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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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역사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무래도 영상매체가 아닐까? 역사학은 가장 중요한 학문이지만, 최근에는 등한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지정해버린, 7차 교육과정의 폐해 덕분에, 이과 학생들은 역사에 대해서 무지하게 됐고, 관심조차 없게 됐다. 그뿐일까, 문과 학생도 국사 과목은 분량이 많다는 이유로 선택을 기피하게 돼서, 가장 중요한 학문인 국사가 그토록 천대받았던 것이 우리 시대 역사교육의 자화상이었다.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정부는 그제야 부랴부랴 고시에서 한국사검정능력시험을 도입하는가 하면, 여러 기업들도 한국사검정능력시험에 가산점을 부여하고, 교육인적자원부에서도 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어찌하랴, 뒤늦게 역사교육을 강조한들, 이미 나와 함께 지내온 우리 세대들의 역사적 무지(無知)는 상쇄될 수도 없으며, 어쩌면 우리 세대는 역사적 무지의 세대로 낙인찍힌다 한들, 뭐라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이 모든 것에는 역사교육을 등한시 한, 정부 교육정책의 방향이 근본 원인이겠지만, 역사의 소명을 자각하지 못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우리 세대의 인식에도 그 원인이 있음을, 나는 느낀다.


그런 역사의 무지 세대인 나에게 있어, 사극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었고, 역사교육이 강조되는 지금도 사극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영상의 힘은 텍스트를 압도한다. 같은 지식을 습득하더라도, 책으로 보는 것과 시각매체로 보는 것의 여운은 월등하게 다르다. 그런 면에서 고전적인 지식 습득법이라 할 수 있는 역사책 읽기는 따분함을 불러일으키는데, 반해 사극은 적절하게 재미와 사실의 사이를 줄타기하며, 시청자들에게 관심을 유도한다. 문제는 이런 사극들도 요즘은 너무 시청률을 의식해서, 재미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사실보다는 허구의 이야기들을 더 중요시하며, 사실인 것 마냥 다루고 있다는 점. 이런 부분들이 솔직히 걱정스럽다.


<수양제> 책을 보면서, 내가 떠오른 것은 그 예전 김갑수 씨가 능청스럽게 연기하던 그 '수양제'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죽인 군주, 형을 죽이고, 형의 자식을 몰살시키며, 아버지의 첩들을 자신이 취한 군주, 대운하 건설을 통해 백성들을 가렴주구로 다스린 군주, 허욕이 부른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3번이나 패한 군주, 주색잡기에 능한 군주... 그러한 모습을 김갑수 씨는 사극 '연개소문'에서 잘 연기했었다. 사실 사극 '연개소문'의 완성도는 별로였었지만, 당시 김갑수가 연기한 수양제는 드라마 제목이 '연개소문'이 아니라 '수양제'라 할 정도로 원맨사극의 포스를 풍겼었다. 거기다 수문제를 연기한 김성경과의 조합도 상당히 볼 만 했었다. 솔직하게 말해 당시 연개소문을 연기한 이태곤은 대사를 읽는 수준이었는데, 그래서일까 사극의 초반부는 가히 '수양제의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책을 보며 그 시절 재미있게 봤던 그 김갑수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후궁을 범하며, 아버지를 살해한 김갑수의 모습, 그리고 놀란 아버지의 후궁 앞에서 조용히 반지를 건네며 능청스럽게 아무 일 없다는 냥,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퇴폐적이고 엽기적인 인물이나, 타락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내가 리뷰하고자 하는 <수양제> 역시도 매력적인 책이라 생각했다. 특히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이민족의 왕조에 대해서 상당히 베타적이었다. 조선 이래로 계속해온 전통이며, 지금도 사실 출판되는 저작을 따져 봤을 때 이런 경향이 이어지는 것 같다.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진나라, 수나라, 당나라, 청나라에 대한 책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나와봤자, 당 태종 이세민 정도만을 다루고, 다른 군주들에 대해서는 조망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수양제는 폭군의 대명사였고, 상세하게 풀어 놓은 대중 저술도 없었던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양제를 무지막지한 폭군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매도했었다.


하긴 우리나라 출판계 현실이, 우리나라 군왕들의 평전도 거의 없는 마당에, 남에 나라까지, 특히 남에 나라의 폭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겠는가 그렇게 위안을 해 봐도,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최근 진시황에 대한 평전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으며, 청나라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망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중국 최대의 폭군이라 칭하는 '수양제'에 대해서도 평전이 나왔다. 재미있는 점은 중국인이 쓴 책이 아니라 일본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쓴 책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몰랐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나는 놀랍고 또 감동이었다. 일본인이 쓴 중국 황제 역사라서, 조금 편파적으로 해석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는데, 책을 읽는 순간 너무나도 놀랐다. 이 책의 가장 큰 서술적 특징은 바로 쉽다는 것이다. 책은 복잡한 시대인 남북조 시대를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 문제와 수 양제, 그리고 나아가 당나라의 태동까지도 다루고 있었다. 물론 수나라 양제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이 정도면 <수양제> 평전이 아니라 '수나라'의 역사라고도 할 만 했다. 복잡한 시대상황을 일본인 특유의 간결한 필법으로 단순화하여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었다. 역사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더라도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저작의 특징이었다. 현학을 덜고, 대중화를 추구했으며, 간결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핵심적인 내용은 가득한, 그러면서도 인간 군상의 본성을 담은 책이 이 책이다.


거기다 편파적인 해석은 없었으며, 진지하고, 성찰적인 태도로 역사를 밝히려는 저자의 노력이 느껴졌던 저서였다. 사실 역사 평전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은 깊이다. 장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깊이 있는 역사서는 사료와 실제 상황의 분석, 그리고 역사학자의 분별력 있는 의견에 만났을 때  인간 본성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부분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다만 단점의 입장에서 깊이를 보자면, 너무 전문적인 사료와 너무 복잡한 상황을 어렵게 분석해버리면, 아무리 효용론적 가치의 역사책이라 하더라도 접근 자체에서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흔하게 말하는 말 '역사책은 두꺼워서 싫어'는 이런 부분을 상징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두 가지의 장단점, 역사학의 딜레마를 극복하였다. 부피는 줄이면서 핵심은 담은, 그러면서도 인간 본성의 통찰력을 한결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역사서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수양제>라는 책이었다.


