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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ㅣ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8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부제 : 고대 그리스 시대 갑질에 대한 을의 항변
이 고전은 서구 사회에서 권력이 자행한 갑질에 을이 항변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문헌이다.
이 고전으로 인해, 장래가 촉망받는 귀족 자제는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스승의 길, 철학의 길을 밝히게 된다. 그는 이 책으로, 자신의 죽어간 스승 소크라테스를 밝히기 시작했으며, 스승의 이름으로 서양 철학을 다시 바로잡아 세워나갔다.
그래서 이 고전은 서구 사회의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가장 자세하고 생생하게 고찰한 문헌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흥미로운 구성으로, 짜여 있다. 작품 내에서 전지적 작가가 한 가지 이론을 전개하기보단, 마치 극본처럼, 다수의 대담자들을 설정하여서, 대화를 이끌어나간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대화편들의 주인공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다.
책의 배경은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이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류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정치체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런 거룩한 정치 체제와는 다르게, 그리스 사회 내부는 상당히 썩어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황금시대를 열어가고 있었지만, 전쟁과 정변으로 인해 시민들의 삶은 내면적으로 피폐해져만 갔었다. 그 결과 정부와 시민들은 그들의 피폐함을 화풀이할 대상을 찾았고, 거기에 걸린 것은 괴짜와도 같은 자유분방한 소크라테스였다.
거룩하고 자유스러운 정치 체제에서 그리스는 위대한 '거리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탄생시킨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다름과 다양성을 수용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런 결과, 기존과는 다른, 소피스트들과는 다른, 낮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채택한 아테네는 썩어 있었다. 겉으로만 관대하고 겉으로만 포장했던 아테네는 독단과 위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오만과 독단 위선이 표출된 대표적인 예가, 거리의 철학자를 죽인 것 이었다. 자신들이 배출한 특출한 철학자를 자신들의 오만 때문에 죽인 셈이다.
이 대화편은 그런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플라톤의 눈으로 재구성한 고전으로서, 당대의 생생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끝내 스승의 죽음을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던 젊은 지성인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방황을 경험했고, 민주주의가 자행할 수 있는 오만과 경고를 이 책에 담음으로써, 스승을 죽음을 몰고 갔던 원고들에게 역사적인 심판을 가함으로써, 실추된 스승의 명예를 복원했었다.
책은 워낙 유명한 고전이라서, 쓸 말은 별로 없겠지만.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 그리고 서양 철학으로 말하자면 1+1과도 같은 기본적인 책이고, 거의 대부분의 철학 입문자들은 이 책으로 철학 원전 텍스트를 시작하니 굳이 이 책의 중요성을 다시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플라톤의 저서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이며, 가장 많이 번역된 책이 이 책이 아닐까 싶다.
다만 많이 알려진 문헌이지만, 내가 많이 읽은 탓에 나의 서평은 길어질 수밖에 없겠다. 이번 서평은 기존의 서평들과는 다르게 번역본 자체를 대거 인용하여 그에 대한 생각들을 전개하려고 한다. (혹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책을 읽길 권한다.)
책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스스로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유죄 판결이 난 뒤 형량에 대해서 논고하는 부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형이 결정 난 뒤 최후변론하는 것으로 구성됐다. 형태적으로 크게 책을 나누면 3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다. 책의 역자인 강철웅 박사는 책의 첫 부분(무죄 주장)과 책의 마지막 부분(최후변론)은 신에 대한 논고가 들어간 뮈토스(신에 관한 이야기) 적 구성을 보여주고, 책의 중간 부분(형량에 대한 논의)은 로고스적 구성(이성 중심적인 구성)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다른 번역본을 읽을 때 의식하지 못 했던 부분이었는데, 상당히 인상 깊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발고한 사람들 그 집단 지성을 향해, 이렇게 말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시기와 비방을 이용하여 여러분을 설득하려 한 사람들, 그리고 개중에는 스스로 설득된 상태에서 남들을 설득하려 한 사람들도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사람들 모두가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 순전히 그림자와 싸우듯 항변해야 하며 대답하는 사람 하나 없는 상태에서 논박해야 하니까요.'
