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중용 동양고전 슬기바다 3
주희 지음, 김미영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이란 텍스트는 나에게 굉장히 의미가 있는 텍스트다. 나는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 했을 때나 의식적으로 나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다잡아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항상 봤던 책이 <대학> 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대학>을 계속해서 봤었다. 유가의 많은 경전들 중 내가 <대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어린 시절 내가 사서 중 가장 싫어했던 책은 <맹자>였고, 가장 좋아했던 책은 <대학>이었다. <맹자>는 가장 분량이 많고 다소 복잡한 정치철학에 대한 논의가 많았었다면, <대학>은 분량이 가장 짧았고, 문체도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량이 가장 적었기 때문에 빠르게 본다면 한 시간 내에 전문을 다 독파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나거나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이르렀을 때 의식적으로 <대학>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분노했을 때는 글이 주는 뜻을 따라가지 못하고, 눈으로 글에 머물기만 했었던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주기적으로, 읽다가 보면 나의 노기는 눈 녹듯 사라지곤 했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대학>의 힘이었다. 글을 차분하게 읽다 보면, 마음의 중심을 잡게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반복해서 읽다, 내 마음의 파도가 사라졌을 때 책을 덮고 잠을 청하곤 했다. 그것이 나의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한동안 <대학연의> 독서에 열중이었다. <대학연의>를 볼 때 나는 항상 <대학>을 가까이 두고 같이 읽어나갔다. 오늘도 따로 <대학>을 읽었다. 분노한 나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대학>을 읽었다.

<대학>이라는 책은 유가 경전의 가장 첫머리에 위치한다. 주희는 이 책을 엮으면서, 왕을 비롯한 사대부의 자제, 그리고 성인이 된 남자들, 배움에 탁월한 이들이 첫 번째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했다. '사서'라는 체계를 집대성한 주희. 그 주희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편찬을 한 것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이라는 경전은 독립된 책이 아니라 원래 <예기>의 한 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대학>을 독립적으로 한 책으로 엮어서 유학의 도통을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주희였다.

책을 읽으며 왜? 주희가 이 책을 유학 가르침의 첫 번째 교과서로 선택했을까라는 물음이 일어났다. 그 해답은 <대학>이라는 책은 유학이 추구하는 공부 방법론과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유학의 핵심 이념과 더불어, 어떻게 그 핵심 이념을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책이었었다. 더불어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선 유학의 경전들 중 <대학>은 지극히 짧고 간결하다. 문체가 간결하며, 부피도 적다. 

그러면서도 내용이 상당히 깊다. 독립된 격언들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좋은 구절들이 많지만, 그 독립된 격언들이 모여서 한 챕터를 이루고, 그 챕터들은 의미군을 형성하고 그 의미군들이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커다란 유학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대학>이다. 더불어 이런 체계성의 장점과 간결함이 합쳐져서 처음 유학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가장 제격의 입문서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뭐 일반론적으로 유학의 중심 이념은 '인'이며 등등의 그런 일반화된 사상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유학 서적을 읽으며 느낀 것은 세 가지다.

1.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큰 것으로 나아간다.
2. 우선 나를 돌아본다. 
3. 선함을 추구한다.

<대학>은 이런 유학의 정신을 가장 간결하게 핵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고전이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것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모든 유학의 핵심적인 사상이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가정을 돌보고, 그리고 치국을 행하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이런 유학의 이념을 잘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논어>와 <맹자>, <중용> 역시 이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수신 이전에 인간이 행해야 하는 부분들까지도 고찰하고 있다. (격물치지, 성의정심) 그래서 대학은 선택받았다. 유학의 이념을 한층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 <예기>라는 경전의 한 편이, 사서의 첫 경전으로 격상되었다. 그것이 <대학>이었다.

<대학>을 한 구절로 압축해보면 '삼강령을 팔조목으로 실천하라'라고 할 수 있다. 삼강령은 유학에서 추구하는 정신의 3가지의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를 말해보자면, 나 자신의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교화하며, 사회를 지극한 선에 머물게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이 우선 나부터 덕을 밝힌다는 부분, 즉 작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행하고, 나 자신이 그렇게 행하고 나서야 남을 교화하며, 그것은 결국 사회를 선한 곳에 머물게 한다. 이것은 내가 앞서 말한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것으로 나아간다, 우선 나를 돌아본다, 선함을 추구한다.라는 세 명제를 만족하고 있다.

