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돈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5
플라톤 지음, 전헌상 옮김 / 이제이북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백조들은 그 이전에도 노래를 하긴 하지만 자신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바로 그때 가장 많이 최고로 노래를 하는데, 그건 그들이 섬기는 신 곁으로 떠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네.'


억울한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것에 대한 백조의 승천곡. 그것이 바로 이 대화편이다. 


소크라테스의 죽는 모습을 다룬 대화편인 <파이돈>. 따라서 그 어떤 대화편보다도, 배경이 주는 긴박함은 강렬했다. 그런 긴박하고 슬픔이 넘치는 상황 속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역시 소크라테스였다. 침착하고 정숙하게, 그리고 절도 있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변명>에서 말했듯,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철학하고 묻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주장을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지켜나가고 있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그 대화편의 주인공은 항상 소크라테스였다. 책을 쓴 저자는 항상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길 은연중에 바라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공명심은 조금이나마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저서에서 저자인 '플라톤'의 이름은 단 두 번 등장하는데, 바로 <변명>에서, 소크라테스의 보증인으로 서겠다는 부분과 바로 이 <파이돈>에서 약간의 언급이다. 그 외에 자신의 저서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만큼 플라톤은 자신을 죽이고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존경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파이돈>에서 언급은 <변명>에서의 언급과는 다르다. <파이돈>에서 플라톤이 나오는 대목을 잘 살펴보면,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누가 있었냐는 물음에서, 플라톤은 당시 병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는 작은 언급만이 있었다. 그런데 플라톤은 스승이 죽은 상황을 <파이돈>이라는 저서로 남겼으며, 이 저서는 숱한 철학자들에게서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다룬 가장 확실한 책으로 권의를 부여받았다. 이 부분에서 나는 조금 미묘한 감정을 느꼈었다.


플라톤은 참석하지 않은 시간 - '스승이 죽은 순간'에 대해 과연 어떻게 글로 남길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은 느낌보다, 자신이 직접 임종에 있었던 것처럼, 이토록 자세하게, 그리고 이토록 논쟁을 치밀하게 담을 수 있었을까? 분명 책 초반부에, 플라톤은 독자들과 거리를 조성했다. '나는 그곳에 없었어.'라고 당당하게 책에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스승의 임종 상황을 지독하리만큼 상세하게 알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추측을 해 봤다. 첫 번째,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실제 소크라테스의 임종과 동일하다는 가정. 실제 <파이돈>의 구성을 살펴보면 액자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액자 밖의 대화는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의 임종 전의 논쟁들과 임종의 모습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뤄져 있고, 본 이야기는 액자 속의 소크라테스의 죽는 순간을 다룬 이야기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승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플라톤은 실제 스승의 임종을 지켜본 누군가(극 중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에게 이야기하듯)에게 스승의 임종 상황을 유심히 듣고 그대로 기록을 했겠다.


두 번째는 <파이돈>이라는 텍스트가 거짓을 말하는 경우이다. 실제 소크라테스의 임종은 이와 같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플라톤의 생각과 자신만의 관념을 더해서, 스승의 임종 상황을 재구성하여 나타낸 것이 <파이돈>의 내용이라는 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플라톤은 스승을 기리기 위해, 약간의 허구를 섞어 <파이돈>을 쓴 것이 되겠다.


여기서 생각할 부분은 보통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을 가를 때,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 대화편의 가장 유명한 것은 <국가>로 전형적인 중기 대화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리뷰한 <변명>과 <크리톤>은 초기 대화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학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파이돈>은 전형적인 중기 대화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초기 대화편의 경우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플라톤이 스승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중기 대화편으로 갈 때 플라톤은 주인공인 스승의 이름을 빌려,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는데, 흔하게 중기 대화편에 나오는 이론이 바로 그 유명한 '이데아론(형상이론)'이다. (이데아가 무엇인지는 밑에 상세하게 다룸), 학자들의 분류로 살펴본 건데, 일단 <파이돈>에는 플라톤의 관념이 초기 대화편들보다는 다소 강하게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 <파이돈>에서는 이데아론이 4번이나 등장한다.


