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회사 빼고 다 재미있습니다만
롸이팅 브로 지음 / 이담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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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서, 내게는 상당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우선,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가 일하던 직종이 노동 강도가 세고 야근이 많기도 했지만, 마음이 급하고 바빠 쉴 틈이 없어서, 평일에는 회사 일 외에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통근에도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건 기본인 적이 많았다. 게다가 주말에 출근이라도 하면 내 자유 시간이라는 건 아예 없다시피 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에는 회사 일이 아무래도 최우선이 되다 보니,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좀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점심도 저녁도 굶으며 일하고 나서, 새벽 두 시에 택시를 타고 퇴근하면서 김밥 하나를 먹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지옥 같다.
이 책의 저자 롸이팅 브로는 이직을 하려다, 다음 회사에 가기까지의 쉬는 기간에 가족과 함께 하는 삶에 가치를 느끼고는 이직을 포기하고 일탈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와 과정을 이 책에 실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일탈이란 일을 탈출한다.’ 라는 뜻이다. 방 탈출도 아니고 일을 탈출한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나는 사회생활의 의미를 회사의 일에서 찾던 과거의 행태를 버리고 회사 밖에서 새로운 일을 찾음으로써 내 삶에 숨을 불어넣었다.
(p. 8)


사실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서 산다기 보다는, 회사에서 일해서 가족과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친구들과 어울려 바다도 가고, 보고 싶은 전시회도 가고, 그러기 위해서 일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는 즐겁고 행복하게 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회사에 다니면서, 회사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 일쑤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직을 포기한 롸이팅 브로의 결정이 이해가 갔다.


결국엔 나를 실행에 옮기게 만든 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 하나다. 물론 지금이 아니라 잠시 미뤄뒀다가 나중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일의 가치와 기약 없는 먼 훗날 하고 싶은 일의 가치의 크기는 다르다. 내가 간절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최고조에 있을 때 성취감이 가장 크다.
(p. 97)


그가 시도해 본 프로젝트는 에어비앤비라는 공유 숙박, 취업 강의, 부동산 재테크, 책 쓰기, 심판 활동하기 등 아주 다양한다. 그러나 그 일탈 프로젝트들의 공통점이라면, 롸이팅 브로가 행복해보였다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데 여행을 하지는 못하니, 여행객들을 집에서 재워주며 세계인을 만나고, 숙박비도 받는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롸이팅 브로는 비경기인들도 심판으로 많이 활동한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스포츠 심판도 한다. 책을 내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지만, 출판사에서 거절한다고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POD 출판이라는, 구매자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인쇄해서 출판하는 방식으로 출판했다. 부크크(BOOKK)라는 플랫폼인데, 호기심이 들어서 접속해봤더니, 많은 책이 올라와 있었다. 책 구매도 할 수 있고, 책 만들기에 필요한 디자인 등의 서비스도 하고 있었다. 독립출판과는 다르게 저자의 금전적인 부담이 없다. 책을 등록해두고 팔리면 인세를 받는다. 언젠가는 나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일탈 프로젝트다.
이런 일탈 외에도 아이들과 함꼐한 프로젝트에도 눈길이 갔다. 회사에 올인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면서, 아이들과 산에도 가고 100인의 아빠단 활동을 하며 새로운 놀이도 하고, 아이와 텃밭도 가꾸어서 아이가 채소도 먹게 하고. 회사 일에 대한 집착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이렇게 좋은 아빠도 될 수 있고, 큰 행복도 느낄 수 있다.
나에게도 여러 꿈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 내 시간을 꽤나 낼 수 있는 요즈음, 좋아서 하던 일로 수익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조금씩 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에 올인하던 떄보다 건강해진 것을 느낀다. 좀 더 행복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의 도전을 보며, 나의 일탈 프로젝트도 조금씩 모양새가 잡히려고 하고 있으니, 내 일탈 프로젝트에도 행복이 따라오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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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걸 클래식 컬렉션 1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고정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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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분명 빨강 머리 앤을 TV에서 본 것 같은데, 어른이 되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빨강 머리 앤 캐릭터만을 알 뿐이었다. 빨강 머리 앤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다가, 단순히 윌북 걸 클래식 컬렉션의 컨셉이 좋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점점 앤에게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앤과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말수도 적고, 앤처럼 활동적이고 큰 기쁨이나 슬픔에 차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난 주로 활달한 친구들을 좋아했다. 마치 빨강 머리 앤에 나오는 매슈처럼. 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매슈같이 나도 친구들의 걱정이나 고민까지도 들어주고 별 한 것도 없이 고맙다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였다. 그러니 앤이 하는 길고 장황한 말을 읽으며 정말 즐거웠다. 게다가 앤의 이야기는 과히 명언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 많았다.

