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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책이었다.  

도시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필수 불가결의 장소이나, 이에 대해서 깊게 생각한 점은 솔직히 드물었던 것 같다. 저자는 데이비드 하비라는 마르크스 주의의 지리학자다. 지리학자지만 숱한 사회학서들을 냈었고, 이번 저작인 <반란의 도시>는 그의 영역인 지리학과 사회학이 합쳐진 부분도 보였다.

 

도시라는 장소는 사실, 근대와 현대가 이룩한 가장 발전된 문명의 상징이다. 물론 그 이전 세대에도 발달된 도시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급격한 사회 변동과 더불어, 기계화되고 고층의 빌딩이 들어서고, 도로가 정비되고, 각종 문화 시설 센터가 등장하는 부분 등은 어느새 우리의 가치관에서 도시의 우열적 척도를 가리게 됐고, 현대화가 더 많이 진행된 도시일수록 우리는 그 도시를 더더욱이나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동경하고 있었다.

 

 지방 태생인 나는 운이 좋게도, 이모들의 생활권이 서울이라서, 어릴 때부터 서울과 지방의 문화를 모두 경험하면서 살았었다. 내 고향 역시도 사실 한국에서는 대도시나 다름없는 곳인데도, 서울 사람들의 눈에는 지방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 '시골'이라고 지칭하고 있었고, 그 '시골 사람'들은 그런 서울이라는 공간을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동경하고 서울의 삶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양상은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지역일수록 더더욱 심해진다. 우리 전 세대에서 농촌에서 성공하려면 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가치관이 낳은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무조건적인 동경, 무조건적인 우열론에 입각해 도시를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도시의 권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다른 사회 현상에 비해서는 비판의 여론이 많았고 우리의 현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주장도 많이 제기됐지만, 그런 부분은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적인 부분이나 경제적인 부분, 사회적 계층화된 부분 등에 국한됐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도시라는 생활 공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올바른 권리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하비는 지금의 도시는 자본을 옹호하는 체제로 옮겨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대한 근거로, 여러 부동산 데이터를 비롯해,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고 인용하고 있었다. 주류 경제학인 신자유주의에 모순을 비판하며, 결국 도시는 자본가들을 위한 착취의 대상이라고 고찰하고 있었다. 결국 도시화가 진행되고 접근성이 높아질수록, 지대는 높아지고, 그럴수록 도시에 거주하던 빈민층은 교외로 몰려나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예시를 들면서 한국 역시도 예시로 고찰하는데 다음과 같다.

 

"1980~90년대 서울에서도 건설회사와 토지개발업자가 험상궂은 용역깡패를 동원해 달동네 주택을 대형 해머로 때려 부수고 주민을 몰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50년대부터 가난한 사람이 거주하던 고지대 토지가 1990년대에 이르러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현대 고지대는 온통 고층건물로 뒤덮여 있어 과거 야만적인 재개발 과정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구절을 보면서,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내리는 지하철역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고층 지대에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게 보인다. 한눈에 척 봐도, 부유층의 동네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지하철역을 지나 오거리에 도착한다. 오거리를 지나면 고층 지대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화려한 '도시스러운 모습'이 나타난다. 오거리를 지나 빌라촌을 이루고 있는 xx 빌리지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아예 입구부터 경비가 서 있다. 한강이 보이는 그 빌라촌은 연예인을 비롯한 여러 재계 인사들이 사는 곳이다. 같은 동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특히 이 빌라촌을 산책하다 놀란 점이 있었다. 비싼 빌라처럼 보였는데, 관리인만 있고 집은 텅 비었기 때문에, 나는 관리인에게 물어봤었다. '분양을 하지 않나요?'라고 묻자 관리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집값이 너무 비싸서 지금은 아무도 안 들어오지, 이러다 헐값에 내놓으면, 가진 사람들이 이때다 해서 분양을 해서 랜트를 하거나 하는 거지, 그래도 안 들어오면, 집을 그냥 부수고, 새로 지어서 분양을 다시 하기도 해.'

 

확실히 그 빌라촌을 산책하다 보면 '멀쩡한' 집을 때려부수고, 새 집을 만드는 경우도 눈에 들어왔다. 돈이 돈을 낳고 있었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확실히 생각을 해 볼 여지는 있었다. 한 쪽은 빼앗기다시피 주거지가 공사되는데... 책을 보고 지하철을 내릴 때마다, 고층 지대가 언젠가는 저런 식으로 되풀이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또 떠올랐던 것이 몇 달 전 sbs에서 했던 <최후의 권력>이 떠올랐다. 특히나 4부인 금권천하 편에서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도시 계획이 떠올랐다. 이 편에서 다루는 것은 미국의 의료보험과 미국 사회의 교육 문제를 다루는데, 특히 미국의 교육 문제를 다룬 편이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유 없고 무분별하게 공립 학교들을 대폭 줄여버리고, 갑작스럽게 학교를 잃은 아이들의 눈물, 그 이면에는 사교육을 진흥시키고, 특권 사학의 이익을 대변하는 교육 엘리트들의 주연 파티가 있었으며(알렉이라고 불리는 조직), 그들의 내면에는 주지사가 있었다.

 

우리가 동경하고 따라 하기 급급한 미국, 자본주의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미국은 그렇게 돈이 좌지우지하고, 특권의 계층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돈이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은 특권층을 옹호하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도시화의 이면에는 이러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순 없겠다. 비단 우리 서울을 비롯한 도시화가 진행되는 대도시들만 봐도 이런 경향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봤다면, <최후의 권력> 금권 천하 편을 꼭 보길 권장한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도시의 속성은 결국 착취의 대상, 신자본주의의 모순적인 모습을 정당화하는 특권 엘리트만의 공간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의 주제는 이것이다. 도시의 개념에 대한 논의와, 도시의 공간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 권리는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주제로 하비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생각을 이 책에 풀어놓고 있다. 그런 주장의 내용에서 도시의 기능 속에 숨겨진 신자본주의의 모순점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좌파 사상을 옹호만 하는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자이긴 하지만, 하비는 기존의 좌파 세력에 대한 비판도 하고 있었다.

 

사회학이란 학문은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사실, 중도적인 관점을 취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따라서 자신이 목표한 결과에 따라서 자료를 취사선택하여, 자신이 유리한 자료만을 내세워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에 가장 최적의 학문이 사회학이다.

