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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ㅣ 아무튼 시리즈 28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부터 나는 노트에 큰 의미 없는 낙서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저
그런 방금 벌어진 일,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 상황, 내가
오롯이 느낀 것들을 두서 없이 노트에 쏟아놓고 나면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때로는 그 노트에 계획도
세우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정리도 해 놓았다.
나는 이 메모하는 버릇을 동생에게 배웠다. 동생은 한 때 길을 걷다가도 메모를 해야 하고, 항상 손에 닿는 곳에 메모지와 펜이 있어야 하는 메모주의자였다. 뭔가
좋아보여서 따라해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뭘 적어야
할 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기분이 뒤숭숭해지게 한 일을 노트에 적어 놓고 나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을 느낀 후 나도 메모주의자가 되었다.
여기 메모주의자인 다큐멘터리 PD가 있다. 그의
이야기는 메모에 대한 찬양일 뿐 아니라, 그가 수 없는 메모를 거쳐 제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소로우의 일기: 나의 일기장이 사랑의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세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적고 싶다.
(p. 37)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p.36)
그는 문장 수집가였다. 특히 정신적 위기의 순간에 책을 더 열심히
읽고, 그 안에서 보석같은 문장들을 수집했다. 그 문장들은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힘든 날들에는 소확행이 더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고, 그에게 그 소확행이란 마음을 울린 문장들이었던 것이다.
그의 메모를 훔쳐보며 나도 이런 메모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메모도
좋고, 할 일을 계획하고 기억해둘 것을 메모해두는 것도 좋지만, 그의
메모는 그저 찬찬히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과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마음 깊이 좋아하는 문장들을
모아두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도 이렇게 내 메모에 탐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특징: 인간은 걱정, 희망, 욕망, 이 셋 중 하나에는 꼭 사로잡힌다.
인간은 자신감과 두려움, 이 둘 사이를 왕복운동한다.
신이 아가에게 삶을 주면서 말했다. “아가야, 선물이란다. 가지고 놀아라!” 그리고 인간은 삶을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쪽과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나뉜다.
(p. 62)
그의 이런 메모들은 삶을 위한 준비로서 차곡차곡 모아졌다가, 어느
날 부화한다. 땀을 흘리면서 집요할 정도로 메모한 태평양 전쟁에 대한 사실은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이용당하고, 전쟁이 끝나자 책임을 뒤집어쓰고 버림받은
조선인 전범들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것이 만연한 사회에서 왜 사람을 아무렇게나 대하느냐는 질문은 너무 본질적이라서 급진적이다.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왜 차별하느냐고 묻는 것은 너무나 근본적이라서 급진적이다. 죽은 조선인 전범들이 무엇을
위해 죽는지 물었다면 살아남은 전범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끝없이 물었다.
(p. 157)
가슴 아픈 조선인 전범들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지어지는 이 책은 내가 메모를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내일을 위한 메모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나를 위한 메모가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낙서장을
펼쳐 나를 두근거리게 할 메모를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