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서화 과도기 낙동강 석공조합 대표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
최서해.이기영 외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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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때는 일제시대. 한반도를 버리고 간도로 가는 사람이 흔하던 시절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지칠 대로 지친 박군은 고향을 등지고 간도로 갔다. 희망을 안고.  

희망이라는 것은 사람을 견디게도 하고 힘있게도 하지만 희망은 현실이 아니였고, 구들도 놓고, 두부도 팔아보지만 가난은 사무침 그 이상이었다. 그들의 노동엔 흠 잡을 것이 없었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했다. 임신한 아내가 귤껍질을 몰래 뜯어 먹어야 할만큼 . 

박군은 가족을 버리고 단체로 간다. 가난의 원인과 싸우겠단다.  내 가족이 자신이 떠남으로 더 고통을 당할 지라도 혹여 생명을 잃을지라도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박군의 선택에 대해 아이들에게 물을 수밖에   

대답은 전원 "집으로" 

"굶어죽더라도 함께 해야 합니다."  

맞는 얘기다 가족인데 - 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도 있는데 그 자식은 어찌하라고 아비된 사람이 어딜 간다는 말인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죽도록 일해도 아궁이에 냉기만 있다면 그래서 결국 몇 날을 좀더 견디다 내가족도 네 가족도 그렇게 쓰러지게 되면 어쩌지? 이렇게 되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가난으로 죽어가도 하나도 바뀌는 것이 없을텐데 -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노력해도 가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서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썼을지라도 아이들은 그 굶주림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할 뿐이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아이들의 굳은 믿음. 이런 믿음이 통하는 대한민국은 좋은 사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노력해도 안 되는 사회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굶어죽더라도 집으로?"   

아니겠지- 다시금 연대의 필요성을 느낀다.  빼앗긴 자들이 연대해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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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관에서 예고편을 보았을 때는 '보지 말아야지'했는데 -  몇 몇 평을 보고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혹시의 근원은 강 감독이 예술성에 도전했다는 말 등등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다. 우리 나라에 좋은 배우가 많다는 생각에 이를만큼 자연스럽고, 심지어는 전율까지 불러일으키는 그네들의 연기에 갈채.물론 우리 검사닙들은 연전히 코믹이 어울리더라.  

주제?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프다. 결국 돈 때문에?  이건 우리 모두 다 아는 얘기지 않은가? 돈을 버는 방식이야 야비함이지. 공갈, 협박, 폭력, 사기, 뇌물 등등 새롭나 아니? 하나도. 근데 그 마을은 왜 만든걸까?  혹시 이게 예술성인가? 일본에 가면 이런 쇼군의 집이 있지 않을까? 난 이 영화가 이 마을의 시작과 끝을, 이 마을의 목적을 보여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형사 나으리의 부가 축적되는 과정이 아니라 신선나으리의 활약상을 보여주었어야 한다고 보는 바이다.  

야심찬 말 "진짜 악마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는 그 말의 구체성을 어리석은 관객에게 말해 주었더라면 들 속상할 듯하다. 선한 얼굴을 하였으나 실상 그런 것 같지만 않은데 -  그가 그 많은 돈을 축적한 이유가 뭔지 좀 알려주면 안되나  

뭐가 다 얘기를 하다 마는지  

박찬욱의 복수와 이창동의 종교 비꼼이 살짝 가미된 역시 강우석의 영화였다. 마을을 둘러싸는 엄청난 공권력 투입을 보면 역시 강우석다웠다.  

마지막을 반전이라고 한다면 그 반전엔  스릴이 없다. 그 여잔 또 뭐야 복수자야? 심판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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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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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가르침은 있다. '멍청하면 당한다.'정도  

예나 지금이나 스타일에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이 책의 저자가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착각은 뭐야? 설마 오웰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 유달리 이거 우리 나라 얘긴가 하는 우수운 생각이 떠나 지 않는 건 뭐야? 보편성인가봐. 

시대와 공간에 나너 없이 먹히는 불변의 보평성.  정적을 퇴치하고, 공공의 적을 만들고, 최악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타협하고, 어김없는 위협과 환상과 회유 그리고 속임수. 

뻔 한 것에 당한다. 이유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뿐이니까.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에서 멈출 수밖에 없으니까. 왜 이상한 건 지.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 지. 따지지 않았으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물을 것이다.  

동물농장의 반란은 성공한 거니? 

-(예상 답변) 아니요. 

왜 아니지 ? 

-(예상 답변) 동물들은 행복해 지지 않았고, 인간의 다스릴 때와 마찬가지가 됐어요. 

존즈가 다스릴 때와 다른 점은 없을까? 

왜 동물들은 자신들의 농장을 지키지 못했을까? 

반란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등등의 질문을 할 것이고, 끝내 아이들에게 동물들이 점차 글 읽기를 못하게 된 것과  뭔가 이상하긴 한 데 그 이상한 것을 정확히 구체화할 수 없었던 이유를 환기시킬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멍청하면 당한단다."   

