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동아시아 사상의 거의 모든 것 - 상황을 읽고 변화를 만드는 힘과 지혜
임건순 지음 / 시대의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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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동양 고전을 읽는 것을 두고 '현실적이지 않다.'라고 흔히 조소한다. 그럴 법 한 것이, 동양 고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공자왈 맹자왈'과 같은 유교 사상이 떠오르기 마련이고, 이런 사상들은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다. 동양 철학에서 대세였던 유가 철학은 사람의 모든 행동과 규범을 인의의 규범 아래에 고정하려고 애를 썼고,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이러한 인의에 종속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절대주의적인 태도는 급변하는 오늘날의 시세에 걸맞지 않은 부분도 많으며, 역사적으로도 동양 국가들의 근대화에 걸림돌이 돼서 근대 사회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우리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동양 사상이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서구의 영향이 커진 오늘날에는 이런 생각이 더욱더 심화됐다. 과연 동양 철학에는 급변하는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현실론적인 철학 이론이 없는 것일까?

책은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고민한 저자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 줄기로 나눠졌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중점을 둔 유가 사상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인간의 의지와 결의보다는 주변의 상황과 가변 하는 시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는 병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외면했던 병가 철학의 중심인 '세'를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었고, 그러한 세가 동양의 문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심도 있게 논하고 있었다.

애초에 전쟁에서 발전한 병가 사상은 극도로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해야만 했다. 감정만으로 싸움을 했다간 손해가 극심하며 잘못하면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병가는 인간의 의지와 믿음을 믿기보다, 주변의 조건과 주변의 환경을 바탕에서 승리를 찾았다. 주어진 조건과 주어진 환경을 나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 놓고 싸움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병가의 핵심 철학이고, 그 중심에 세가 있었다. 즉 병가의 철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세를 얻어놓고 싸움을 걸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은 노오력만 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가의 철학과는 대조적이다.

 병가에서 출발한 세라는 개념은 전쟁 철학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갈래로 퍼져 동양 문화의 한 축을 만들었다. 세라는 개념은 도가와 결합하여 황로학이라는 도가 중심의 정치학을 탄생시켰으며, 이러한 사상은 극현실적인 철학인 법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법가의 철학은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는 입장인데, 이들은 병가의 세라는 개념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세라는 개념은 철학을 넘어 동양의 풍수사상과, 그림, 그리고 시와 서예, 점술서까지 방대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세라는 개념은 동양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라고 할 수 있겠고, 그런 세의 철학의 현실적인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덕목이다. 

 책을 읽으며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어려운 개념을 평이한 설명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내공이 돋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철학에 국한된 세의 개념을 예술과 문학, 그리고 풍수와 점술의 영역까지 확장하여 설명하는 해박한 응용력이 돋보였다. 동양학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하여 색다른 견해를 만날 수 있겠으며, 동양학을 처음 보는 초보자들이라도 친절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글솜씨 때문에 어려운 관념들을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책에서 설명하는 '세'의 철학적인 부분은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세의 철학을 예술과 문학, 그리고 풍수와 점술에 적용하는 부분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었다. 실제로 나는 예술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편이었는데, 그림과 서예가 가지고 있는 작품 고유의 '세'를 해석하는 저자의 설명이 크게 와닿았고, 동양 예술을 어떻게 관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풍수와 점술에 대해 그 안에 내재된 '세'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그래서 예술인들도 이 책을 통하여 동양 예술을 관통하는 세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보다는 현실이다. 의지는 없이 살 수 있어도, 밥을 못 먹고는 살아가지 못한다. 의지와 투지는 밥이 최소한으로 충족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시대에는 주변의 상황을 보고 맞추는 현실주의적 '세'의 철학이 마음의 의지로 대표되는 '인의'의 철학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를 중점으로 하는 철학의 맹점은 바로 인간성의 부정이다. 병가를 비롯하여 세를 중심으로 다루는 철학들은 인간성을 과소평가하고 무시해버린다. 인간이 일을 이루는 데에는 이랬다저랬다 왔다 갔다 하는 인간의 마음보다는 주변의 환경과 객관적인 상황에서 요지를 찾는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과 객관적인 상황을 아무리 좋게 조성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때에는 결국 '인간의 노력'이 큰 무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의 상황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세'를 유리하게 조성함과 동시에, 나의 의지와 마음도 굳건해야 한다. 주변의 조건을 나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포기하지 않는 의지. 이 둘을 쌍두마차로 내어 달린다면 하고자 하는 일에서 결실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성취하려면 세를 믿고 세를 타고 세를 의지하되, 사람을 믿고 사람을 바탕으로 하며, 나 자신을 믿으며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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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1 - 1000년 로마의 시작 리비우스 로마사 1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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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는 로마 역사를 다룬 고전 중 가장 권위 있는 책이다. 책은 150권으로 기획했으며 리비우스는 142권까지 집필을 하고 죽었다. 다루고 있는 시대는 로마 건국에서부터 시작해 옥티비아누스가 황제로 등극한 시대까지라고 하는데, 현존하는 부분은 초기의 1 ~ 10권 그리고 포에니 전쟁과 그 후를 다루는 21 ~ 45 권이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발간되자마자 화제를 모았으며, 후세에도 마키아벨리를 비롯하여 지식인 계층에게 두루 영향을 미쳤다. 서구 사회에서는 상류층의 교양을 상징하는 라틴어를 배울 때 《리비우스 로마사》를 교재로 삼았다고 한다. 최근 번역된 한국어 판본 《리비우스 로마사 1》은 1권 ~ 5권까지의 분량을 다루고 있다.