이 대목에서 나는 기원전이건 그보다 2000여 년 뒤의 우리 사회건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공인이 가진 힘은 개인의 힘보다 훨씬 강력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공인의 말은 일반 사람들에게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질 가능성이 높겠다. 그래서 공인은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하며,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멀리 갈 필요 없이 최근의 이슈, 갑의 위치에 있는 조현아 사건만 생각해도 수긍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 시기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지금 현대에도 사실 그때에 비해 나아졌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공인이라 할 수 있는 집단지성은 그들의 눈에 들지 않은 소크라테스를 불온자로 규정하였고, 그리고 결국 죽이기 위해 사형까지 세웠으니까 말이다. 그럼 그들이 과연 무슨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를 죄인으로 규정한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땅 아래 일들과 하늘의 일들을 탐구하고 더 약한 논변을 더 강하게 만들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르침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고, 주제넘는 일을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젊음이들을 망치고,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
그의 죄목은 두 가지로 집약되겠다. 첫 번째 교육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가치가 허용하지 않는 지식을 가르치고 퍼트렸다는 죄목과, 두 번째는 사회가 규정하는 종교관을 부정하며, 신을 부정하고 있다고 원고 측(고대 그리스의 갑 - 멜레토스 패거리)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는 바로 신의 목소리를 경청한 이유를 근거하며, 신탁에 의거한 목소리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항변했다. 그는 이 자신의 변명의 증인을 신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은 사회적 통념의 신앙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무신론자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으로 멜레토스를 대화에 참여시킴으로서 그와의 논쟁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흔하게 보이는 플라톤의 대화편과 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차이점은 바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대상에 있다. 대부분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개개인과 소규모 대화만을 추구하고 있는데 반해 이 <변명>에서는 아테네의 시민들(집단)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변명> 내부에서 소크라테스가 직접적으로 언급하듯, 자신은 공적인 곳에서 불특정 다수와 대담을 나누기보단 사적으로 소수의 인물에게 깊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더 추구한다고 밝히는 부분과도 대치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이 <변명>은 상당히 특이한 대화편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러나 역시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라고 생각이 들었다. 법정에서도 그는 상대 원고 측의 멜레토스를 자신의 대화에 참여시킴으로서, 기존의 대화편이 가지던 개별적 대립의 논쟁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었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 소크라테스는 신의 속삭임 아래에서, 무지의 인정으로부터 지혜가 나온다는 진리를 주장했다. (이 부분은 사실 논리적이지 않은 부분이다. 신이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였다는 부분은 지금 듣기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부분이니까) 즉 기존에 통념적인 아테네 지성인들이 알고 있다고 위장하고 허상을 떠는 그러한 허영의 도시에서, 그들의 허영과 그들의 아집을 꼬집기 위해, 여러 정평 난 명사들을 만나서 논쟁을 하고 다닌다. (숱한 플라톤의 대화편 제목들은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논쟁적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즉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모른다 -> 나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그러나 기존의 지성인들은 그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그들이 모든 진리를 다 안다고 한다 -> 그런 이들에 비해 나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저들보다는 내가 더 지혜롭다.
관점을 바꿔 동양철학 쪽에서도 이런 지식에 대해서 많은 격언이 존재한다. 가령 도가 철학의 <노자 도덕경>에서는 최상의 앎은 역설적이게도 무지이다. 지식을 끊을수록 행복해진다.라는 회의적인 관점을 보였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럼 동양의 소크라테스라 추앙받는 공자는 어떨까? <논어> 2편 위정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유야, 너에게 아는 것을 가르쳐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이 관점은 소크라테스의 관점과 굉장히 흡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다. 노자와는 다르게, 공자는 앎과 지식에 대해서 긍정적인 철학자이다. 그러나 그런 공자조차도 무조건적인 지식을 지향하지 않았다. 특히 모르는 것에 있어서는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사상은 일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동양의 성인과 서양의 성인은 지역은 다르지만 이렇게, 지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공통분모가 있었다.
