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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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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재미있는 책이었다. '치킨'이라는 먹거리는 요즘 대한민국의 국가공인 마약이라고까지 알려진 먹거리다. 식욕이 없거나, 밥 먹기 귀찮을 때,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때, 1순위로 생각나는 것이 '치킨'이다. 여기에 맥주까지 곁들인다면, 흔히 말하는 환상의 '치맥'이 완성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러 사람의 기호를 만족시킬 수 있는데다, 아이들에겐 콜라를, 어른들에게는 맥주만 있다면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바로 우리나라의 '치킨'이다. 저자는 이런 치킨에 대하여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책은 평이하게 잘 읽혀나갔다. 음식을 주제로 한 인문서는 내 개인적인 느낌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분야의 인문서들보다도 진입 장벽이 친숙하고 부담이 없는 느낌이다. 이 책도 그랬다. 평이한 서술과 그러면서도 조곤조곤하게, 치킨과 치킨을 둘러싼 모든 부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책에는 치킨에 대한 유래와 치킨에 대한 역사를 시작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치킨에 대한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나라에서의 치킨의 역사,(백숙 - 전기구이- KFC를 시작으로 후라이드의 전성시대 - 양념치킨 - 그리고 다시 후라이드), 후라이드치킨의 종류(크리스피 치킨, 엠보 치킨, 민무늬 치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치킨과 맥주의 그 필연적인 만남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시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롯데 마트의 통큰 치킨'과 '대구 치맥 페스티벌', '조류 독감'에 대한 치킨 업계의 실태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장의 '치킨집 사장으로 사는 것은'이라는 대목과 마지막 소챕터의 '양계유감' 즉 하림이라는 기업의 횡포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싶다.

 

책은 치킨이라는 문화적 콘텐츠를 가지고 통시적으로는 치킨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한국의 치킨의 발자취를 고찰하고 있었고, 공시적으로는 현대 치킨의 현황을 살피며, 프랜차이즈화, 기업화된 치킨의 현 실태와 그에 따른 부분들을 고찰하고 있었다. 즉 전자는 정보제공이라고 할 수 있겠고 후자는 치킨으로 알아볼 수 있는 현재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의 최종적인 칼날은 '자본주의화' 된 프랜차이즈 치킨의 부작용을 향해 겨누고 있었었다.


내가 성인이 된 시점에는 이미 치킨이라는 존재가 사회에 '보편적으로' 들어왔던 문화였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책에서 말하는, 명동의 전기구이 치킨도 생소하며, 사실 KFC도 친숙하지 않다. 내가 친숙한 브랜드는, 교촌, 네네치킨, BBQ 등의 상업주의의 끝판왕을 달리는 프랜차이즈 치킨들만 각인되고 있었다. 그래서 치킨의 역사를 읽을 때, 공감을 하기보단, 내 이전 세대가 이런 치킨들을 먹어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있어 치킨이란 '크리스피 치킨' 만이 유일한 후라이드치킨이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엠보 치킨', '민무늬 치킨'을 보며, 후라이드치킨이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런 '엠보 치킨'이나 '민무늬 치킨'의 존재를 알더라도 쉽게 먹을 수 있지 않다. 이미 시장은 '크리스피 치킨'에 장악당했으니까,

 

치킨과 맥주에 대한 고찰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치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맛은 원재료인 닭의 맛보다는 '튀김'의 맛이다. 뜨겁고 바삭한 맛의 치킨에 원재료의 닭 맛은 중요하지 않는다. 그저 닭은 냉장육, 국내산 닭이면 오케이인 것이 치킨의 현주소다. 맥주 역시도 특유의 보리 식감을 느끼기보단, 과한 탄산과 차가운 맛으로 원 재료의 맥주 맛을 느끼지 못한다. 닭의 느끼함, 그리고 튀김의 느끼함을 강한 탄산을 가진 차가운 맥주가 잡아주는 시스템, 그것이 바로 치맥의 탄생 비결이었다. 그 맛의 비결 앞에 너 나 우리 할 것 없이 중독되어 갔다고 책은 설명한다. 맥주를 못 먹는 어린아이는 맥주 대신 콜라를 먹는다.

 

 책을 읽으며 정리해 보건대, 치맥의 본질적인 맛은 닭의 맛과, 음료의 풍미 짙은 맛이 아닌, 뜨겁고 바삭한 기름 맛과 그것을 중화시키는 차가운 탄산의 맛, 그것이 본질이었다. KFC가 우리나라에서 기를 못 편 것도 치킨에 짝꿍인 맥주를 판매하지 못해서라고 분석하는데 일리 있는 말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비평을 담고 있는 2장, 2장의 주제는 프랜차이즈 치킨점 사장들의 고뇌와 일상을 담고 있었다. 대기업을 다니는 친구도 숱하게 술자리에서 지껄이는 말이 이것이다. '임원이 되지 못하면 퇴직금 두둑하게 받아서 닭이나 튀기며 살아야지.' 그 녀석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기업을 위해 평생 '을'의 입장으로 일했으나 '갑'의 입장인 임원이 되지 못했으니, 말년엔 자신만의 가게를 차려서 '갑'이 되겠다는 심보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말년에는 뭐... 치킨이나 피자집을 해야겠지...

 

 

 그러나 이 책을 보는 순간 그런 기분이 싹 사라졌다. '갑'의 희망을 걸고, 자영업을 시작한 치킨 업주들의 한 맺힌 이야기, 프랜차이즈의 이름을 따내기까지의 '어마어마한' 자본의 필요성, 그리고 성사되는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노예 계약'과 같은 불공정한 대우 등등을 저자는 잘 밝혀놨다.

 

 고객에 치이고, 지사에 치이고, 본사에 치이고, 가뜩이나 많은 동종 업체들과의 전쟁에서 치이고, '갑'을 꿈꾸며 창업을  하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울며 겨자 먹기로 창업을 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치이면서 좌절한다. '사장님'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사연'이 있었다. '갑'이 아닌 어쩌면 '병'과 '정'의 위치가 바로 대한민국의 곳곳에 있는 치킨 업주들의 실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이 부분은 치킨 업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프랜차이즈 업체나, 편의점 업주들의 입장이겠다. 본사는 이윤을 극대화하고, 오로지 하나의 깃발 '이윤창출'이라는 목표 아래에 대부분의 짐을 가맹점에게 떠맡기고 있었다.

