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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톤 ㅣ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9
플라톤 지음, 이기백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악법도 법이다.'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배웠던 소크라테스의 격언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알았지만, 사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저 말은 누군가가 지금 리뷰하려는 대화편 <크리톤>을 보고 참고하여서 지어 낸 말이었던 것이다.
<크리톤>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책으로, 상당히 짧다. 그러나 일명 소크라테스의 4대 대화편에 항상 들어가는 대화편이었으며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4대 대화편 (에우튀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으로도 묶을 수 있겠다.
책은 짧은 분량이지만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더없이 난해한 부분이었으며, 특히 전편이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모순적인 사상이 존재하여서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해석의 다양함을 선사하고 있는 책이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전작은 <변명>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친구이자 이번 대화편의 이름인 '크리톤'은 친구 소크라테스가 죽을 것이라는 소식(델로스에 사절단을 보낸 배가 돌아옴, 이 배가 출항했을 때는 모든 사형을 연기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30여 일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을 받고 마지막으로 그를 탈옥시키기 위해, 감옥으로 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크리톤에게 논쟁을 시도했다. 그는 국가의 사형선고를 지킬 것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크리톤이 주장하는 탈옥은 정의에 위배되는 부분이라 잘라 말하며, 크리톤을 설득했다. 결국 소크라테스를 설득하지 못한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압도당해 그가 죽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죽는 순간, 그리고 죽음을 바로 앞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구하러 온 크리톤에게 한 말이었다.
'내게 이런 운명이 닥쳤다고 해서 내가 이전에 말한 원칙들을 지금 내던져 버릴 수는 없네. 만일 지금 우리가 이것들보다 더 좋은 것들을 제시할 수 없다면, 나는 자네에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아두게. 다수의 힘이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은 도깨비들로, 즉 투옥과 사형과 재산몰수로 겁을 줄지라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네.'
어떻게 보면 꼬장꼬장하고 원칙주의자 같은 소크라테스. 죽음 앞에서조차 자신은 원칙을 고수하겠고, 그 원칙에 합당하지 않은 근거를 제시할 시 굽힐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까지만 보면 <변명>에서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사상 중,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이것들보다 더 좋은 것들을 제시할 수 없다면.'이라는 부분. 즉 자신에 대한 비판과 논쟁에서 더 합당하고 타당한 주장을 펼친다면 자신은 즉각 의견을 굽히고 수용할 수 있다는 여지도 남겨놓고 있었다. 원칙주의자라고 해서 자신의 원칙만을 최고로 여기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포용력 있고 대범한 그의 사상이 드러난 부분이라 생각됐다. 이런 부분은 뒤에 나오는 그의 국가관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그가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행위는 결국 정의로운 행동인가.'라는 잣대였다. 크리톤은 이에 대해서, 자신의 논조로 이야기를 하는데, 대표적인 부분이 다수의 평판을 의식한, '내가 자네를 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는가.'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비유를 하며 논의를 이끌어가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소수더라도 의식 있는 사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의 의견은 대중의 의견을 압도하고 합당하다는 이야기를 펼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민간요법으로 의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도 의사의 말 한마디는 대다수의 사람을 초월한다. 그것은 소수의 각성 있는(혹은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사람이 하는 말은 대중의 여론보다 더 탁월할 가능성이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만일 그가 그 한 사람(전문가이자 의식이 깨어 있는 존재)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의 판단과 칭찬을 존중하지 않은 채, 전혀 전문지식을 갖지 못한 다수의 판단과 칭찬을 존중한다면 그는 나쁜 걸 겪지 않겠는가.'
'이것들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수의 판단을 따르고 이것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사람의 판단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 밖의 모든 사람 앞에서보다도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두러워해야 할 전문 지식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있다면 말이네.'
어떤 사람, 즉 소크라테스는 전문 지식이나 영역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까지도 절대주의적인 면을 고수하고, 완벽한 인성에 다다른 인간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는 '윤리적 절대주의' 사상을 드러내며 크리톤을 일깨운다.
