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스티그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외국인이 그 자체로 낙인찍힌 범주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외국인들에게특별한 호의를 베풀면서, 그들이 우리 문화의 장점들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이상적인 외국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한에서이다. 돈 많고, 교양 있고, "원더풀"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그들이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게 판명된다면, 가령 그들이 돈도 없고, 교양도 없는 데다 남의 나라에 와서도자기네 방식을 고집한다면, 게다가 금방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아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의‘ 여자들을 건드린다면, 그들에게 주어졌던 환대는 철회될 것이다. 스티그마가 있는 개인이 그에게 추천되는 특정한 행동 노선 line of action에서 벗어났을때처럼 말이다. 즉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환대 혹은 사회적 성원권은 조건적이다. 환대와 사회적 성원권을 구별하는 사람은 결국 조건적 환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에 대한 환대의 철회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의해 정당화된다. ‘우리나라에서 받는 대접이 못마땅하다면 자기네 나라로 가면 된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등한 사람으로서 사회 안에 현상하려는 순간이 허락은 철회된다. 여성이 보이기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한편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오염의 메타포는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함의한다. ‘더럽다‘는 말은 죽일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타자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이런 말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