 로마를 다룬 역사고전은 여럿 있는데, 대표적으로 꼽는 책이 바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다.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가장 화려했던 로마가 왜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고찰하는 역사서다. 그렇다 보니 글의 대체적인 어조는 건조하며 침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리비우스 로마사》는 신생국 로마가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고찰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책의 초반부인 1 ~ 10권이 이에 속하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글의 어조는 굉장히 힘차고 역동적이다. 그래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와 비교한다면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의 부제는 '로마 공화국 발전사'라고 할 수 있겠다. 

 

 번역된 1권의 내용은 로마의 건국에서부터 왕정의 폐지와 공화정의 수립, 그리고 갈리아 민족의 침략까지를 다루고 있다. 전설 속의 트로이 전쟁 직후, 아이네이스는 트로이 유민들을 데리고 이탈리아 반도로 피난을 온다. 그곳에서 정착을 했고, 아이네이스의 후손인 로물루스는 로마라는 국가를 세운다. 창업자 로물루스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종교적 권위, 그리고 때로는 권모술수와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을 활용하여 로마의 초석을 쌓는다. 그 뒤 2대 왕인 누마 치세에는 평화와 종교 등의 내치에 집중했고, 툴루스 치세에는 다시 전쟁을, 안쿠스 치세에는 전쟁과 내치를, 타르퀴니우스와 세르비우스 시절에는 제도 정비와 사회 정비를 완료한다. 이때까지 로마 왕정은 세습이 아니라,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 시절부터, 그들의 자손들은 왕가를 세습하여 권력을 독점하려 시도했으며, 그 결과 세르비우스 왕을 몰아내고 타르퀴니우스의 아들이 옥좌를 차지하여 전제 정치를 휘두른다. 이러한 세습 군주정은 로마 귀족과 시민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귀족과 평민은 단결하여 왕정을 폐지했다.

 그 뒤 로마에는 공화정이라는 정부 체제가 들어선다. 공화정이 들어서고 국가는 두 세력으로 나뉘는데 보수층을 대표하는 귀족 세력과 진보층을 대표하는 평민 세력이다. 집권 초기에는 귀족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했지만, 계속되는 평민의 견제로 인해 평민들에게도 정치적 입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평민들은 투쟁과 집회를 통해 그들의 행정관인 호민관을 선출했으며, 보수층의 행정관인 집정관을 대신할 정무관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큰 공헌을 한다. 그 외 많은 관직들도 평민들에게 개방됐고, 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재무관 역시 평민들에게 열리기 시작했으며, 귀족과의 통혼도 법적으로 허용이 됐다. 그러나 귀족 보수층은 기득권을 옹호하고 이권을 쉽게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평민들 역시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새로운 권리를 얻어내려 했으며, 그로 인해 공화정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극심한 내부 갈등 속에서도 외부의 침공이 있을 때에는 단합하여 국난을 극복했다. 외부의 부족들도 로마의 정치적 분열을 빌미 삼아 침공한 경우도 많았는데, 빈번히 실패하고 패배한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정치적 내분은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졌고, 극심한 정쟁으로 인해 10인의 의원회라는 극단적 전제정치가 들어서기도 했으며, 갈리아인들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국난 앞에서 로마는 굴하지 않고 서로 단합하여 문제를 극복했다. 리비우스가 주목하고 강조한 것도 이런 로마의 정신이었다.