 

 기존의 미국을 필두로 한 신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신들이 신봉하는 그 이념의 정당화를 위해, 객관적이지 않은 편파적 자료를 가지고 자본주의를 옹호하여 왔었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사상은 현실적으로 실패했지만, 그러나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는 완벽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모순을 최소화하여서 발전시켜야 한다.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편파적인 눈 가리고 아옹 식의 주의보다는 다양한 관점에서의 문제 제기를 함께 모색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분에서 이 책은 굉장히 의의가 있는 책이다. 무비판적인 동경, 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도시에 대한 환상을 깨고, 이면에 숨겨진 도시에 가치와, 도시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주류 경제학이 외면하려 했었던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공유지에 대한 부분을 비롯하여 지대와 문화활동, 전반적인 도시에 대한 부분을 하비는 그만의 생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의아스러운 점은 아무튼 하비는 마지막에 도시에 대한 권리를 촉구하며, 실천적 '반란'을 권고하고 있는데...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이 전의 차분한 실증과 논증의 분위기가 아닌 다소 격양된 어조로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반란에 대해서는 솔직히 좀 현실성이 없어 보이긴 했다. 어쨌든 이 책은 자본주의를 돌아보게 만든 책임은 맞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서울 만능주의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이 문화와 여러 가치들이 집중된 도시임에는 맞다. 그 친구들이 보이는 눈에는 63 빌딩이 발전의 상징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친구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돈이 없으면 서울에서의 삶은 낭만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라고 빛나고 가치 있어 보이는 도시의 이면은 그렇다. 자본이 없다면, 농촌 촌부보다도 더 고된 삶이 기다리고 있는 곳, 그것이 바로 도시화의 정점을 찍고 있는 서울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도시화된 도시의 환상적인 시선을 걷어내고, 현실적으로 도시의 속성을 바라볼 때다. 도시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자본의 논리에 너무나도 충실한 것이 도시니까,

 

서두에서 예시를 든 파리의 레알 지구, 파리를 갔을 때, 다른 부분은 이질감이 들었다. 대도시인데도 앤티크 한 건물들이 많았고 그런 부분에서 문화의 차이를 경험했다, 그러나 파리의 중심지 구인 레알 지구를 갔을 때, 그 모던한 현대화된 건물의 친숙함. 주변 경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공간. 거기서 느껴지는 안도감과 동질감 그것은 어쩌면 나 역시도 무의식적으로 현대 도시화의 가치에 물들여있다는 것이었고, 나 역시도 자본주의가 빚어낸 도시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란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하비의 이 책은 굉장히 화두를 많이 던져줬었다. 원래 이 책은 하비가 앙리 르페브르의 저서를 보며, 그의 도시 논의를 확장하여 쓴 책이다.(무조건적인 수용이라기보단 비판적인 수용이다.) 어쨌든, 책은 굉장히 실증적인 데이터와 자료를 가지고 조리 있게 잘 써졌으나 마지막 부분이 다소 용두사미가 보여서 아쉬웠다.

 

우리의 도시는 왜 만들어졌는가? 우리의 편의를 위해 필수불가결적으로 형성된 공간이다. 그런 도시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누군가의 공간'이 아닌 '모두의' 공간이여야만 한다. 그게 도시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 가치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 '도시'에 대해서 올바른 권리와, 지향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진정한 도시의 '가치'에 대해서 깊은 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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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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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평가단이 되고 처음으로 쓰는 리뷰다. 사실 나는 블로그에 책에 대한 서평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서평을 쓴 인문서들이 꽤 있다. 그런데 블로그는 나만의 공간이라서 글을 쓰는 데, 제약이 없고 내 맘대로 리뷰의 콘셉트를 잡아서 썼었다. 그런데 이 리뷰는 사실 좀 걱정이 되긴 했었다. 아무래도 신간평가단으로 작성하는 리뷰라, 대중의 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에, 리뷰의 콘셉트를 어떻게 잡아서 써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었었다. 또 한 가지는, 여기 분야의 인문 사회 과학 예술을 지원하는 다른 평가단 분들에 비해서도, 떨어지는 서평을 쓰면 안되겠다는 무언의 강박이 있었기 마련이다. 책을 읽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엔 그냥 내가 써 왔던 대로 마음대로 내가 느낀 대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블로그의 서평 모토가, 부족하면 부족함을 드러내고 쓰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생각과 같이, 최대한 내가 읽은 느낀 점을 위주로 글을 전개하기로 생각했었다. 

 

 사실 알라딘에서 신간 2권을 보내 준다고 했을 때, 기대감이 있었다. 뭘 보내줄까라는 그런 설렘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 책이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 반, 아쉬움 반의 감정이 교차됐다. 우선 아쉬움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생각 외로(?) 책이 적은 분량이었다. 아무래도 받는 김에, 값이 나가고 두툼한, 좋은 책이지만 압박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책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이타적인 마음이 있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어차피 이 책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적은 양에 비해서, 가격은 높아서 선뜻 또 사기에는 미묘한 그런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애독하지만, 이런 부분에서조차 속물적인 근성이 발동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자조적으로 한심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어쨌든 한병철은 친숙했다. 이유는, 한병철의 전작인 <피로사회>도 봤었기 때문이다. 해제에서 나오듯, 한병철은 현대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가치에 대해서, 재발견을 하고 재해석을 하며, 오히려 긍정성의 가치에 대해서 검토하고 살펴보는 철학자였다. 전작인 <피로사회> 역시도 그런 책이었다. 근대 산업혁명 이래로, 과도한 긍정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 등을 신랄하게 파헤치며, 인간이 이룩한 성과사회의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그는 여러 선현들의 철학자들의 논의를 비판하며, 그의 주장을 드러낸다. 

 

 이 책 역시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투명성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하며,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두 대립된 측과 개념은 갈등을 유발하고 있었다. 기존의 무비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관념적으로 긍정된 가치관과 한병철이 주장하는 부정의 가치관은 시종 일관 책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책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는 갈등이었다. 그 싸움에서 한병철은 기존의 긍정된 투명성을 그만의 불투명성의 철학으로 전면적으로 재고한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챕터인 <투명사회>는 거국적인 사회의 투명성에 대해서 검토하고 전반적인 사회의 투명성을 재고하며, 여러 부분을 고찰해나간다. 논의 전개에서 여러 철학자들의 글과, 그것을 검토하고 반박하는 한병철의 현학적인 수사가 돋보였던 단락이었다. 물론 그만큼 이해하는데 더 집중을 요했었다. 느낌 상이었지만, 전작인 <피로사회>에 비해서 어렵게 다가왔던 것 같았다. 위의 챕터가 전반적 사회의 고찰이었다면, 두 번째 챕터는, 투명사회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한 대상에 집중적으로 논의를 진행하는데, 그 대상은 디지털 사회에 대한 부분이다. 이 두 번째 챕터는 생각보다 쉽게 논의가 전개됐다. 물론, 이 단락에서도 하이데거를 비롯한 롤랑 바르트 등의 철학자들의 논의가 있지만, 위 챕터보단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페이스북을 들어가 봤다. 하루 만에 선장의 얼굴이 공개되고 신상이 공개된 글에 좋아요가 엄청나게 달렸고, 내 지인들은 그것을 퍼 나르고 있었다. 물론, 그 선장은 도의적으로 잘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그것은 '디지털 파놉티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정보의 공개 투명성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의 모든 부분을 감시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 사회는 모든 부분에서 투명의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이쪽에서 주장하는 것도 정보였고 저쪽에서 주장하는 것도 정보였다. 정보가 넘쳐나고 있었고, 그 정보와 정보끼리의 난잡한 '난교' 현상에서 나는 책에서 말하는 정보피로증후군(IFS)를 느꼈다. 과연 이게 어떤 정보가 옳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됐다. 추이를 지켜보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하루가 지나면 몇 백가지의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나의 사유는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었었다. 그것은 정보들의 난교적 해석으로도, 그리고 책에서도 상징하고 있던 투명성이 극대화된 '포르노 사회'였다.