 

 그것은 뒤 장에 나오는 닭의 유통과정, 육계 사업에서도 분분했다. 우리에게 신뢰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하림'은 그렇게 육계 공장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책에서 나오는 양계농민과의 인터뷰, 그리고 치킨 사장 업주와의 인터뷰는 보여주고 있었다. 기업의 극대화된 이윤 창출에 억눌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업을 해야 하는 그들의 고뇌, 인터뷰에서는 그 고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갑'의 횡포가 두려워서 자신들의 이름을 인터뷰 글에서 떳떳하게 밝히지 못 했다. 구구절절하고 자세한 인터뷰 내용보다도 자신의 불편사항을 본사가 알까봐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부분,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힘든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가볍게 먹는 '치킨'은 그렇게 기업에겐 가볍게, 누군가에겐 무겁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책을 보며 아쉬웠던 점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책을 보며 행했던 의문 '그래서 어떻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자주 먹는 치킨에 대한 실태를 소상하게 자세하게 밝혀놓은 것은 높이 사야겠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를 해 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저자의 생각으로는 치킨을 통한 현 상황의 고찰만을 다루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평서들이 가지는 고질적인 문제는 이것이라고 본다. '비평에만 그치는 것' 다소 좀 부족하더라도 비평에 그치지 말고 자신의 해결책이나 방안 등등을 밝혔으면 어땠으면 싶다. 해답이 아니더라도, 그런 모범 답안들이 여럿 모이고 토의와 토론을 거쳐, 부조리한 사회현상의 해결책으로 귀결되는 법이니까

 

 

두 번째로는 내가 알기로, 프랜차이즈 치킨에 유통되는 닭에는 많은 약품을 첨가한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밝혔으면 어떨까 싶었다. 닭의 유통과정과 대리점들의 아픔 등은 소상하게 잘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프랜차이즈 치킨의 영양이나 약품 등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으니 그 부분이 조금 아쉽다. 그리고 닭의 영양에 대한 이야기도 없으니, 이 부분도 아쉽다. 치킨전이라고 이야기를 붙였으면, 치킨의 외부적인 사정과 역사, 그리고 현재의 치킨 그 자체의 분석도 이뤄져야 하는데, 역사성과 외부적 사정에는 소상하게 밝혔지만 정작 치킨의 영양이나 치킨에 첨가되는 약물 등등에는 소홀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어쨌든 그런 단점이 보이긴 했어도, 재미있게 읽은 책임에는 부인할 수 없겠다. 치킨이라는 음식을 통해 우리나라의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 사회 현상 등을 살펴볼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앞으로, 이렇게 생활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로 사회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주제의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음식으로 예를 들면 '라면'도 꽤나 재미있을 텐데...


오타 부분 지적(1쇄 기준)

94쪽 7번째 줄 닭도리탕 -> 닭볶음탕
120쪽 주석 첫째 줄 가겨 -> 가격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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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구성체를 이루는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정치학>의 명언언 중 하나다. 이 구절을 국내 번역가들 대부분은 정치적인 동물로 해석하는데 천병희 선생님은 이렇게 번역하셨다. 

 

어쨌든 저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 속에는 인간 군집성의 긍정을 뜻하며 국가 구성체라는 말속에는 국가조직의 존재를 긍정하며 그 안에는 필연적인 조직의 우열을 긍정하고 있다. 조직의 우열이라는 말속에는 결국 권력의 불가피성이 숨어있다. 

 

가끔 이 말을 보면서 부조리를 느끼기도 했다. 그럼 모든 인간은 정치적인 행위의 핵심인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저 격언이 부조리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 나의 저 생각에는 정치와 권력 추구를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력 추구는 어쩌면 정치의 범주로 보자면 중심 범주이기보단 하위 범주에 달할 수 있겠다. 정치적인 행위는 권력 추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린 나의 관념에서조차 권력과 정치를 하나로 보고 있었고 정치의 생활성보단 정치에서의 권력 추구의 시선만 너무 의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권력 추구에 입각한 정치 해석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만 있었다. 

 

정치와 권력 추구를 따로 갈라놓고 생각을 해 보니 스스로 해답을 내릴 수 있었다. 내 결론은 세간에 잘 못 번역된 격언인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가 옳은 명제인 것 같다. 왜냐하면 정치라는 큰 범주의 틀 안에는 권력 추구도, 그리고 국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리고 생활 속의 정치 모든 면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최종적으로 저 잘못 번역된 명제를 긍정하고 싶었다. 

 

축구 비판서 리뷰에 웬 쓸데없는 말을 하냐고 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나면 왜 내가 이런 정치와 권력에 대한 말을 구구절절 쓰는지 이해가 갈 것이라고 본다. 

 

이 책을 보고 나서 나는 오역한 명언, 내가 스스로 긍정한 명언에 또다시 회의감이 들었다. 피파라는 조직은 인간의 가장 큰 즐거움 스포츠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런 피파 역시 집단을 이루면서 조직과 위계 권력이 당연히 생겨났다. 여기까진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이 맞다. 그러나 공공성이 강한 피파 내부가 이렇게 썩어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피파의 부패. 그것은 정치라는 요소를 권력과 권력욕으로부터 떨어트려 정치의 생활적 요소,긍정성을 상기시켜서 결론지었던 나 자신의 결정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결국 정치의 중심은 밑을 향하는 것이 아닌 위를 올라가려는 권력욕이 전부인 것이란 말인가...라는 회의적 시각이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이 책은 피파라는 조직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운영됐는지에 대해 소상하고 자세하게 밝힌 르포르타주다. 솔직하게 말해 책을 봤을 때 느낀 점은 흥미는 있고 재미있는 주제긴 했으나 그렇게 썩 잘 읽히진 않는 모순적인 책이었다. 

 

그 썩 잘 읽히지 않는 이유에는 일단 책에서 말하는 방대한 인물들에 대해서 사전 지식이 없다는 점이 크다. 저자와 역자는 책의 주석을 통해 방대한 인물들에 대해서 간결하게 설명했으나 사실 내가 이쪽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다소 많은 사람과 많은 단체들을 기억해가며 독서를 하진 못 했다. 

 

그러나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야망인 권력, 그 권력을 사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추구하는 것대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고찰하고 있었다. 피파 마피아 책에서 본격적으로 까고 있는 사람은 피파 왕국의 절대군주 제프 블라터다. 블라터는 피파의 공공성을 방패로 사용해 자신의 탐욕을 극한으로 추구한다. 

 

책은 그런 블라터를 고찰하기 위해 블라터 위의 주앙 아벨란제를 파고들었으며 아벨란제의 스승이자 국제스포츠를 이윤추구의 도구로 만들어버린 전 아디다스 창업자 호르스트 다슬러까지 책에서 다루고 있다. 

 

다슬러를 시작으로 국제 스포츠계와 피파는 극심한 상업주의로 물들었다 그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벨란제였으며 아벨란제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 블라터였다. 그들의 그라운드 뒤의 협작은 스포츠계를 더럽히고 있었다. 