 

 책은 널리 알려진 고전답게 오늘날에도 매우 의미 있는 교훈을 주고 있었다. 첫 번째로 느낀 점은 바로 '소통과 토론의 중요성'이다. 동양의 정치사는 군주정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동양 역사서에는 군주에 대한 권위와 복종을 당연하게 서술한다. 동양에서의 민본이라는 것도 결국 아래에서의 외침이 아닌 위로부터의 목소리를 상징한다. 동양에서는 이 당시 신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고, 참여한다고 해도 그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신민은 그저 지배층의 수탈의 대상이었고, 왕의 절대적인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그래서 동양의 군주 중심의 역사는 읽다 보면 매우 경직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리비우스 로마사》는 달랐다. 이 당시 평민들은 귀족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했다. 힘없고 가난하고 수탈의 대상이었지만, 동양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그 결과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행정관을 선임할 권리를 얻어냈으며, 귀족들이 움켜쥐고 있는 권력을 최대한 나누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모습은 동양의 경직된 역사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비유하자면 매우 역동적이며, 활발했다. 이러한 로마의 역동성은 상하의 소통에서 비롯됐으며 이러한 로마의 소통은 로마의 발전에 주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두 번째로 '상무정신'을 꼽을 수 있겠다. 초기 로마 역사를 읽으며 느꼈던 것은 로마의 성공 요인에는 상무정신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로마의 초기 역사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건국 초부터 책의 말미까지 평온한 시대를 보낸 적이 드물었다. 한 해에는 몇 번의 원정이 있었으며, 적국의 침략 역시도 빈번했다. 공화정 로마국은 내부적으로 정쟁을 일삼더라도, 외부적인 침략이 있을 때에는 상하가 합심하여, 국난을 극복했다. 물론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전쟁에 대한 로마인의 열정은 시들어갔다. 외부 원정을 둘러싸고 귀족들은 전쟁을 통해 내부 문제를 덮으려 했고, 평민들은 그러한 귀족들의 징집에 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건국 초의 상무정신은 어느덧 정쟁에 가려져 사라져가고 희미해졌지만, 그럴 때마다, 귀족이나 평민 측에서는 정쟁보다는 더 큰 대의를 이야기하며 나라의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위인들이 있었다. 그로 인해 로마인은 그들의 상무정신을 되살리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외세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사실 로마가 존재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군사력이었다. 아무리 공화정이라는 민의를 바탕에 둔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지탱할 수 없는 무력이 없다면, 외세의 침략 아래에서 로마라는 나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로마인은 그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었으며, 타국을 점령할 수 있는 무력이 있었다. 초기 로마의 발전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약탈품과 전리품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보수와 진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인류사를 관통하는 주요 테마 중에 하나는 바로 기득권과 피지배층의 갈등이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그러한 모습을 가장 역동적으로, 그리고 전형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역사서다. 당시 공화정이라는 수준 높은 정치제도 역시도 이러한 보수와 진보의 갈등과 조율 사이에서 구현된 제도였다. 귀족으로 대표하는 보수 세력은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애썼고, 평민들과의 차별화를 주장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위기가 올 때마다, 외세의 침입을 침소봉대하여 정치적 위기를 피해 가려고 애썼다. 마치 오늘날 보수가 사골처럼 주장하는 '보수 - 안보 - 국방' 트리오의 원조가 아닐까. 반면 평민으로 대표되는 진보 세력은 끊임없는 투쟁과 격쟁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토지문제와 세금 문제, 그리고 전리품에 대한 보상 등등을 놓고 귀족과 싸웠으며, 정치적으로 공직의 선출 조건을 두고 원로원과 대립했다. 사실 보수와 진보의 갈등 요인의 핵심은 결국 자원의 분배에서 비롯하는데, 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권력과 물질적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두고 양측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오늘날에도 부동산 문제로 국가가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과거에도 비슷했다. 진보 쪽의 문제는 정쟁에 너무 열을 내서 정작 국가의 큰일을 못 보는 것을 꼽을 수 있는데, 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외세의 침입 앞에서도 국가의 안위는 돌아보지 않고 정쟁에만 골몰하던 쪽은 대체로 평민을 대표하는 호민관들이었다. 리비우는 간접적으로, 귀족들의 입장을 옹호하지만 평민들의 입장을 내려깎아 서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런 평민들의 수준 높은 정치의식이 로마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활기와 역동성이야말로 제도의 발전과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마키아벨리를 비롯하여 후대 정치철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네 번째로 '선공후사의 정신'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공화정 로마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혼란했다. 귀족과 평민은 싸움의 싸움을 거듭했다. 각자의 이권을 서로 주장했는데, 이런 혼란 속에서도 선공후사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로마는 이어질 수 있었다. 여러 사례가 나오지만 귀족들 중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2권의 파비우스 가문이다. 파비우스 가문은 원래 귀족 중 극보수 집안이었다. 그래서 평민들에 대한 불만을 한 몸에 받는 가문이었는데, 그들의 후예는 이러한 불신을 씻기 위해서 전쟁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으며, 평민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에 평민들 역시 그들의 진정성에 감동받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 뒤 전쟁을 앞두고 귀족은 군대 징집을 평민은 징집 거부를 내세워 반발했다. 이에 파비우스 가문은 자신들의 가문으로만 병사를 편성하여 전장에 나선다. 이러한 행동은 로마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연상하며, 평민층에게도 귀족층에게도 귀감으로 남았다. 5권에는 전쟁영웅 카밀루스가 평민층 호민관의 정쟁 탄핵을 받고 추방된다. 그 뒤 로마는 갈리아 민족의 침략을 받는데, 정부에서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추방된 카밀루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한다. 카밀루스는 부당한 탄핵과 추방에도 불구하고 로마를 위해 싸워서 조국을 구원했다. 그 뒤 평민을 대표하는 호민관은 도시를 베이이로 이주하자고 주장했고, 그런 주장에 카밀루스는 선조의 얼이 살아있는 폐허가 된 로마를 버리지 말 것을 호소하며, 로마의 중요성과 상징성 강조했다. 이러한 모습은 계급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평민 쪽에서도 '선공후사'의 정신은 이어졌다. 귀족층과 극심한 대립 중에서도,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자 로마의 여인들은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국고를 채웠다. 게다가 귀족과 평민이 군대 징집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자, 국난의 위기에 압박을 받은 일부 평민 계층은 사비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말을 이끌고 자진하여 기마병 군단을 만들어 출격했다. 이에 대다수의 평민들은 자극받아 보병대를 꾸려서 출병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정신은 로마를 지탱해왔던 귀중한 자산이었다. 이렇듯 로마의 발전은 몸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던진 소수 귀족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국가의 위기와 대의 앞에서 양보할 줄 아는 평민들의 미덕에서 비롯했다.