 

 판단과 사색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책에서 말했다. 그리고 정보는 즉각적이고 빠르게 전달된다. 우리는 투명성을 외치며, 즉각적이고 즉답적인 해답을 갈구한다. 그래서 판단과 사색의 기다림의 미학은 사회적인 가치로부터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에는 투명을 추구하는 우리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었다. 확실히 그랬다. 판단과 성찰 그런 지식적인 부분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사색이라는 가치도 그렇다. 그러나 정보는 그러한 기다림의 가치를 깔아뭉개고 있었고,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한 공간은 그런 정보를 우리에게 홍수처럼 쏟아붓고 있다.

 

 그러한 무차별적인 정보 속에서 몇몇의 인간은 익명성을 빙자한 악플을 달고 있었다. 책에서 말한 대로 그들은 격분하며, 어떤 대화도 논의도 불가능한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그 악플러의 격분에서 디지털이 야기한 병폐 중 하나인 전형적인 히키코모리적 나르시시즘 보이고 있었다. 그런 자들이 내뿜는 악플은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으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승냥이 때와 다르지 않았다.

 

 진정한 주권자는, 악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우리 사회는? 그러한 악플과 인터넷으로부터 자유로웠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였다.

 

'포르노 사회' 저자는 투명사회를 그렇게 지칭했다. 정말로 적절했다. 손뼉을 치고 싶을 정도로, 흔히 야동을 볼 때 가장 설레고 감정의 최고조가 됐을 때가 어느 시점일까?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여주인공이 옷을 벗을까 말까 하는 그 전희가 가장 설렘이 있었다. 벗기 전에는 나만의 상상이 가능하다. 나만의 해석도 가능하고, 기대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벗는 순간 그런 기대는 없어진다. 그리고 점점 벗은 모습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았다.

 

 포르노의 속성이 그렇다. 그것에 사랑이라는 것도 없으며, 심지어 전희라는 단계도 없다. 여자의 몸은 너무나도 투명하다. 에로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에로스에는 사랑이 있으며, 육감적인 사랑의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포르노는 그냥 투명한 것이다. 투명 사회가 그렇다. 너도나도 다 급하게 알려고 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무시된다. 그래서 빠른 정보를 우선시하고 난잡한 정보들끼리 난교가 시작된다. 깊은 사색과, 깊이 있는 생각은 멀어진다.

 

 포르노는 상품적이다. 투명 사회 역시도 그렇다. 보기 좋게 잘 전시된 정보나 매개체는 자본주의를 만나 저열한 상품으로 추구된다. 보기 좋은 것에서 우리는 획일화를 느끼고 다양성은 사라지고 있다. 좋아요가 많은 포스팅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온 국민이 원하는, 날씬하고 예쁜 몸매, 그것 역시도 어떻게 보면 다양성의 상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뚱뚱함의 미학, 그리스 시대의 조각품에 나오던 그런 미의 관념은 이제 사라졌다. 투명을 빙자로 포르노 사회는 모든 상품을 전시시키고 있었다.

 

 참사의 실존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너무나도 투명적인 이런 사태들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던 4월이었다.

 

 내가 페이스북을 관둔 것도, 익명성 커뮤니티 사이트를 내가 관둔 것도, 이 책에는 잘 설명돼져 있다. SNS의 모든 가치는 수량화 개량화로 귀결된다. 친밀감은 친구의 숫자로 판별되고, 자신의 가치는 좋아요의 숫자로 결정 난다. 리플은 자신의 인기로 귀결 난다. 그 속에 진지함이나 진득함보다는 무조건적인 가시적, 몰가치적인 부분만 있었다.

 

 디지털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도, 그리고 디지털 파놉티콘의 논의에 이어지는 전 국민의 프로토콜의 흔적의 삶도, 하이데거를 인용하여, 진득한 농부의 삶이 아닌,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사냥꾼의 모습이 된다는 책의 논의도 모두 공감했다.

    

 결국 내가 블로그를 하는 것 역시도, 내 나름의 소신 있게, 글을 쓰고, 표현하는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가끔은 댓글도 많은 이웃들의 블로그나 공감이 많은 블로그를 보면, 뭔가 돌아보게 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이런 부분도(좋아요의 관심, 댓글의 관심) 디지털 사회가 야기하는 중증이었다. 이 책을 보며 나 역시도 블로그에 대해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운영해야 하나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바르게 사용할 수 있나에 대해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런 그 모든 원론적인 부분엔, 과도한 긍정, 투명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투명성을 대표적으로 구현하여 나타나는 것이 디지털 문화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해답은?이라고 저자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저자는 문제만 진단하고 있을 뿐 해답은 주지 않았다.

 

 어쨌든, 해답의 부분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 없이, 스마트폰 없이 살아간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하다. 다만,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한 번쯤은 고찰을 해 봐야 한다. 그저 도덕 교과서 뒷부분에 나온 것 마냥, 정보화 사회의 문제점이라고 짤막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진지하게 우리의 인터넷 문화를 비롯한, 사회의 전반적인 투명성 가치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하겠다. 정치적인 부분, 경제적인 체제에 대한 부분, 사회적 현상 모든 부분에까지 심사숙고가 필요한 시점이긴 하다. 특히나 우리나라같이 디지털 강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이 문제는 더욱더 절실하다고 느껴졌다.

 

 어떤 사물이라도 흑과 백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투명성이라는 부분에 무비판적으로 백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확실히 이번 사태나 이런 부분에서 흑의 관점도 고찰을 해 볼 필요는 있다. 이 책은 그러한 화두를 던져준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그래도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투명화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저자의 말 대로, 정치의 속성은 비밀적이고, 공개적이지 않다는 부분도 동의한다. 인간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있는 동물이다. 나의 비밀은 공개하고 싶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비밀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모순이라 생각하겠지만,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투명성에 부정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찬성하지만, 정치적인 요소에서의 불투명성을 옹호는... 솔직히 선뜻, 손을 들어주기가 어렵겠다. 어쨌든 권력은 감시해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고자 많은 대가를 치러왔었다. 정치와 정책이 투명하여 보이는 정치, 즉흥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단점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공인이고, 국가권력이 집중된 자들이어서 감시를 하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것은 생각을 해 봐야 한다고 느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철학서들이 그렇듯, 조금은 궤변적인 부분이 있긴 하다. 그리고 내용 자체가 조금 어렵게 전개되는 부분도 있다.

 

 어쨌든 책의 논의가 재미있게 전개된다. 대립되는 두 축의 갈등의 야기, 긍정성과 부정성의 속성의 격돌, 그 사이에서 한병철은 부정의 가치를 현란한 수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은 적절한 시기에 배송됐다. 4월, 너무나도 아팠던 사건이 있었을 무렵 비를 뚫고 배송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서두의 아쉬움적인 부분과, 위의 속물적인 생각을 한 번에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만큼 책의 내용이 좋았었고, 다소 가성비적인 부분에서 고뇌를 하게 만드는 작고 적은 책이지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을 논설하고 있었던 책이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피로사회> 보다는 <투명 사회>가 더 현실적으로 와 닿았었던 것 같았다. 그만큼 책의 내용은 좋았다. 작고 적은 크기의 책이지만, 내용은 그 이상이다.

