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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입은 남자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4년 11월
평점 :
"장영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이 되다"
라는 눈에 띄는 카피를 내세운 <한복 입은 남자>라는 소설은 사실과 픽션 사이의 아주 묘한 줄타기를 한 소설이다. 사실 카피만으로 굉장히 궁금해지는 책이다. 장영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와의 접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으며, 조선과 로마(이탈리아)는 현재에서도 물리적으로도 굉장히 먼데 지금으로부터 600년도 전에 만났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으며, 더군다나 스승이라니. 이것이 어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래서 신청했다. <한복 입은 남자>의 사전리뷰단에..! 그리고 사전리뷰단에 선정돼서 PDF 파일로 받아보게 됐다. (사전리뷰단은 종이책으로 나오기 전 교정단계에 있는 PDF 파일을 메일로 받아보고 리뷰를 쓰는 서평단을 의미한다. 이런 사전리뷰단은 이번에 처음으로 신청했던 거라 낯설음이 더 컸다.)
아무래도 책보다 컴퓨터로 글을 읽어야 해서 눈도 더 아프고 속도도 좀 더딘 듯 했지만 그런 단점들이 무색하게끔 내용이 흡입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장영실이라는 조선 최고의 과학자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서양 최고의 과학자와의 만남을 주장하면서 그 사이사이 증거들을 빼곡하게 나열하는 것이 이 책에 쏟은 작가의 노력을 알 수 있었다. 무릇 팩션이라 함은 작가의 상상력이 바탕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세세한 자료 조사가 없다면 상상력을 엮어나갈 이야기가 부족해지기 때문에 흡입력있는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복 입은 남자>는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읽는데 무리가 없을 만큼 말이다.
책은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의 그림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PD 진석이 엘레나 꼬레아라는 유학생을 만나 비망록이라는 책속 비밀을 풀어나가는 게 큰 줄거리이다. '비망록'에는 장영실의 어마어마한 모험이 담겨져 있고, 진석과 그의 친구 강배가 그 비밀을 풀어나간다. (오강배는 진석의 친구이자 헌책방 주인이며 문학박사학위를 갖고 있고, 비망록의 모든 번역을 도맡는 인물이다.) 더이상의 이야기는 스포일러성이므로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진석과 장영실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데, 장영실이 등장하는 부분은 비망록을 번역한 부분인거고 진석이 등장하는 부분은 현실의 이야기인데,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건 "실제로 이랬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과 "진짜로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두 가지였다. 이 두 가지의 시점이 왔다갔다 할때마다 두 가지의 생각도 교차로 이어졌다. 장영실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에 남아있는 사료에 등장하는 것들이었고, 그것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것- 그렇기에 장영실이 다빈치의 스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사실일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대표적인 과학자로 칭송받는 다빈치의 스승이, 동양보다 서양이 우수하다 느끼는 그 우월감의 존재인 다빈치의 스승이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의 사람이라는 것이 말이다. 서양중심으로 쓰여 있는 역사에 통쾌한 한 방을 먹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읽으면서 흥미진진했다. (물론 장영실의 노년으로 갈수록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짐으로써 얼개가 아주 꽉 짜여져 있지는 않은 느낌을 받긴 하지만 후루룩 읽어버리는 데는 문제 없다.)
역사란 우연을 가장하여 때론 치밀한 각본을 만들어내기도 한단 말이야. ㅡ264
<한복 입은 남자>의 부제가 '장영실 미스터리'일만큼 장영실 일대기에 관한 내용을 꽤 진득하게 쫓아간다. 사실 한복 입은 남자가 장영실이라는 추측을 기정 사실로 놓고 진행하는 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새삼 잊고 있던 장영실을 재조명하는 계기도 되는 것 같아 색달랐다. 왜 우리는 그동안 장영실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토록이나 세종대의 과학의 꽃을 피웠던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이 책은 장영실의 재발견이라는 명목에서만 보더라도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어떤 진리도 처음에는 부정되기 쉽다. 하지만 진리 그 자체가 변화하진 않는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ㅡ511
장영실의 삶이 실제로 이리 파란만장 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장영실은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굉장한 사람이었고, 나아가 모험을 두려워 앉는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 책의 영화화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한다. 책에서 느꼈던 것이 얼만큼 각색되어 눈앞에 펼쳐질 지는 알 수 없지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