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책을 사랑하는 이의 첫 책이다. 책을 쓰는 동안 인생의 다른 부분이 엉망진창을 향해 엔트로피를 늘려나가도, 오로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조금 덜 불행했다. 이글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갖추어 사람들에게 전달될것이며, 적어도 그때까지는 확실한 목표를 향해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지탱했다. 감히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도있었다. - P8
사실 이 자리에서 내가 읽었던 책을 모두 나열할 수도 없고, 나열해봤자 별 의미도 없다. 중요한 건 책이 나의 피와 살이라는 것이고, 인생의 삼할 정도는 책장을 넘기는 데에 썼다는 것이다. 이할 정도는 책장을 넘길 책을 살 돈을 버는 데에 썼다. 나머지 오할은 막연하고 불확실한 인생 속에서 몇 권 안 되는 책을 안고 비틀거리는 데에 썼다. 이 책도 비틀거림의 일환이다. 좀 비틀거리더라도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라 다리에 힘이 좀 없다. - P116
나의 방 한면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책장을 바라볼 때, 수천 년 전의 인간이 남긴 말부터 지금의 인간이 그 말을 해석한 책까지 있는 광경을 바라볼 때, 나는 인간이란 죽으며 한낱 활자만을 남길 수 있는 존재임을, 동시에 그 활자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임을 상기한다. 책에 대한 소유욕은 그래서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자 애정의 발로다. 구체적인 하나의 인간에 대한 소유욕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의 정신성에 대한 소유욕인 셈이다. - P137
이는 활자의 배열 속에서 자신만의 진리를 발견하든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지, 검열관 (소설 내에서 우주와 시간의 기원을 기록한 책을 발견하고자 모험을 하는 수색자들)이 되어 부서진 층계를 포함하든지, 세계에 어떤 ‘진리‘가 있어서 죽어서야 그걸 깨달을수 있다면 이런 곳에서 밖에는 깨달을 수 없을 테다. 파주에 위치한 지혜의 숲에 갔을 때 티끌만큼이나마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신이시여, 제가 믿지 않아서 염치는 좀 없지만 혹시 죽게 되면 영혼은 이쪽으로 좀 부탁드립니다. - P217
나는 더 좋은 책‘과 ‘덜 좋은 책‘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에 우열이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면 엘리트주의자로 매도되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봐도 르누아르가 그린 그림과 내가 그린 그림은, 내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든 상관없이, 가치도 수준도 전혀 동일할 수 없다. 작품에 대한 선호를 무조건 취향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각 분야에서 쌓아 온 규칙과 역사, 성취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는 예술을 논함에 있어 취향을 존중해달라‘라고만 말할 수 없다. 이 말은 때로 무지(無知)에 대한 좋은 명분이 될 뿐이다. 책에 주어지는 상은 더 좋은 책에 주어진다. 여기서 ‘더 좋음‘과 ‘덜 좋음‘을 구분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다. 작가의 성취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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