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일기 - 인조,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6
작자미상 지음, 김광순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2017년 '남한산성'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봤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온라인 이웃님 중 한 분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대충 얼마부리고, 언젠가는 《산성일기》의 서평을 통해 '남한산성' 영화에 대해서 내 의견을 피력하려고 했었는데 뒤늦게나마 이 서평으로 이웃님의 물음에 답하게 됐다.

사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봤을 때 명분의 척화파와 실리의 주화파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대부분 실리의 주화파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기에 명분론만 앞세운 척화파의 주장은 크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중기 당대의 시대만 하더라도 주화파보단 척화파가 대세였고, 그러한 관념이 조선이라는 대륙을 잡아먹고 있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실용주의적인 사람들도 조선 중기에 태어났다면 대부분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척화를 외쳤을 것이다.

각각의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이념과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에는 고루하고 따분하게, 이해가지 않는 이념이더라도, 과거에는 그러한 이념이 사회를 구축하는데 주요한 요소였을 수도 있다. 주화와 척화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도 시대에 보편적으로 통변 되는 이념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쉽사리 오늘날의 관점으로 당대의 모습을 평가하는 것은 어쩌면 후대인의 역사적 오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적 관념을 고려하여 척화파를 이해하려고 해도, 사실 조선 중기를 지배하고 있던 성리학적 사상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명분과 이념을 앞세우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척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군사 훈련을 비롯하여, 국경 수비 등등에 자신이 있어야지 내세울 수 있다. 정묘년에 청나라의 군대 앞에서 호되게 당해놓고도 인조와 서인 조정은 반성하지 않고 그저 입으로만 전쟁을 떠들었다. 그 결과 남한산성에 몰려서 50여 일간 근근이 버티다 항복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 태종의 조서가 와닿는다 '너희 나라는 선비의 나라라고 자청하는데, 그럼 너네는 붓으로 우리의 대군을 막을쏘냐?'라고 일갈하는데, 조선의 사정을 정말 꿰고 있는 말이었다. 같은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 초기에는 이렇게 문약하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는 성리학이 국가의 이념이었지만, 성리학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성리학을 주로 삼되 적절하게 탄력적으로 융통성 있게 적용하고, 성리학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인 연구와 접근을 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 국방력도 탄탄하게 정비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조선 중기에 이르자 성리학을 수용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현실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그저 맹목적이고 교조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국방은 문약한 문치주의로 인해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그저 이념만을 공허하게 외치는 선비들이 대세를 이뤘다. 이렇게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잘난 척에 큰소리만 뻥뻥 쳐대고 있으니, 힘 있는 강국 입장에서는 이를 빌미로 당연히 쳐들어오지 않겠는가.

냉혹한 국제사회 앞에서 우리는 늘 명분으로만 맞섰다. 임진 - 정유년에도 그랬고, 정묘 - 병자년에도 그랬고, 조선 말기 개화를 앞두고도 이러한 자세를 고집했다. 너무나도 순진하게도 실력도 없이 그저 명분만을 앞세우며 의견을 주장했다. 패권이 왔다 갔다 하는 국제사회에서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자강할 수 없는 나라는 명분도, 실리도 찾을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병자호란을 주화파와 척화파의 입장을 빌려 명분과 실리의 싸움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 이전에 국력이 없고 국난을 대비하지 못했던 못난 조선의 안일한 생각이야말로 만화의 근원이다. 명분도 좋고 실리도 좋다. 다만 선택한 명분과 실력을 취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나서 고민할 문제다. 결국 남한산성의 치욕적인 항쟁은 조선의 나약함과 안일함에 대한 결과일 뿐이고, 명분도 실리도 취하지 못한 그저 무능한 패배일 뿐이다.

청나라의 침공은 우리에게 '호란'으로 불려왔다. 임진년의 일본과의 전쟁을 두고 왜란이라 한다. 그러나 과연 이 '호란'과 '왜란'이라는 명칭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의문이 든다.  왜란과 호란. 언뜻 보기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난이라는 글자다. 동양에서 亂 자가 붙은 사건은 대체적으로 상급자에게 하급자가 어지러움을 선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숱한 반란 앞에 亂 자를 붙여서 명칭 했다. 왜란과 호란 역시 마찬가지다. 왜란이라는 글자를 해석해보면 '왜나라 오랑캐가 난리를 피운 사건.'이라는 뜻이고 호란은 '북쪽의 오랑캐가 난리를 피운 사건.'이라는 뜻이다. 과연 왜란과 호란이 그저 난리일 뿐이란 말인가? 당시 일본과 청보다 우리가 지위적으로 앞서있기에 두 전쟁을 亂이라고 칭하는 건가?

왜란과 호란은 국가와 국가 간의 전면전이었다. 그렇기에 명칭 역시도 임진전쟁, 정유전쟁, 정묘전쟁, 병자전쟁이라고 칭해야 옳다. 그러나 당대의 자존심이 강한 사대부들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렇기에 亂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정신 승리'를 시전했다. 이러한 관념에 따르면 그럼 우리 정부와 정규군은 그저 하급자에 불과한 일본과 북방 민족의 난리조차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것인데, 참 웃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어릴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국권을 침탈당한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이라고 배웠다. 마찬가지로 임진 - 정유년의 전쟁과 정묘 - 병자년의 전쟁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혼란을 야기한 亂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당시 우리는 일본과 청나라보다 월등한 국력을 가지지도 않았으면서, 중화사상이라는 명분에 의거하여 우리가 그들보다 위라고 생각했다. 두 전쟁을 亂으로 표기하고 亂으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亂을 제압하지 못해 빌빌대고 항복했던 조선의 수준만 떨어트릴 뿐이다. 바른 역사교육이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는 자국의 역사에도 유효하다. 치욕의 역사라고 해서 이를 축소하기 위해 亂이라고 표현한다면 이것 역시도 역사왜곡이 아닐까 생각한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사용자의 심리를 반영한다고 한다. 이렇듯 왜란과 호란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당대 조선 사대부들의 명분에 입각한 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산성일기》는 비록 명분론에 입각하여 저술된 기록이지만, 글을 통해 오락가락하는 대책 없는 조선 정부의 모습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만약 책의 내용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과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 등등을 곁들여 본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남한산성에 가서 지나간 역사를 복기하고 싶다. 완연한 봄날 따스한 햇살 아래에 펼쳐진 장대한 성곽이 보고 싶다. 조만간 가게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