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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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내게 책이나 TV에만 존재하는 시대였다. 그 시절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서 2020년까지 50년을 지나왔지만, 현재 성 평등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가 아주 잘 운영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문화가 아주 성숙했다고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 그려진 70년대 말 명문여대 기숙사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여성에게 보다 억압적이고, 남성에게 항상 양보하며 정치적 분위기 역시 살벌했다. 주인공인 신입생 김유경은 학내 제도에 반대하는 시위에 선배의 요청 때문에 얼굴을 잠깐 비추었다는 이유로 기숙사 사감에게 불려가 장시간의 훈계를 받는다.
이 기숙사에는 입소한 학생 별로 품행을 관리하는 파일이 따로 있다. 최대의 피해자라면 김유경의 룸메이트인 4학년 최성옥이었을 것이다.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는 우등생이지만, 시위를 조직하고 학생들을 모아 스터디를 진행한다는 이유로 사감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고 최성옥을 올가미에 가두기 위해 사감은 기숙사생의 고자질을 포함해 이 파일에 정보를 모은다.
최성옥의 가장 친한 친구인 송선미는 최성옥이 기숙사 사감의 표적이 된 일로 인해, 최성옥보다 더한 불행의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친한 친구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데에 대한 분노와 그와 떨어져야 하는 외로움 때문에 지병이 더 심해지고 그 최후는 비참해진다.
김유경의 기숙사 친구 김희진은 중년에 작가가 되어, 지금은 볼 수 없어진 기숙사 친구들의 소식을 모은다. 그 와중에 최성옥과 송선미의 여대 이후의 인생이 김희진에 의해 밝혀지고 이런 송선미의 말년 상황이 김유경에게 전해진다.
말을 조금 더듬는 증상 때문에 컴플렉스를 갖게 되고 자기 안으로 숨어드는 김유경과 항상 주위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자신을 추켜 세우는 김희진의 대비가 눈에 띈다. 김유경은 학보사 기자로 일하게 되나,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인터뷰를 하는 등의 일이 잘 맞지 않아 이 일을 결국은 그만두게 된다. 결혼하고 국어 강사로 일하기도 하나, 매번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벼랑 위에 서는 것 같다. 결국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번역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김희진은 기숙사 친구에서, 회사 직장 상사로, 다시 김유경이 되지 못했던 작가가 되어, 김유경을 은근히 비교하고 자신이 위에 올라선다.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던 김유경의 기억과 김희진의 기억은 엇갈리기도 한다. 김유경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에피소드를, 김희진은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소설에 적는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김유경에게 어떻게 스무 살의 최초의 추억을 잊을 수 있느냐고 한다. 그 외의 다른 에피소드들도 조금씩 초점이 다르다. 그들의 기억의 편린은 조금씩 엇나간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인생을 따라가며 읽는 재미도 있으며 1970년대의 사회가, 더욱이 여성의 눈으로 본 사회가, 고스란히 이 책에서 내게로 들어왔다. 무려 5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과거의 한 단편이기에, 읽어봄 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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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잔으로 충분한 꽃 수채화
Quarto 편집부 지음, 김광우 옮김 / 미술문화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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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만, 수채화는 좀 어려웠다. 어렸을 때는 미술학원에서 수채화를 종종 연습하곤 했고 유화도 해 봤지만, 성인이 되어서 다시 수채화를 한다는 게 만만치 않았다. 물감과 붓, 물통, 팔레트도 준비해야 하니 한 번 시작할 때마다 판을 벌려야 했다. 그게 귀찮아서 자주 안 잡게 되는 데다가 물이 소재이니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대안으로 요새 많이 나오는 수채 컬러링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밑그림이 그려져 있고 대부분은 컬러링 가이드가 있으니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역시나 물감, 붓 등을 준비해야 해서 한 번 하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하지만 좀 더 쉽게 펼칠 수 있었다.
<
물 한 잔으로 충분한 꽃 수채화>는 준비물마저 책에 들어 있어 시작하는 데 별다른 힘이 들지 않는다.



