게 상승하고 있고, 그래서 고랭지 채소 수확량이 급감했으며, 새롭게 나타난 해충도 골칫거리라는 암울한 내용이 전해졌다. 온난화 문제가 확산되면서 전 세계적 식량 위기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국책 연구기관에서 국장이라는 자리에 까지 와 있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다. “망고, 파파야, 키위 등 열대작물을 개발해서 수입을 대체하는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오히려 국내 농업 경쟁력을 강화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는 말도 덧붙여졌을 법 하지만, 이 양반의 말이 너무 민망하다고 생각한 담당PD가 편집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된다면 해수면이 가파르게 상승하여 지구상의 몇몇 섬은 지도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고, 생물종의 대다수가 멸종할 가능성이 높다는 웬만한 과학자들의 충고는 고리타분한 맹자왈 공자왈 쯤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프리카나 남미의 나라들처럼 식량작물을 포기하고 환금작물로 농업을 다 갈아 엎어버리면 농업 경쟁력이 상승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일까? 혹시 집에 TV가 없어서 이들 나라가 최근의 애그플레이션으로 인해 엄청난 식량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신 것인지...?? 아! 농진청 국장님의 구상대로라면 한 동안 사람만이 자원이라던 우리나라가 엄청난 농업 수출국이라도 되는 것일까? 여하간에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인터뷰 대목이었다.
이렇게 나이브한 생각을 가지신 분에게는 ‘생태위기’에 대해 포괄적이고 친절한 설명이 요구되는데,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는 바로 이런 양반을 위해 준비된 책이라 할 수 있다.
1. 생태위기의 범인을 찾아라!
사실 위의 인터뷰에서 보여진 입장을 비롯해서 최근 환경과 생태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략 다음과 같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생산적 부에 대한 자연의 기여를 ‘무상의’ 이득 또는 공짜 선물로 취급한다. 위의 인터뷰에서는 심지어 기후의 교란 조차도 수입대체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기회’(즉 ‘공짜 선물’)로 보고 있지 않은가? 둘째, 환경변화에 따르는 위기를 단순한 기술적 진보나 새로운 국제협약을 통해 탄소배출 감축량 등을 정하는 것으로 해결될 것으로 본다. 최근의 교토의정서 협약에 포함된 ‘탄소거래’가 바로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앞의 두 가지 입장의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셋째, 자본주의적 경제성장과 생태의 보존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때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들고 나온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슬로건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포스터는 이와 같이 생태위기에 대한 고전적인 입장에 통렬하게 일침을 가한다. 그의 다른 책(『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책갈피, 2007)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생태계의 안전과 자본주의는 양립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여기서 마르크스의 ‘신진대사의 균열’(metabolic rift)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즉 노동뿐만 아니라 자연도, 산업혁명이 인도하는 새로운 조건들의 결과로 점점 더 자본에 종속되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도시와 농촌을 분리(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20세기 후반의 가장 극적이고 가장 영향이 널리 미친 사회적 변화이자 우리를 과거세계로부터 영원히 단절시킨 변화는 농민층의 사멸이다.”라고 말한 바로 그것!)함으로써,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에도 공업적인 기법들을 적용함으로써 인간존재의 생태적 기초를 파괴했다고 본다. 이로 인해 생명 그 자체의 자연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상호 의존 과정에 비가역적인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그 결과 토양 생명력이 낭비되고 이 낭비는 무역에 의해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무역에 의해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부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저자는 생태위기가 일국적 경제성장 전략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체계적 메커니즘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경계를 넘어서’라는 말은 단순히 개별 국가들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한 나라의 생태위기가 다른 나라로 전이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을 초과하여,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등장과 함께 구조화된 불평등한 국가간체계의 문제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사탕수수 재배의 세계화’(이 표현은 그냥 내가 붙인 거다)의 예를 든다. 사탕수수는 주변부의 환경을 변형시킨 최초의 현금작물이다. 아메리카 발견에 성공한 개척자(??)들은 카나리아 군도의 원주민들을 노예노동을 위한 인력으로 뽑았다. 개척자들(아, 왜 이렇게 이 단어가 거슬리냐?)은 이들을 활용해 다양한 생물종이 번성하던 땅을 사탕수수 생산을 위한 단종경작의 대농장으로 변화시켰다. 