기존의 대화편들과의 현재 비교 연구를 통해서도, 텍스트 내부의 여러 상황 (플라톤은 이 임종 때 참석하지 않은 부분)을 보더라도, 내가 생각했을 때에는 플라톤의 주관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대화편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가장 혼돈이 되는 논점은 이것이 과연 '실제 소크라테스의 사상인가 vs 스승의 가면을 쓴 플라톤의 사상일까?'라는 부분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도 엇갈리고 확답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서 혼돈스러운데, <파이돈>은 읽을 때마다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쓴 플라톤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느껴졌었다. 그리고 이번 독법에서도 강하게 느꼈다. 즉 내가 느끼기에 이 대화편은 플라톤의 저술 동기가 가장 직선적이고, 저술 내의 플라톤의 의지가 가장 강하게 드러난 대화편이 아닐까 싶다.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만 봐도 이런 부분은 두드러진다. <파이돈>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사후 혼의 불멸'이라는 부분이다. 배경으로 보자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루는 때에 가장 적절하고 알맞은 철학적 담론은 아무래도 사후 세계의 영혼에 대한 담론이 아닐까 싶다. 삶의 공간이 아닌 죽음의 공간,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사후 영혼을 다루는 책이라서, 책의 주제 만으로도 상당히 강한 포스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주요 담론은 액자 내부에서 시작된다. 철학자의 죽음을 두고,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철학자라면 죽음을 오히려 반긴다는 이야기를 펼친다. 이에 케베스와 심미아스는 반론을 펼치고 이들과의 영혼을 다룬 논쟁 자체가 바로 <파이돈>의 핵심 내용이다. 요약해서 정리를 해 보면,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몸을 분리하여 인식하고, 몸의 여러 감각기관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반면 영혼의 가치는 몸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며, 결국 죽음이란 영혼의 감옥인 몸에서 해방되는 행위이므로, 진정한 철학자는 죽음을 오히려 반가워해야 한다는 논의를 펼친다. 즉 이런 논쟁의 전제조건은 혼은 소멸하지 않으며 항상 불멸함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심마이스와 케베스는 반론을 제기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존재를 위해 '순환논증(x가 F라는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리고 반대되는 속성 -F가 존재한다면, F를 가지게 됨이라는 변화는 -F로부터의 변화이다. ex - 차가움의 인식은 앞전 따뜻함에 비롯된 것으로, 이것을 삶과 죽음으로 대입시켜, 삶으로부터 죽음이 죽음으로부터 삶이 존재하며, 결국 죽어서 삶으로 가는 과정에서 영혼의 존재성을 입증함.) '을 시도했으며, '상기논증(대상을 상기함에 있어, 태어날 때부터 상기에 필요한 같음이라는 앎을 알고 있고, 이것은 영혼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증, 따라서 영혼의 존재를 입증 - 상당히 복잡하고 학자마다 해석이 갈리는 부분으로 논의의 결론만을 요점적으로 서술. 인식론과도 맞물림. 자세한 것은 책 참조)'을 통하여 영혼의 존재에 대해 논지를 강화했다.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초반부 철학자가 죽음을 추구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이데아 이론(보이지 않는 이성적인 것으로만 - 감각 기관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알 수 있는 본질)이 나온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사실 상기 논증에서도 이데아 이론이 설명되고 있었는데 이 부분은 상당히 난해했고 학자마다 해석이 갈리기 때문에 조금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


이런 증명에도 불구하고 심마이스와 케베스는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만을 입증했을 뿐, '죽고 나서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유사성 논증'(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내세워 몸과 감각기관의 인지를 가시적인 것으로, 영혼과 이성적인 인식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내세워 유사성에 입각하여 논증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각 속성의 특징을 이야기하며, 가시적인 것은 소멸 해체되며, 비가시적인 것은 소멸되지 않음을 입증한다.) 으로 인해, 그들의 논란을 잠식시킨다. 여기에서 또 영혼의 항목과 몸의 항목 대립적인 축을 설명하면서 비유를 든 것이 바로 이데아론이다. 그 뒤 심마이스와 케베스는 각각의 반론을 펼치는데, 이에 대한 부분을 소크라테스는 증명하며, 결국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며, 확고하게 동의를 얻어낸다. 전체적으로 복잡한 논증은 이렇게 4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뒤,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다뤄진다.)


사실 책은 상당히 어렵다. 주제면으로도, 보이지 않는 영혼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그러하며,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본격적으로 논증에 드러나는데다, 상당히 어려운 논의들이 난무하기 때문에 접근하기 쉬운 대화편은 아니다. 사실 이 책을 저술한 플라톤의 동기는 분명하다. '내 스승인 소크라테스께서는 육신은 이렇게 죽지만,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해방되는 것이며, 사후 세계에서 영혼을 잘 갈고닦은 스승은 결국 최고로 안락한 곳에 위치하리라, 스승의 혼은 불멸하리라.'라는 제자의 마음을 나는 느꼈던 것 같다. 그러한 저술 동기 때문에 플라톤은 스승의 극적인 모습을 담은 <파이돈>에서 자신의 이론인 '이데아론'까지 동원하여가면서, 스승의 임종에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세하게 책을 쓴 것은 아닐까?


책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이돈> 대화편을 관통하는 이분법, 두 축을 잘 읽어내야 한다. 내가 읽었을 때 <파이돈>은 육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간과, 영혼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간 두 부분을 크게 가르고 있는 대화편이다. 전자의 속성은 감각기관, 몸, 육체에 집중한 삶, 쾌락적인 삶 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플라톤은 이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이다. 반면 후자는 이성 기관, 정신, 영혼에 집중한 삶, 금욕적이고 내면을 추구하는 삶 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두 축은 사후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즉 동물적인 삶을 산 사람은 동물로 태어나고, 인간적인 삶을 산 자는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윤회설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며, 이승에서 철학으로 인해 영혼을 잘 닦은 자는 신들이 사는 공간으로 갈 수 있다는 부분은 불교를 비롯하여, 동양의 여러 내세의 사상들과도 맞물려 있는 부분이었다.