그럼 이 삼강령을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대학은 친절하게 구체적 방법론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사물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앎을 확장해나간다. 앎을 알아가며 나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마음의 방향을 올바르게 만든다. 그렇게 내 마음을 다진 후에야 내 몸을 닦고, 가정을 바르게 하여, 나아가 사회생활에서 발분하며, 평천하를 이룬다. 이것을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 치국 -평천하) 8가지 조목으로 나눠서 설명했다. 이것이 팔조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본 이 역본은 주희가 해석한 <대학>의 번역을 존중하여 해석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자학의 관점이었다. 훗날 명나라의 왕수인은 이런 주희의 <대학> 해설에 반발하는데, 여러 가지 부분들의 해석상 차이가 있지만 팔조목 부분의 비판을 보면, 주희가 말하는 격물치지 이후에 성의정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비판하였다. 왕수인은 굳이 격물치지(사물을 탐구하여 앎을 넓힌다.)와 성의정심(나의 의지를 성실히 하고 마음의 방향을 올바로 잡는 것)을 단계별로 볼 것이 아니라 통합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장으로는 성의정심을 이룩하게 되면 굳이 격물치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며, 사물 탐구(어떠한 대상)로부터 마음을 다지는 주희의 사상을 비판하며, 마음공부의 우위성을 주장했었다. 즉 그의 사상으로는 격물치지는 마음 외부의 대상의 탐구에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면 올바른 마음 수양으로 가는 것에 번거로울 수 있다며 격물치지보단 성의정심의 우위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왕수인은 훗날 주자학과는 다른 양명학 학파를 일궈낸다.

개인적으로 나는 주자학의 관점도 양명학의 관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주자학의 관점으로 팔조목을 지금 시대에 발맞춰 해석해본다면, 어린아이가 태어나 탐구를 시작한다. 그 탐구라는 것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고(격물), 직간접적인 관찰과 지식의 탐구는 결국 아이의 뇌에 앎을 확장하게 만든다. (치지) 그러한 앎과 지식이 축적됐을 때 아이는 성장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의지의 다지게 되며(성의), 그러한 의지로부터 나의 마음의 방향을 바로 세우게 된다. 이 마음의 방향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한 사상, 관념 등이 어느 정도 고착화된 것을 의미한다. (정심) 이렇게 한 개인이 마음이 체계가 잡히게 되면 스스로의 스펙을 쌓고 (수신), 가정을 일궈 아이를 낳게 되고 가정을 잘 꾸리며 (제가), 사회생활에서 원활하게 활동을 하며(치국), 자신이 맡은 바에서 최고의 결과를 내는 것(평천하)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왕수인의 관점을 존중해본다면, 사물(어떠한 물체)의 탐구와 앎을 확장하는 것에 너무 지나치게 되고 그로 인한 그 앎의 지식이 체계가 잡히지 못하고 방향을 잃는다면, 나의 의지를 다지는 것과 내 관념의 방향을 잡는 것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모든 수신의 중심은 결국 나의 의지를 바로하고 마음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며, 격물치지 역시도 큰 관점으로 본다면 성의정심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이 체계화한 학문의 방향 방법, 팔조목을 지금 시대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생각은 나도 없다. 하지만, 대학의 이 팔조목을 바라보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둘러보게 됐다. 격물과 치지에 너무 힘써서, 지식이 충만한데도 마음의 방향이 없는 사람, 애초에 격물과 치지(공부)에 힘쓰지 않는 사람, 잘 배운 교육 덕분에 격물과 치지가 충만하나, 성의정심이 이뤄지지 않는 사람, 등등 현대 사회의 각박한 사람들의 자화상을 이 팔조목에 대입하여 생각해 봤었다. 그리고 그 자화상들이 내는 결론은 결국, 우리 사회 사람들은 '마음공부'가 부족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대학>이라는 텍스트는 사실 지극히 짧은 글이지만, 풍부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대학>을 보며 진덕수는 <대학연의>라는 방대한 저작을 탄생시키기도 했으며, 역대 사상가들은 <대학>의 해석을 두고 찬반양론이 있었었다. 