 

책의 본문은 지독히도 역겨운 케케묵은 돈 냄새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사욕과 돈에 대한 욕심이 자행할 수 있는 모든 부정부패를 다 다루고 있었다. 배신, 로비, 협작, 굴복, 매수, 금권선거,돈 세탁 스폰, 막무가내 개최지 선정, 심지어 스포츠 내에 편파적 심판 동원 등등 온갖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있는 피파의 내부 사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스포츠 정신. 스포츠에 대해 우리는 공정성을 당위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국제 스포츠 대회는 그런 공정성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이번 축구 대회에서도 의혹은 많았으며, 축구뿐만 아니라 피겨 스케이팅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경기장 위의 화려하고 열정적인 플레이에 정신이 몰두될 때 

 

그라운드 밖에서는 화려하고 열정적인 선수들의 노력 그 이상으로 협작정치 뒷거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스포츠 업계를 이런 시각으로 바라볼 순 없겠지만 이 책에 의하면 "적어도 피파"는 그랬다. 

 

피파의 부정 피파의 부패 그 중심에 블라터와 그의 충견들이 자행했던 일들을 보니 생각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얼마나 부정부패가 심각한지 소상하게 압축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은 구린내가 진동했다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이런 피파를 비판하기보단 피파가 가진 축구라는 주제의 대중성을 파악하고 오히려 피파를 옹호해주고 그렇게 자신의 평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축구와 피파를 이용하려 했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3s 섹스 스포츠 스크린 정책만 봐도 그렇고, 얼마 전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의 발언(월드컵을 이야기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블라터도 마찬가지다. 대중성이 강한 축구를 감성적으로 이용했다. "축구는 우리를 하나로 만듭니다."라는 다소 감정적인 말로 자신들의 비판세력들을 누그러트렸다. 책에 묘사된 대로라면 피파라는 조직은 공공성을 앞세운 공익 기업이지만 사실은 회장 블라터에 블라터에 의한, 블라터를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었고 그 밑의 사람들은 그의 충견들이었다. 

 

스포츠는 현대인이 즐길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오락 거리다.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물론 국가주의 민족주의적인 면도 있지만, 스포츠라는 것은 적어도 공정하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정정당당하고 공정한 경기를 보며 어쩌면 사람들은 부조리하게 느꼈던 세상에 생각에 대한 조금의 보상(공정한 룰의 경기에서 오는 승패)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보상은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대리만족을 선사하여서, 그렇게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봤다. 

 

블라터 역시 그랬다. 스포츠는 공정해야하며 독립적으로 정치와는 구분되야 한다고 지껄였으나, 그라운드 밖에서의 그의 행동은 음험한 정치인을 넘어섰고 경기는 공정하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2002년 우리나라가 붉은빛으로 물들 때, 경기에서 우리가 환호성을 지를 때의 그 열정 그 내면에는 블라터의 치를 떠는 부정선거가 있었다. 더불어 이 책에서는 2002년 우리나라에 유리했던 편파적 판정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 일리가 있다 생각했다. 그 외 정몽준의 로비 활동 의혹 등등도 기록하고 있다. 

 

나는 솔직히 저자의 논의나 비판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준의 지식은 갖추지 않았다. 책에서 나오는 그 방대한 인물들에 대해 선행 지식도 없고 그래서 저자의 이 방대한 르포가 올바른 비판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보며 경의를 표하고 싶다. 첫 번째로 블라터라는 인간이 자행한 부정에 대해서 조롱의 경의를 표하고 싶고, 이걸 밝혀내기 위해 노력한 저자의 집념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다. 

 

책을 보며 느낀 것은 역시 사물이나 현상의 겉과 속을 다 보는 것이 참 어렵구나 싶다. 누가 알았겠나, 공정과 공평의 아이콘인 스포츠 그 스포츠 대회를 주관하는 공익단체가 이리도 부패했는지... 사람들은 그라운드 안만 주목할 뿐 저자와 같이 그라운드 밖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우리나라는 지금 피아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관피아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군대 문제가 불거져 군피아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책은 피파라는 "마피아"조직이 행하는 온갖 부정부패를 집요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일독을 권해본다. 

 

사실 이런 비평서를 보고 나면 마음속이 허하며 세상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부정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블라터의 블라터에 의한 블라터를 위한 피파 제국을 보며 인간 존재의 염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치밀하게 밝혀 낸 저자의 집념 피파 제국을 상대로 싸우는 저자와 같은 사람을 생각하니, 그래도 염증을 해소할 빛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초독을 할 때는 내 지식이 이 책을 비판할만한 그릇이 못 되어서, 논의를 따라가고 읽어나가는데 만족했지만, 나중에 꼭 한 번 다시 읽고 싶다. 이 책에 논거 된 인물들에 대해 자세하고 소상하게 알아 본 뒤에 이 책을 다시 재독하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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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알라딘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보내주는 책들이 참 재미있다. 그중 이 달에 보내준 도서는 다소, 이전까지에 비해서 '부담이 없는' 책으로 보내줬는데, 그중 가장 독특한 책이 바로 <독신의 오후>라는 책이다. 책을 보며, 생각했던 것이, 아 신간평가단 형(?)님들께서 독신이신 분들이 많으시거나, 독신을 지향하고 계신 분들이 많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독신을 다룬 책들은 많이 나왔지만, 이 책만의 독특한 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의 시각으로 저술된 '남성을 위한 독신 책이라는 점.' 남성 독신자들이 쓴 독신에 대한 책이 있을지 몰라도 이 책은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독신에 대한 책이다. 따라서, 남성 독신주의자들도 간과하고 지나칠 법한 부분들을 시원하게 긁어 준다는 점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미리 말하겠지만, 나는 독신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한 여성과 함께 일가를 이루고 싶고, 책에서 말하는 육아라는 거룩한(?) 대업을 함께 이루고 늙어가고 싶은 '평범'한 남자다. 따라서 이 책이 배송 왔을 때,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인데'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본 순간 굉장히 많은 것을 느꼈다.

 


이 책은 독신 남성을 위한 책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기혼 대상자나, 늙어가는 남성 전체를 위한 책이 아닐까 싶었다. 책의 체계는 단순하다. 글 자체가 명료했고, 저자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간 책이었다. 남자의 독신에 대한 의의와 배경을 설명하며, 독신의 유형에 대해 분류를 한다. 가장 핵심은 2장과 3장,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기술,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챕터들이었다. 4,5장은 요양과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아무튼 핵심은 2장과 3장에 집중됐었다.

 


독신은 비혼(결혼하지 않은), 이별 싱글(이혼을 한 싱글), 사별 싱글(아내가 먼저 죽은 경우)로 나뉘는데, 대체적으로 연령대로 보면, 사별 싱글이 가장 연령대가 높으며(당연하겠지만), 이별 싱글이 중장년 층, 그리고 비혼 싱글들은 20~30대 세대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비혼 싱글의 추세가 높아지고 있다. 아무래도 이혼 싱글 세대와는 다른 육아정책과 불균형적인 성비, 때문에 비혼 싱글이 굉장히 늘어나는 추세다. 이것은 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다.