책의 본문은 230쪽 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 232~261쪽은 그야말로 '심화 학습' 수양제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전문적으로' 다뤘다. 즉 너무 어렵고 고증이 필요한 '논문 포스의 지식'들은 뒤에 따로 편제했으며, 본문에는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하듯, 재미있고 간결하게 수양제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수양제가 막장의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에서는 그런 관점을 조금 비판한다. 한 인간은 그 사회 관념으로부터 자연스러울 수 없다. 아무리 스스로가 시대적인 관념을 거부하려 하더라도 환경이라는 요소는 인간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중국의 남북조 시대는 그야말로 '막장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 시대의 천자들은 하나같이 다들 포악하고, 음탕했으며, 선정을 베풀기보단, 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였다. 아버지의 첩을 강탈하거나 때로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죽이기도 하며,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것이 궁궐에서조차 보편화된 그야말로 중국 치세의 '막장의 시대'였던 것이다.


물론 수문제가 중국 남북조를 통일하여서, 당시의 막장 시대를 끝내고 조금은 다른 시대를 열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수문제 역시도, 권력을 쟁탈하고, 자신의 형제들을 의심하고 견제했으며, 권모술수를 자행한 점 등으로 봤을 때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책에서 짚고 있다.


역사학에서 가장 경계를 해야 할 부분은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가령 절대 선을 상징하고 그에 걸맞은 절대 악의 축을 '설정하는 것', 혹은 이 반대로 절대 악에 발맞추어 '절대 선'을 설정하는 것. 이러한 이분법적인 발상은 유교 사회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는데(단적인 예로 유학이 추구하는 이념과 그 외의 지식을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 수양제가 바로 대표적인 그 예였다. 앞서 말했듯, 당시 남북조시대의 군주들은 막장의 시대였었다. 그런데 유독 남북조 군주들은 묻혀버리고, 막장의 황제 하면 떠오르는 것이 수양제라는 점. 그런 부분은 아버지인 수문제와 수양제를 비교한 부분에서 파생된 부분이었다. 유학자들은 수양제의 악업을 강조하며, 대조적인 사람을 내세워야 했는데, 수문제를 선의 축으로 삼음으로써, 성군의 수문제, 악군의 수양제로 공식화하였다.


우리는 근시적인 분류를 사극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방영한 퓨전사극들은 아버지 vs 아들이라는 구도 아래에서 아버지는 무조건적으로 악의 축, 아들은 성군이라는 공식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시각 역시도 거슬러 올라가면 유교 관념에 입각하여,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해버리는 사관과 일통한 면이 있음을 느꼈다. 저자는 명확하게 이 점을 비판하고 나섰는데, 이런 부분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기는 부분이었다.


역사는 그리 단순한 학문이 아니다. 권선징악의 구도 전래동화처럼 모든 것을 선과 악, 이분법적인 분류로 평가하기엔 인간이란 동물은 너무도 복잡하다. 선과 악이 뒤섞여있는 모습이 바로 인간이고, 특히 사학에서는 전대의 관점들을 다시 검토하여서, 올바르게 선과 악을 사실적으로 분별하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수 양제가 폭군이 된 점은 전대의 남북조시대의 영향도 있었는데다, 마찬가지로, 수문제의 행실에도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형제 간의 우애를 강조하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형제들과 반목하며 정략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황자들의 가정교육을 가르치지 않아서, 하나같이 다들 망나니로 커 왔었고, 주색잡기에만 능했었다. 너무 받들여서 키운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물론 수문제는 한 나라의 제국을 건립했고, 중화 대륙을 통일한 황제로써, 뛰어난 군주였었다. 근검절약했으며, 내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국가기강을 다진 군주였다. 그러나 그가 자행했던 권모술수들은 고스란히 수양제에게서 볼 수 있었다. 아니 수문제에 비해 수양제의 권모술수는 더 발전했었다.


저자는 분별 있는 시각과 사서의 맹점들을 짚어나가며, 수양제가 부군인 수문제를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흔하게 인식된 아버지를 죽인 폭군이라는 점은 수나라 역사책인 <수사>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열전에 잠깐 나온 부분인데, 후대 사가들은 악의 상징적인 축으로 수양제를 설정하며, 열전의 이야기를 정사로 편입시켰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양제는 아비를 죽이고, 형을 죽인 폭군으로 인식됐었다.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수양제를 연기했던 김갑수 역시도 능청스럽게 아버지를 죽인 모습이 떠올랐다. 저자의 말 대로라면 이 부분은 아무래도 각색된 것이리라. 여기서 저자의 생각을 인용해본다.


'수양제 전기는 특별히 소설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역사적 사실 자체가 재미있는 이야기다. 아니, 오히려 날것의 역사적 사실이 훨씬 재미있고, 읽는 맛에도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역사적 사실만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는 수양제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각색된 모습이 많았다. 책에서는 그런 부분을 조곤조곤 짚어주고 있었다. 하긴 솔직히 어떻게 보면 수 양제도 피해자이기도 하다. 당대에는 그런 막장의 군주들이 '보편화'된 막장의 시대였는데, 다른 막장들은 언급되지 않고, 유독 '수양제'만 언급되니, 그것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나는 왜 그가 폭군의 아이콘으로 됐는지 이해하기도 했었다.


첫 번째로, 과한 토목공사와 전쟁이었다. 특히 중국 역사상의 궤적이라 할 수 있는 '대운하 건설'을 감행했었다. 이때 완성된 대운하는 지금의 중국의 강 물줄기에 고스란히 영향을 주고 있으며, 중국의 화북과 강남, 북쪽과 남쪽의 교통에 많은 도움이 됐었다. 그러나 그러한 물줄기를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사 인력이 동원됐었다. 여기서 연상되는 군주가 있다. 바로 진시황제다. 시황제는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마자, 흉노족의 위협을 막고자 저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아버린다.