무지에서 앎을 이끌어내고, 그러한 솔직한 앎의 범주를 설정하는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아는 척하고 위선과 교만으로 포장한 기존의 지식인층, 허영과 가식에 찌든 지성인들과는 달랐다. 그는 그러한 사회의 '갑'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들과 논쟁을 시도했었고, 그들의 허상과 허위를 낱낱이 밝히기 시작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거의 혹은 아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간들 가운데 쌔고 쌨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 때문에 검토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서 가 아니라 나에게 화를 내면서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지극히 부정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젊은이들을 망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소크라테스에게서 새로운 무지의 앎을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지적인 기성세대를 검토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을 부담스럽게 여긴 기득권은 결국 소크라테스를 불온자로 몰아가고 있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상대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소수의 목소리라도 검토할 만한 사안이라면 받아들이고 돌아봐야 하는 것이 허용된 정치체제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새로운 거울을 직면하기보다는, 깨부수려고 고수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고대판 갑의 횡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여김 없는 갑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나를 빼놓고 아테네인들 전부가, 그들을 아름답고 훌륭하게 만드는데, 나만 그들을 망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런 뜻으로 말하는 건가요?
멜레토스 : 바로 그걸 내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다름에 대해서 재고조차 하지 않고, 바로 몰아가는 멜레토스의 모습.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의 이름으로 자행했던, 크고 작은 오만들이 떠올랐었다. 과연 지금 나의 안에는 멜레토스의 모습이 없는 것일까? 확실하게 대답을 할 수 없었고, 그런 내 모습이 순간 부끄러워졌었다.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신론에 대해서도 멜레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논변으로 착각하고 있는 부분(아낙사고라스의 신론)들을 일깨워주며, 소위 훌륭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자부한 멜레토스의 무지를 꼬집었다. 그리고 비유를 통해 자신의 굳건한 신앙관을 설파했다.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세력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왜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를, 그 이유에는 사실 이런 논리적인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변론 최후 말미에 직격탄을 쏘아올린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에 대해 많은 미움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생겨나 있다는 게 진실이라는 건 잘 알아두세요, 또 나를 잡을 게 바로 이겁니다. 멜레토스도 아뉘토스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비평과 시기입니다. 그것들은 분명 다른 많은 훌륭한 사람들도 잡았고, 또 내 생각에 앞으로도 계속 잡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이 내게서 멈추게 되지 않을까 무서울 일은 전혀 없습니다.'
기원전 2000년에 한 말 치고는 굉장한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실제의 선각자들은 그들의 시대보다 너무 앞서간 사상 때문에 탄압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공자도 그랬고, 소크라테스도 그러했다. 이 뿐일까,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방영한 정도전이 그러했고, 조광조도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소크라테스에게는 플라톤이라는 제자가 있어서, 그는 글 한 줄 남기지 않고도 살아남았고, 지성의 아이콘이라는 문화적 권력을 사후에 누리게 됐다. 그는 죽음으로서, 영원한 승리를 했으며, 그 시대의 갑들, 위정자들은 그를 죽이면서 잠시의 승리를 누렸겠지만, 역사적으로 패배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소크라테스는 시대의 갑질에 항거하여,을의 입장으로, 정의를 대변한 모습들을 입이 아닌 행동으로도 나타냈다.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자신은 양심을 팔지 않았고, 권력자의 요구로부터 소신껏,을의 위치를 고수하며 신념을 굽히지 않은 행동들을 이야기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봤던 전쟁들이 언급된 사례가 있었던 점이다. 요약해보면 그는 말로만 궤변으로 남들에게 양심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실천하는 지성이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긴 설명을 끝으로, 마지막에 소신 있게 대못을 박는다. '동정은 사양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여서 나에게 투표를 해 달라.'라고 이야기한다.