즉 물질 중심주의가 만연하는 사회에서, 이 대화편이 던지는 화두는 바로 '영혼', 즉 내면을 돌보는 삶에 대해서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물질보다 영혼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물질주의적인 부분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금의 물질 지상주의의 사회에 대해서는 조금 심하다는 게 내 생각인데, 이런 부분에서 <파이돈>은 많은 부분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설령 이 대화편의 주된 논의인 영혼의 존재와 불멸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논증이 어려워 따라가기가 힘들다 하더라도, 이 부분은 쉽게 설명되었으며, 이 부분만에 서라도 물질 중심주의 사회에서 현실을 돌아보고 교훈을 얻는다면 많은 것을 느끼게 할 대화편이 아닐까 싶다. 실제 플라톤은 이 부분을 대화편의 핵심으로 간주할 정도로 강조하고 또 강조하며,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느꼈다.


해설에 보니 이런 플라톤의 금욕주의적인 모습은 후대의 기독교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 학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ex 스토아학파의 현인) 그리고 청교도의 사상에도 유사한 부분이 보이기도 했으며, 실제 동양 사상, 극도의 도덕주의를 내세운 유교, 공자의 군자의 상과도 떠올랐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다룬 대화편과 비교를 해 보자면 <변명>과 <크리톤> 그리고 <파이돈>으로 서사적으로 엮을 수 있겠다. <변명>의 주요 주제는 '되묻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다소 개인주의적인 범주로 주제를 고찰하고 있다. 반면 <크리톤>의 주요 주제는 '법과 개인'을 다루고 있으며 이 대화편은 개인주의를 넘어선 사회와 인간을 다루고 있다. <변명>과 <크리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현세적이며 현실적인 삶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면, <파이돈>은 이런 두 대화편과 극명하게 다르다고 느꼈다. <파이돈>은 사후 세계의 죽음을 다루고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죽음과 사후 세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앞선 두 대화편이 현세적인 성격을 지녔다면 <파이돈>은 내세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앞선 두 대화편에 비해 다소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논고하고 있었다. (이데아론 등등의 등장.)


특히 <변론>의 초중반부 부분은 법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 부분은 <크리톤>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있었다. 또한 <변론>의 후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파이돈>이 바로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변론>을 중심으로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는데 이런 부분에서도 세 대화편은 상통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


과연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주장한 대로, 신들이 머무는 곳에서 불멸의 영혼으로 살아남아 있을까? 그리고 플라톤 역시도, 성실하게 철학을 공부했으므로 신들이 머무는 곳에서 과연 스승을 만났을까? 나는 알 수가 없다. 사실 이 혼에 대한 논의 자체가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부분이며, 결정적으로 객관화할 수 없는 물증이 없는 논의이기 때문에(소크라테스는 감각기관으로 인지하는 것을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혼의 담론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백조들은 그 이전에도 노래를 하긴 하지만 자신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바로 그때 가장 많이 최고로 노래를 하는데, 그건 그들이 섬기는 신 곁으로 떠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네.'


다만 플라톤은 <파이돈>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승천곡, 백조의 노래를 지음으로써, 그리고 그 <파이돈>이 현세에 막강한 권위를 부여받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 곁에 항상 살아있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혼이 불멸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파이돈> 덕분에, 더욱 생생하게 우리 곁에 남아있을 것이다. 책에서 주장한 불멸의 영혼처럼 그들은 현세 인류 지성사의 아이콘으로 영원할 것이다. 신들이 있는 공간에서 과연 플라톤은,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알까? 사제는 작금 현세의 분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하다. 궁금증을 끝으로, 책을 덮으며 소크라테스의 (혹은 플라톤의) 명언이 떠오른다. 인상 깊은 구절을 끝으로 서평을 닫아본다.


 

'올바르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몸에 관련된 모든 욕망들을 멀리하고 견뎌 내며 그것들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데, 그건 많이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그가 가산 탕진과 가난을 조금이라도 겁내서가 아니라네. 또 그건 그들이 권력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그가 불명예와 타락으로 인한 오명을 두려워하고 그로 인해 그것들을 멀리하는 것도 아니라네


모든 즐거움이나 고통은 마치 못을 가진 듯 영혼을 몸에 대고 못질해 박아 육체적으로 만들어서는 몸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참이라고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몸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것에 대해 즐거워함으로 해서, 내 생각에, 영혼은 필연적으로 그것과 같은 성격과 같은 습성이 되고 결코 순수하게 하데스(죽음)에 이르지 못하고 매번 몸에 감염된 채 떠나가야 하는 그런 어떤 것이 되어서 결국 다른 몸속으로 곧바로 다시 떨어져 마치 씨 뿌려진 듯, 뿌리를 내리게 되고 이런 이유들로 해서 신적이고 순수한 모습인 것과 함께 있음에 참여할 수 없게 되고 말거든.'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소크라테스의 변명 - 플라톤>, <크리톤 - 플라톤>, <국가 - 플라톤>, <영혼에 관하여 - 아리스토텔레스>, <죽음이란 무엇인가 - 셸리 케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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