수양제 역시, 명목상으로는 북쪽과 남쪽을 연결 짓는 수로를 만들어야 한다며, 공사의 합리화를 주장했는데, 물론 이 대운하 건설은 중국 대륙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공사였었다. 그러나 전란에 전란이 덮진 막장의 시대에서, 이제 겨우 통일왕조가 들어섰는데, 과연 무리해서 그렇게 공사를 해야만 할까, 당시 책에 나온 바로는 '여자'들까지 공사에 동원됐다고 한다. 일손이 모자라서 여성들까지 공사에 투입할 정도면 얼마나 무리를 해서 공사를 했는지 이해가 간다. 이렇게 완성된 대운하는 지금 시대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중국 영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하기 힘들지만, 그러한 공사를 무리해서 완성하려 했던 그의 야욕은 인정받기 힘들다.


거기다 그렇게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킨 뒤, 국가가 흔들릴 정도로 사치스러운 전국 퍼레이드를 펼친다. 항상 통일왕조가 들어서면 황제들은 국가를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과도한 퍼포먼스의 순례를 하는 경우가 많다. 진시황제도 그러했으며, 수양제도 그랬다. 완성된 대운하를 통해 양주까지 배를 타고 운행을 하는데 그 무리가 90km나 됐다고 한다. 이 많은 인원들을 데리고 수양제는 떵떵거리며 순시를 했는데, 황제가 머무는 고을에서는 이런 무지막지한 행렬의 음식과 숙박을 감당하느라, 고역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공사, 고구려와의 3차례나 걸친 전쟁 등으로, 국가 경제는 파탄 나게 되고, 각지의 민심은 흉흉하게 됐었다. 그런데도 수양제는 정신 차리지 못 했고, 사치를 추구했었다. 심지어 부하들에게 죽을 때조차도, '짐이 이런 허접스러운 말을 타야 하는가? 깔끔한 말로 가져다주게.'라고 호통칠 정도니 알 만 하다.


책을 읽으며 수양제의 결점을 생각해봤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1. 무리한 토목공사와 의미 없는 전쟁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났다.

2. 여색을 지나치게 밝혔으며, 허장과 허세, 낭비가 심했다.

3. 사람을 보는 눈이 없으며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공경하기보단 질투하며 배격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기에 수양제는 자질이 나쁜, 폭군이라고 인식하는데, 저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수양제는 어쩌면 주변 환경에 쉽게 좌지우지 받는, 전형적인 일반인의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비극은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신을 다스리지 않은, 지위적 야욕만 가득한 자들의 모습, 수양제는 그런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자가 리더가 됐으니 백성에게는 이보다 더 한 비극이 있을까? 이런 부분을 보며, 그 누구보다도 평범한 삶을 사는 나 역시,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또 한가지 느낀 점은, 저자는 말했다. 남북조와 수나라 시대의 인물 유형과, 당나라의 인물 유형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말했다. 남북조와 수나라 시대의 인물들은 전형적으로 나의 세력을 기르고 나의 힘을 이용하기보단, 남의 힘을 권모술수적으로 빼앗아 이용하여 권좌를 획득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수문제, 수양제 역시도 이런 인물에 해당됐다. 그러나 당나라 대의 인물들은 이런 시대적인 인물 유형에서 탈피했는데, 바로 자신의 힘을 길러서 왕좌를 차지했다고 한다. 특히 이런 예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이세민이었다. 즉 남의 힘을 빌려서 떵떵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강불식하여 권좌를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이세민은 더 나아가 종래의 막장 시대 - 피폐한 쾌락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도덕을 강조하며, 국가의 윤리를 바로 세워나간 점도 남북조, 수나라에 비해 더 나아진 부분이었다.


이런 부분에서, 생각난 점은, 특히 우리나라의 된장녀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그저 돈 많은 남자들에 눈에 들어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그런 부류들, 그리고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에게 빌붙어서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난세의 역사서, <수양제>가 나에게 알려준 것은, 결국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나 자신의 힘을 주축으로 일을 도모하라는 것, 그런 자주성도 알려줬었다.


책은 아주 재미있고 간결했다. 한 편의 막장드라마를 본 것 같다. 문학에서 나 올 법한 그런 막장의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다. 허구의 문학도 재미있지만, 역시 인간의 실체 모습은 때론 허구를 넘어서는 부분이 보인다.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다. 야욕과 쾌락, 막장의 시대, 그것이 바로 수양제의 시대였었다. 그 시대 안에는 온갖 인간의 모습이 다 담겨 있었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그런 좋은 역사서다. 책을 덮으며 이제야, 김갑수의 수양제를 버릴 수 있었다. <수양제> 속의 수양제는 김갑수의 수양제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책에서 나온 수양제의 모습은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은 지극히도 나, 너, 우리와 닮은 일반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반면교사로 삼으려 한다.