'재판을 받을 때 그들은 한인물 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면서도 놀라운 행동들을 벌입니다. 죽으면 뭔가 무서운 일을 겪게 되리라는 생각에서죠. 마치 여러분 손에 죽지 않으면 불사자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국가에 수치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어떤 식으로든 한인물 한다고 여겨지는 여러분 자신이 이런 일들(동정에 호소하여서 감성을 자극하는 행위)을 해서도 안 되고 우리가 이런 일들을 할 때 여러분이 우릴 그냥 내버려 두어도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이걸 보여 주어야 합니다. 조용히 있는 사람보다 이런 불쌍한 행위를 연출하면서 국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사람에게 여러분이 유죄 표를 던지게 될 공산이 훨씬 크다는 걸 말입니다.
재판관은 정의를 사적 이해관계로 재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판가름하기 위해서 앉아 있는 거니까요. 또 그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겠다고 서약한 것이 아니라 법에 따라 판결하겠다고 서결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러분에게 서약을 깨는 버릇(감정에 호소)을 들여도 안 되고 여러분이 그런 버릇을 들어도 안 됩니다.'
죽음 앞에서 흔들리고, 초연하기 힘든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를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와 정의뿐이었고,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지성이었다. 물론 그 역시도 인간이니까,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고, 죽지 않기 위해 동정을, 죽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법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친절하게도 소크라테스는 작품 초기에 그러한 물음에 대해서 고전 <일리아스>를 인용하며 답변을 한다.
'곧바로 죽어도 좋습니다. 불의를 행한 사람에게 대가를 받아 낸다면 말입니다. 그래야 여기 구부러진 배 곁에서 비웃음의 대상으로, 대지의 짐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되겠지요.'
또 이에 대해서 결론을 이끌어낸다.
'아테네인 여러분, 누군가가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어떤 자리에 자기 자신을 배치했거나, 혹은 지휘관이 배치해 주었다면, 그게 어디든 그 자리에 남아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난 생각합니다. 죽음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수치스러운 것보다 먼저 계산에 넣는 일은 아예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즉 자신은 진리를 실천하는 것에 목숨을 걸겠고, 치졸하고 비굴하게 살아남지 않겠다는 것을 강하게 이야기했었다. 진리 앞에서 자신은 당당하니 자신을 진리에 기초해 판단해 줬으면 좋겠다. 동정은 바라지 않는다는 그의 집념. 이 대목을 보면서, 나는 세월호 사건의 선장도 떠올랐다. 최선에 자리에 있어야 할 선장은 가장 먼저 수치스러움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생명을 계산에 넣었다. 그 결과 작년 4월은 참혹했었다.
그렇게 이성을 강조하며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항변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그는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죄를 정하는 법정에서 소크라테스는 벌금형을 주장했지만 결국 그에게 내려진 것은 사형이었다. 사형이 확정되고 나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부를 택발 바에는 죽겠다고 공헌했다.
'내가 유죄 판결을 받은 건 물론 궁해서긴 하지만 말들이 궁해서가 아니라, 대담함과 몰염치가 궁해서, 즉 여러분이 들으면 가장 달콤해할 그런 말들을 여러분에게 할 의향이 궁해서죠. 통곡도 하고 비탄도 하면서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바로는 가장 나답지 않은 다른 많은 일들과 말들을 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바로 그런 것들이야말로(아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듣는 데 익숙해져 있기도 한 것들이지요... 오히려 저런 식으로 사느니 보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항변하고 죽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형량에 대한 변론을 할 때, 그는 다소 어이 없이, 자신은 국가 유공자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했으며, 사형을 선고받고 최후변론을 할 때에도 알려지지 않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 자신은 죽어서도, 죽은 위대한 영혼들을 검토(그들이 과연 위대한 인물이 맞는가) 하겠다며, 차라리 이렇게 죽을 수만 있다면 살아서 눈치 보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훨씬 값지지 않을까?라며 너그러움을 잃지 않는다.
