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무라카미 요코 사진,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이 부대끼고, 지치고 힘든 날에는 유독 내 소확행을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지어진다. 내 소확행이라면 만년필과 그림, 책이다. 종이 위를 부드럽게 내달리는 만년필을 잡고 아무 글이나 끄적이다 보면 스트레스가 금방 풀리고, 자세히 관찰하면서 이리 저리 쓱쓱 선을 그어 그림을 그리고 나면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펴서 잠시만 읽다 보면 그 전에 아무리 어수선했어도 평화로워질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은 고양이, 마라톤, 그리고 여행이다. 마라톤이 왜 소확행일까. 너무 힘든 것 아닌가 싶지만, 그가 사랑하는 순간은 머나먼 타지인 보스턴 마라톤에서 들을 수 있는 일본인의 응원, 풀코스를 뛰고 난 후 먹는 풍성하고 따뜻한 저녁 식사, 마라톤으로 생긴 물집을 터트리며 욕조에 몸을 담그고 다음 마라톤에서의 파이팅을 생각하는 순간들이다.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p. 136)


힘들고 절망적인 날들에는 소확행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하루 종일 시달린 날에는 밤에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차가운 음료수만 마셔도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
하루키는 가난하던 학생 시절 피터라는 고양이를 키웠다. 그러나 하도 돈이 없어서 하루키 자신이나 고양이가 먹을 음식도 구할 수 없었다. 한 달에 일주일쯤은 무일푼으로 지내면서 돈을 빌려서 생활할 정도였다니. 거기다 방학 때에는 고양이와 함께 지낼 수 없어서 피터는 하루키의 방학 때 마다 약탈과 야생 동물의 포획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하루키가 방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억세고 와일드해지는 고양이였지만, 하루키는 그 고양이를 아주 사랑한 것 같다.
하루키는 여행지에서 책을 구해 읽는 것도 좋아한다. 버몬트에는 헌책방이 많고 그 지방에 휴가를 오는 사람들이 헌책방에서 책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한다니 독서 애호가에게는 천국 같은 곳일 것 같다. 휴가지에 한 권의 책을 가져가 다 읽고 그 책을 팔아 또 다른 헌책을 사서 읽는 멋진 시간이라니.
하루키는 버몬트에서 읽을 책으로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라는 아주 고리타분한 책을 선택했다. 그 기회가 아니면 읽지 못할까봐. 여관의 소파에서 읽는 토마스 만에는 불현듯 찡하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니. 여행지에 가면 TV소리에 시달리는 나로서는 이런 여행이 로망이다. 때로는 여름 휴가 때 호텔방을 잡고 거기서 책만 읽으며 지내보는 걸 해보고 싶다.
요새 유행하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정말 마음에 든다. 행복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 무더운 날의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우연히 눈에 들어온 마음을 울리는 책, 이런 순간을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해 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백만장자라도 스스로 찾지 않은면 찾을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다. 오늘 밤에도 나는 샤워를 마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타서 책을 펼치고 만년필로 메모를 하며 책을 읽는 시간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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