 

 

 

4월 이 책을 보던 시기, 참사에 마음도 아팠고, 그리고,

투명하고, 너무나도 투명하여서,

더 혼란스러웠던 한 달이었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여러모로, 깊은 성찰을

제시해 준 책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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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우현주 옮김, 김상근 해제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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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연휴의 대부분을 마키아벨리와 보냈다. 새로 번역된 <군주론>을 깊이 있게 독서했고, 이 책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와도 같이 보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의 후대 저작 중 하나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짧은 생애를 서술한 책이다. 카스트루초는 실존 인물로, 마키아벨리의 조국 피렌체를 침공한 용병 대장이자 군주였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은 굉장한 특징이 있다. 첫 번째로 그의 의도를 숨겨놓는 필법이 그것이고, 두 번째는 사실 관계에 대한 과장과 축소가 나타난다는 점, 세 번째로는 작품 내에서 대립각의 축이 나타나고, 어떤 가치관의 충돌이 항상 보인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이 작품 역시도 그렇다. 책은 실존 인물인 카스트루초를 객관적인 묘사로 사실 그대로의 그를 그린 것이 아닌 허구를 집어넣은 책이다. 즉 사실로서도, 주관적으로서의 역사서도 아닌, 말하자면 마키아벨리가 각색한 카스트루초의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용은 사실 단순하다. 비범한 카스트루초가 용병 대장으로 활동하다가, 본국 루카를 장악하는 과정, 그리고 옆 도시인 피사와 피스토니아를 점령하는 과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폴리의 지원을 받은 피렌체군을 섬멸하며 반도의 통일을 꿈꾸지만, 결국의 포루트나(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병사하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카스트루초가 양아들에게 말하는 유언 그것은 바로 마키아벨리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물론 읽으면서 우리와는 다른 문화와, 이탈리아 특유의 지명과 인명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 지식이 없어서 잘 읽히진 않았는데, 다분히 마키아벨리가 쓴 의도나 이 책을 통해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이해할 수 있었다.

 

김상근 교수의 해설은 뭐 무난했는데, 개인적으로 잘 못 느꼈다는 부분이 한국의 현실론적인 눈으로 마키아벨리의 이상적인 정치관을 이해하려고 해서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독과 편견이 생긴다.라고 한 부분.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이상론적이고 관념적인 눈으로 마키아벨리의 현실론적인 사상을 이해하려고 하니, 오독의 여지가 있다고 말이다. 이 부분은 사실 이번에 이 책과 더불어 봤던 새로운 역본 최장집 교수의 <군주론> 해설에 나오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이 해설이 더 와 닿았고 맞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논의는 <군주론> 서평에 남기겠다.)

 

그 외 다른 부분들에 대한 것은 무난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포르투나와 비르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결국 카스트루초는 강한 비르투 (역량을 비롯한, 여러 인간의 주관적인 의지 - 한국어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라 원어로 표기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다.) 를 가지고 있었지만 포르투나(객관적 운명과 상황, 수동적인 여성성 - 역시 마키아벨리의 비르투와 대립각을 세우는 개념으로 중요한 개념)를 극복하지 못 했다. 김상근 교수는 이 책으로 결국 비르투를 가지더라도 포르투나를 이길 수 없고, 포르투나에 대한 경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부분에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부분은 사실 후대의 자의적인 해석이 분분한 부분인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마키아벨리의 의도를 숨긴 필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밑에 자세히 다룸)

 

 일단은 첫 번째 궁금증, 왜? 그럼 왜? 이 역사적 인물을 이렇게 각색을 해가면서 전하고 싶은 주제는 뭘까? 또 한가지 모순은 우리는 사실 마키아벨리를 전제군주 옹호론자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 공화주의를 외치고 있다는 점, 그런 면에서 마키아벨리는 '겉으로는' 공화주의자다. (이 부분도 <군주론> 리뷰에서 심도 있게 다루겠다.) 그런 그의 대표적인 이중성을 보인 것이 바로 <군주론>이다. 그러나 그는 군주에게 호의와 희망을 걸었지만 결국 군주에게 불리지 않았고, <로마사논고> - 공화주의가 강하게 표출된 책.을 저술했다. 그런 그가 왜? <로마사논고>를 써 놓고 다시 전제 군주정의 예시 사례인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라는 책을 저술하여서, 전제 군주의 표상을 그리는 것일까? <로마사논고>를 저술한 마키아벨리는 스스로 공화주의를 지지한다고 직접적으로 밝혔었는데, 왜 공화주의에 입각한 영웅을 그리지 않았을까?

 

나는 책을 읽으며 정말로 궁금했다. 이 부분은 어느 책, 어느 해설에도 지적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이 부분에서 머물렀었다. 해답은? 아직까지도 나는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의도를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을 보면 볼수록 카스트루초는 마키아벨리가 선호하는 공화주의가 아닌 강력한 전제 군주의 모습이었다.

 

책의 영웅은 사실 '체사레 보르자'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즉 <군주론>의 모범적 모델, 실존적 인물의 모델이 바로 '체사레 보르자' 라면, 마키아벨리만의 관념적이지만 이상화된 모델은 바로 '카스트루초' 라는 셈이다. 카스트루초는 많은 면에서 체사레 화가 됐을 정도로 마키아벨리는 각색시킨다. 책의 카스트루초의 면모를 자세히 살펴보면 체사레 보르자의 일란성 쌍둥이라 할 정도로 닮아 있다는 점.

 

과연 <군주론>으로 실패하고, <로마사논고>로 공화주의를 열망하던 그가, 왜 다시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저술하면서 다시 전제 군주의 롤모델을 제시하고 보이고 있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 나는 과연 대체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꼬이고 꼬인 마키아벨리의 알 수 없는 얼굴에서 나 역시도 매력을 느껴, 그를 좋아하는 것이라는 것도 생각해봤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분명, 포르투나는 인간의 대부분을 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비르투를 통해서 포르투나의 홍수를 예비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포르투나와 비르투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은 반반이라고 정의하며, 비르투를 갖추고, 포르투나의 홍수를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다소 포르투나의 영향력에 대해 비르투의 역량을 강조하고 예방할 수 있다는 신념이 담긴 것이 <군주론>의 주장이다. 

 

그러나 <군주론>의 역사적 사례로 든 체사레 보르자는 결국 포르투나에 굴복했었다. 강한 비르투를 가지고도 실패했는데, 그럼 마키아벨리가 후대의 이상향으로 꼽은 카스트루초의 경우는 얼마든지 각색하여서 비르투로 포르투나를 이길 수 있는 스토리를 쓸 수 있었다. 진정 그가 <군주론> 본문에 입각한 비르투에 대한 가치를 드높이려면, 얼마든지 카스트루초의 일대기를 통해, 그 이상향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애당초 이 책에서 카스트루초에 대한 삶을 진실적으로 규명하지 않고 앞에서 밝혔다시피 자신의 생각에 따라 '각색'을 시도했기 때문에 책의 결론 따위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체사레와 같이 카스트루초도 결국엔 강한 비르투를 가지고도 포르투나를 극복하지 못하여 죽는,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 군주론의 본문에서 주장했던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관점과 실제 영웅 체사레와, 각색한 영웅 카스트루초의 묘사에서 나오는 주장(비르투와 포르투나에 대한 관점)은 전혀 상반된다. (물론 체사레의 경우는 실제 사례를 그대로 쓴 것이라 논외로 친다고 쳐도), 과연 그의 의중은 무엇일까? 그는 비르투로 포르투나를 최소화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인간의 의지를 중요시한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운명론자의 모습인 건가?