나는 그의 그런 괴짜 같은 모습이 참 좋다. 동양의 성인들은 뭐랄까, 유머와 개그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괴팍하고 궤변적이기도 하지만, 익살적이고 언어유희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극이나 대화를 너무 무겁게 이끌어나가지 않는 그의 여유로움이 좋았던 것 같다. 죽음 앞에서도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여유를 잃지 않았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고받으면서 한 가지 큰 예언을 남긴다.
'여러분 (유죄의 투표를 던진 사람들) 나는 여러분이 나를 죽일 때의 앙갚음보다, 제우스에 맹세코, 훨씬 더 혹독한 앙갚음이 내 죽음 이후에 곧바로 여러분들에게 닥칠 거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실제 소크라테스의 이 말이 '죽음 이후에 곧바로' 닥친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사후, 플라톤의 저술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영원히 자신을 유죄로 몰고 간 이들을 이길 수 있었다.
책의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 핵심 키워드는 '검토'다. 검토란 거울과도 같다. 밖에 나갈 때 우리는 외모를 검토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선다. 치장을 하고 예쁘게 꾸미기 위해 거울을 본다. 우리는 외관은 항상 검토하는 반면 내면을 검토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소크라테스의 검토는 바로 마음의 검토, 지식의 검토, 통념의 검토 즉 내면적인 검토를 뜻하는 것이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세속화되면서, 우리는 보이는 것 만을 검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럴수록, 나의 앎을 수시로 검토하며, 우리의 인생을 검토해야 하고, 아는 지식을 다시 검토해야 하며, 사회의 통념을 다시 한 번 검토해야 하고, 우리의 민주주의 역시도 검토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늘 검토했으며, 신의 말도 검토했으며, 검토 때문에 재판 받았고, 재판에서도 검토하다 죽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검토했으며, 죽어서도 검토하겠다고 공헌한 철학자이다.
'가장 훌륭한 양반, 당신은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국가인 아테네 사람이면서, 돈이 당신에게 최대한 많아지게 하는 일은 그리고 명성과 명예는 돌보면서 현명함과 진실은,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해지게 하는 일은 돌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이런 말을 하는 나를 훨씬 못 미더워할 겁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실상은 내가 주장하는 대로에요.'
소크라테스의 발언으로 미뤄보던데 그때나 지금이나, 물질 중심적인 사회는 여전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사는 21세기가 더욱더 그런 면모가 부각되지 않을까? 자본주의, 대놓고 물질을 신봉하는 경제 체제 아래에서 우리는 얼마 전 그 물질 중심주의적인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바로 조현아 사건 말이다. 시대의 갑들은 특히 내면을 검토하지 않았으며, 내면의 덕을 갖추지 않았다. 그 결과 인권은 물건으로 치부되고, 인격적 모독을 일삼은 갑질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부터 돈과 인간들에게 좋은 다른 모든 것들이 사적인 영역에서든 공적인 영역에서든 생깁니다.'
흔히 인간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해서 회의적으로 그 주장을 수용한다면 과연 인간에 발전이 있을 것인가? 적어도 저 시대의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인간들과는 다르고자 노력을 했고, 그 노력 때문에 죽은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그런 회의적 시각을 극복하며 나아가야만, 더 나은 발전과 행복의 풍요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불어 민주주의라는 체제 역시도 검토가 이뤄지지 않으면, 결국 그 희생양으로 제2, 제3의 소크라테스가 나올 수도 있는 법이다.
대화편에서 가장 신비주의적이게 나오는 신의 목소리에 대해서(그의 이성을 규제하는 무언가의 목소리) 나는 내 자의적으로 이렇게 해석해봤다. 그것은 신의 목소리이기라기보단, 마음의 양심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시대 관념상 그리스 시대의 종교적인 부분에 입각하여 소크라테스는 이야기를 했겠지만, 종교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내면의 양심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하며 읽었던 것 같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는 과연 미래 세대를 위해 희망적인 말은 남기지 않았을까? <변명>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무죄로 투표해 준 이들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내 아들들이 꽃다운 나이로 자라면 내가 여러분을 괴롭혔던 것과 똑같이 (진리의 검토 논쟁) 그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갚아 주세요. 그들이 덕보다도 돈이나 다른 뭔가를 우선하여 돌보고 있다고 여러분에게 여겨진다면 말입니다. 또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한인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하듯이 그들을 꾸짖어 주세요. 돌보아야 할 것들은 돌보지 않고,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면서 스스로 한인물 한다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해 주면, 나 자신도 내 아들들도 여러분에게서 정의로운 일들을 겪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인정해준, 무죄로 투표해 준, 시대의 깨어있는 지성들에게 간곡 어린 부탁을 한다. 이것은 그의 아들을 부탁하는 이야기로 해석되겠지만, 사실 이 부분은 우리 후세들에게 선각자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즉 독자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하고 싶은 진리를 말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죽으러 갔다.