 


싱글에 대해서 사실 자신의 신념으로 싱글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비혼 싱글의 대부분은 '경제적 능력' 때문에 못 하는 이유도 있다. 이 부분은 부모의 육아 정책의 실패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자식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독립을 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에 대해서 '부모 노릇의 정년'이라고 하는데, 이것에 실패한 자식들은 부모의 정년에는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사실 이 육아 정책의 실패는 크게 보면 사회 구조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다. 극심한 취업난과 취직의 어려움 등등의 사회구조, 아무튼 비혼 싱글은 완벽한 싱글이 아니라고 저자는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로, 싱글이더라도 완벽한 독립적인 싱글이 아닌 부모의 돌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자유롭지 못 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저자는 뒤에 바람직한 싱글의 전제조건을 제시했는데, 일 순위가 의식주의 자립은 기본 중 기본이라고 확고하게 정의한다.) 이별 싱글과 사별 싱글에 비해서 비혼 싱글 부분이 크게 눈에 들어왔던 것은 아마도 나와 같은 세대를 공유하는 것이 비혼 싱글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하긴 그렇다 하더라도, 결혼을 전제해 둔 나로서도, 이별과 사별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게 될 순 없다. 내가 독신이 아닌 결혼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어디 내가 이별을 안 한다는 확신도 없고, 혹여나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을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염두에 둬야 하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자의 책은 상당히 현실론적인 부분을 고찰하고 있다. 다른 남성 저자들이 쓴 독신의 기술에 대한 책들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간과하고 있는 부분들을 꼬집어내며 집어내고 있다.

 


하긴 사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것이, 우리나라 남성들은 너무 무사 안일주의가 심하다. 이건 일본과 마찬가지다. 대체적으로, 부부 중 먼저 죽는 것은 남성이 일반적이지만... 그래서 남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대비책'을 차려놓지 않는다. '난 그저 노년에는 편하게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다가 편하게 죽어야지.' 이게 우리 할아버지 세대, 우리 아버지 세대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사회는 변하고 있고, 혹시 아나, 그렇게 안전하게 생각했다 아내가 먼저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못하는 가부장적인 남편으로서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평소에는 무관심과 당연함으로 생각하던 아내의 빈자리를 외롭게, 고독하게 바라보며 애처로워하겠지,

 


저자의 독신의 처세술은 이럴 때도 유용할 것 같다. 법륜 스님의 저서 <스님의 주례사>에 온쪽과 반쪽에 대해서 이런 말이 있다. '서로에게 반쪽이 되기보다, 온쪽과 온쪽이 만나서 동그라미가 합치되어야 한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아내가 죽어서 아무것도 못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인생이 아닐까 싶다. 남자 역시도 온 쪽이 돼야 한다. 그것은 남성 역시도 여성이 없더라도 밥을 하거나 빨래를 하고, 장을 잘 볼 수 있으며, 혼자가 되어도 온쪽처럼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말하는 독신의 처세술은 기혼 남성에게도 의의가 있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죽고 아무것도 못하며, 울며불며 처량하게 히키코모리적 삶을 사는 것보단, 아내가 죽으면 담담하게, 아내의 부분까지도 스스로 잘 처리하며, 여생을 정리하고, 나아가 아내의 삶까지 돌아보며 정리하며 죽는 것, 이것이야말로, 남자가 해야 하는 도리 남자의 결혼의 종착지가 아닐까 싶다.

 


책을 보며 요리를 가르쳐 준 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께서 나에게 요리를 가르쳤었다. 그리고 오랜 자취 경험 때문에,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두부찌개는 물론, 심지어는 김치까지도 혼자서 담근 경험이 있다. 이런 부분은 아마도 홀로 남겨지게 될(???)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배려가 아닌가 싶다. 요즘 세상에 아내에게 밥 얻어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생각이고, 맞벌이를 하는 이상 가정 역시도 같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며, 극단적으로 짝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나 혼자의 생존의 기술에도 도움이 되니까, 남자에게 있어서, 독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식 - 먹거리'니까,

 


책의 여러 부분들이 공감이 갔지만, 특히나 공감이 갔던 부분은, 남자의 독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자들은 올라가는 법은 알지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기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남자라는 동물은 권위적이고,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 등등을 과시하는데 익숙한 동물이다. 여성과 가장 극명하게 보이는 부분이 바로 이런 '허세'라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런 허세가 늙어가고 약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에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특히나 대인관계에 대해서 저자는 강조하여 말하는데 이 부분은 독신 남자뿐만 아니라, 늙어가는 모든 남자에게 해당된다. 어느 모임에 가서 자신의 무용담을 구구절절 이야기하거나, 학식이나 자신의 지식, 사상 등을 이야기하며 은근히 강요하는 부분, 그리고 비공식적인 모임에서조차 남성들은 그들만의 권력 다툼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잘 나갔을 때의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내 생각으로 늙은 남성의 공통적인 현상 같았다. 지금의 나의 아버지도 등산 모임을 가서도 리더가 되려고 저렇게 '분발'하시는 모습이 떠올랐고, 그토록 겸손하게 살아가셨던 '할아버지' 역시도 나에게 6.25 참전 경험의 '무용담'을 1시간 내외로 무한적으로 반복해서 이야기하셨다.

 


가족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용납이 가지만, 타인들에게 이런 행위는 심히 거북스러움을 유발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옳다. 자고로 남자라는 동물은 허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좀 배웠다 하는 사람들과의 모임 속에서는 어떻게든 지식적으로 타인을 누르려는, 부분이 유독 '남성'에게는 집중되어 있음은, 나 역시도 경험을 해 봐서 알고 있다.