퀸스를 졸업할 때는 미래가 대로처럼 뻗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인다고 여겼죠. 하지만 이제 거기 굽이가 생겼어요. 굽이 너머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좋은 게 있다고 믿겠어요. 그렇게 굽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매혹적이에요.
(p. 456)

초긍정의 마인드를 가진 앤은 어떤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줄 알았다. 그린 게이블스에서 고아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여정 속에서도 길에서 마주치는 황홀한 풍경들을 즐기며 그 여정을 최대한 즐기기로 한다. 퀸스를 졸업하고 레드먼드 대학을 가려고 하는 꿈이 좌절되었을 때에도 앤은 에이번리에 남는 즐거움을 찾는다. 치열한 시험 공부 중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생각하면 시험 점수 따위는 사소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런 앤은 그린게이블스의 매슈 뿐 아니라 엄격한 마릴라까지도 사로잡는다. 마릴라와 매슈는 앤이 없는 세상은 이제 생각도 할 수 없다.
앤은 그린게이블스에서 다이애나를 단짝으로 사귀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주변의 숲과 아름다운 들판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물론 매번 실수를 하고, 학교에서는 길버트와 원수 관계가 되지만.
앤의 도전과 모험, 우정과 사랑이 어우러진 속에서 멋진 결말로 앤의 이야기는 끝난다. 앤 캐릭터는 원래 좋아했지만, 이제 정말 사랑스런 앤에게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될 것 같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동심과 감성을 되찾게 하는 사랑스런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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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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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나는 술을 잘 하지 못한다. 술을 배웠어야 할 열혈 청춘 시절에는 술을 한 번이라도 마음껏 마셔보도록 허락받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대학원이나 회사에서 강요하는 술 때문에 술을 전혀 즐기지 못했다. 그래서 여태 술 맛을 잘 모른다. 아주 가끔 책맥이 하고 싶어서 맥주를 마시기도 하지만, 달달한 바닐라 라뗴가 자꾸 생각나고 마니, 술에 관해서는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닌가 보다. 술 맛도 모르고 나이가 든 게 때로는 아쉽지만, 이 책 만은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깔깔 웃으며 즐겼다.

자타공인 술꾼인 김혼비 작가의 술에 얽힌 에피소드와 인생 이야기에 웃기도 하고 나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엄청난 술 사랑에 놀라기도 했으며 아팠던 인생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어쩐지 나는 좀 힘을 내기 시작했다. 당장에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를 가까스로 건너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힘내라는 말과 그 비슷한 종류의 말들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때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언젠가 가닿기를, 언젠가 쉬워지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망이 단단하게 박제된 말은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p. 62)


힘들어도 친구들에게 내색하지 않다가 결국 힘내라는 말 한 마디에 무너져내리기도 하고, 욕에 전혀 소질이 없다가 불법 행위를 하고 성희롱을 하는 데다 직장까지 잃게 한 어이 없는 직장 상사 때문에 찰진 욕이 입에 붙기도 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도 술에 관한 사연은 빠지지 않는다.
어찌나 술을 사랑하는지 면세점을 갖춘 배를 타자, 주류 판매대로 가서는 많은 술병들이 달그락달그락 부딪히는 소리를 감상하기도 하고, 첫 술을 따르는 꼴꼴꼴 소리가 듣고 싶어 소주 두 병을 한꺼번에 시키고는, 계속 채워넣으며 그 소리를 듣기도 한다. 심지어는 천생배필도 술 친구에서 발전한 사이다.
그러나 이 책의 백미는 술이 부른 웃지 못할, 그러나 읽으면 누구나 폭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인것 같다. 그 중 최고는 백일주를 마시고 친구에게 진지하게 말한 너희들이 나에 대해 뭘 알아. 나 사실 배추야. 좀 더 추워지면 나 김치 된다.” 였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나처럼 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든, 오늘 아무리 힘든 일이 있었던 사람이든 이 책을 펼치면 바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술이 내 취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책만은 내 취향이다. 언젠가 나도 기분 좋게 취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만들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이 책으로 이미 때문에 한없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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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하는 벅찬 즐거움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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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책에서 여행과 연애는 20대에 스타트를 끊어야 한다는 얘기를 읽었다. 아무래도 난 이번 생에는 망한 것 같다. 여행을 가끔 했지만, 출장을 제외하면 내가 계획하고 준비해서 떠난 여행이 전무후무하다. , 기차 여행 무박 2일로 한 것과 부산을 버스로 당일 여행한 게 있기는 하지만, 여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한 전적이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여행하는 이유를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라고 했다. 책에서 읽고, 영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 거기에 가서 내가 그 땅을 밟아 봐야겠고, 거기에 있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봐야겠다는 심정이란 말이다. 떄로는 따분함 마저 그 곳에 직접 가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다며 따분했어도 그 곳에 있어야 했단다.
어쩌면 아무 이유 없이, 어떤 맥락도 없이, 특정한 것에 끌리는 일이 있는 것처럼 여행도 아무 이유 없이 반드시 그 곳에 꼭 가야 한다고 느끼는 지도 모른다. 집순이인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이끌림이지만. 그렇게 떠난 그 곳에서는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아무리 멀리까지 갔더라도 아니 멀리 가면 갈수록 우리가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p. 234)