과연 이 대화편이 사실인 것일까? 플라톤의 저술, 대화편의 특징은 플라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스승인 소크라테스만을 내세워 논의를 전개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이 대화편의 모습이 플라톤의 각색한 것 - 소크라테스의 탈을 쓴 플라톤인 것인지, 소크라테스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것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변명>은 플라톤 초기 대화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대체적으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많이 반영한 작품이 아닐까 학계에서 추측하고 있다.
<변명>을 보는 독법은 역자가 말하듯 다양하다. 기존 아테네인의 입장으로 보는 경우(이럴 경우 소크라테스는 유죄다.). 그리고 플라톤의 입장으로 보는 경우, 등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지만, 사실 글 논조 자체가 후자를 따르기가 쉽겠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봐 왔던 독법도 플라톤의 입장을 존중하는 입장으로 글을 읽었다. 그래서 이번 독법은 소크라테스가 범죄자라는 것을 의식하고 책을 읽었었다. 그렇게 읽자, 해설에서도 이야기하듯,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나, 하라는 변명보다 잡론만 펼치는 괴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재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한 텍스트가 이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받은 것에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누가 옳건 그르건을 떠나, 소위 고전이라는 책이 얼마나 현실성을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고찰해가며 읽었다. 이 <변명>은 상당히 현실적인 작품이다. 서평에서 밝히듯, 이 책 한 권으로, 우리 사회의 이슈, 세월호 사건의 책임론, 그리고 갑질에 대한 논의 - 조현아 사건에 대한 해석, 그리고 정치적인 부분들까지도 해석해 낼 수 있는 여지가 존재했었다.
이게 과연 고대의 저술인지, 현대의 저술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굳이 그런 효용론적 관점, 현실성과 현세성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플라톤의 저술은 다양한 독법으로 읽을 수 있겠다. 특히 외부의 개입 없이 텍스트 내부만으로도 읽어낼 수 있는 독법은 다양하고, 그 재미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내용의 재미, 문학성, 그리고 텍스트 안에 그려진 소크라테스의 모습,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쓰고 있는 원저자 플라톤의 모습 등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다.
정암학당 번역본은 언제나 날 만족시킨다. 깊이 있는 서술, 희랍어 하나하나에서 오는 그 미묘한 어감까지도 상세한 주석으로 잘 반영하고 있다. 상세한 각주와 미주 덕분에, 마치 내가 희랍어 원전을 읽는 생생함까지도 경험했으며, 더불어, 상세하고 깊은 해설도 나를 만족시킨다. 이 <변명>을 시작으로 집에 모아놓은 정암학당 본 플라톤 대화편들의 총체적인 리뷰를 진행해볼까 한다.
마지막으로 논란의 중심인 '변론'과 '변명' 텍스트의 명칭에 대해서 정암학당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고발된 혐의 내용에 반박을 가해 무죄 판결을 받아내려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고발이 함축하는 바 자기 삶 전체를 향한 물음과 도전에 대해 항변한다. 소크라테스로 대변되는 삶의 방식 그러니까 철학과 철학적 삶 자체에 대한 '변명'인 셈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각자에 대해서 판단해 보면 되겠다. 모쪼록 새해 신년, 추천하고 싶은 도서이고,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공유했으면 좋을 고전이 아닐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 대해서 냉정하게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