 


저자는 여성들은 동성 간의 관계를 다소 잘 원만하게 유지한다고 하지만 남성은 3명 이상 모이면 권력게임과 파워게임이 적용된다고 했다. 비약이 좀 심한 것 같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 부분에서 저자는 남성들이 '독신력'의 선배인 여성들에게 좀 배우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허세를 벗어나는 것은 배워야 하지 않나 싶다. 다 늙어가고 다 약해지는데 뭐 그리 무용담과 파워게임에 골몰하는지... 때론 약점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늙어가는 관계에 도움을 준다는 저자의 말. 이것은 독신 남자의 교제법뿐만 아니라, 기혼 남성의 교제법과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늙어가며 허세를 떨고 싶으면, 자신의 개인 블로그나, 일기장에 해도 충분할 테니까,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경제적 활동의 최전선에서는 때론 이런 '허세'와 '파워게임'이 더 좋은 자리와 위치를 주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런 욕망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적용한 것임에는 맞다. 그러나 늙어가는 시기에는, 이러한 허세와 파워게임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다 같이 늙어가며 교제를 하는데 권력이 무슨 소용이고, 잘난 시기는 무슨 소용일까, 

 


 또 공감이 갔던 것은, 세부적인 부분이지만, 남자가 여성을 간병을 하게 될 때 자세에 대해서다. 보통 남성이 먼저 죽고 여성이 뒤따라 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까 말했듯, 그 반대의 상황이 됐을 때, 남편은 아내의 병을 돌 볼 때, 지극히 '간병인의 입장에서의 돌봄'을 한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남편들은 아내의 수발을 평생 받아온 존재들이기 때문에 간병을 한다 선 치더라도, 나름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불편한 점이 많고 미숙한 점이 많다.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불편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해주는 간병이라, 쉽게 불편한 점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환자가 중심이 된 간병'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부분은 혹시 모르겠지만 남성들이 항상 마음에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아플 때, 어떻게 아픈지, 자신의 간병에 대해서 돌아보고, 이야기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남편도 고쳐주려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어쨌든, 최종적으로 남자 싱글의 덕목을 10가지로 추려서 설명하고 있고, 남성 교우의 관계에 대해서도 7가지를 조언하고 있다. 구구절절 다 밝히고 싶지 않고,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경제력을 갖춘 진정한 의식주 독신주의자가 돼야 한다.'라는 점과 '남자 특유의 그 허세를 다 버려라.'라고 압축할 수 있겠다.

 


다만 이 책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2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저자의 성 관념에 대해서 꼬집고 싶다.

 

 

 

남편만 따라오지 않는다면 우정보다는 가깝지만 사랑은 아닌 교제도 싹틀지 모르는데 모처럼의 찬스를 눈뜨고 놓치기는 아깝다. 돌아보게 만드는 구절이다. 너무 싱글의 입장에서 부부를 해석한 것이 아닐까? 싱글이 가장 큰 장점이 성으로부터 자유분방하다는 점은 백번 수용하겠지만 부부간에 부부가 됐다면 이런 부분은 서로 조심해야 한다. 뭐 사실 이 문구는 넘어가더라도,

 

 

 

 

이 대목은 아내를 간병하는 지극정성인 남편의 예를 들며, 아내에 대한 사랑과 성욕은 별개라는 논의를 주장하고 있다. 맞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과 성욕은 별개의 문제다. 남자라는 동물은 여자와 다르게, 평생을 생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성욕도 왕성하고 실제로 '사랑 없이도 성적인 활동을 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별개라고 하더라도 지켜야 할 윤리가 있는 법이다.

 


 아내를 간병하는 지극정성인 남편의 정부가 되어 그 남자의 성욕을 해소시켜줘서 '당.신.덕.분.에.나.는.아.내.간.병.에.전.념.할.수.있.어.고.마.워.' 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한다. 싱글은 이럴 때 자유롭지만 상대인 남편은 결혼한 존재라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다. 너무 싱글의 입장에서 부부의 모습을 해석한 것은 아닐까? 남성 편만 들고 여성에게는 적이 될 심보일까? 글쎄 당신의 이런 생각은 '남성'인 나에게도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싱글로 살아서 자유분방하게 사는 저자의 관점에 태클 걸고 싶진 않다. 그러나 위의 예시, 간병을 하는 남편의 성욕을 해소시켜주는 애인이라... 그럼 그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서 성적인 부분을 해소하고 힘을 얻어(?) 자신의 아내의 간병을 충실하게 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크게 어긋났다. 부부라는 것은 어쨌든 연을 맺으면, 좋으나 싫으나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 성욕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의 성욕이 아무리 무한하더라도, 한 남자의 아내라면, 다른 곳에서 분출하기보단 미우나 고우나 아내와 상의하고 협의를 찾아야 한다. 저런 상황이 오면 차라리 야동을 보며 혼자서 해소할지언정, 아내가 상처받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말로, 아내 몸을 간병해서 몸을 치료할 순 있겠지만, 어떻게보면 아내가 알면 '마음'을 다칠 행위 아니겠는가? 아내의 몸을 고치면서, 아내의 마음을 다치게 할 행위를 몰래 한다? 이게 과연 맞는 이치인가?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남성 싱글의 먹을 것을 이야기하면서 '도시락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히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레토르트 식품이나, 편의점 식품, 그리고 나아가, 도시락 가게가 아무리 뛰어난다고 하더라도, 결국 방부제라는 화학 약품이 첨가된 식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부분은 같은 일본에서 나온 책 아베 쓰카사가 쓴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즉석식품>이란 두 책에서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혼자 사는 남성에게 편의점 음식은 단연코 굉장한 유혹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편하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아베 쓰카사의 책을 본다면, 그런 일본의 도시락 문화의 단면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하물며 도시락 문화가 발전된 일본의 사례도 저런데, '도시락 문화가 발전하지 않은 한국'은 어떨까?

 


남자가 '건강하게' 독신을 하려면 스스로 요리를 해 먹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한계와 아쉬운 부분(극단적 페미니즘)도 있고, 너무 자유분방한 성관념과 저 음식에 대한 생각을 제외하고는 아주 훌륭한 책이 아닌가 싶다. 특히 독신남 뿐만 아니라 늙어가는 모든 남성이 어떻게 처세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남성이 아닌 여성이 말해주고 있는데, 배울 점이 많은 책이다. 굳이 독신주의자 남자들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둔 남성들도 읽었으면 싶은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항상 서재에다가 꽃아 두고 정기적으로 볼 생각이다.

 


미래 아내가 될 사람은 아마 내 서재에 이런 책이 꽂혀 있다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게'지만, 나에겐 '혹시 모를' 미래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화낼 수도 있는 미래의 아내에게 조용히 이야기하련다.

 


"막말로 '당신'이 죽으면 난 혼자라고 이 사람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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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리뷰가 다소 길어서 세 부분으로 나눴다. 먼저 허영덩어리 히틀러를 바라보며 느낀 점과, 히틀러의 주변 사람들을(히틀러에 찬동한, 반동한) 읽으며 우리 역사, 시대적인 부분과 비교를 하며 생각을 해 봤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결론에 담아봤다.

 

 

 

1. 히틀러의 삶을 보며, 나의 허영을 반성하다.

 

사실 뻔한 주제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재미가 있는 책이다. 오래간만에 서평을 맛깔지게 쓸 책을 발견한 것 같다.