 다섯 번째로 리비우스의 뛰어난 '문체'를 꼽을 수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는 역사서지만 문학서 못지않게 표현이 아름다웠다. 책에서 나온, 광장에서 연설하는 정치인들의 연설문은 대부분 리비우스가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글들인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으로 가득했다. 책에 나오는 정치인들의 연설문은 웅장하고 비장했으며, 전투를 묘사한 부분은 여느 전쟁소설에 뒤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논평을 가하는 부분에서는 오늘날의 신문 사설을 연상했다. 흔히 동양 고전에서는 《자치통감》과 《사기》의 문체를 비교하여, 《사기》의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허구가 가득한 문학서라고 비평하기도 하는데, 《리비우스 로마사》 역시 《사기》의 문학적인 필법에 견줄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리비우스 로마사》와 마키아벨리에 연관성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군주정을 대표하는 정치철학자라고 오해한다. 이는 그의 주요 저작인 《군주론》 때문에 불거진 오해다.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를 지지했고,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로마사 논고》라는 저작에 정리했다.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 로마사》의 1 ~ 10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로마사 논고》를 작성했다. 즉 《로마사 논고》는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의 주석인 셈이며, 《리비우스 로마사》를 바탕으로 한 공화주의 정치철학서다. 왜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에 집중하여 《로마사 논고》를 탈고한 것일까? 책을 읽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리비우스 로마사》 1 ~ 10권의 주요 내용은 아까도 말했듯 '로마 공화국 발전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즉 신생 국가인 로마가 어떻게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공화주의자였던 마키아벨리는 이 부분을 토대로 자신의 역작 《로마사 논고》를 작성한 것이다.