 

 분명히 책은 <군주론>의 이상적인 롤모델을 써 놓은 전기가 맞다. 따라서 <군주론>의 후속편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두 책 모두 마키아벨리가 지향하는 강력한 군주에 대한 논의가 담겨있으니까, 그러나 같은 사상을 지닌 두 책에서도 마키아벨리는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며, 과연 어디에 진실을 숨겨놓고 있는지는 독자의 몫으로 돌려놓고 있다. (이것은 모든 마키아벨리의 저서에 나타난 부분이다.)

 

책은 다소 작고, 적다. 그리고 담긴 내용에 비해서는 비싼 편이다. 147쪽에 11800원... 상당히 비싼 책임에는 맞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라서 국내 최초 번역이라 하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국내 최초의 원전 번역이라 해야 옳다. 왜냐면 옛날에 범우사에서 군주론의 부록에 카스트루초의 이야기를 담아서 냈기 때문이다. 물론 이중 번역본이겠지. 아무튼 이런 광고 문구에서도 아쉬움을 느꼈지만, 나는 이 책을 구매했다. 이탈리아어 원전 번역본이고, 예전의 카스트루초 이야기보다도 훨씬 가독성이 좋았기 때문에 예전 판본보다 이해하기도 더 수월했다.

 

책을 읽고 나서 마키아벨리의 초상을 봤다.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 과연 그의 진심은 무엇인 것일까? 한 권의 책 사이에도 모순적인 부분을 서술하고, 책과 책 사이에도 모순적인 부분을 제시하며, 전혀 다른 사상의 책을 내면서 어디에 진심이 담겨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저서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임에 틀림없다.

 

사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리고 사실 좀 재미는 떨어진다. 하지만 <군주론>과 이 책의 역학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왜 이 책을 저술했나? 과연 이 책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에 대한 부분을 생각한다면(김상근 교수의 해설이 있지만 사실 마키아벨리의 본심에 대해서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생각됐다. 르네상스 시대의 객관적 분석은 일리 있으나, 마키아벨리의 주관적 해석 부분은 따르지 않고 참고만 하길 바라는 바다) ,쉽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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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책,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2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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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의의가 있는 책이다. 일단 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매우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다. 중학교 때, 손무의 <손자병법>에 빠져있었다면, 고등학교 때는 <군주론>에 빠져있었다. 그만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나에게 있어서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한 권이다.

 

내 서재에 있는 책들 중 가장 많이 봤던 책이며, 가장 많은 손때가 묻은 책이 바로 강정인 역본의 <군주론>과 김원중 역본의 <손자병법>이다. 어쨌든 두 책의 성격은 지극히 현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관념적인 철학서들의 말장난 놀음에 비해 두 책은 명확하고, 인간에 대한 돌직구적인 성찰을 보이고 있는 책이다.

 

 우리 나라의 학계는 지금까지 번역을 위한 번역서들만 존재했었다. 사실 고전이라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는 정확한 번역을 위한 논의가 급선무고, 그런 번역의 노하우가 집중됐다면, 그 번역을 토대로 한 학자들의 주관적인 현대화적 해석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리고 학계 간에서 새로운 해석이나 동향 등을 최대한 친절하게 독자들에게 이해시켜, 전반적인 인문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 학자의 의무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 서양 고전은 좋은 번역서들이 대거 번역되지도 못했으며, 번역된 고전들도 원전 번역이 아닌 이중 번역이 대다수다. 따라서, 안 그래도 어려운 고전을 더 힘들게 읽고 있다. 동양 고전은 이보단 낫다. 최소한 한자문화권인 우리 문화 덕택에 전공자들도 많고, 번역서들도 대거 등장했다.

 

그러나 동양 고전 역시도, 아직도 자구 풀이의 의한 해석에 의한 해석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학자들이 쓴다는 현대화된 고전의 해설서들은 고전이 가지고 있는 깊은 철학적 베이스를 기초로 한 해석이 아닌 일반론적인 내용을 가지고 그저 상술에 입각하여서, 얕게 쓰는 경우가 대부분 작금의 현실이다. 이 원인에는 인문적 인프라를 정책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정부의 문제도 있겠고,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은 기피하고자 하는 소명의식의 부재도 있다.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들은 웬만한 고전은 자국의 언어로 번역이 다 돼있는 실정이다. (솔직히 이중 번역본 대부분은 일본에서 번역된 책이다. 이 부분만 봐도 우린 지금 엄청난 문화적 약소국 가임을 인정해야 한다.)

 

<군주론> 역시 마찬가지다. 엄청 유명한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오역과, 언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번역, 그리고 심지어 이 유명한 고전조차도 이중 번역본이 판치고 있었던 것이 얼마 전이었다. 그래서 강정인 교수가 소명의식을 가지고 <군주론>을 번역하고 번역하여,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이탈리아어 원전 번역 <군주론>을 가질 수 있었다. 수많은 <군주론> 번역서 중에서 까치 출판사의 강정인 <군주론>이 돋보이는 이유는, 그런 열정과 더불어, 똑바로 된 정본을 확립하게 됐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마키아벨리의 사상적 측면이나 깊은 철학적인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직도 <군주론>을 처세학의 교본, 간사한 기회주의자들의 교본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보고 있으며, 얕은 잔꾀와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책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런 주장과 맞서서, <군주론>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그들은 그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텍스트적인 처세학 내용에만 집중하여, 성급한 일반화로 현실성을 이야기하며 주장하는데, 사실 <군주론>이 현실적인 책임은 맞으나, 왜 현실적인 책인지, 어째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그러한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이 출간됐다. 나는 <군주론>을 많이 읽어봐온 입장으로 (아마 손자와 더불어 100번 이상 읽은 책은 두 책이 유일할 것이다. 예전에는 책 읽는 것에 집착하여 횟수를 기억했는데 100번 넘어가고 나서는 무의미하고 진득한 독서에 방해만 되는 것 같아서, 그다음부터 회독할 때는 세지 않았다.) 시중에 판매되는 모든 <군주론>을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웬만한 출판사의 <군주론>을 다 봤었고, 관련 서적이나 <군주론>에 입각한 처세서들도 거의 다 봐 왔었다. 그런데도 사실 <군주론>은 힘들었고 알아가기 힘들었다. 심지어는 정본이라 불리는 강정인 본 <군주론> 역시도 가독성 부분으로 볼 때,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르다. 이 책은 사실 이탈리아 원본을 저본으로 한 것 같지는 않다. 영역본을 많이 참고했을 것이다. (참고도서에 영역 본과 이탈리어본 두 개를 다 참고해서 번역했다고 하나, 사실 역자의 약력을 봤을 때, 영역본에 무게를 두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판본들보다, 더욱더 의미가 명확하고 특히나 마키아벨리 사상에 중요한 단어들의 개념 정립과, 번역이 주는 미묘한 단어들까지도 하나하나 고찰해가면서 책을 번역했다.