 

책은 한 허영심이 많고,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야심가가, 얼마나 무모하게 '철학'을 이용하는지를 다룬 책이고, 그 야심가의 허영의 철학에 동조한 철학자와, 반동한 철학자들의 행보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

 

 사실 철학이라는 분야는 굉장히 애매모호한 속성이 있다. 바로 형이상학적이고 궤변적이고 사변적, 관념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철학이다. 답도 없고,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는 난해한 학문, 그러나 이 난해한 학문에 대해 대중이 가지는 인식은 대체적으로 깊이 있는 학문이지만 '어렵다'라는 것이 대다수다.

 

특히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철학에 대해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 철학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든다.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기도 싫고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을 배울 가치도 못 느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소수의, 집념 어린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철학을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단'으로 이용한다. 난해한 철학은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쉽지 않을 부분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적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들도 철학은 어렵다는 생각을 주로 하는 것이 대다수인데, 영리한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자들은, 이를 간파하고, 그 접근성이 용의하지 않은 어려운 철학의 단면으로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덮어버리는 것을 시도한다.

 

즉 어려운 철학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하는 행위가 나타난다. 이들은 철학자의 저서들을 깊이 숙독하지 않으면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철학자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은 철학자의 '명언'등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의 주장이나 논고에 그대로 복사하기를 시도한다. 똑바로 그 사상을 이해하지 않으며, 그 격언을 이용하는 것은 명언을 내린 철학자를 죽이는 일이다.

 

철학에 겸손하고 정통한 자들은 본질적으로 그런 행위를 간파하지만, 대중들은 그렇지 않다. 만약 이 지적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이 정치가이거나 야심가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히틀러였다.

 

나치는 그렇게 사상적으로 완성됐다. 독일의 거장, 칸트를 비롯한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의 사상들은 모두 히틀러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히틀러는 이들의 철학을 깊이 있게 숙독했다고 우기며, 그들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뒤틀린 사상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는 무력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상 속, 철학 속에서도 거장들을 지배하고자 했던,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고자 했던 허영덩어리였다.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진보와 발전을 가져줬지만, 때론 이렇게 오용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숱하게 볼 수 있다. 인문학을 좀 만져봤다면서 아는 척하는 허깨비들에게 철학은 이용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철학뿐만이 아니다. 내가 볼 땐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의 몇몇 부류는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독서로 덮으려고 한다. 독서로 발전을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독서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덮어버리는데, 더 열중을 하는 순간, 배움의 길을 멀어진다.

 

물론 허영이 발전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허영에 집착하다 보면, 배움의 본질보다 허영 자신을 드러내는 그 자체에 집중을 하기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식과 철학은 배우는 자에게 지식과, 발전 가능성을 선사하지만, 알게 모르게 인간 내면에 보이지 않는 자만심과 오만의 시각을 키워준다. 이에 굴복해버린다면, 진정한 배움으로의 길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교양 있는 지식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독서와 철학은 깨달음을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지식을 추구로 하는 독서와 철학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은, 중고등학교의 학습으로 끝내야 한다고 본다.

 

 <논어> 위정 편에서 공자는 말했다. '안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는 사람의 태도'라고,

 

모르는 것을 거짓된 지식으로 덮어 버리고, 똑바로 알지 못한 지식을 아집으로, 아는 척을 하는 것, 그 마음에는 알량한 소영웅주의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지식의 나열, 인정을 구걸하는, 그렇게 자신을 칭찬하며 자신을 철학이나 여타 다른 권위로부터 포장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이 사회에는 꽤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노자> 20항의 격언이 생각난다.

 

'지식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나는 노자의 저 말에 대해 사실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지적 허영에 가득 찬 인간들에게는 꼭 들려주고 싶은 격언이다.

 

사실 나의 20대 초반은 이런 지적 허영심에 들떠 있었다. 다소 어린 나이에 동양 고전을 조부로부터 배웠다는 자만과, 서양 철학을 껄떡이면서,  이 서양 철학만 내 손에 넣으면, 완벽한 동서의 지식을 가진다는 망상.

 

그러나 나는 가졌다고 생각했던 동양 철학도 구멍 투성이였으며, 허영으로 시작한 서양 철학 역시도 똑바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 동 서양의 고전을 겸손하게 다시 공부하듯 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단 많이 나아졌지만, 허영이 없다라고는 부정하진 못하겠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다시 꿈틀거리는 나의 허영을

서랍 안으로 밀어 처넣으며 나오지 못하도록

반성을 했던 것 같다.

 

내 안에도 '히틀러'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정도는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에

'히틀러'가 살아 숨 쉰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이라는 책.

그 책의 이름을 빌려오자면,

 

내 마음속의 허영덩어리(히틀러)와 나의 자아는 싸울 것이며

이 싸움은 나의 내면에서 평생 갈 것이다. 나는 오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이고,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나만의 히틀러와 싸울 것이다.

그것은 '나의 투쟁'이다. 내 마음의 히틀러를 겸손의 자아로 눌러버릴 것이다. 히틀러가 자행했던 철학의 자의적 인용. 나 역시 그의 저서의 이름을 따서, 내 멋대로 이렇게 붙여봤다.  

 

 

 지식은 양날의 검이다. 올바르게 사용될 경우, 대체적으로 인간에 성장을 가져다주지만,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인간을 몰락으로 몰고 간다.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은 인간이 개인에 국한된다면 그 개인만이 고통을 받을 것이지만, 만약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이런 행위를 해 버린다면, 공동체의 비극으로 귀결된다. 지식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도 마찬가지고, 독서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본보기가 바로 '히틀러'였다.

 

아무튼, 가장 아름다운 철학의 배움과, 가장 아름다운 독서는,

'깨달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적인 탑 쌓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

 

히틀러의 허영으로 덮이고, 뒤틀린 삶은, 나에게 그런 반성을 불러일으켰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히틀러에게 배울 점은 있다. 바로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승화시킨 그 추진력 그것 하나는 인정해야겠다. 다만 그 행동력의 바탕에는 뒤틀린 철학이 있었으며, 그로 인한 결과는 인류 최악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드도 쳐주고 싶지 않다.

 

 

 

2. 히틀러의 주변 철학자들(찬동한, 반동한)을 우리 역사와 대비하여 읽다.

 

이들 내용을 보며, 생각한 것들은, 우리나라의 역사다. 특히 조선 중기와, 일제 치하 시대가 생각났다. 조선에서는 건국 초의 이념화된 성리학이 발전하고 있었다. 중국을 존중하고 중국을 따르는 데에, 대해서 누구도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이 건국된 철학, 성리학이라는 체제에 대해서 우리나라 학자들은 벗어나지 못했고, 그 가치관 내에서 철학을 발전시켰다.

 

조선에게는 성리학에 물음을 던질 만한 조선만의 '발터 벤야민'도 없었고, '테오도어 아도르노'도 없었고, '한나 아렌트', '쿠르트 후버'도 없었다. 사회에 통용되는 철학, 체제가 용인한 철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을 해 봄 직한데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까지도, 그러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실학이라는 철학이 발전하면서 주체성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자학'의 권위는 대단했었다.