 그럼 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정치철학과 상반되는 《군주론》을 쓴 것일까? 이러한 이유 역시도 《리비우스 로마사》에 나와 있었다. 《리비우스 로마사》 2권 첫 부분에는 리비우스의 독백으로 시작하는데, 공화주의자인 리비우스도 신생국 로마가 왕정으로 시작했던 것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한다. 새롭게 건국된 나라에서 바로 공화정을 시행했더라면, 공화정 특유의 불안정성 때문에, 국가가 기틀을 못 잡고 전복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공화정이라는 수준 높은 정치 제도는 나름의 근본 바탕 위에서 구현되야 하는데, 신생국 입장에서 시행하기에는 너무나도 시행착오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건국된 나라의 기틀을 잡을 때에는 군주제가 필요악으로 필요했다며 군주정을 부분적으로 긍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즉 난세에는 군주정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지고, 치세로 이어나갈 때에는 공화정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리비우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마키아벨리 역시도 이런 리비우스의 생각을 계승한 것이 아닐까? 마키아벨리 당시의 이탈리아 대륙은 사분오열 합종연횡으로 찢겨 있었다. 여러 유럽의 강대국들은 각기 대륙을 통일하고 제국으로 나아갔는데,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하지 못 하고, 도시국가 체제로 찢겨서 열강에 이용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난세의 시국에서, 강력한 군주가 일어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통일 제국을 건설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군주론》 26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뒤, 나라가 제국을 이루고 기틀을 이룬 뒤에는 로마의 선례를 본받아 정치제도는 공화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리비우스 로마사》에 나온 리비우스의 생각과 로마인의 역사적 성공 사례를 귀감으로 삼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마키아벨리는 《전술론》이라는 군사 저작을 발간했는데 이 역시 《리비우스 로마사》와 관계가 깊다. 앞서 밝혔듯 로마의 성공 요인에는 '상무정신'과 더불어 자강을 꼽을 수 있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탈리아 도시국들은 용병을 사용하는 관례가 보편화됐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런 용병의 고용을 매우 위험하게 생각했다. 《리비우스 로마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로마인이 성공할 수 있던 까닭은 정치적 분열 속에서도 자강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힘은 바로 '강한 자국의 군사력'에서 비롯했다. 《리비우스 로마사》를 읽다 보면 군사력을 잃은 부족들이 어떻게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전술론》의 핵심 주제는 바로 자국 군대의 정예화인데, 이러한 부분도 직간접적으로 리비우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의 번역은 영문판 중역본인데, 번역은 굉장히 매끄럽게 잘 읽혔다. 리비우스 특유의 수사적인 필법을 자연스럽게 번역했는데 역자의 노련미가 돋보였던 번역이다. 고전 애호가인 나는 개인적으로 원전 번역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원전 번역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독성이다. 간혹 어떤 원전 번역본들은 너무 직역만을 고집하여서 읽기가 힘든 경우도 있었다. 이런 책보다는 중역이더라도 잘 읽히고 어색하지 않게 읽히는 책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고전을 가장 온전하게 읽으려면 고전이 기록된 언어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고전을 읽자고 라틴어나 헬라어를 배우는 것 역시도 바쁜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독자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가독성과 원전 번역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번역이 좋겠지만, 만약 한 가지를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가독성을 선택할 것이다. 매끄럽게 잘 읽혀야 이해할 수 있다. 역자는 고전과 사회학, 문화학 서적을 여럿 번역했고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이번 번역도 매끄럽게 잘 마무리한 것 같다. 이 책 번역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할 수준이 아니지만, 적어도 책을 통해 리비우스의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문체를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오랜 소원 중 하나가 바로 《리비우스 로마사》의 완역이었다. 한국어 번역본은 총 4권으로 현전하는 《리비우스 로마사》의 모든 내용을 완역한다고 한다. 매우 반길만한 소식이다. 특히나 고대 로마에 대한 고전은 국내에 없었는데, 가장 권위 있고 가장 중요한 《리비우스 로마사》가 번역되고 있으니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실각한 뒤, 시골로 내려가 점심에는 선술집에서 시민들과 어울려 놀고, 저녁때에는 관복을 갈아입고 고전으로 가득한 자신의 서재에서 고전 공부를 했다고 스스로 편지에서 밝혔다. 나 역시 이 책을 그런 기분으로 읽었다. 저녁에 집에 와서는 정갈하게 샤워를 하며 사회에서 묻은 때를 벗어내고, 깔끔한 옷을 갈아입고, 양서가 가득한 나만의 서재에 들어가 스탠드 불을 켜서 《리비우스 로마사》를 읽었다. 자유와 평등이 살아있는 공화주의의 정신을 읽을 때마다 내 감정은 고무됐고, 로마인들의 뛰어난 인품은 귀감으로 삼을 만 했다. 책을 읽는 순간 자체가 나에게는 힐링이었다. 어서 빨리 다음 권이 나와서 지적 유희가 하루빨리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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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4-1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비우스 로마사』는 다른 책에서 구경만 했는데 마침내 국내에 번역판이 나왔군요. 번역도 가독성이 좋다고 하니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몽테뉴의 <수상록>,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등에서도 리비우스의 문장들을 부분적으로 접했었지만, <리비우스 로마사>에서 직접 리비우스를 대한다면 또 얼마나 흥분될까 무척 기대가 됩니다.^^