책을 보며, 주희의 고민이 여실히 느껴지는 듯했다. 같은 사서라도 <논어>와 <맹자>와 <대학> <중용>은 달랐다. <논어>는 유학의 창시자 공자의 맨얼굴을 내 보인 경전이고, <맹자>는 유학이 추구하는 정치철학이 담긴 책이다. 수당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위기를 맞았다. 성행하는 불교와 도교의 이론 앞에서 주희는 고민했다. 유학 역시도 이대로는 안된다. 기존의 <논어> <맹자>와 6경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불교와 도교를 누를 수 있는 '강력한' 이론서가 유학에서도 필요했다.

<대학>은 그런 유학의 이론에 체계를 제시하고 있어서 선택받았고, <중용>은 그런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발견할 수 있어 선택받았다. 그리고 주희는 이 두 가지 책과 <맹자>와 <논어>를 '사서'라는 체계로 완성하였다. 그렇게 <대학>과 <중용>은 유교를 더욱더 깊이 있게 심화하였다.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사물에 대한 탐구는 진지하지 못 했다.'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앎은 깊지 못하다.'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의지는 굳건하게 다져지지 못한 것을'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마음이 바로 서지 못한 것을'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마음을 다지지 못하여 수신을 하지 못한 나의 몸뚱어리를'

그랬다. 그래서 분노에 감정에 이를 때, 나는 <대학>을 부단히 읽었다. 나 자신이 반성을 해야 할 때 부단히 <대학>을 읽었다. 그리고 평정을 하고자 노력했다. 사물 탐구를 좀 더 진지하게, 앎을 좀 더 지극하고 깊게, 의지를 더욱더 굳건하게 다지기 위해, 나의 마음의 관점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렇게 수신하기 위해, 앞으로 제가를 할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사회에서 좀 더 충실한 내가 되기 위해, 그리고 내가 맡은 곳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그런 나를 꿈꾸며 반성하며 책을 읽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모두가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특히 10장 치국평천하 장에서, 재물에 대한 관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지도자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점은 경제적인 이익이다. 국익을 내 대수의 국민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해야 하고 그 방법에는 경제적인 이익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이런 경제적 이익 추구에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부분은 수용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대학>의 관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면,  재물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하며 명문을 우선시(대학의 관점) 하지 말며, 이익을 추구하되 명분과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어쨌든 현대 사회의 무조건적인 성과주의와 이익 추구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유학에서 말하는 부분도 부분적으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됐었다.

확실히 유학이라는 관점은 치국으로 나아가면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맹점이 많이 보인다.(무조건적인 선의 추구, 경제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명분론 등등) 그것을 <대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수신의 영역으로 바라볼 때는 굉장히 좋은 격언들이 많다. 유학이라고 해서 좋은 것만 있지 않으며, 또 무조건적으로 배격할 사상은 아니라는 부분도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불만점은 <시경>의 인용문이었다. <대학>에서도 다른 고전들의 인용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시경> 인용이 가장 많다.  각 장의 마지막 부분들을 <시경> 인용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시의 인용으로 가져오는 서술상 특징이라면 함축적이며, 경구문으로 완결할 때 보다 좀 더 많은 여운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은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게 공을 들이고 그런 해석상의 여운의 의도가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용과 구성이 의미하려는 주제가 와 닿지는 않았다. 그냥 돌려 시로 표현하지 말고, 짧고 간결한 경구문으로 표현했으면 어떨까 싶은 아쉬움도 있었다.

 
 자질구레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나에겐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고전이며, 최근 <대학연의>를 읽으면서 <대학>의 체계와 <대학>의 내용에 대해 더욱더 심취했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와 닿은 구절 한 구절을 끝으로 리뷰를 마칠까 한다. <논어>는 이미 작성했고, <중용>과 <맹자>는 다음 기회에 다뤄보도록 하겠다.


<대학> 전 10장 治國平天下 中

 자신이 아랫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윗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 뒷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앞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뒷사람에게 먼저 하도록 시키지 말며 자신이 앞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뒷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앞사람을 따르지 말라. 또 자신이 왼쪽에 있을 때 오른쪽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왼쪽과 사귀지 말며 자신이 오른쪽에 있을 때 왼쪽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오른쪽과 사귀지 말라 이것이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헤아려 보는 도'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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