그리고 별개로, 이 책을 통해 저자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역사비평사 출판사에서 저자의 전집을 발간할 예정이라 하는데, 기대가 된다. 깊이 있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서술, 그러면서 진지하고 성실한 학문적인 고찰, 우리나라에서도 본받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사실 우리나라 역사책들은 너무 쓸데없이 무거운 감이 없잖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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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열게 하는 마케팅 - 불황을 이기려면 컨슈머 마인드를 이해하라
페페 마르티네스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기 전 자극스러운 제목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요즘과 같은 불황에서 소비는 위축되고, 불경기가 이어나가는 작금의 시기에, '지갑을 열게 하는 마케팅'이라는 제목은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불황을 이겨낼 수 있는 마케팅을 이뤄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다만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책 제목에 비해서, 마케팅을 다룬 내용은 크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책의 원제는 'The Consumer Mind'다. 번역해보면 소비자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책은 뉴로마케팅(뇌과학)을 중심으로, 소비자의 마음과 심리를 추적하고, 마케팅에 접목시키는 부분을 다루고 있었다. 뉴로마케팅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뇌라는 기관이다. 책은 뇌를 통하여, 인간의 모든 행위를 풀어내고 있는데, 가령 기억과 감성, 지능, 이성, 행복 등등을 고찰하고 있으며, 이 모든 이야기를 뇌에 입각하여 풀이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보통 우리는 감성적인 부분을 가슴에 비유하곤 하는데,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감성을 주관하는 요소들조차도 우리 뇌에 위치한다고 이야기했다. 저자는 왜 '뉴로마케팅'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장황하게 심리적인 부분을 뇌로 풀이하고 있을까? 저자는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뇌이며, 이성과 감성을 조절하는 센터가 바로 뇌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결국은 마케팅 전략에서 인간의 기호를 파악하고 대중의 수요를 잘 읽는데 키워드는 인간의 뇌를 이해하는 것, 핵심은 뇌의 기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해야지 다중을 상대하는 마케팅에도 유리하다고 저자는 함축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목과는 별개로, 상당히 심오한(?) 뇌과학 이론들이 심리학과 결부되어서 풀어지고 있었다. 이런 지식을 통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뇌에 대한 중요성도 알게 됐으며, 뇌라는 기관이 참으로 신비하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한 기관이라는 점을, 뇌의 각 부분들이 어떤 일을 하고 인간의 감정과 이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 개괄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이 책의 매력은 뇌에 대한 이론들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심리적인 행위까지도 고찰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저자는 이런 뇌 과학 이론과, 인간의 심리적인 요소를 통해 '바람직한' 인간의 상을 규정하고 있는데, 핵심은 바로 '균형성'이다. 우리 뇌에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실천해야만 하며, 저자가 주장하는 뇌의 4요소 '행동하기' , '느끼기' , '의사소통' , '생각하기'도 조화가 이뤄져야 바람직한 인간으로 거듭난다고 주장했다.


서평을 여기까지 본 분들은 이 책이 과연 '경영 마케팅 책인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다. 나도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한데, 사실 이 책은 마케팅 전략을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추적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구성은 16챕터로 이뤄져 있는데, 1~13챕터까지는 소비자의 심리적인 요소를 '뇌과학'으로 풀어서 해석하고 있다. 즉 소비자의 마인드를 '뉴로마케팅'의 입장으로 심도 있게 해석하고 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마케팅이나 경영에 대한 부분보다, 인간의 본연적인 심리를 고찰하는 심리학서라고 생각이 들었다.



위의 사진은 책의 목차에 내가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부분이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01 도입부에서 ~ 13 요약 : 두뇌의 기능까지는 디테일한 인간 본연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챕터 06 ~ 챕터 12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개별적인 감정들을 뇌과학적 심리학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상당히 심도 있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13챕터에 이르러서 지금까지의 인지된 인간 심리에 대한 고찰을 결론 내리며 두뇌에 대해서 총괄적으로 정리를 한다. 책은 그래서 두 부분으로 편재되어있다. 13장까지 뇌과학과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을, 그리고 책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14장은 이러한 뇌과학적 인지를 바탕으로 하여, 설문조사하고 밝혀낸 뉴로마케팅의 사례와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15장은 이러한 뉴로마케팅의 첨단 과학적인 부분을 예시로 보여주며, 뉴로마케팅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가에 대해서 낙관적 전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16장에 이르러서는 인류 최대의 지성들이 밝혀 낸 철학 이론들과 저자가 이야기하는 뉴로마케팅 이론을 접목,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책은 끝나고 있다.


일단 책에 대한 비판을 가하자면, 한국어판 제목 <지갑을 열게 하는 마케팅>이라는 부분으로 볼 때, 너무 주제를 벗어나고 있다. 책은 너무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 가령 뇌과학, 심리학, 그리고 마케팅 등등을 다루고 있고, 이 분야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면, 좋았을 텐데, 뇌과학과 심리학까지는 자연스러운 연결을 보여주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마케팅과의 연결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보였다. 즉 1~13 이론적 챕터와 14장의 실전을 다룬 챕터의 연계성이 부족했다. 책의 절반을 넘어선 200페이지를 소모하여 설명한 이론적 지식이 실제로, 실전 마케팅과는 다소 연결되지 않은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핵심 마케팅 챕터가 '과연 뉴로 마케팅이라는 요소가 맞을까?'라는 물음조차도 생겼었다. 차라리 이론적인 부분을 조금 단순화하거나, 분량을 줄이던가, 아니면 실전을 다룬 챕터 사이에 좀 더 이론과 실전에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챕터를 추가하여 서술했으면 어떨까 싶었다. 책의 내용에도 나왔는데, 너무 학문적이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내용을 서술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너무도, 범주를 벗어난 것 같다. 그래서 그 부분이 결정적으로 아쉬웠다. 좀 더 책의 포커스를 마케팅에 집중했으면 어떨까 싶다.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대부분의 경영학 책은 이런 사례를 보인다. 한 가지 현상에 대해서 근거 있는 비전을 제시하기보단, 이미 유행하는 비전들을 분석하여서, 그 분석을 바탕으로 이론화하는 책이 대부분이다. 물론 분석을 통해 이론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뛰어난 경영학 책이라면 분석과 이론화를 넘어서, 앞으로의 전망과, 그 전망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전형적인 전통적인 스타일의 경영학 도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14장에서 저자는 소셜 마케팅을 이야기하며, 기존의 전통적 마케팅과 소셜 마케팅은 마인드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확실히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기업들은 블로그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등의 소셜마케팅을 지향하는 추세이고, 발 빠른 업체들은 오프라인 광고 못지않게 비용이 적게드는 온라인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애용하고 있다. 저자는 이 부분을 강조하며, 소셜 마케팅은 기존의 오프라인 마케팅과는 전혀 다른 마인드로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통적 마케팅을 주장한 업체들이, 소셜 마케팅을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분석하고 있다.