 

일본과 비교하기는 나도 싫은데, 여기서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스승으로 불리는 사토 잇사이 어록 <언지사록>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언지사록><언지록>의 131절이다.

 

하늘은 차별하지 않는다. -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문명국인 중화의 나라가 있고 또 야만스러운 나라가 있다. 하늘은 정말로 어떤 곳에는 후하고 어떤 사람에는 박할까?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며 차별을 할까? 그렇지 않다. 단지 인간이 지켜야 할 일을 말한 중국의 옛 성인이 다른 곳보다 특별히 더 빨리 또한 특별히 자세하게 그것을 밝혔을 뿐이다. (중략)

 

그래서 도는 중국의 문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유학자인 사토 잇사이 역시도, 유학자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맹목적인 중화 추존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럽고 유연스럽다.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진을 일궈냈던 것 같고, 우리보다 더 빨리 발전하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시대, 그리고 권력이 용인한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발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히틀러와 철학자들> 책은 히틀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나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송강 정철이 참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둘 다 세계적으로, 그리고 조선 내에서 시대의 최고 철학자로 존중받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시대가 규정한 철학, 권력이 규정한 철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 두 사람은 분명 뛰어난 자질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로부터의 굴복이 그 명석함에 오점을 남겼다.

 

동시대에는 칭찬과 추존을 받을지 몰라도, 결국은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

 

시대를 거슬러, 일제 치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생존과 진리 중, 생존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일제 치하에도 변절자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의 교조화된 성리학 추존 사상보다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일제 치하의 시대에서서는 기존의 시대가 규정한 굴욕의 철학으로부터 거부한 '독립 의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발터 벤야민'이었고, '테오도어 아도르노'였으며, '한나 아렌트'였고, '쿠르트 후버'였다.

 

독립을 위해 일으킨 의병 그 한 명 한 명의 병사들의 마음, 조국을 되찾기 위해 거병한 그들만의 철학, 그들은 비록 히틀러에 반항한 소위 세계적인 네임드 철학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의 마음은 아마 더 뜨겁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들의 희생, 그들의 독립을 위한 의지, 그들의 뜨거운 피를 바탕으로 우리는 지금 현세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그리고 내가 살아갈 내일들의 무게가 더욱더 무겁게 느껴졌다.

 

 

 

 

3. 결론

 

책은 참 매력적이다. 매력적인 구성, 히틀러를 비롯해, 히틀러에 동조한 자들과, 히틀러에 반대한 자들을 나눠서 잘 대비하여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제지간이었고,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읽으면서 대비되는 것이 루쉰과, 쉬광핑 부부가 생각났다. 하이데거는 결국 권력의 힘에 굴복하여 한나 아렌트와 거리감을 뒀지만, 루쉰과 쉬광핑은 사제지간으로 만났지만, 종국에는 함께 했다. 사상적으로도, 그리고 결혼생활도, 그래서인가? 루쉰의 위대함이 더 부각되는 느낌도 받았다.

 

철학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역사서에 가깝다. 대립되는 인물들 간의 관계와 심리 묘사가 소설처럼 잘 묘사된 책이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모르는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결론은 사실 뻔한 책이지만,

 

히틀러의 모습에서, 나의 내면의 오만, 히틀러의 모습을 반성했고, 히틀러에 복종한 철학자와, 히틀러에 대항한 철학자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역사와 연계하여 봤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현재 마르틴 하이데거를 비롯한, 슈미트와 프레게가 미국과 유럽 교육과정에 중심에 있다고 한다. 이 '히틀러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학생들은 무비판적으로 배워나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독일의 지적 유산에서 어두운 요소는 언급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에필로그에서 나치 사상에 물든 철학자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읽어야 한다고, 다만 저자들이 어떤 만행을 했는지,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가르치고 읽어야 한다고,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읽기보단,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이 인류 지성에 이룩한 철학적 업적은 인정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릇된 관점 등은 비판하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나치 사상에 물들었다고 하더라도, 다 걸러낼 것은 없다고 본다. 오히려 역사적 거울로 이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악용될 수 있을 여지는 많고 제2의 나치의 사상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히틀러가 자행했듯, 철학이라는 칼과 지식이라는 칼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에게 저주를 가져올 수 있다. 

 

과거 독일 선현들의 철학들을 히틀러가 '독이 든 성배'로 조합하여 사용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환경 속에서 태어난 철학들도, 바른 가치관의 인간이 사용할 때에는 옳은 가치로 사용될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물론 바른 가치관을 전제로 했을 때 이야기고, 우리는 여기서 그 바른 가치관을 어떻게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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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가볍고, 편안하게 읽었으며, 고요한 분위기였으나, 강렬했다.'
 

이 책을 간단하게 논평하면 그렇다. 제목 <철학자와 하녀>가 상징하는 것은, 탈레스의 일화로 설명한다.


 '어느 날 철학자 탈레스는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본 트라케의 하녀가 깔깔대며 이렇게 말했다.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이면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중략)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 재치 만점의 하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은 그녀를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무지한 대중의 상징으로 삼았다.'

 
양자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의미하는 것 같았다. 하녀로 상징되는 것은 우리 일반의 대중이고, 탈레스는 지금의 철학자들을 이야기하는 것, 철학이라는 학문의 난해성으로 인해, 대중은 철학을 오해하고 배우려 하지 않고, 대중에게 지식을 가르쳐야 할 철학자들은, 그런 대중을 무지하다고 이야기하는 현실. 그런 철학자들의 태도 속에는 자신들만의 '학자를 위한 학문'을 꼬집고 있었다.
 

책은 '현대의 하녀(어감이 좀 그런데... 아무튼)'들에게 올바른 철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철학의 가치와 철학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기존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친근하고, 편안하고 쉽고, 다정하게 다가고 있었다.
 

인문학의 여러 분야 중 가장 어렵고 접근하기 힘든 분야는 누가 뭐라고 해도 '철학'이다. 그런 철학을 배우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과거 블로그 습작에 나 역시 지식의 축척을 위해 철학을 배웠지만 한계가 있었다는 주제를 썼던 것이 기억났다. 책에 나온 올바른 철학에 대한 부분. 철학이라는 것은 앎의 '지식'적 측면보다는 삶의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 그 말이 참 매력적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조부로부터 동양학 고전을 배웠었다. 동양 철학을 나름 체계적으로 배운 탓에, 철학과의 만남은 오래된 인연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철학'이라는 것에 삶의 물음도 구해봤고, 삶의 정신적인 방황을 할 때, 서양 철학에 심취도 해 봤었지만, 모두 다 실패했다. 나의 의식 관념 속에는 '철학'이라는 주제, 그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이었다. 해답을 찾고, 방황을 빙자하여 철학을 끼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철학을 진지하게 학습하지 않고, 피상적 지식의 획득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피상적 지식이 탑처럼 높아질 때마다, 나의 자아의 허영은 높아만 갔었고, 나는 오만해져 있었다.
 