 

게다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모두 긁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군주론>을 읽어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몇 가지가 있였다. 우선 마키아벨리는 글을 아주 짧게 그리고 강하게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수많은 대명사가 등장한다. 따라서 이 대명사가 지칭하는 대목이 굉장히 헷갈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 장과 장 사이를 넘나들며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글이 짧더라도, 이해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었다. 이 부분은 마키아벨리의 필법이 주는 어려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군주론>은 이 대명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괄호를 통해 지칭하는 바를 알려준다. 따라서 한층 더 이해하기가 편리하게 구성됐다.

 

더불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원전의 단어를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비르투와 포르투나, 네체시타, 프루덴차 이 네 가지의 개념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이다. 그러나 한글로 표현하기가 참 어려운 단어들이다. 특히 앞에 저 비르투와 포르투나는 책의 핵심 중 핵심인데, 우리나라의 많은 역본들은 저 단어들을 역량, 운명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미묘한 어감 차이가 있는 단어들이 원문에 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기존 역본들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들을 모두 열거하며 상세하고 좀 더 세심하게 단어를 선별하여 번역하고 있는데, 굉장히 의미가 더 와 닿았었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배경 지식이다. 이 책은 사실 그냥 봤다간 그대로 멘붕당하기 쉬운 책이다. 마키아벨리의 시대 상황을 알고, 그리고 숱한 역사서에 인용된 영웅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은 알아야만 수월하게 책이 읽히는데, 기존의 역본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짧게만 언급하고 지나친다. 그러나 이 책은 상세한 인물 풀이를 시도하고, 또 전체적인 시대를 조감하며 설명해주기 때문에 (물론 자세하진 않지만, 이런 시도가 괜찮았다.) 책의 이해를 한층 더 돕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풍부한 이탈리아의 사진 지도 자료들과 세력들에 지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곁들였다.

 

박상훈 교수의 번역적인 장점을 총론 하면 '가독성' 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책을 가장 빛나게 하는 부분은 책의 해설이다. 최장집 교수의 해설은 그 어떤 <군주론>의 해석보다도 깊고, 가장 최근의 학계의 논쟁들까지 알기 쉽게 잘 설명해서, 서구나 다른 나라에서는 군주론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마키아벨리를 왜 오인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들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말은, 마키아벨리를 우리는 전제 군주제를 찬동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나도 솔직히 궁금했다. 왜냐면 나는 <군주론>을 봤을 때에는 마키아벨리가, 군주정을 옹호하는 것 같았는데 뒤의 저작인 <로마사논고>를 볼 때에는 '공화주의를 지지한다.'라고 주장하니, 도대체 어느 모습이 마키아벨리의 모습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책에선 이렇게 해설했다. '군주론 어디에도 마키아벨리가 군주정을 지지하고 체제를 옹호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로마사 논고에서는 직접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는 공화주의자였지만, 그가 처한 현실적 불가피성(네체시타)을 인식하고 그 해결방안으로 최적의 군주정에 대한 논의를 책으로 만든 것 뿐이었다.(프루덴차)

 

물론 네체시타와 프루덴차는 군주론의 개념인데, 내 임의대로 마키아벨리에 덧씌워본 해석이다.(결론 부분에 상세하게 설명해 보겠다.) 그럼에도 의문이 남는 것이 오전에 작성한 <카스트루초의 생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대체 그는 왜 <로마사논고>에서 공화정을 주장했으면서 그 뒤의 저작인 <카스트루초의 생애>의 주인공은 전제적 군주정의 주인공을 저술하고 있는가? 이것은 정말로 모순된 부분이었다. (아직도 이 부분이 참 궁금하다 그의 의중은 뭘까.)

 

아무튼 공화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을 가지고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케임브리지학파는 마키아벨리를 키케로적 (귀족적) 공화주의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다른 소정의 학자들은 민주적(시민적) 공화주의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런 학계적인 동향은 사실 소명 학자들이 좀 더 대중에게 연구 결과에 대해서 알려주고 지식을 공유해야 시민들의 인문적 지식이 높아지는데, 기존의 학계는 그런 전문적 지식은 그들만의 언어와 그들만의 시각으로 공유하고 그들만의 학문을 해 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사태에서 이런 심도 있는 해석과, 현대의 해석론에 대한 동향은 정말이지 돋보였었다. 신선한 해석이나 여러 부분에 대해서 나는 더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이랬다간 글만 길어질 것 같아서 자제한다. 아무튼 초독 상태로 이 해설을 보기엔 무리가 많지만 어느 정도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독자라면 최장집 교수의 해설에서 많은 놀라움을 발견할 것이다고 확신한다.

 

사실 리뷰의 초점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내용적으로도 마키아벨리 사상에서 느낀 점도 많았고, 이 책 자체의 의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었고, 우리나라의 고전계에서 내가 봤을 때, 큰 획을 그은 번역본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언급도 하고 싶었다. 어쨌든 그 큰 획에 대한 부분은 장황하게 설명을 했으니 이제 내용적인 부분으로 느낀 점을 짧게 서술하고자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주제는 뭘까? 솔직히 쉬워 보이고 잔인해 보이고 처세학적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정의하기가 굉장히 힘들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보며, 비로소 한 가지로 <군주론>의 주제를 정의할 수 있겠다.

 

'포르투나의 압박에서는 어쩔 수 없는 네체시타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군주(개인)이라면 그런 네체시타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프루덴차로 풀어나가야 하며, 그 프루덴차의 원동력에는 결국 비르투가 존재해야만 한다.'

 

포르투나는 객관적 운명, 조건, 수동적 영향, 여성성을 상징하고

비르투는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주동적인 역량, 의지, 힘, 남성성을 상징한다.

네체시타는 어떤 일에서 파생되는 불가피한 일을 뜻하고

프루덴차는 그 불가피성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대처하는 실천적 이성을 뜻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상, 모략적이고, 음험한 사상의 군주론의 부분은 네체시타에 대응하는 프루덴차의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걸 느꼈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네체시타에 대응하는 프루덴차는 여라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인자한 방법을 써야 할 때는 인자해야 하며, 잔인해질 때에는 잔인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사의 보편적이고 역사적 관점을 봤을 때 잔인한 방법을 행해야 했던 것이 더 많았고, 기존의 세속은 그 가치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군주론>을 통해서 그 부분을 소상하게 밝히려고 했었다. 이런 부분으로 볼 때, 우리가 이해했던 마키아벨리의 모습은 그가 주장했던 프루덴차의 한 방법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의 책의 가장 모순된 점, 1장부터 25장까지는 혐오스럽고 차갑게 논의가 전개되다가 26장에는 굉장히 뜨거운 기운으로 열변을 토한다. '이탈리아를 야만인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권고' 이 장에서 마키아벨리는 열변을 토한다. 자기가 지금까지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고 혐오스럽게 이야기 한 것은 강력한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서였다고, 그렇게 부르짖는다.