분명 소셜 마케팅은 지금 살펴봤을 때, 대세의 마케팅이다. 그러나 저자의 책에서도 말하듯, 인간은 상당히 실증을 잘 내는 동물이다. 과연 이 대세의 소셜마케팅이 언제까지 '신선함'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언젠가 소셜마케팅은 진부한 마케팅으로 치부되겠고, 인간은 다가올 새로운 그 무엇의 마케팅에 또다시 적응하고 열광한다. 내가 책에서 기대한 것은 과연 뉴로마케팅의 측면이 이 다가올 새로운 마케팅을 예측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추상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마케팅이 대세일 것이다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부분이 상당히 아쉽다.


다른 기업들보다 앞서가는 마케팅을 구사하려면, 첫째로 현재의 대세적인 마케팅을 분석하고 발빠르게 적응하며, 대세에 합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대세의 마케팅의 수명을 예측하고, 다음 세대에는 어떤 마케팅이 유행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전망이 핵심이라고 본다. 저자의 책은 뉴로마케팅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현재 통용되는 마케팅과의 연관성을 밝혀내고 있지만, 정작이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상당히 아쉬웠다.


그러나 그런 큰 아쉬움이 있더라도, 책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과학적인 요소, 뇌과학적 측면을 다룬 부분과, 인문적인 요소, 심리학적인 측면을 다룬 부분, 그리고 경영학적 요소, 마케팅을 다룬 부분들이 다소 자연스럽게 연결되진 않았지만,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었다. 특히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경영 마케팅적인 부분보다, 뇌과학에 대해서 매력을 많이 느꼈었다. 그리고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생각했으며, 과연 나의 감정과 이성은 올바른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스스로 자문해봤다.


재미있는 것은 밀워드 브라운이라는 회사가 뉴로마케팅을 '어떻게' 설문조사에 활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들이 어떤 콘셉트로 고객의 니즈와, 경영 업계를 분석하고 있는가도 소상하게 알 수 있었다. 특히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첨단 장비들을 동원하여, 뉴로마케팅을 실천하는 밀워드 브라운 회사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사실 챕터 15는 밀워드 브라운이라는 회사의 PR 같은 느낌도 들어서 거부감이 있었지만,(저자 역시 이 회사의 임원이다.) 간접광고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다.


모쪼록 아쉬운 부분이 있는 책이지만 매력적이기도 했었다. 사실 이 책은 인간 진화론을 긍정하고 기초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기록된 책이다. 아직까지 진화론이 완벽한 이론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이런 뇌과학과 뉴로마케팅에 대한 부분도, 좀 회의적인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단언적으로 배격하는 것 역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뉴로마케팅이 인간의 현재 현상을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그 분석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미래에 대한 대한 제시까지 밝힐 수 있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부분을 밝힌 서적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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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 창업과 수성의 리더십
오긍 지음, 신동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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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유명한 고전인 정관정요, 제왕학의 요체를 다룬 책이다. 원래는 완역본이 김원중이 번역한 책 하나뿐이었지만, 신동준이 새롭게 번역을 하여 샀던 책이다. 김원중본에는 번역문만 있는데 신동준본에는 번역과 원문 그리고, 당 태종에 대한 일반론과, 고전의 번역, 그리고 역대 정관정요에 판본에 대한 대체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즉 김원중 본에 비해 이 책이 더 자세하다고 할 수 있고 김원중 본에는 나오지 않는 대목들(판본이 다른 듯)도 실려 있다.  

 

 일단 말해야 할 점은, 신동준 이 저자는 주관적인 사상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대체로 학계에서의 대세적인 부분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인 색깔을 가미한 신선한 주장 등을 내세우는 편이다. 거기다, 이 사람의 사상 자체에는 전제 군주제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체제를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 대표적으로 이 사람은 세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조금은 사상적 편향이 보이는 듯하지만, 그런 부분을 넘겨보더라도, 책의 번역 부분은 아주 깔끔하다는 점이 있다. 주관적 해석이 강한 역자의 고전인 경우는 사실 고전에 익숙하지 않은 초학자들이 보기에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에서는 고전을 현실론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부분만큼은 탁월했다. 따라서 약간의 내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서라도 신동준의 역본은 현실적 가치로 평가하자면 탁월한 부분 그것 하나만 보고 이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은 군주가 갖춰야 할 리더십에 대한 책으로, 역대 제왕들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었으며, 고려 시대에 광종 역시 이 책을 깊이 있게 숙독했으며, 조선조 제왕들 역시도 이 책을 깊이 탐독했다. 특히나 당 태종을 좋아한 세조 역시도 이 책을 많이 봤을 가능성이 있으며, 숙종과 영, 정조 역시도 이 책을 봤다고 실록에 나와 있다. 조선조가 들어서서 유학적 가치관의 제왕학이 성행하여 정관정요가 덜 주목받았긴 했지만, 그래도 역대 왕조에서 이 책을 무시하진 못 했다.  

 

 책을 쓴 오긍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는 직필로 유명한 사관이었다. 따라서 정치권에서 자신의 정권을 합리화하는 그런 내용의 사서 편찬을 명 받았을 때 그는 동의할 수 없다며 사직했다. 오긍은 무후 실록을 편찬하는 데에도 기여했는데, 이때 재상 장열이 위원충과 관련된 일을 여러 차례 개정해 달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개정해주지 않았다. 즉 엄격한 사관과 나름의 객관성과 소신을 가지고 있는 사관이었다. 그런 그가 집필한 제왕학의 성전인 정관정요. 그런 직필의 손에서 탄생한 정관정요 역시도 나름의 객관성이 있는 제왕학서였다.

 

 책의 주인공, 당 태종과 그의 치세에 대한 군주론이 이 책의 핵심, 당 태종 이세민은 조선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태종 이방원과 같은 전제 군주 성격의 군왕이었다.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그였으나 나라를 번영시킨 데에는 큰 공이 있었음은 부인하기 힘들었다. 그런 당나라의 성세한 시대, 당태종과 신하들의 이야기를 담은 군왕의 교과서가 바로 정관정요다.  