이와 같은 단종경작의 결과 이 식민지들은 식량을 유럽과 북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내륙에 의존하게 되었다. 최근 제3세계 식량위기로 인해 운위되고 있는 ‘식량 제국주의’의 출발은 바로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성립되던 15-16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계 비판에 바탕을 둔 포스터의 생태위기에 대한 인식은 생태에 대한 미국 사회의 전통적인 두 진영, 즉 보호주의(conservationist)와 보존주의(preservationist) 모두와 차별점을 가진다. 전자의 경우 미국의 대기업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으로서 환경악화에 반대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이윤을 위해 자연자원의 이용을 규제, 합리화하려 했던 쪽에 속한다. 테오도르 루즈벨트와 기포드 핀쇼가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데, 이들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관리자’를 자청해 왔다. 생태계가 자본에 점점 더 종속됨에 따라 인간존재의 생태적 기초가 파괴된다고 보았던 포스터가 “우리의 번영은 우리의 주요산물의 생산과 미국 전역을 통한 그것들의 상업적인 유통에 기반해 있으며, 이는 또 그 산물들이 숲으로부터 적절한 비용으로 적당한 양만큼 영원히 공급된다는 점에 불가분하게 의존해 있다.”고 말하는 과학적 관리의 입장과 교차점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포스터가 산업혁명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기술적 진보를 거부하고 ‘생태적 양심’이나 ‘땅의 윤리’와 같은 도덕주의적 방식으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불평등하게 조직해 내고, 생태적 교란을 심화시키는 ‘사회적 구조’였다. 그런 이유에서 포스터가 아무리 프란시스 베이컨과 같은 근대 계몽주의자의 이성에 대한 낙관주의를 비판한다고 해도, 이성에 대한 거부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환경영향에 관한 코모너의 연구를 차용하여 다음과 같은 공식을 제시한다.
I = P×A×T
I : 환경영향, P : 인구, A : 부(富)와 관련된 물질산출량,
T : 물질산출량을 생산하는데 사용되는 에너지 단위당 환경영향(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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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논의에서 환경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인구증가에 기인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A)와 기술(T)이 거의 언제나 일정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종종 무시된다. 이러한 맬더스적 관점에서는 인구성장이 교체 수준(‘높은 사망률-높은 출생률’의 단계에서 ‘낮은 사망률-낮은 출생률’의 단계로의 인구학적 이행)에 접근하는 부자 나라들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에 환경문제의 주된 책임이 돌려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3세계 나라들이 인구학적 이행의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여 교체수준의 번식력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국제적 불평등 구조의 결과일 뿐이다. 즉 “식민주의는 세계의 부의 분배뿐만 아니라 인구의 분배도 결정하여, 대부분의 부를 북반부에, 그리고 대부분의 인구를 남반부에 집적”시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작가 저메인 그리어의 말을 인용하여 쓴 다음 부분은 음미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기근의 기억이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어린이 수를 줄임으로써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하나 더 있다고 해서 동냥질에 방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경제체제가 다수의 궁핍화를 야기한다면 그런 일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며, 실제로 이로 인해 극빈자의 확산이 더욱 심화되었다.”
2. 자본주의 농업․생태체계를 인식하기
이 책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20세기 후반기의 생태위기에 대해 다룬 6장 「상처받기 쉬운 지구」이다. 이 부분에서의 설명이 비록 여러 사례의 나열 형태이기는 하나, 그 분석의 방법은 최근 광우병 사태, 멜라민 파동 등으로 붉어진 자본주의 농업․생태체계의 문제와 먹거리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해 나가는데 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의 설명을 더욱 보충․심화하는 것으로는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제이슨 무어 외, 공감, 2005)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포스터의 몇몇 글도 번역되어 소개하고 있다.)
먼저 주목해 볼 것은 영농과 농업 사이의 괴리 증가에 관한 것이다. 르원틴과 베를랑은 이 둘의 차이를 전자는 밀을 생산하는 것이고 후자는 비료를 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정의한다. ‘밀’이라는 생산물이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영농 그 자체는 이제 농업생산물의 평균 부가가치 중에서 겨우 10%만을 차지할 뿐이다. 나머지 90% 중에서 40%는 농업 투입물(종자, 비료, 살충제, 기계 같은)에 의한 것이고, 50%는 생산물이 농장을 떠난 이후 주로 마케팅과 유통비용의 형태로 부가된다. 그 결과, 비록 영농 자체는 “많은 수의 소생산자들에 분산되어 있지만” 농업 투입물의 판매와 농업 생산물의 마케팅과 유통을 독점하는 소수의 대기업들이 영농에서의 생산 조건을 통제하고 농업 이윤의 대부분을 거둬들인다.