저는 최근에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서는 의외로 리비우스를 인용한 문장들은 거의 없고(아직까지 1권만 읽어서 그럴까요?), 타키투스를 굉장히 자주 인용하고 있어서 좀 놀랐습니다.^^

리군 2019-04-17 17:10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고전입니다. 리비우스는 기원 전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필력이 뛰어난데, 이는 <사기>에서 보여준 사마천의 필법과 비슷합니다. 두 거성 모두 자신의 감정을 가감없이 글에 녹여서 역동적인 역사 서술을 보여주는데, 리비우스는 자신이 자신있는 수사학을 <리비우스 로마사>에 절묘하게 녹여서 탁월한 비유와 은유 등등의 수사법을 아름답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봤던 역사서 중 가장 문학성이 탁월한 저서라고 생각하네요 ^^ 책의 중요성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중요성을 떠나 너무 재미있게 서술된 고전이라 관심이 있으시다면 반드시 일독을 권해봅니다 ^^

그리고 기번이 다루는 <쇠망사>는 공화정 로마 체제가 아닌 제정의 로마의 몰락을 다루는 저서라서, 아무래도 초기 로마를 고찰한 <리비우스 로마사>보다는 왕정을 다룬 타키투스의 저서를 더 많이 인용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기번이 다루는 왕정 체제의 로마와 타키투스의 저서는 시대적으로 가까우며 왕정이라는 주제 의식으로 볼 때에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점도 많을 테니까요.
 
치우, 오래된 역사병 - 역사과잉시대 한중의 고대사 만들기
김인희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치우는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02년 월드컵 때 치우는 붉은 악마의 마스코트였으며, 국민 대부분은 치우의 레드 데빌스 티셔츠를 입고 국가대표팀을 응원했다. 외신들도 이런 붉은 물결을 흥미롭게 주목했으며,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열정이라고 칭찬했다. 치우에 대해서 국민들은 친밀함을 느끼며, 우리와 연관이 깊은 신화적 인물로 생각한다. 치우를 상징하는 붉은색도 월드컵 때문인지 매우 친근하다. 정리해보면 치우라는 캐릭터는 한때 국가를 대표했던 마스코트였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 친숙한 인물이다. 그런데 정작 국민들은 이런 친숙한 치우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아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붙잡고 단군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의 조상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만, 치우에 대해서는 떨떠름하게 반응한다. 물론 역사학에 관심이 있고, 역사에 대해 조금 배운 바가 있는 사람이라면, '치우는 동이족'이며 우리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치우는 누구이며,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상인 것일까?