 

 이 책이 독특한 이유는, 앞서 말한 오긍의 직필법 때문인데, 책의 대부분은 태종의 행적에 대해 우호적인 서술이 많으나, 태종의 결점 역시도 드러내고 있다. 즉 무분별하게 태종의 치적만을 칭송하는 책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당 태종 이세민의 가장 큰 결점인, 국방 고구려와의 패전에 대한 부분을 지적하자면, 9권의 주제 국방론에 잘 나타나있다. 여기서 당 태종의 무모한 고구려 원정에 대해 신료들의 상서가 실려 있는데, 태종은 이를 묵살한 내용들이 잘 나와 있었고,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시대의 현인들은 그 상소들이 옳다고 생각했다.라는 평까지 달아놨다. 즉 태종의 부끄러운 모습 등도, 삭제하지 않고 표현하고 있다.  

 

 책은 대체적으로 유가적인 입장에서 서술됐다. 아무래도 뭐 유학을 진흥시키자는 대목도 책에 노골적으로 나와 있으니 부정하긴 힘들겠지만, 유학에 입각한 제왕학서인 <대학연의>와 <성학집요>와 같은 책과 비교해봤을 때에는, 그 유학적 색채가 조금 덜하긴 했다. 유학의 경전 문구에 입각하여 역사를 선별한 방식이 기존의 유학적 제왕학의 서술 방식이라면 이 책은 당 태종의 행적과 역사를 우위에 두고 쓴 책이라는 점이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유가 서적들에 입각된 제왕학서에 비해서 비교적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재미있게 본 부분은 태종의 트라이앵글 명신들에 대한 이야기, 지략의 대가인 방현령과, 결단의 대가인 두여회 그리고 당 태종을 가장 돋보이게 만든 직간의 명신 위징에 대한 이야기. 방현령은 대체로 법가적이고 현실적 사고에 입각한 신하였다. 그는 지모가 뛰어났으며, 당 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현무문의 변을 실질적으로 구상하고 기획한 자였다. 특히 9권의 국방론에서, 방현령이 죽기 전 태종에게 고구려 원정을 취소하라는 상소를 볼 때, 그는 정말로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다는 걸 느꼈다. 두여회는 방현령에 비해서는 조금 지모가 떨어지지만 방현령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행동을 촉구한 신하였다.  

 

 그리고 가장 태종을 돋보이게 한 위징. 보통 전제성 군주의 경우 신하들이 직간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왕권의 눈치를 보며, 왕이 손가락을 가리키면 그쪽으로 우르르 공론을 모으는 것이 일반적인데, 위징은 그러지 않았다. 위징은 당 태종의 일반적인 그런 전제를 견제한 유일한 명신이었으며, 당 태종의 오만을 경계하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 당 태종의 면전에서 민망하게 군주를 지적한 사례도 숱하게 책에 많이 나온다. 그럴 때마다 다른 군주들 같았으면 목을 치거나 했을 텐데 당 태종은 그런 그를 아끼고 아꼈다.  

 

 실제로 정관정요 2권 규간론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천하의 흥망과 왕조 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득실을 분명히 할 수 있다.'  

 

 태종은 위징을 거울로 삼았고, 위징은 그런 거울의 입장에 충실하게 행했다.  실제 사람들의 경우는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어조로 대하면 분한 마음에, 상대와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충신은 직간을 서슴지 않는다. 위대한 군주는 자신의 비판을 잘 들을 줄 알며, 자신의 비판을 고칠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것은 군주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나를 칭찬만 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객관적으로 비판할 줄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리고 그 비판을 내가 새겨 들을 마음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발전 가능성이 아주 높은 사람이다. 사람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저 말은, 지금의 개인에게도 유효한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태종 역시도 사람이라서, 위징의 간언한 것에 대해 '저 더벅머리 놈이 나를 너무 놀리는구나.'라고 말한 부분도 책에 나온다. 하지만 태종은 순간의 화를 내면서도 알고 있다. 위징의 간언이 충심으로 비롯된다는 것을, 전제적 군주이면서 이런 직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둔 것에 대해서, 태종은 굉장한 멘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위징은 그런 면에서 자신의 직간을 이해할 수 있는 군주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던 명신이었다. 군주를 잘 못 만났다면 그냥 형장의 이슬로 갈 뻔한 대쪽같은 원칙주의자인데, 태종은 그의 가치를 알고 그를 거울로 삼았으며, 위징은 그러면 그럴수록 태종에게 더 대쪽같고 비판적, 현실적으로 태종을 일깨웠다. 그런 면에서 조선 중기의 율곡과 선조의 관계가 떠올랐다. 명신 역시도 현군을 만나야 능력을 발휘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당 태종이 성공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명신들이 곁을 보좌하고 이런 명신들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었던 태종의 도량과 그릇도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책에서 색욕을 멀리하라는 대목에서 고구려의 왕이 미인 두 명을 바쳤는데, 태종이 이를 보고 돌려보냈다는 대목 역시도 재미있었다. 실제 태종 이세민은 호색한 군주였기 때문인데, 조금은 신기했던 대목이다.  

 

 당 태종의 치세에서 가장 오점을 찍은 것은 무모한 고구려 원정과 더불어, 후계 구도에 너무 준비를 안 했다는 점. 특히나, 무모한 고구려 원정에 대해서, 정관정요는 비판적이었다.  

 

 아무튼 책 자체는 고전 치고는 쉽게 잘 읽히며, 더불어 군주가 행해야 할 모범적인 규범들을 교과서처럼 잘 정리했다. 대체적으로 유교적 사관이 보였으며, 특히 태종의 독단적인 모습들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한 편의 역사서와도 같았으며,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태종의 명신들의 상소문이 그대로 인용된 경우가 많은데, 상소들 역시도 좋은 내용들이 많았다.  

 

 신동준의 고전 역본은 특징이 있는데, 고전을 번역한 것과 더불어 그 고전의 일반론적인 해석을 같이 첨부한다는 점이다. 보통은 고전을 번역과 역주한 것만을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자신만의 독특한 해설을 길게 첨부하여서 독자들에게 이해를 시키는 콘셉트. 그것이 그의 해석본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 해석이 다소 주관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도 한계가 있다.  