 

그것은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현실론적으로 메디치가의 참주가 결정됐다는 사실(네체시타)를 인지하고 그 군주를 위해, 혹은 백번 이타적으로 생각하여 스스로의 정치 복권을 위해,(사실 둘 다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올바른 군주제에 대한 논의를 <군주론>에 담은 것이었다.(마키아벨리의 프루덴차)

 

<군주론>의 모순,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자가 외치기엔 너무나도 모순적인 책. 그래서 그의 대표적인 사상을 담은 <로마사논고>보다도 더 가치있게 돼버린 <군주론> 그 <군주론>때문에 숱하게 오인받아왔고, 오해받아온 그

 

그러나 <군주론>은,

 

그의 불행한 운명(포르투나)에 대응하기 위한 마키아벨리 스스로의 의지(비르투)였다.

설사 관직을 잃고, 매국노로 찍히며, 교형을 당하면서까지 불행을 겪고 무직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생계가 불투명해진 그였지만,

 

조국 이탈리아가 프랑스와 에스파냐, 그리고 독일로부터 찢겨 울부짖고 시름하는 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그만의 공화주의적 가치를 담은 책과 그의 사상과는 다르지만 참주의 가치를 담은 책 두 권을 저술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두 권의 책은 모순되지만, 그 두 권의 책을 쓸 만큼 마키아벨리는 조국에 대한 신념이 뜨거웠다. 그것은 그의 비르투였고, 그것은 그의 최선의 프루덴차였다.

 

고전이란 이런 깊은 철학적인 사상이 담겨있다.

이런 깊은 이해 없이 자구 풀이를 가지고 일반론적으로 성급하게 풀이한다는 것은 텍스트를 오독하는 것이고, 그것은 고전에 대한 무례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그래서 가치가 있다.

한층 더 발전된 번역서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서,

그리고 또 이 책에서 참고했다는 곽준혁 교수의 <군주론> 해설서인 <지배와 피지배> 역시도 관심이 갔다. 곽준혁 교수는 일반적 학계의 논리보다는 스스로의 관점에 입각한 해석을 시도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발전된 우리나라의 인문주의를 느꼈다. 반드시 저 책도 사서, <군주론>과 함께 찬찬히 음미하며 사색하며 생각하며 읽어보고 싶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군주론>에 대한 체계를 정리해보면 이렇게 추천하고 싶다. 먼저 마키아벨리의 평전을 한 권 읽기를 바란다. 무조건적으로 읽어야 한다. 시대상황을 모르면 <군주론>의 논의를 따라갈 수가 없다. 평전을 다 읽으면 이 책의 <군주론> 텍스트를 읽기를 권한다. 찬찬히 읽으며 <군주론>의 내용을 음미한다. 해제는 텍스트를 다 읽고 나서 읽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강정인본의 <군주론>과 곽준혁 교수의 <지배와 피지배>를 동시에 읽길 권해본다. 이 정도의 심화 독서가 이뤄지면 적어도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대해서 오독하거나 오해하는 우를 범하진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나는 <손자병법>의 해설서, 리링 교수의 <유일한 규칙>을 리뷰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 병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조예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겸손해졌었다. 그리고 그의 책에서 배운 것들이 아주 많았다. 국내에서 출간된 <손자>는 많고 많지만, 내가 볼 때 그 책만이 가치가 있었었다. 국내의 책들은 아직도 번역적인 부분에서 싸우고 있는데, 그 책은 한층 더 나아가 해석학적인 부분과 고문적인 부분까지 고찰하고 있었고, 독자적인 해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스승처럼 생각하고 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또 다른 필독서인 <군주론>에서 이렇게 좋은 해설과 역본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뻤다. 더구나 유럽이나 다른 학자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이런 번역과 해설을 달았다는 사실에 나는 무한하게 자부심을 느꼈었다.

 

끝으로 한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현실의 정치에 가치에 대해서 생각을 하며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정치서고, 현실 정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현실 정치와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라면 그것은 고전이더라도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나 이 책은 현실 정치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을 남기는 책이다. 따라서 책을 보며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많은 부분이 보였다. 명분과 도덕주의에 입각한 우리나라의 정치가 보였다. 마키아벨리가 토로하던 부적절한 상황들에 대해서도 현실의 가치에 비춰서 생각도 해 봤다.

 

가장 마음에 와 닿던 말은 마지막 장이다.

 

이탈리아인을 검투사로는 1:1 싸움으로는 강한데, 뭉쳐 놔서 전쟁을 하면 다른 군대에 비해 약하다. 이 뜻은 민중은 좋은 자질이 있으나, 항상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군주는 등장하지 않았고 그것은 모든 민중을 타국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가 생각났다. 개개인이 뛰어나지만... 군집성에서는 약한 부분.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리더십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도, 누구나 리더를 꿈꾸고 되려고 하지, 내실 있는 리더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는 사람은? 과연 이 시대에 몇이나 존재한단 말인가? 그 부분도 깊이 생각했었다.

 

 

여러 가지를 느낀 책이다.

아주 좋은 번역, 그리고 아주 좋은 해설, 흠잡을 곳이 없는 군계일학의 책이다. 단 한 가지 흠을 잡자면, 책의 퀄리티가 내용과 해설을 못 따라간다. 이런 책은 응당 양장으로 내야만 한다. 쓸데없는 잡서들보다 이런 내실 있는 책을 양장으로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다소 실망스럽게 나온 책의 퀄리티 때문에 나는 이 책에 겉지를 씌웠다. 그만큼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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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군 2014-05-07 14:59   좋아요 0 | URL
아 예 ㅎㅎ... 괜찮습니다. 가급적이면 http://blog.naver.com/bosom86/209407194 이쪽으로 노출해주셨으면 합니다 ㅎㅎㅎ... 제 개인블로그거든요
 
병경백자
게훤 지음, 김명환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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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이한 책이다. 나는 고전 중 특히나 군사학 고전이 나오면 따지지 않고 바로 주문해서 본다. 군사 모략이나 계략 등이 재미있기도 하고 실제로 동양 철학 중 가장 현실적인 부분이며, 전쟁이라는 것이 사실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많기에 병서를 보며 여러 생각을 하지 않나 싶다.

 

 

기존의 우리 출판계에서는 병법서라고 하면 서양 쪽은 클라우제비츠의 병서 <전쟁론>에 중점적이고 동양 병법서는 <손자병법>을 중점적으로 번역한다. 두 책 모두가 가치 있는 책인 건 알겠다만,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풍토가 아쉬웠었고, 저 영향력 때문에 다른 고전들이 대중에게 소개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있다. 특히나 서양 병법서들은 거의 번역이 전무하고 근세 이후의 병서들만 번역하는데, 그리스나 로마 시대 때의 고대 병서들도 번역이 됐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반면 동양 병서는 너무 고대에 치우쳐서 아무래도 근세 이후의 명 청대의 병법서는 번역되지 않는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이 <병경백자>는 아주 반가운 책이었다. 지은이는 명-청 전환기를 살았던 게훤이라는 자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 사람이 수학에 능통했다는 것이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서 수학이 비교적 덜 발달했다. 서양은 고대 플라톤 이래로 수학을 중요시하는 전통이 있었고 모든 학문의 기초엔 수학이 있었다. 수학이란 부분은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동양의 여러 사상과들과는 조금 다른 이성적인 면에 치우쳤으며, 실제로 그가 쓴 병법서인 <병경백자>에 수학적으로 군사를 계산하여 공격과 수비에 대한 부분을 서술한 것이 있었다. 이런 부분은 대략적인 수치로 서술해온 동양의 고대 병서에 비해 실증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책의 구성은 문자 그대로 100글자에 입각하여 병법을 풀이한 책인데, 비슷한 예로 명나라의 유기의 <백전기략>을 들 수 있겠다. <백전기략>은 백 가지의 모략이라는 뜻으로 백 가지의 모략을 서술한 것이 특징이라면, 이 책 <병경백자>는 100가지의 글자를 테마로 제시하고 그 글자에 입각하여 전쟁의 여러 면모들을 고찰하는 방식으로 서술했다는 차이가 있다.