이 책의 교훈을 이 쯤으로 잡으면 완전 오독이 되려나?  

읽고 생각하고 비판하라. 그래야 주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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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원에서 월그컵 프로젝트를 한다며 바람빠진 축구공을 들고 나선 아들에게 뭔가 잘 보이고 싶었다. 신문에 난 국가대표선수들의 멋진 포즈를 오려붙이고 우리나라 경기 일정도 붙이고 '오 - 필승코리아' 뭐 이런 말도 쓰고 해서 2절지 크기의 게시판을 선물했다. 그 날 이후 나도 아들도 만나기만 하면 월드컵 이야기를 했다. 대표선수 이름부터 월드컵 참가국까지 모조리 외운 아들은 서서히 코너킥, 핸드링 등의 축구용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전 때까지만 해도 경기를 보는 것보다 잠을 선택헸던 아들은 시간이 갈 수록 축구에 빠져들었다. 나이지라아 전을 새벽에 깨어 보더니 , 우르과이와 독일 전을 보고 오늘 새벽에는 누나와 함께  연장전까지 한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결승전을 보았다. 사실 낮에도 입만 열면 축구였다.  

 "네덜란드가 이길것 같지요?"   

 "글쎄, 왜 그럴 것 같은데 -" 

 "브라질을 이겼잖아요." 

  나와 남편은 잤다. 아이들의 함성과 한숨을 들었다.  "뭐냐? 쟤들." "그러게?" 네덜란드가 이길 거라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으나 아들에겐 어떤 아쉬움도 없었다.

 시상식을 앞두고 아들이 방에 들어왔다. 

 "스페인이 우승했어요. 시상식 안 보실래요?" 

딸은 "엄마, 네덜란드 볼이 골대에 또 맞았어요." 라며 관전의 즐거움을 밝혔다.  

 월드컵 덕에 아들의 꿈은 축구선수가 됐다. (그 이전까지는 소방차 운전수였댜.) 2002년 월드컵 이후에 폭발적으로 늘었던 축구꿈나무들,  2010년이 키우는 축구 꿈나무가 된 아들은 아침마다 축구연습을 한다. 주말에 가는 축구교실을 일주일 내내 기다리고, 월드컵 경기를 기다리던 아들에게 물었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살까? 월드컵이  끝났으니?" 

 "4년 뒤에 또 해요."   

식탁 위에 깔려 있는 지도에서 스페인을 찾고 다시 브라질을 찾으며 방실 웃는다.

월드컵은 아들에게 4년을 기다릴 그 무엇을 선물하고 간 셈이다.  월드컵에도 여러 속 내가 있겠지 뭐든 그렇듯 상술도 있겠고, 술책도 있겠지 자본이 들어가는 마당에 무엇인들 맑고 깨끗할까? 하지만 일곱살배기 아들에게 월드컵은 세계를 알려주었고, 열정과 땀을 알려주었다. 다시 바뀔 꿈일지라도 잠시 사랑할 그 무엇을 가르쳐주었다. 축구를 보려고 새벽에 일어나는 아들에게 브라보. 엄마가 갖지 못 한 열정을 가진 아들에게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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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이 없는 지금의 시대에도 확실한 것은 있었다.  '공수래 공수거' 

누군가가 태어났고, 자랐고,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죽었다. 흔히 죽음을 '돌아갔다.'고 하니 어딘가 갈 곳이 있긴 한 모양인데 - . 두 눈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정말 빈 손으로 오더니 정말 빈 손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친척 할머니의 죽음을 보고 왔다. 87세의 삶을 사셨으니 안타까울 것도 없고, 게다가 병상에 상당기간 누워계셨으니 자식들을 보나 본인을 보나 두루 잘 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마지막은 그 자체의 무게로 사람을 제법 우울하게 했다. 고운 베 옷을 입고 관에 누우니 그로 끝이다. 화장한 뒤에 영월 숲 어느 나무 밑에 묻히신다니 퍽 잘 된 일이다.  

이제는 보내드려야 할 분도 많고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를 두고 떠나갈 것을 생각하다 보니 이별의 장면이 이러이러하면 멋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보내드릴 때도 '엉엉' 울 일은 없었으면, 이별의 아픔이야 어느 순간에고 있겠지만 그 아픔 외 더 큰 아쉬움이나 한은 없었으면 좋겠다. 종종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있는 사람, 내 안에 있는 시간들이 가장 가치 있다는 믿음에서 하는 말인데 - 내게 허락됐을 때 마음껏 행복하고,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누리다가 이별의 슬픔 그 이상은 남기지 않아야겠다. 내가 갈 때도 누구도 '엉엉' 울 게 만들 지 말았으면, 이별의 아픔만 남겨주고 기쁘게 가볍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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