 

 이 책에서는 정관정요 주석론,과 정관정요 치평론으로 나뉘는데, 주석론이 고전을 주해한 부분이고 치평론이 일반적인 당 태종과 당나라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돋는 일반론적 해석 부분이다. 치평론을 읽고 주석론을 읽어도 상관없으며 책의 편차대로 주석론을 읽고 치평론을 읽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독자의 성격에 따라서 자세한 배경 이해를 원한다면 전자가 좋겠고, 책을 보고 심화 학습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후자가 좋을 듯싶다.  

 

아무쪼록 국내에 나온 정관정요 책 중에선 이 책이 가장 뛰어난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여러 서구의 국가에서도 정관정요는 주목받는 리더십의 고전이다. 동양적인 리더십과 동양의 모범적 군주 상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으며, 도움이 되는 명문들이 아주 많은 좋은 고전이다.  

 

 두깨에 비해 그렇게 어렵지 않은 고전이라서 어릴 때부터 자주 봤던 책이다. 고전에 대한 문체만 익숙해진다면 쉽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라 리더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을 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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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독서뿐 -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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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교수의 책은 깔끔하다. 필력 자체가 군더더기가 없고 쓸데없는 가식이 없어서 좋다. 전작인 <일침>에서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뽑아서 책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 책의 연장선으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조선 중 후반의 선비들 허균, 이익, 양응수, 안정복,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홍석주, 홍길주 9명의 저서에서 독서에 대한 글들만 뽑아내 번역하고 정민 스스로가 해설을 해 준 글이다. 전작인 일침과 비슷한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책의 여백들이 많아서, 사실 빨리 읽을 수 있고,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가 빠르다. 대체적으로 책의 쪽수 중 반은 빈 공간이라고 봐도 될 듯싶다.

 

일단, 허균을 시작으로 실학파 선비들이 책을 어떻게 대했나에 대한 모습들을 볼 수 있으며, 확실히 좋은 문구들도 많이 있다. 독서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글 읽는 것들이 지루해지거나 권태로움이 있을 때, 읽기에 아주 좋으며, 독서에 흥미를 붙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고전의 경구들도 뛰어난 문장이 많지만, 정민이 뒤에 달아논 해설 역시도 깔끔하고 좋았다. 책에 대한 좋은 문구와 그에 걸맞은 해석, 수미쌍관이 잘 이뤄진 책이다.

 

어쨌든, 실학자들의 독서 방법론도 볼 수 있는 데다가, 사실 여기 기록된 독서법이 절대적이진 않지만, 취사선택하여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분명 도움은 되는 책이긴 하다. 거기다가 책에서 맑은 솔나무 같은 느낌이 나서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마음도 큰 듯하다.

 

아무튼, 고전의 경구 치고 무겁지 않으면서 좋은 내용, 좋은 설명 등이 보이는 책이다. 다만 다소 편집을 잘 해서, 여백의 미를 줄였으면 책이 좀 더 콤팩트해지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뭐 어쩌면 그런 여백의 미 역시도 출판사가 의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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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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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과 그 소년의 아버지는 서점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에게 두 권의 책을 쥐여줬었다. 바로 이 <명상록> 과 <군주론>을 소년은 이해하기 힘든 책을 쥐여준 아버지가 싫었다. 만화책을 읽고 싶었었으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완강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야, 소년은 성장하여 그 책에 대해서 느낀 점을 서평으로 쓰고 있다.

 

아버지께선 나완 반대로 책을 좋아하시진 않았지만, 보통의 철학서나 사상서들은 많이 알고 계셨다. 어린 나에게 사주셨던 책 2권 중 하나인 <명상록>, 이 책은 많이 읽었던 책이나, 리뷰를 보류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논어>가 일전 리뷰에서 할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 <명상록>은 아버지의 바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권유하신 두 책 <군주론>과 <명상록>은 내용이 전혀 상반되는 책이다. <군주론>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책이었으며, <명상록>은 다소 도덕적 관념과 내면의 성찰을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군주론>과 <명상록>의 공통점은 어쨌든 리더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군주론>은 리더의 치국에 대한 방법이 써진 책이고 <명상록>은 저자 자체가 리더다. 리더가 개인적인 성찰을 적은 글을 모아논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유명한 황제 중 한명이고 5현에 마지막을 장식한 현군이었다.

 

블로그의 서평을 쭉 살펴보니 동양 고전과, 위인들에 대한 책만 쓴 것 같다. 하지만 플라톤을 비롯한 서양 철학 책이나 역사 책들도 읽고 있다. 다만 내 능력이 일천하여 아직까지 서평으로 승화하여 쓰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블로그에 처음 올리는 이 <명상록>을 필두로, 서양 사상 책에 대해서도 서평을 남기도록 노력해볼까 한다.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단 스토아학파의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다. 스토아학파는 대체적으로 인내를 강조하며, 현실을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기본적 모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상형은 현인으로, 그 현인은 개인의 자아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도덕적 수양을 목표로 한 위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소 반대적 입장의 에피쿠로스 학파의 경우는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는 입장이지만 스토아학파는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면서도 공동체에 대한 도덕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스토아학파의 기본적 관점은 이성이다. 어찌 보면 운명론적이기도 한데, 그들은 이성에 따라서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 이성의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현인이라고 한다. 뭐 이렇게 보면 바꿔 본다면, 동양 사상의 유교 사상과도 일통한 부분이 있다. 유교의 절대 상인 군자와 현인은 어찌 보면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 물론, 세상을 인지하는 그런 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전체적인 틀로 보면 비슷하다고 느꼈다.

 

책은 그런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은 황제가 직접 서술했다. 놀라운 점은 이 명상록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책은 저자가 공개적인 목적으로 출판을 생각한 책이 아닌 그냥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을 담은 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 솔직한 면도 볼 수 있었고, 로마의 현군이라 칭하는 그의 진솔한 모습을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현인의 상을 볼 수 있었다.