농업과 영농의 괴리 증가는 사실 미국자본주의 하의 ‘녹색혁명’의 기본적 펀더멘털이라 할 수 있다. 자유무역체계에 종속된 농업 시스템은 자국내의 자족적 식량생산을 파괴하고 이를 단종경작 중심의 환금작물 재배로 대체한다. 이 때 종자의 생산, 보급, 생산과정, 유통과정 전반이 초국적 농식품기업의 통제하에 놓여지게 된다. 여기서 농민은 전통적인 부농/빈농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pt화 되는데, 이들은 농업 생산물 생산 과정에서 가장 위험하고 자연재해에 쉽게 노출되는 ‘영농’을 담당하게 된다. 예컨대, 식품산업자본이 종자, 비료, 기계 등을 농민에게 제공하고 매뉴얼화된 농작법에 따라 생산을 강제한 뒤, 2차가공의 원료로서 농산물을 다시 사가는 것인데, 이 때 품질검사 탈락이나 풍수해, 병충해 등으로 인한 손실은 모두 농민책임이 된다.
이로 인해 농민은 자본주의 농업 시스템에 실질적으로 포섭된다. pt화된 농민과 함께 자연도 실질적 포섭에 묶이게 되는데, 그 결과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신진대사의 균열’이 심화되는 것이다. 개별 농민의 독립적 통제하에서 작동하던 ‘토지-가축-농산물’의 영양물질의 순환은 초국적 농산품기업의 통제하의 ‘화학적/인공적 투입물(교배종 종자 또는 유전자 조작 종자, 화학비료 등)→농산물’의 선형적 흐름으로 대체된다. 자연 생태계를 ‘무상의 선물’로 인식한 초국적 자본이 오로지 자본축적을 위해서만 생태계를 변형/조작함으로 인하여 지속 가능한 농업․생태체계는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pt화된 농민, 자연의 자본으로의 실질적 포섭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종자생산의 상품화’라 할 수 있다. 농업의 전 과정을 단일한 법인자본 하에 수직적으로 통합한 몬산토, 듀퐁, 카길과 같은 초국적 농산품기업들은 유전공학의 힘을 빌어 종자생산을 통제한다.(ex: GMO) 생산량 증대를 목적으로 유전자 조작된 종자들은 보통 해충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고, 자연재해의 피해를 덜 입는 특성을 지니지만, 이런 종자를 사용한 농부들은 매년 새 종자를 구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유전자 조작된 종자들은 진품을 낳지 못하며, 이들 자손들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산출량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변종 종자들은 초국적 기업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기술 패키지가 수반되었을 경우에만 좋은 산출량이 나온다. 그 뿐인가? 변종 종자들은 이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관개용수를 요구하며, 이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건강을 해친다. (몬산토사가 만든 유전자 조작 Bt면화를 생산하는 인도 농민들은 피오줌을 싸는 질병에 걸리고, 이를 먹고 자란 염소들은 대량 폐사했다.)
3. 새삼스러운 위기, 뒤늦은 인식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껏 운동을 하면서, 생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올 해가 처음이다. 심하게 말해서 그 전까지는 ‘생태위기’ 떠들고 다니는 얘들을 좀 우습게 봤다. 변명이긴 하지만 그 때의 ‘무시’가 그렇게 근거없는 짓은 아니었다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생태’ 운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뭔가 도덕주의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치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 문제를 거창하고 거시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손 치더라도, 지금 환경단체의 대부분은 개인적인 양심에 호소하거나, 정부에 청원하는 형태의 운동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들의 인식속에 자본주의라는 생태계 파괴의 가장 큰 범죄자에 대한 인식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듯 하였다.