종이물감과 붓이 책에 들어 있다. 더 필요한 것은 물 한 잔 뿐. 팔레트도 있으면 좋지만 없다면 종이물감의 빈 부분에 색을 섞으면 된다. 종이물감은 그냥 보기에는 마치 인쇄물 같지만, 물을 적시면 물감이 묻어 나온다. 양은 적지만 쓸 만 하다. 10가지 색이 2 세트로 준비되어 있고 흐리게 발색되기는 하지만 매력적인 색들이다.



이 간편함에 반해 얼른 그림 하나를 그려 보았다. 윤곽선이 흐리게 프린트되어 있지만 진하게 그으면 좋을 것 같아 라이너로 진하게 덧그린 후 채색을 했다. 적은 양의 물감으로 채색하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자주 종이 물감에서 물감을 가져와야 해서 특히 색을 섞으면 자주 다시 색을 만들어주어야 했다. 또한 채색하는 부분의 종이가 수채지가 아닌 듯 했다. 살짝 도톰한 종이이기는 하지만 채색하면 꽤 울어 버리고, 물 표현이 쉽지 않았다. 종이가 울지 않게 하려면 절취선 대로 잘라내어 화판에 마스킹 테이프로 붙이고 채색해야 할 듯 하다.



욕심 내서 멋진 수채 컬러링을 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간편하게 어디서나 물 한 잔 종이컵에 떠다 놓고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아주 훌륭한 취미 용품이다. 특히나 준비할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물감이나 붓, 팔레트가 없는 초보자들이 처음에 수채 컬러링을 시작할 때 쉽게 즐길 수 있다. 좋은 수채 컬러링 책이 이미 있음에도 자주 펼치지 못하는 나에게도 수채 컬러링을 좀 더 자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접근성이 좋은 책이다. 물 표현에 서툰 나도 이 책으로 좀 더 자주 연습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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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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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권남희의 에세이를 읽으며 그 안에 있는 일본 문학 이야기에 매료되어 일본 문학이 읽고 싶어졌다. 집에 사서 쌓아두었던 해묵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꺼냈다. 한 때 무라카미 하루키를 모조리 읽을 거라며 초기작부터 장편소설, 단편집, 산문집까지 모으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새 시들해졌지만, 권남희 작가의 에세이를 계기로 그 책들의 먼지를 털고, 도서관에서 아직 읽지 못한 하루키의 작품을 찾아 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은 대부분 기묘한 구석이 있다.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다 무슨 의미인지 잘 파악되지 않는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책장이 팔랑팔랑 잘도 넘어간다.
이 단편집에서도 역시 기묘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난하여 먹을 것도 구할 수 없었던 젊은 시절, 빵 가게를 털며 들었던 클래식 음악 때문에 저주에 걸린 남자. 커다란 코끼리의 미스터리 같은 소멸. 알 수 없는 여자에게 서로 이해하자며 걸려 오는 전화.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소설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고, 이야기가 가진 매력에 흠뻑 빠진다. 단편이 하나 끝날 때마다 다음 단편을 더 읽고 싶어진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다른 빵 가게를 음악을 듣지 않고 다시 한 번 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부인. 뒷산에서 커다란 코끼리의 소멸을 조그만 축사의 구멍을 통해 지켜보았으나 말할 수 없는 나. 알 수 없는 여자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나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셔츠를 다리는 나.
짧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아주 얇은 책이지만, 상당히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다. 번역가 권남희가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읽어보았는데, 정말 신비한 매력이 있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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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ilda (Paperback, 미국판) - 뮤지컬 <마틸다> 원서 Roald Dahl 대표작시리즈 4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 Puffin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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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동화나 청소년 도서를 읽지는 않지만, 원서로는 즐겨 읽는다. 쉬운 표현들로 되어 있어서 원서로도 크게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종종 어른들이 읽기에도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책들이 있다. Matilda 역시 영어 공부를 위해 읽었지만, 원서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정말 즐거운 독서를 하게 해 주었다.