 

일단 그의 치세에서는 로마가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었다. 로마는 넓어진 영토와는 다르게 비효율적인 행정 체계가 만연했고, 이민족들의 반란 등이 많았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의 나날을 보낸다. <명상록> 역시 그런 전쟁 속에서 지어진 책이다. 반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는 그는 사실 피곤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 현상들을 외면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황제의 자리지만 그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전쟁터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움을 진두지휘하는 모범을 보였지만, 사실 그 역시도 피곤하고 혼탁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그가 매일을 반성하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적었던 것이 바로 이 <명상록> 이다. 책의 체계는 <논어>와 비슷하게 일관적이지 않은 황제의 단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 1권은 자신의 가족들을 비롯한 평을 조리 있게 적어놨는데, 그 점을 빼면 <논어>와 마찬가지로 장마다 공통점은 없었다. 그는 이 책에서 끊임없는 자신에 대한 노력과, 반성, 성찰 등을 토로했다. 그의 사상 속에는 강력한 도덕적 의식이 있었으며, 때론 운명론에 수긍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체념 감초차 보이기도 하고 인간의 허무주의에 대해서도 토로한다.

 

그러나 주 모토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끊임없는 반성을 종용, 그것이었다. 동양의 <논어>와 비교해봤을 때, <논어> 가 친근하고 조곤조곤하며 일상적인 느낌이라면 <명상록>은 전혀 다르다. 엄숙하고 절제적이며, 때론 숭고함, 경건한 분위기를 보여줬다.

 

그것은 한 인간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정신승리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명상록> 1장에 그는 자신의 아내를 현숙한 여인이라고 칭송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왕좌를 전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비워둔 탓인가 그의 아내는 그 외에 다른 장군과 소문까지 날 정도의 평판을 가졌다. 그러나 황제는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충실했었다. 심지어 후궁도 없이!! 이 여인만으로 여색을 잠재웠다고 한다!! 이런 부분으로 봤을 때 정말이지 초월적인 인간 자제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구나 더 놀라운 점은, 이 책의 원문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이라는 점. 이 당시 로마 사람들 상류층은 모국어인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역시도 빠삭했었다.  전쟁 끝나고 와서 모국어로 일기 쓰기도 귀찮을 텐데, 황제는 엄숙하게 '외국어'로 자신의 성찰을 담담하게 기록해나간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책이 아닌 스스로를 반성하며 스스로를 경계하며, 스스로를 질책하며 쓴 책. 그것이 바로 명상록이다. 그런 책이니만큼 책에서 풍겨져 나오는 엄숙함과 숭고함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만했다. 지금의 모습으로 치자면, 일상을 마치고 영어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영어를 잘 한다선 치더라도 사실 편한 모국어를 놔두고 그런 짓을 하는 건 썩 유쾌하진 않을 것 같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와도 비교해보자. 공통점은 둘 다 로마의 지도자가 쓴 책이지만 둘의 성격은 너무나 다르다. <갈리아 전쟁기>는 애초부터 카이사르가 로마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기를 지지하게 만들기 위해 쓴 자전적 영웅전이다. 물론 그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며 '카이사르는 ~했다.'라는 구절을 써오긴 했지만... 반면 마르쿠스의 <명상록>은 전혀 반대적이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쓴 책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쓴 것이 아닌 주관적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진솔하게 기록했다는 차이점이 있겠다.

 

문체 자체도 다르다. 카이사르의 글은 수사학적으로 볼 때, 굉장히 짧고 단문이 많다. 그러나 <명상록>의 문체는 그렇지 않다. 그는 그의 글은 단출한 것 같으면서도 숭고한 면이 있으며 그 숭고한 면은 아무래도 좀 현학적인 표현 때문이 아닌가도 싶었다. 반면 카이사르의 글은 대체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느낌이 강했다.

 

 로마의 스토아학파 저술을 볼 때 가장 참고되는 저자가 세네카다. 그리고 이 <명상록> 역시도 마찬가지다.

 

최고지도자가 이런 정신적 원숙함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다. 여러 유혹에 굴하지 않고 이렇게 성찰하려고 했던 노력. 그 노력을 <명상록>은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 노력 속에는 앞서 말했듯 황제의 절망이나 허무주의 역시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숭고함과 엄숙함 속에서도 비인간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뇌하고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한 한 인간의 영혼의 고문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다 봤을 때 그래서 더 그를 존경했었다.

 

그렇게 올바르게 살고 로마를 위해 봉사한 그지만, 그의 대에서 로마 현군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로마는 이 시기 보통 왕위를 덕망이 높은 자에게 양위하는 방식을 보여줬는데, 그는 자신의 친자인 코모두스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리고 알다시피 코모두스는 로마 시대에 유례없는 폭군으로 기록된다. 이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서양 고전 역본을 볼 때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번역가에 천병희라고 쓰여있으면 일단 믿어라. 우리나라에서 번역되는 서양 역본은 대부분이 일본을 거쳐 들어온 이중 번역이 많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숙한 학자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천병희 선생님은 둘 다 능숙하시고 전문가시다.  초기엔 문학서를 번역하셨는데 지금은 역사학이나 철학 서적도 번역하시고 있다.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 특징은 일단 원전 번역서라는 장점이 있겠고, 두 번째가 가독성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즉 직역 위주로 한다 하더라도 다른 원전 번역자들에 비해 가독성을 염두에 두고 번역하신다. 이 부분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좋았던 것 같다. 문학과 역사 고전은 그냥 이분 책으로 다 샀었다.

 

요즘은 플라톤 대화편들을 번역하시는데, 개인적으로... 플라톤 번역서는 정암학당의 책들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뢰할 만한 번역가 선생님이시고, 책의 내용 자체도 좋고 번역도 괜찮았던 것 같다. 다만 주석이 뒤로 있는 구성이라서 좀 왔다 갔다 번거롭게 책장을 옮겨야 하지만, 책을 보는 데에는 거슬리진 않았다.

 

책은 굉장히 짧다. 본문은 모두 합쳐서 200페이지 정도고, 짧은 문단으로 구성돼서 사실 작정하고 읽으면 하루에도 다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읽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진 않다. 이런 책은 한 구절을 읽고 사색을 해 보면서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봤던 것 같았고,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는 고기처럼, 이 책도 그런 맛을 보여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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