그런 와중에 광우병 파동, 전세계적 식량 위기 이후에 명박이는 새삼스럽게도 ‘녹색 성장’을 들고 나왔다. 일단 나는 이 구호가 명박이 개인의 정치적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차원에서 제기되었다고 본다. 사실 서울시장 재직 시절, 청계천 복원공사를 통해 나름 환경 친화적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놨는데, 대운하 때문에 엄청 이미지 구기지 않았던가? 이걸 만회하려면 자기 이미지에 나름 쐐기를 박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녹색성장'이란 구호는 어딘가 광고 카피스러운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
하지만 이건 좀 부차적인 이유다. 더 중요한 것은 전 세계적 정세가 '녹색'을 강제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멍청한 부시만이 부인하고 있지만) 2-30년 안에 오일 피크가 도래한다는 것은 지질학자가 아니더라도 상식 수준에 속하는 것이어서, 당장의 에너지 위기 해결이 전 세계적 과제가 되었다. 게다가 한국도 1997년 체결된 쿄토의정서에서 합의한 나라로서 이산화탄소 감축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현재 에너지 체계에 대한 제고는 아무리 명박이 똥배짱이라 하더라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였다. 정부가 이 '녹색성장'을 중심으로 경제위기를 탈출하고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겠다고 나섰다. '녹색'이라는 담론이 이명박 정부에겐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하나의 비상구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사실 내가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어찌보면 명박이 때문이다. 명박이 덕분에 새삼스럽게 위기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열라 고맙다!!)
그런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정부가 '석유 이후 시대'를 준비한다면서 제시한 제1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에는 새로운 원전 개발, 수소에너지, 원자력 에너지 비중 확대와 같이 화석에너지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거나 화석에너지 만큼이나 환경파괴의 문제점이 거론되어왔던 것들이다. (현 정부의 이러한 에너지계획에 대한 반론으로 적절한 책으로는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강양구 저, 프레시안북, 2007을 들 수 있다.) 바로 어제까지 러시아를 방문하고 온 명박이가 러시아 대통령하고 합의했다는게 러시아에서 직통으로 남한까지 가스 송유관을 연결한다는 것이란다. 이게 대안에너지 체제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건설자본 중심의 회색빛 경제성장 정책이 국민들에게 약발이 안먹히는 것 같으니까 겉 표면만 녹색으로 덕지덕지 칠한 '삽질 경제정책'의 2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서평을 마무리 지을 타이밍이 왔다. 이 글이 최근 생태위기를 둘러싼 정세를 분석할 목적으로 쓴 글은 아니니까... 그 방향이야 어찌됐든 간에 정권차원에서도 '녹색'과 '생태' 담론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무엇을 위해서 이런 담론을 활용하려 하는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이명박이가 전통적인 자본주의적 성장 전략을 포기하고 생태주의로 돌아섰다고 단단히 착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포스터가 다른 글에서 언급하는 아래 글을 음미해 보자.
(오코너의) "두 번째 모순" 개념의 전반적 취지는 일단 생태적 손상이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로 전환되면 일종의 피드백 매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직접적으로는 자본이 생산조건의 손상과 결합된 생산비용의 증가를 억제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간접적으로는 사회운동이 체계로 하여금 외부효과를 내부화하도록, 바꾸어 말하면 자본이 외부화해온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체계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산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전체로서 자본주의에는 그러한 피드백 매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녹색당이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계는 마지막 한 그루의 나무가 벌목되었을 때야 비로소 화폐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인간사회와 대다수 생물종을 위해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주 혼란스러운 생태 파괴의 와중에도 축적할 수 있고 (예컨대 폐기물 관리산업의 성장을 통해) 환경 훼손으로부터도 이윤을 얻을 수 있으며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지구를 계속 파괴할 수 있음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달리말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생태 문제의 위험은 자본주의 체계가 그것을 재촉하도록 인식하게 만드는 어떤 내부적 (또는 외부적) 조절 매커니즘도 그 체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심각하다. 생태에는 경기순환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 존 벨라미 포스터,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中
자연생태계를 무상의 선물로 여기는 자본에게 생태계의 교란이 이윤 압박을 가져와 자본 스스로 생태계 치유비용을 내부화하기 위한 자정 노력이 발생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은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안정적인 생태계가 자본에게 무상의 선물이라면, 자연 자원의 희소성 또한 자본에게 무상의 선물이 된다. 자연 생태계를 사유화한 자본이 '희소성 판매'에 나선다면 '생태계 파괴'라는 자연적 상황 또한 자본 축적을 위한 안정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에서 어렴풋 하게나마 이런 더러운 속셈을 훔쳐보고 있다. 전 세계적 담수부족 현상을 물 사유화의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하고, 지구 온난화는 열대 과일의 수입 대체 상품화의 기회로 인식하는가 하면, 대체 에너지 개발은 탄소거래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논의의 중심에 '지속가능한 생태'에 대한 문제의식이 빠져있다.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는 생태위기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며, 어디서부터 물고 늘어질 것인지, 매우 새삼스러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왜 우리가 녹색'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녹색', '생태'를 지향해야 하는지 고민이 드는 사람이라면 포스터의 이 책으로부터 시작할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