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너무 바빠 독서 진도가 안나간다..
내 시간이 더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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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과 수용소에대한 고프먼의 연구는 사회가 그 내부에 일체의 존중의 의례가 사라지는 예외 지대를 마련해두고 있으며,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에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어서 배제와 조건부 통합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신분주의와 싸워야한다 - 유교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낡은 신분주의만이 아니라, 배금주의의 토양 위에서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새로운 신분주의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노동자=못 배운 사람‘이라는 등식이 지배하였고, 이는 조선 시대에 양반이 상민에게 그랬듯이 노동자를 하대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관리자가 노동자에게 나이에 관계없이반말을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고등교육이 일반화된 오늘날, 이런 종류의 신분 차별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이 사람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사실 1퍼센트를 위한 사회에서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는 대접받기 힘들다. 사람 위에도 ‘매우중요한 사람(VIP)‘ ‘매우 매우 중요한 사람(VVIP)‘ 등이 있기 때문이다.
‘매우 중요한 사람‘ 앞에서 그냥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노바디‘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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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과 자유의 대립은 현대인이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규범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옷을 입은 인간과 벌거벗은 인간의 대립은 현대인이 옷을 입은 자기, 즉 남들에게 보여지는공적인 자기를 진짜 자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욕을 더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면 그것을 존엄과 연관시키면서도,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상호작용 의례에 대한 고프먼의 논의는 이러접근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매킨타이어는 고프먼이 모욕을 공적 갈등의 영역에서 사적 감정의 영역으로 추방하였다고 비판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의 의례적 성격을 강조하고프먼의 시각은 오히려 모욕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 장에서 나는 고프먼의 통찰에 기대어, 모욕이 언어라면 이어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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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스티그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외국인이 그 자체로 낙인찍힌 범주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외국인들에게특별한 호의를 베풀면서, 그들이 우리 문화의 장점들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이상적인 외국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한에서이다. 돈 많고, 교양 있고, "원더풀"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그들이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게 판명된다면, 가령 그들이 돈도 없고, 교양도 없는 데다 남의 나라에 와서도자기네 방식을 고집한다면, 게다가 금방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아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의‘ 여자들을 건드린다면, 그들에게 주어졌던 환대는 철회될 것이다. 스티그마가 있는 개인이 그에게 추천되는 특정한 행동 노선 line of action에서 벗어났을때처럼 말이다. 즉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환대 혹은 사회적 성원권은 조건적이다. 환대와 사회적 성원권을 구별하는 사람은 결국 조건적 환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에 대한 환대의 철회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의해 정당화된다. ‘우리나라에서 받는 대접이 못마땅하다면 자기네 나라로 가면 된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등한 사람으로서 사회 안에 현상하려는 순간이 허락은 철회된다. 여성이 보이기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한편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오염의 메타포는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함의한다. ‘더럽다‘는 말은 죽일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타자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이런 말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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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Orlando Patterson, 같은 책, p. 9.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기혼 여성은 친족이 없는kinless 존재라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조선 시대에 기혼 여성에게 적용되었던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은 여자들이 혼인과 동시에 부계 친족집단에서 영구히 성원권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출가한 여자는 부모의 제사에 참여할 수 없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없다. 그리고 친정일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출가외인이라는 표현은 여자가 친정 일에개입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시집에서 쫓겨나도친정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친정에 대해서 ‘외인, 즉 아웃사이더가되었다고 해서, 그녀가 남편의 친족 집단에서 그에 상응하는 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시집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지도 않고, 제사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두 집단 중 어느 쪽에서도 성원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시집살이가 종살이와 비슷하게 체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절대적 소유권, 즉 배타적인 지배란 주인이 노예에게 어떤 짓을 해도 제삼자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것, 혹은 사회적으로 그 행위가 승인된다는 것, 다시 말해 노예의 완전한 고립과 무력함powerlessness 을 함축한다. 패터슨이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소유권이란 사람과 물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사람과 물건이 ‘관계‘를 맺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정확히 말해서 소유권은 일종의 권력관계이며, 노예가 물건이라는 법적 허구는 이 관계 안에서 노예가 처하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위치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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