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것이 없는 지금의 시대에도 확실한 것은 있었다. '공수래 공수거'
누군가가 태어났고, 자랐고,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죽었다. 흔히 죽음을 '돌아갔다.'고 하니 어딘가 갈 곳이 있긴 한 모양인데 - . 두 눈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정말 빈 손으로 오더니 정말 빈 손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친척 할머니의 죽음을 보고 왔다. 87세의 삶을 사셨으니 안타까울 것도 없고, 게다가 병상에 상당기간 누워계셨으니 자식들을 보나 본인을 보나 두루 잘 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마지막은 그 자체의 무게로 사람을 제법 우울하게 했다. 고운 베 옷을 입고 관에 누우니 그로 끝이다. 화장한 뒤에 영월 숲 어느 나무 밑에 묻히신다니 퍽 잘 된 일이다.
이제는 보내드려야 할 분도 많고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를 두고 떠나갈 것을 생각하다 보니 이별의 장면이 이러이러하면 멋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보내드릴 때도 '엉엉' 울 일은 없었으면, 이별의 아픔이야 어느 순간에고 있겠지만 그 아픔 외 더 큰 아쉬움이나 한은 없었으면 좋겠다. 종종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있는 사람, 내 안에 있는 시간들이 가장 가치 있다는 믿음에서 하는 말인데 - 내게 허락됐을 때 마음껏 행복하고,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누리다가 이별의 슬픔 그 이상은 남기지 않아야겠다. 내가 갈 때도 누구도 '엉엉' 울 게 만들 지 말았으면, 이별의 아픔만 남겨주고 기쁘게 가볍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