Matilda라는 작고 어린 여자 아이가 주인공이다. 이 소녀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만, 사실은 천재 소녀이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아이에게 관심이 없고 여자 아이라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Matilda의 재능을 전혀 모르고, 안다 해도 믿지 않거나 별 관심이 없다.
Matilda
는 도서관에서 사서의 도움을 받아 책을 빌려 본다. 처음에는 아동용 도서를 하나 하나 읽다가 도서관의 모든 아동용 도서를 다 읽어버리자 성인용 고전들을 읽어 치운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의 작은 아이가 이 소녀의 부모님조차 읽지 않은 고전을 섭렵한다.
수학적 재능도 천부적이어서 복잡한 곱하기와 더하기를 한 번에 머릿속에서 해 낸다. Matilda의 계산 능력을 본 그의 아버지는 Matilda가 답을 보고 읽었다고 주장하며 이 천재소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간다. 게다가 여자 아이가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그저 외모를 가꾸면 되는 것이지, 능력을 키우면 고생만 한다고 생각하여 Matilda의 재능에 관심이 없다. 아니, 애초에 Matilda라는 아이에게 관심이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Matilda
는 부모가 부당하게 대할 때마다 한 가지씩 복수를 한다. 아버지의 헤어 제품에 어머니의 염색 약을 섞어 놓고, 앵무새를 구해서 굴뚝에 넣어 놓아 가족들이 겁 먹게 한다.
Matilda
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이제 학교 교장선생님인 Miss. Truchbull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담임 선생님인 Miss. Honey Matilda의 재능을 알아보고 최상급 반으로 진급시키려 하자 Truchbull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Matailda를 작은 악마로 몰아간다.
Matilda
Miss. Honey의 오두막에 들러 선생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되어 이 난관을 헤쳐 나간다.
Matilda
의 모험과 우정, 천재 소녀가 갖게 된 특별한 능력 등이 어우러진 정말 멋진 이야기다. 통쾌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며 인상적인 결말로 끝난다. 이 작은 소녀가 사랑스럽고 Miss. Honey와의 우정이 돋보인다. 청소년 용 도서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탄탄한 스토리에 극적인 결말이다. 샬롯의 거미줄이라는 동화 역시 원서로 아주 즐겁게 읽었는데, 그 이후로 다시 만난 최고의 동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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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아무튼 시리즈 26
이지수 지음 / 제철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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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하루키의 작품을 한 번 전부 읽어보고자 한 적이 있다. 데뷔작부터 시작해 초기작을 찾아 읽고, 단편집과 장편 소설을 하나씩 찾아 읽었다. 산문집도 빼 놓을 수 없었다. 얼마 간 하루키 정복하기를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 이후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이 나오면 득달같이 사서 읽곤 했다. 지금까지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즐겨 읽는 작가이다.

일본문학 번역가인 이 책의 작가는 청소년 시절에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빠졌다. 그는 하루키의 문장을 원서로 읽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일어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일문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졸업 후 물류 회사에 취업하여 영혼을 좀먹으며 일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라 죽어가던 자아의 생존 본능이 발휘된 것인지, 맥도날드에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공책을 들고 갔다. 그곳에서 학창시절 외울 정도로 좋아했던 그 소설을 공책에 한 줄 한 줄 번역하기 시작했다.

2
층 창가에 자리를 잡은 뒤 원문을 한 줄 쓰고 그 아래로 내가 번역한 문장을 붙여 쓰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마음이 별안간 지잉, 하고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듯이.” 지잉.
(p. 70)


그 길로 그는 번역을 하기로 마음먹고 번역 학원과 출판사 두 군데를 거쳐 마침내 전업 번역가가 되었다.
마침 최근에 읽은 가쿠타 미쓰요의 <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가 바로 이 작가가 번역한 책이었다. 가쿠타 미쓰요가 유머러스한 문체로 썼기도 했겠지만, 유려한 번역으로 아주 즐겁게 읽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의 하루키 사랑은 육아에 지친 날들에 잠깐의 자유 시간이 생기면 곧장 하루키의 작품을 펼치게 하기도 했고, 생일 파티 모임에서 하루키의 작품을 가지고 토론을 하게 하기도 했다. 번역가로서의 일상과 하루키의 작품을 넘나들며 쓴 이 에세이를 읽고 나자, 다시 하루키의 작품들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양을 쫓는 모험>부터 시작하자. 아무튼, 나도, 하루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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