 

 

동양 병법서의 특징은 일단 간결하다는 점인데, <병경백자>역시도 간결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손자병법>을 비롯한 여러 병법서들과 주제 면에서는 크게 특출난 부분은 없었다. '병법은 속임수'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진 않지만, 고대 병서에서 보이는 미신적인 부분이나 형이상학적인 표현 등이 없고 다소 문체가 짧고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나 고대 병법서에 비해 어려운 표현들을 쉽게 설명하려고 서술하고 있었다.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병법 읽기'라는 장이었는데 그는 여기서 주장한다. 모든 병법은 그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읽을 때 비판적인 자세를 요구하며, 틀린 내용은 수정하고, 현실 상황에 맞지 않은 부분은 고쳐서 바로 인식하여야 한다.라는 주장은 깊이 공감했다. 그가 이 <병경백자>를 쓴 이유도, 고대 이래로 흘러내려오는 병법서들의 정수를 모아서 다시 현시대에 맞게 재정립한 의도도 보였었다.

 

 

쉬운 예로 기본적으로 <손자병법>에 나오는 군략과 모략에 대한, 부분과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추상적인 이론을 구체화시키는 서술을 했으며 <오자병법>에 보였던 병졸들 간에 편성에서 노비나 범죄자들로 구성된 병력을 만들어 그 부대는 공명심을 내세워 다스려야 한다는, 심리적인 기교론까지 포함하여 적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손자병법>이 왜 그렇게 칭송을 받는가? 사실 <손자병법>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병법 이론을 한 곳에 모아 재정립하고 종합적인 고찰을 지닌 부분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런 부분에서 <손자병법>은 동양 고대의 병법 이론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찬가지 부분에서 본다면 이 <병경백자>는 고중세 이래로 흘러나오는 병법 이론들을 그 시대에 맞게 재정립한 종합적인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게훤 특유의 실사적인 시각이 돋보여서, 신선한 부분도 보이긴 하다. 아무튼 책을 읽어봤을 때, 특이사항보다는, 종합적으로 잘 요약했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더불어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게훤은 군략과 모략, 그리고 병력뿐만이 아니라, '말'에 대해서도 중요성을 인식했다. 이 부분도 되게 재미있는데, 동양과 서양의 차이 중 동양은 말에 대해서 아끼는 것이 능사라고 주장했고 서양의 경우는 수사학과 논리학이 굉장히 발달했다. 서양 사람들은 군인은 병법을 알아야 하고 문인은 말과 논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말이라는 것은 문인의 칼과도 같다는 그런 주장을 했다. 즉 동양과 서양은 말의 중요성을 둘 다 인식했지만 동양은 그것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자제하는 입장이었고, 서양의 경우는 그런 중요한 말을 조리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게훤은 신기하게도 서양의 가치관적인 생각을 했다. 그는 전쟁에서도 말의 중요성을 알고, 말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따로 기록할 정도로, 깊이 있게 생각했었다.

 

 

특이한 점은 그런 부분이며, 재미있는 것은 모략이나 계략 등의 이야기를 할 때, 미인을 이용하는 방법이나 적장을 꾀어낼 때 뇌물을 이용하는 방법 등, 선대에 하나씩 빠졌던 부분들을 모두 총괄하여 서술하고 있었다.

 

 

특히나 책 자체가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전쟁의 진법과 같은 세세하고 구체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기보단 전쟁의 큰 흐름과 큰 방도에 대한 물줄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점에서는 동양 전통의 병법서의 체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책을 보다 보면 고대의 병법서에는 두루 뭉실하게 기교를 부려야 한다는 부분들을 <병경백자>에서는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가령 대놓고 군대를 이끄는 장군은 때론 적에게 허세를 부려 적을 혼란에 빠트릴 수도 있어야 한다.라고 명확하게 말하는 부분 등은 전대의 병서에서 두루뭉술하게 형이상학적 도교 사상을 차용하여 설명한 것을 좀 더 구체적이고 간결화하여 서술하고 있었다.

 

 

책이 굉장히 짧은 편이나, 굉장히 흥미가 있는 책이고, 재미가 있었다. 특히나 우리나라 옛날 독서계에서 병법서는 중국의 병서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고 특히 무경칠서라 위시되는 <손자> <오자> <육도> <삼략> <사마법> <울료자> <이위공문대> 7권의 책만을 경으로 높여 칭송하였다. 지금도 번역서들은 <손자>가 가장 많으며 많아 봐야 위의 무경칠서 7권과 <손빈병법>, 제갈량이 지었다는(모작일 가능성도 많음) <장원>,<편이십육책>, 그리고 명대의 유기가 쓴 <백전기략>, <삼십육계>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그래서 사실 아쉽고 아쉬웠는데 이런 신선한 병서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특히나 저번에 리뷰를 했던 <오자서병법>과 같은 책은 짧은 원문을 가지고 처세학적인 해설을 뻥튀기하여 쓴 책이라 신선함과 한계가 둘 다 있었는데, 이 <병경백자>는 오로지 순수하게 충실한 번역으로만 이뤄진 책이다. 내용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자면 <오자서병법>은 굉장히 역학적이고 음양학적인 부분을 차용한 병법서인데 반해 <병경백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책이고, 미신이나 허황된 이론 등을 배격해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다소 책 장수에 비해서 값이 높다는 점이 있지만, 글항아리 출판사의 책이 다소 가격이 좀 높은 감이 있지만, 양장본인데다 깔끔한 표지 등이 돋보여서 서슴 없이 책 가격을 지불할 수 있었다.

 

 

인생이란 것은 전쟁을 닮았지만 모든 부분이 전쟁과 같을 순 없다. 병법이란 것은 전쟁을 타파하기 위한 계략이며 모략의 일종이다. 모든 병법의 주제는 속임수다. 적을 어떻게 속여서 내가 이길 것인가. 모든 병법의 주제는 그렇다. 그렇기에 인생의 모든 부분을 그렇게 처세적으로 다룰 순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이런 처세를 모르고 살아갈 수도 없다. 세상은 도덕으로만 살 수도 없으며 모략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 둘 다 적절하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하니, 병법에 지혜를 무용지물로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병법에 나온 처세적 부분을 응용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도 병법서가 각광받는 이유는 선현들의 지혜가 아직도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데,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모쪼록 신선한 책이었고, 신간이지만 뜨자마자 바로 구매를 한 책이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 병법서를 좋아하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도 좋은 내용으로 이뤄진 책이 아닌가 싶다. 만족도가 아주 좋았던 책이며, 특히 권모나 모략, 병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일독이 아닌 필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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