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여행으로서의 텍스트, 문학비평의 척도로서의 즐거움과 즐김, 이밖에도 이 책이 말하는 또 다른 즐거움은 보다 관능적이라 할 수 있는세부적인 것에 대한 끈질긴 조망과 추적이다. 한 마디의 말, 물건, 날씨, 몸짓, 목소리의 억양 등에 대한 묘사는 물신숭배자로서의 바르트, 유물론자로서의 바르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다. - P13
작가와 독자의 육체가 서로 만나며, 소비적·추상적인 즐거움 대신 생산적·구체적인 즐거움이 창출되는 공간이 바로 이런 세부적인 것이라는 바르트의 거듭되는 주장은, 삶의 글쓰기로서의 텍스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다. 또한 세부적인 것은, 그것이 드러내는 섬세함·뉘앙스 등 질적인 가치 외에도 텍스트의 전복적 영상과 관계된다. 물질적이고 감각적·세부적인 것이 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나열 속에 불쑥 끼어들 때, 그것은 하나의 틈새를 자아내며, 그리하여 텍스트를 불연속성의 공간으로, 관능적인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그런데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의 전복적인 양상은 기존의 문화나 언어의 파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변형하고 재분배하는 데 있다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언어의 재분배에는 반드시 틈새가 있게 마련이며, 이 틈새가 즐거움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 P14
그(말라르메)는 지금까지 언어의 소유주라고 여겨져 왔던 자를 언어 자체로 대체할 필요성을 광범위하게 인식하고 예견했다. 그에게서또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저자가 아니다. 쓴다는 것은 선행적인 몰개성(impersonnalité) - 사실주의 소설가들의 그 거세적인 객관성과는 결코 혼동될 수 없는 - 을 통하여 <자아>가 아닌, 오직 언어만이 작업하고 <수행하는>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하고자하는 것이다. - P29
고전 비평은 결코 독자를 다룬 적이 없다. 고전 비평에서는 글을 쓰는 자 외에 문학에서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류사회 자체가 배척하고 무시하고 은폐하고 파괴해 온 것을 이제서야 마치 위하는 양 뻔뻔스럽게 글쓰기를 비판하고 나선다면, 우리는 그런 반어적인 수법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글쓰기에 그 미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글쓰기의 신화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P35
텍스트를 쓰는 나는 종이 위에 씌여진 나일 뿐이다. - P44
왜 나는(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소설 · 전기 · 역사적 작품에서 한시대, 한 인물의 <일상적인 삶>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일까? 시간표 · 습관 · 식사 · 숙소 · 의복 등 이런 하찮은 세부적인것에 대한 호기심은 왜일까? 그것은 <현실>에 대한 환영적인 취향 때문일까(<그것이 존재했다는> 물질성 자체에 대한)? 아니면 환영(fantasme) 자체가 내가 그 안에서 쉽게 자리잡을 수 있는 <세부적인 것>을, 사적인 미세한 장면을 불러오는 걸까? 요컨대 위대한 것이 아닌 하찮은 것에 대한 연극, 그런 낯선 연극으로부터 즐김을 이끌어 내는 <대수롭지 않은 히스테리 환자들>(바로 그 독자들)이 있는 걸까 (하찮은 것에 대한 꿈이나 환영은 없는 걸까?) - P101
<오늘 날씨>(혹은 어제 날씨)에 대한 묘사보다 더 미묘하고도하찮은 묘사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아미엘의 글을 읽으면서 또 읽으려고 애쓰면서, 그 덕망 높은 편집자(즐거움을 배제하는 또 한 사람)가 아미엘의 일기에서 무미건조한 도덕적 고찰만을 보존하기 위해, 일상적인 세부사항이나 제네바 호숫가의 날씨를 삭제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데 대해서는 정말로 화가 났다. 낡지 않을 것은 아미엘의 철학이 아닌, 바로 그 날씨일 텐데. - P101
우리의 즐거움은 개별체적인(individuel) 것이지 개인적인(personnel) 것은 아니다. - P110
죽음, 진정한 죽음이란 증인 자신이 죽어갈 때이다. 샤토브리앙은 자신의 할머니와 고모할머니에 대해 말하면서 『어쩌면 나는 그분들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아는 이 세상의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글로 썼고, 그것도 아주 잘 썼다. 그리하여 적어도 우리가 샤토브리앙을 읽는 한에 있어서는, 우리도 역시 그 사실을 안다. - P177
X의 방문. 그는 옆방에서 끊임없이 말한다. 감히 문을 닫을 수도 없다. 나를 방해하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대화의 진부함이다(적어도 내가 모르는 언어로 말한다면 음악적으로 들릴 텐데). 나는 항상 타자들의 저항에 놀라며, 얼이 빠지기조차 한다. 타자란 내게 있어 지칠 줄 모르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에너지, 특히 언어의 에너지는 나를 놀라게 한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광기를 믿는 유일한 순간일 것이다(폭력을 제외하고는).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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