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假定)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 또는 사랑받을 ― 올바른 대상의 발견이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태도에는 근대사회의 발전에 바탕을 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 가지 이유는 ‘사랑의 대상‘의 선택에 있어서 20세기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다. - P14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사랑의 열도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 P17
고독이라는 가공할 경험으로부터 구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로 이끌어 가기 위해 독재체제는 위협과공포를 이용하고 민주국가는 암시와 선전을 이용한다. 물론 두 체제에는매우 큰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에서는 불일치가 가능하고 사실상 불일치가 전혀 없을 때는 없다. - P29
오늘날 평등은 일체성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을 의미하고 있다. 평등은 추상적 동일성, 곧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오락을갖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우리는 보통 진보의 조짐으로찬양되고 있는 성과들 ― 예컨대 남녀 동등권 ― 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 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나는 남녀 동등권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등을 추구하는 이러한 경향의 긍정적 측면 때문에 기만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의 일부이다. 남녀평등은 바로 이러한 대가를 치르고 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자는 이제 다른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다. ‘정신에는 성(性)이 없다‘는 계몽주의 철학의 명제는 일반적 관습이 되었다. 성의 양극성(兩極性)은 사라지고 동시에 이러한 양극성에 바탕을 둔 성애(erotic love)도 사라졌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극으로서 평등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었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비개성화된 평등이라는 이상을 설교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서로 동일한 원자적(原子的)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부른다. - P32
어의상의 온갖 난점 때문에 해답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공서적(共棲的) 합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미숙한 형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 P35
인간을 아는 문제는 신을 아는 종교적 문제와 병행된다. 인습적인서양신학에서는 사고에 의해 신을 알고 신에 대해 진술하려고 노력한다. 이 신학은 나의 사고에 의해서만 신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 (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유일신론(唯一神論)의 결과인 신비주의는 사고에 의해 신을 알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신과의 합일의 경험을 추구하는데, 신과의 합일에는 신에 대한 지식이 끼어들 여지 ― 필요 ― 는 전혀 없다. - P51
원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사실상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동일한 오류이다. - P69
신은 진리이고 신은 정의이다. 이런 발달에서 신은 이미 사람이나 남성이나 아버지는 아니다. 신은 현상의 다양성의 배후에 있는 통일원리의 상징이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정신적 종자로부터 피어날 꽃의 상징이다. 신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이름은 언제나 한 사물 또는 한 사람, 요컨대 유한한 것을 나타낸다. 신이 사람이 아니고 사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 P96
그 후 신학이 발달한 단계에서는 이 사상은 더욱 진척되어 인간은신에게 어떠한 적극적 한정사(限定詞)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로 된다. 신에 대해 신은 현명하고 강하고 착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시금 신을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신은 ‘~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소극적 한정사로 말하는 것, 신은 한정되지 않고 불친절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나는 신이 ‘~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럴수록 신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된다. - P97
프로이트는 그 사고에 있어서 19세기에 유행한 유형의 유물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람들은 모든 정신적 현상의 근원을 생리학적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랑, 증오, 야심, 질투 등은 프로이트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의 성적 본능의 여러 가지 결과로 설명되었다. 그는 근본적 현실은 인간의 존재 전체에 있다는 것, 곧 첫째,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의 상황 둘째, 사회의 특수한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생활상의 실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이러한 유형의 유물론을 넘어서는 결정적 조치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의해 취해졌고 유물사관에서는 신체나 식욕, 소유욕 등 본능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적 생활과정, 곧 인간의 ‘생활상의 실천‘이 인간 이해의 열쇠가 된다). - P124
프로이트 사상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본주의 정신에 일어난 변화 때문이었다. 곧 자본주의 정신은 절약의 강조로부터 낭비의 강조로, 경제적 성공의 수단으로서의 자기억제로부터 끊임없는 시장확대의 기초로서의 그리고 불안하고 자동기계화한 개인의 주요한 만족으로서의 소비의 강조로 변했던 것이다. 어떠한 욕망의 충족이든지 지연시키지 말라는 것이 모든 물질적 소비의 분야에서와마찬가지로 성적 분야에서도 주류로 되었다. - P125
여기서 자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오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환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환경 밑에서든 고통과 슬픔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습관인 것처럼, 그들은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투쟁은 당사자의 어느 쪽에도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 못하고 오직 서로 파괴해버리는 것 같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이러한 생각에 대한 좋은 이유를 찾아낸다. 그러나 이와 같이 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갈등‘이사실은 ‘진짜‘ 갈등을 회피하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갈등은 사소한 또는 피상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이고, 이러한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명료해지거나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진짜 갈등, 곧 은폐하거나 투사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그들이 속해 있는 내면적 현실의 같은 차원에서 경험되는 갈등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갈등은 명료해지고 카타르시스의 작용을 하며, 이러한 카타르시스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보다 많은 지식과 보다 많은 힘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위에서 말한 바를 강조한 것이다. - P136
두 사람이 서로 그들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사랑은 이와같이 경험될 때에만 끊임없는 도전이다. 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것이다. - P137
이러한 점에서는, 다시 말하면 신의 원칙에 따라 생활을 바꾸지 않고 갓난애처럼 신인동형적 신상(神神)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중세의 종교적 문화보다는 오히려 우상숭배를 하는 원시부족에 더 가깝다. 다른 점에서는 우리들의 종교적 상황은 현대의 서양 자본주의 사회에만 특유한 새로운 특징을 보이고 있다. - P139
우리 사회는 관리자의 관료조직에 의해, 직업 정치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사람들은 집단적 암시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그들의 목표는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고 이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다. 인간이 사랑할 줄 알게 되려면 인간은 그의 최고의 위치에 놓여져야 한다.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해야 한다. 인간은기껏해야 이익을 나누어 갖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을 나누어 갖고 일을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사회적 존재와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사회가 조직되어야 한다. 내가 입증하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사랑만이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한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면, 상대적으로나마 사랑의 발달을 배제하는 사회는 인간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 P172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인간존재의 궁극적이고 현실적인 욕구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구가 은폐되었다는 것은이러한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러한 결여상태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개인의 예외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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