허깨비 같은 나의 오만을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 얻었던 피상적 지식의 철학은 모두가 허사였다는 사실도 느꼈다. 철학은 이렇듯, 가장 중요한 것이,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배워야 하는가라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을 세워야 하는 학문이었다. 나는 그 부분이 없었다.
 

책은 이런 철학의 올바른 이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저자는 철학이라는 것은 천국에는 필요 없고 지옥에서만 있는 것이라고 한다. 천국은 모든 것이 갖춰진 행복한 시대지만, 지옥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더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더욱 철학을 배워야 하고, 약자일수록 더더욱 선현들의 사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점을 달리해서, 이런 뉘앙스의 책은 많이 발간되고 있다. 약자를 위한 책들. 유난히 올해에는 이런 부류의 책들이 많이 발간되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자기 계발의 유명한 저술가 말콤 글래드웰의 <다윗과 골리앗>, 그리고 사회학으로 보자면 노명우 교수의 <세상물정의 사회학>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문학으로 보자면 공원국 씨의 <오자서병법> 이 책 역시도, 고전이지만, 약자가 강자에게 항거하는 해석으로 책을 냈다. 그리고 철학적인 부분에서도 고병권의 <철학자와 하녀>.
 

이런 약자를 위한 해석의 책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척박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싶었다. 하나하나 비교를 해 보긴 뭣하다만, 사회학의 노명우 교수의 책 <세상물정의 사회학>의 경우는 사회학자라는 전문가가, 비전문인인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좀 더 대중적이고, 평이한 글쓰기를 지향하여, 썼던 책이다. 다소 어조가 경쾌하고 힘이 있고, 똑 부러진 학자의 문체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고병권의 책은 그와는 다르다. 어체는 여성스럽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느낌마저도 들었다. 더불어, 노명우의 책은 대중을 위해 눈높이를 낮췄다고 하지만 그래도, 학자라는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슬며시 현학적 글쓰기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고병권은 그런 부분이 없었다. 깔끔했다. 내려놓고, 좀 더 대중적인 글쓰기를, 감성을 자극하는, 그러나 강력한 주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서술법이 특징이었다. 두 작가 모두, 필력의 개성이 대비적이지만, 두 작가 모두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철학에 대한 필요성과, 올바른 철학이 가져야 할 이야기 등을 작가의 관점으로 대중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참지 말고, 분노할 때 분노하고, 싸워라.' 이것이 이 책의 모토였다. 책의 뒷부분은, 그런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 현대판 하녀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예시를 보여준다. 사회적인 부분,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가장 의미 있게 봤던 것은 원자력에 대한 부분이었다.
 

책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나 의견 등등을 이야기하며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예술, 그림 등의 예시도 있었다.
 

다 좋지만 몇 가지 책을 보며 들었던 문제점을 지적해보겠다. 일단 이 책의 주제는 철학이라는 부분이다. 학문의 특성상, 인문학 분야는 특히 간학문적인 속성이 있다. 따라서, 학문 간의 관계가 대체로 전문적이라기보단 모호한 속성이 있다. 이 부분은 자연과학과 비교했을 때, 인문학이 더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처음 이 책의 도입부는 참 매력적이다. 철학과 인생, 철학과 약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조용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잘 이끌어나간다. 그러나, 책이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철학' 이야기보다는, '사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앞서 말한 대로 인문학의 간학문적 속성에 의거해, 사회 사태 역시도, 철학에 속한다,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책의 제목과 책의 주제와는 거리가 좀 있는 내용들까지도 보였다. 고병권이 주장하고 있는 의견 자체는 일리 있는 말이고, 숙고를 해 봐야 할 주제들이지만, 책의 전체적인 주제, '철학'이라는 주제에 봤을 때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초기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며 순수 철학의 주제를 더 끌어와서 설명을 했으면 어떨까라는 아쉬움도 있었다.
 

 또한 이 책을 볼 때에는 세심하게 잘 생각을 해 보며 봐야 한다. 저자는 책의 초반부에서 어떤 '사실'에 대한 부분보다는 '해석'적인 부분에 더 관심을 둔다고 이야기했다. 그럼 이 책 역시 저자가 '철학'을 생각하는 '해석'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공감을 하고 저자가 '해석'한 책을 보며 '답안'으로 생각할 여지가 높다는 것이다. 이 책은 '모범답안'이 될 순 있어도, '답안'은 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잘 생각을 하며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저자의 '해석'에 근거한 것이니까, 해석이라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책들은 저자의 논의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며 독서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생각을 해 나가며 판단을 해 나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가벼워 보이고, 옳은 이야기, 감성을 자극하는 책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저자의 논의는 다소 강력한 느낌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견문이 좁고, 덜 여물어서 저자의 논지에 대해 아직은 많이 생각을 해 봐야겠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철학을 대하는 기본 정신에는 공감했고, 많은 울림을 받았다.
 

특히 방황에 대한 저자의 논의가 좋았다. 방황에 대해서, 저자는 '기꺼이 길을 잃고 방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글에서 전율을 느꼈다. 굳이 답을 얻지 않아도 좋다. 방황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이런 위로 어린 말은 생각하며 방황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퇴폐와 타락, 그리고 쾌락을 위해 방황하는 생각 없는 방황자들에게는, 어쩌면 그들이 내뱉는 숱한 '변명1'이 되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더불어 길이 없는 방황에 대해서, 인용한 루쉰의 편지, 그 초반부의 루쉰의 편지. 길이 없는 상황에서의 '편지'는 내가 전문을 다 타이핑하여, 보관하며 두고두고 보고 있다.
 

다소 가볍고 쉬운 책이지만, 역시 철학을 다룬 책이기 때문에, 가벼운 에세이더라도, 사색을 많이 하면서 봤던 책이다. 따라서 쪽수에 비해 시간을 좀 끌면서, 여유를 부리며 독서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 더불어 한 가지를 더 꼽자면, 책에 보이는 그림 삽화들이 참 좋았다. 글과 아주 매치가 잘 되는 그림들이라서, 좋았던 것 같았다. 아무튼 이런저런 아쉬움도 있고, 영감도 받은 책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앞서 말한, 고병권이라는 사람의 글 쓰는 방식. 조용하고 고요하고, 여성적이고, 섬세한 필력임에도 불구하고 돌직구적인 강렬함이 느껴지는 뒷맛. 그것이 아마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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