하루키가 말하는 여행은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다. 무인도 까마귀 섬에 가서 밤이면 섬을 점령하는 무수히 많은 벌레에 쫓겨 하루 만에 돌아와 버리기도 하고, 멕시코 대 여행에서는 식중독에 시달리는 데다가 강도가 종종 출몰하는 지역에서 무장 경찰과 함께 버스를 타기도 했다. 우동 맛기행을 떠나서는 우동이 코로 나올 정도로 우동만 먹었고, 노몬한에 가서는 국경을 넘기 위해 바로 옆 지역을 돌고 돌아 가기도 했다. 미국 여행은 매일 똑같은 호텔, 똑같은 식사, 똑같은 풍경 속에 지루함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의 본질을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예측불허의 상황,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 자기 자신이 스스로 초래하고 마는 피곤함과 번거로음, 때로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서도 그 곳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인상적인 여행은 수많은 일본인과 중국인이 목숨을 잃었던 노몬한 전투의 흔적을 쫒아서 떠난 여행이었다. 어린 시절 노몬한 전투에 대해서 배우며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고, 성인이 되어서 그 곳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여행이라니. 내게도 그런 강한 이끌림이 있었던가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설명되는 이끌림보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서 인생을 사는 지도 모른다.
내 여행을 죽기 전에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방구석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여행기를 훌훌 넘기는 재미도 삼삼하니, 난 이대로 만족하련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낀다면 하루키처럼 훌쩍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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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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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연수는 소설과 시 모두로 등단했다. 사실 그의 시는 읽어본 적이 없으나, 어째서인지 그의 소설 문장들이 마치 시어처럼 읽힌다. 가끔 아주 진하게 밑줄을 긋고 싶은 멋진 문장들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 속의 언어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아름다운 문장들로 그는 백석 시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본명은 기행. 그가 사랑했던 시와 썼던 문구들과 실패한 사랑과 북한 체제 하에서의 좌절과 고뇌를 그리고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유명한 백석 시인의 삶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첫 눈에 반한 처녀와 맺어지게 해 준다던 친구는 바로 그 처녀와 결혼해버리고, 북한 체제 하에서 체제 선전 외의 감성적인 시는 쓰지 못하게 하는 당의 방침 때문에 그는 쓴 시들을 감추어야 했다.

그렇게 한 편의 시를 쓰고 쭉 읽은 뒤, 종이를 찢어 난로에 넣고 그 불꽃을 바라보는 일을 반복하다가 그는 노트에 館坪이라고 쓰게 됐다. 마찬가지로 그 왼쪽으로 글자들이 쭉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보이는 대로 받아적었다. 다 적고 나니 마음에 흡족했다. 그리고 그는 종이를 찢어 난로에 넣었다.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쓴 그 시도 포르르 타오르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p. 207)

그는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고 변방의 삼수로 파견되어 가축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다. 주변의 초등학교 선생님인 서희가 매주 들고 오는 초등학생들이 쓴 시를 지도하고, 자신의 노트에 비록 태워질지라도 시를 끄적이곤 했다.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
작가의 말 (p. 246)


어쩌면 김연수 작가는 좋아하는 시인인 백석에게 이 소설을 선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삶의 이야기이면서도 그가 홀로 지켜왔던 반짝이는 시에 대한 이야기로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
작가의 말 (p. 245)


시인의 삶은 힘겹고 원하지 않았던 일들이 수두룩하게 벌어졌지만, 그의 가슴 속에 살아 있었던 시만이 그를 그답게 했을 것이다. 비록 출판할 수 없을 지라도. 비록 제대로 집필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백석 시인에게 있어서 시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나는 김연수 작가의 가슴 안에 있는 시어들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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