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논리로 대표되는 ‘팍팍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신을 ‘정상‘ 혹은 ‘강자‘로 간주할 수 있었던 시절의 정서가 ‘인간적인 것‘, ‘순수한 것‘ 등으로 간주되며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하다. IMF 이후 대중영화의 서사적 경향을 분석한 손희정에 따르면, 한국 대중서사가 과대재현한 ‘위기의 남성(성)‘은 곧 지난 시대의 (사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희구를 정당화 하기 위해 동원된 사회적 담론의 산물이었다. 이 서사들에서 목가적인 방식으로 상상되는 ‘원시적 이야기공동체‘의 ‘평화‘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시민권을 삭제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 P31
여성에 대한 물리적ㆍ상징적 폭력 및 도식적 재현을 필수적으로 경유하는 한국문학 전반의 여성혐오, 외국인 이주 노동자 및 결혼이주여성, 장애인, 노동자, 성소수자 등에 대한 재현의 윤리를 고려하지 않는 약자혐오 및 소수자혐오, 장르문학에 대한 철저한 위계화를 통해 관철되는 순문학주의, 자체 동력을 상실한 채 환금화 가능성에만 매달리는 기생적 존재방식, 세계시장 진출 및 세계문학상에 집착하는 제국주의적 욕망 및 후진국 콤플렉스, 가족ㆍ모성애와 같은 전통적 질서 수호에만 골몰하는 폐쇄적 보수성, ‘국뽕‘ 기획과 결합한 무차별적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교조주의적 "꼰대질", 오락성의 현저한 결여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류 한국문학의 부후한 특성으로서 새 세대 문학주체들로부터 자주 지적돼온 내용이다. 그리고 ‘K문학‘은 이 같은 한국문학의 부정적 성격 전반에 대한 종족화를 경유함으로써 ‘한국문학‘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조롱의 기표로 활용되고 있다. 바로 이것이 21세기의 독자들이 ‘개저씨‘들의 ‘K문학/비평‘ 복권에 냉담한 이유다. - P94
‘헬조선‘이 정말 ‘헬hell‘인 이유는 ‘지옥‘을 ‘지옥‘이라고 묘사할 언어조차 박탈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00년대 이후 강력범죄 피해자의 10명 중 9명이 여성인데도 ‘여성혐오 범죄는 없다‘는 단언, 부국강병의 논리로 정당화되는 인종혐오와 소수자혐오의 사례들을 떠올려보자. 소수자의 인권보다 ‘혐오할 자유‘가 우선시되고, 가시화된 차별과 극단적인 폭력만이 혐오의 유일한 내용으로 규정될 때 우리의 사유는 앙상해지고 삶은 피폐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유도하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의 시선을 폭력의 스펙터클에만 잡아둠으로써 그것을 방관할 수 있는 안전한 자리에 ‘나‘를 분리해놓으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다 일상적으로 광점위하게 존재하는 혐오의 구조와 정치적 무의식의 문제는 희석된다. 이제 남겨지는 것은 ‘죽이지 마‘, ‘때리지 마‘와 같은 단말마적인 생존과 치안의 언어뿐이다. - P119
물론, 중견 남성지식인/비평가들의 연이은 ‘페미니스트 선언‘은 페미니즘/퀴어 정치학에 대한 특별한 공부 없이 ‘상식‘과 ‘합리‘, ‘진보‘와 ‘윤리‘ 같은 가치에 대한 느슨한 믿음만으로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인식하고, 그 선언이 즉각 정치값을 가지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남성권력의 실천이겠다. 그러나 선언의 자격과 진정성authenticity 탐문에만 골몰하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사와 지성사를 갱신하는 데 그리 생산적인 작업은 아니므로 이 현상을 좀 더 확장적으로 의미화할 필요가 있다. 즉 586세대 남성비평가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비록 면피용이나 체면치레, 혹은 구별 짓기의 제스처에 불과하더라도, 그 선언의 수행성performativity을 신뢰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선언‘은 수행됨으로써 선언하는 주체의 의도나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그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정치적 급진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전략이다. 다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특전사‘이자 여성을 존중하는 ‘페미니스트‘라는 형용모순의 명제를 자기정체성으로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의 전략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상기하는 일은 필요하겠다. - P185
페미니즘 비평이 하는 일은 한국문학사의 미학과 문학적 상상력이 구성돼 온 역사적 방식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을 통해 앞으로 한국문학이 여성혐오적 상상력을 경유하지 않고도 새로운 미학과 쾌락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지 타진해보는 것이다. 그러니 페미니즘 비평에 대한 한심한 걱정은 접어두시고, 여성혐오 없이 작동하지 않는 당신의 낡고 무딘 미적 감수성부터 걱정하시라. 그럼에도 여전히 페미니즘 비평의 ‘본질적 한계‘를 논하고 싶은 분께는 리타 펠스키의 다음과 같은 당부를 전해드린다. "특정 사상을 주장하는 학파와 설득력 있는 논쟁을 하려면, 그 분야에서 최하가 아니라 최고의 저술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 P217
결국 ‘퀴어‘란, 맥락적ㆍ잠정적ㆍ구성적인 분류로서 이성애적 지배규범과 불화하는 것일 뿐, 결코 특정 정체성의 물리적 총합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체적 또한 타고나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식하고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허구necessary fictions일 뿐이며, 정체성 범주가 곧 정체성정치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숙고돼야 한다. - P394
최근 한국문학장에서 성소수자는 여전히 정체성정치에 기투하면서도 여느 N포세대처럼 가난하고 고립된 ‘보통 청년‘이라는 알리바이와 함께 등장한다. 사회경제적 불안정이 비규범적 성정체성이 초래하는 삶의 무게를 압도하는 것으로 재현될 때에만 비로소 ‘보통 사람‘으로서 대사회적 발언권을 부여받는 것이다. 허나 그렇다면 이건 성소수자의 시민적 권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경제활동의 형상을 경유하지 않고는 ‘보통 사람‘을 상상하지 못하게 된 사태, ‘보통 사람‘의 기준이 너무 낮아진 우리 모두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 P432
세월호참사를 설명하는 유력한 프레임으로 자주 운위되는 ‘파국론‘에 대해서는 이미 ‘자기 시대를 특권화한다‘(사사키 아타루)거나 "우리 시대의 윤리적 데카당스를 보는 듯"(서동진)하다는 지적이 제출된 바 있다. 이 지적이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파국론에 깃든 사변성과 비운동성의 뉘앙스는 종종 시험에 든다. 그런가 하면, "‘잊지 않겠습니다‘도 행동을 낳는 다짐이었던 것이 이제 그 자체로 행동의 최대치가 되었다."라는 인문학자 윤여일의 진단이 암시하는 것처럼, ‘기억‘이라는 (비)행위의 정치성 또한 무조건 자명한 것은 아니다. - P520
애도하되 그 대상을 ‘순결한 희생자‘나 ‘피붙이‘로 제한하지 말기를, 허무와 체념을 말하되 그것의 정치적 가능성을 봉쇄하지는 말기를, ‘아이히만‘을 말하된 무책임의 체계를 승인하는 방식은 아니기를, 동정과 연민의 기만성을 경계하되 그것이 연대와 실천의 불가능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기를. - 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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