다만 나는 이 대목에서 생각을 한 부분이 어느 특정 분야나, 측정화할 수 있고, 객관화할 수 있는 지식의 범주에서는 분명 절대주의가 통용되겠지만 과연 윤리나 덕을 다루는 분야까지 절대적 범주에 도달한 인간성을 설정한 것은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나 역시 부분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의견을 존중하긴 하지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윤리 앞에서 절대적인 범주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란 말인가?에 대해서는 사실 회의적인 관점을 고수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회의주의적 관점은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부분이지, 윤리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관점은 아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윤리라는 가치 위에 설 수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덕이나 윤리를 추구하여서, 불완전한 내면을 다스려야 한다는, 관점이 내 관점이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윤리라는 가치를 마스터한 인간, 그것을 설정한 소크라테스의 관점을 따르고 있진 않다.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정의에 대한 담론에서 크게 느낀 점이 있었다.
크리톤과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대한 담론을 나누며, 윤리관에 봉착한다. 즉 당시 고대 사회는 보복적 윤리관을 지향하고 있었다. 즉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당할 시 그대로 혹은 어느 정도만이더라도 보복적으로 불의를 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회에 만연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라던가, 중국의 법, 아니 외국을 떠나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고조선 8조 법에서 보복적 윤리관을 볼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이 당시 그리스 사회 역시도 그런 생각이 만연했었다. 크리톤 역시 이 사상에 입각하여, 국가가 행한 사형이 불의에 입각하니, 소크라테스 너는 탈옥해도 괜찮다고 은연중에 주장했다. 이런 크리톤의 내면에도 아테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보복적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면 '소크라테스적 윤리관'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든 보복으로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도 해롭게 해서도 안되네, 그들에 의해 무슨 해를 입든 말든 말이네.'
지금은 범국가적으로 평화적인 사상이 만연하여 이런 평화주의적인 윤리관이 익숙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런 윤리주의를 전 세계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 당시 고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부분이었다. 당시의 고대 사회상은 여전히 보복주의 윤리관이 성행했었는데, 그런 서구 사회에서 텍스트에 나온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보복주의 윤리관에서 탈피하여, 설사 국가가 나에게 불의 한 죽음을 가하더라도(보복의 가함), 나는 그 부당한 죽음을 부당하게(탈옥) 대응하지 않겠다.'며 크리톤에게 강조했다. 이런 부분에서 소크라테스의 윤리관은 확실히 진보적이었고, 신선한 모습이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논리를 크리톤에게 주장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논쟁을 할 때 먼저 생각이 다른,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크리톤을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며 '공동의 논의 기반'을 설정하고 공유하며, 그 공동의 논의 기반을 설정했을 때 그 공동의 논의 기반이 '숙고의 출발점'으로 삼는 모습. 이 부분은 토론문화가 척박한 우리 사회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아직도 우리는 논쟁이라는 것을 할 때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억압하고 내 목소리만 크면 장땡이라는 인식을 가지는데, 그런 부분보다는 일단 논쟁자와 '공동의 논의 기반'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설정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토론에서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기도 했었다.
책의 하이라이트이자 책의 핵심 주제는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법의 의인화'를 통해 자신의 설명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크리톤>의 핵심 주제는 '부당한 법에 대해 과연 인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인데 이것을 통해 우리는 확장하여, '부당한 법에 인간이 순응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항거하는 것이 정의로운가'라는 물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설득시키러 온 크리톤을 역으로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즉 자신이 국가의 사형을 받고 죽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이며, 부당한 법이더라도 선고가 되면 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설파했다. 모순적인 모습은 여기서 드러난다. 분명 <변명>에서의 소크라테스는 악법은 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첫 번째로 그리스 30인 과두정 시기 정부는 소크라테스에게 레온을 연행해 오라고 지시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이 명령이 정의롭지 않다고 따르지 않았다, 두 번째는 사형을 받으면서까지 자신은 만약 자유로워진다면 국가가 금지한 논쟁적 철학을 죽어서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대목) 이 대목에서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악법은 따르면 안 된다.'라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 후속 대화편 <크리톤>에서는 이러한 입장이 전혀 반대로 일어난다. 결국 자신의 사형이 결정된 법 지키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며, 이에 반대 입장에 선 크리톤을 논쟁으로 무마시켜버렸다.
