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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독립만세 - 걸음마다 꽃이다
김명자 지음 / 소동 / 2018년 11월
평점 :
부모님의 맞벌이로, 나는 어려서 할머니 손에 컸다. 분유를 먹인 것도, 밤에 안고 얼러서 잠을 재운 것도 할머니였고, 기저귀를 갈아준 것도, 밥과 간식을 챙겨준 것도 할머니였다. 엄마보다 할머니와 더 가까웠고 어려서는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따랐다. 가끔
할머니는 젋었을 적 얘기를 하셨다. 6.25 때 위험을 무릅쓰고 월남하던 이야기, 피난 와서 어렵게 살던 이야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엄마까지 떠나버릴까봐 불안해하며 집안일에 몰두하던 이야기. 어려서 잘 이해는 되지 않았고
아직도 할머니의 철두철미한 근검절약 정신에는 거부감이 든다. 할머니보다 좀 연배가 없으신 할머니의 이야기지만, 이 책으로 나는 함께 살면서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할머니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 어렵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냐마는, 저자는
읽기가 고통스러울 정도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정불화, 어린
나이에 당한 어머니 상, 심각한 건강 문제 등. 이렇게 힘든
인생이 있을까 싶다. 어쩌면 가난 보다도 이런 마음의 상처가 저자의 몸과 마음을 더 할퀴어서 한창 나이에
병원 신세를 졌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에서도 저자는 희망을
보았고, 오히려 위기가 전화위복이 된 듯,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저자의 고난은 개인적인 불행 때문만은 아니었으니, 한국전쟁을 겪고 가부장적 유교 사회에서
여자로 살며, 억압당하고 고생한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 한 구석이 아리어 왔다. 여혐이나 남녀차별, 성상품화 등 여전히 여성의 삶은 힘겹지만,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에 놀라며 책장을 넘겼다.
저자는 오히려 만년이 되어 갖가지 어려움에서 해방되고, 파주에 독립하여 세간을 차리어 여성으로서
가지기 힘든,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가졌다. 취미생활에
몰두하고, 젊었을 적 쓰고 싶었으나 엄두도 못 내던 글도 배워 이렇게 책을 내니, 인생의 황혼기에도 훨훨 날아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다. 비록
나이는 할머니여도 그 열정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 못지 않다. 저자는 오히려 현재가 청춘이다. 남자친구도 있고 위해주는 동생도 있으니 스무 살 소녀 부럽지 않다.
아프고 쓰리기만 했던 젊은 날들을 뒤로 한 채, 인생을 즐기며 제 2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멋진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좋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