정부의 권력(법의 권력)와 시민불복종을 두고, 결국 두 가지 사상이 모순되고 있고,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확실히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지도 의문에 남는다. 내가 <크리톤>을 숱하게 읽어왔어도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각할 때마다 답이 안 나오는 부분이기도 하다. (해설 역시도 난해한 부분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부당한 사형 명령을 군말 없이 따르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크리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맹목적 국가주의로 매도하기 쉽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맹목적인 국가주의를 따르진 않았다. 의인화된 법의 말에서 그 대목을 살펴볼 수 있겠는데
'우리(법을 지칭 의인화한 것이다.) 에게 복종하기로 합의하고서, 복종하지도 않고, 우리가 뭔가를 잘못하는 경우 우리를 설득하지도 않기 때문이오.'
즉 법이나 국가가 나에게 잘못을 할 시에는, 불복종하기보단, 국가나 법을 상대로 논쟁하여, 설득하여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변명>에서 국가의 법에 불복종한 소크라테스를 생각해본다면, 두 번째, 자신은 죽어도 논쟁적 철학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부분은 이렇게 해석 가능하다.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대목은 그가 스스로 국가나 법을 상대로 자신의 정의로움을 설득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죽어서까지 철학하고 남에게 묻고 나에게 묻는 삶을 살겠다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이 모든 행위는 결국 국가를 설득하는 일말의 소크라테스만의 행위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첫 번째 의문이 남는다. 과연 과두정에서 연행해오라고 한 그 명령은 왜 따르지 않았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로서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대화편을 보면서 소크라테스가 다 옳다고 해도 크리톤이 옳다고 생각한 부분도 있었다. 가령 자네는 자식을 낳아놓고 키우는 것은 어떻게 하겠는가? 아이만 낳고 무책임하게 가는 것이 부모의 도리인가라는 말은 크리톤의 말이 옳은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자네들(친구들)이 진정한 친구라면 내 아이들까지 잘 보살펴 주겠지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은 현대 시대에서는 공감력을 사기가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어느 누가 절친의 자식 3명을 부양하겠는가... 아내에게 쫓겨나지 않을까... 애 하나 키우기도 힘든 세상인 현대 시대에...)
대화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아까도 말했듯 '정의'라는 가치와 더불어, 국가권력과 개인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이런저런 의문점이 남더라도 죽음 앞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강조하고 초연하게 자신을 살리러 온 크리톤을 설득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많은 영감을 받었다. 인간인 이상 생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한 본능인데,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유혹들을 잘 이겨내고, 극복했다.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믿으며 굳건하게 지킨 소크라테스. 그의 자세에서 많은 귀감을 얻었다.
책은 짧고 분량도 적지만, 책이 다루고 있는 가치는 분량을 초월한다. 모순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 그것은 과연 그의 진실적인 모습인 것일까, 아니면, 스승의 죽음을 극적으로나마 미화시킨 플라톤의 오류인 것일까, 이것이 과연 소크라테스의 진짜 모습인 건지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쓴 플라톤의 모습인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대화편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다.
다 좋은데 이번 번역본은 번역이 상당히 직역투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시대명사가 가리키는 부분을 잘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 짧은 텍스트지만 집중력을 요하는 책이었다. 또한 주석 처리에서 전문적인 단어에 대한 부분과 내용상의 해석을 돕는 부분을 나눠서 처리했으면 어떨까 싶다. 전문적인 단어에 해석 주석을 미주로, 내용상의 해석을 돕는 주석을 각주로 처리했으면 더 보기 깔끔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다.
다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파이돈>을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