 책은 도발적인 명언으로 시작하고 있다. '역사의 과잉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라는 니체의 주장을 빌어, 우리나라, 그리고 중국의 '치우병'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치우라는 인물은 중국의 사서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선사시대 이래로 모든 문명국의 역사는 비현실적인 신화로 시작하며, 그로부터 먼 시간이 흐른 뒤에야 현실적인 시간의 기록으로 이어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메르 문화도, 나일강의 이집트 문화도, 인도의 인더스 문화도, 그리고 중국의 황화 문화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역사도, 로마 역사도 모두 시작은 신화로부터 비롯한다. 일본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사실 단군이라는 인물도, 신화적 색채가 강하지 않는가? 치우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의 신화에서 선의 축이 '황제'였다면, 악의 축이 바로 '치우'라는 인물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했다. 검증하기 힘든 신화적 인물을 역사의 무대에 끌어올리려 하다 보니, 온갖 억측이 만연했고, 이것이 한국과 중국을 강타하고 있는 치우병의 원인이었다.

 그럼 역사에 기록된 신화적인 요소는 비현실적 요소가 다분하기에, 그저 무시해야만 하는 기록일까? 그렇지 않다. 신화는 현실을 매개로 하여 탄생한 비현실적 기록이다. 즉 당대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여서 기록한 것이 신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조건적으로 덮어둘 수만은 없다. 앞에서 고찰했듯 인류의 대부분의 고대사는 신화적 요소가 강한데, 이를 좀 더 사실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허구의 속에 내포된 진실을 잘 가려내야만 한다. 허구를 매개로 한 당대의 진실은 무엇인지, 허구는 왜 이렇게 부풀려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역사적, 문헌학적, 고고학적 요소를 모두 동원해서 조심스럽게 검증해야 한다. 이런 어려움이 있기에, 신화적 요소가 잔재한 고대사 부분은 여전히 사학에서 어려운 영역으로 여겨진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고대사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저자는 책을 통해 치우라는 인물이 어떻게 형성됐고, 치우라는 인물이 왜 태어났으며, 치우 신화를 모태로 한 사건이 무엇인지를, 정밀하게 고증한다. 책 초반부에 고증하지만 치우의 신화는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주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에서 비롯했다. 황제를 통칭하는 세력은 주나라 황실을 뜻하며, 초나라의 반골 세력은 치우를 상징한다. 치우를 이야기할 때 전쟁과 관련한 이미지, 그리고 구리를 제조하는 능력을 가져서 병기를 제작했다는 것 역시도, 당시의 초나라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밝혔다. 주나라 황실과 초나라 제후국의 싸움의 원인은 바로 청동기 광맥 때문이었다. 당시 초나라 일대는 천연 청동기가 많이 매장된 곳으로, 매해 황실인 주나라에 청동기를 조공으로 바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초나라는 자신의 노다지를 주나라 황실에 바치기 싫었고, 이를 무기화해 자신이 패자가 되려고 했었다. 이에 주나라는 온갖 도덕적인 명분을 내세워 초나라를 정복하는데, 이 사실이 황제와 치우의 전쟁이라는 신화적 스토리텔링의 모태가 됐다.

 이후 시대가 거듭할수록, 중원에서는 황제와 치우 신화를 더욱 부풀리기 시작했는데,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 당대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를 신화 속에 첨가하여 더욱더 과장을 부풀렸다는 점이다. 황제와 치우가 크게 싸웠다는 기주대첩과 탁록대전, 그리고 소금 못에서 치우와 관우가 싸웠다는 설화 등등이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역대 이래로 중원의 정부는 역대 이래로 만들어지고 부풀려진 신화를 '사실로의 역사'로 끌어내려,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역대의 중원 정부에서 늘 자행했던 일이며, 특히 최근 근대 이래로 중국의 과잉 민족주의 정책에서 노골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신화적인 요소를 역사적으로 검증하는 데에는 아까 살펴봤듯 신화 속의 허구적 요소가 다분하기에, 매우 정밀한 태도로 검증해야만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를 자국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해석하고, 자료 해석 역시도 취사적인 선택으로 살펴봐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으로 이끌어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역시도 우리 마음대로 치우라는 인물을 해석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치우라는 설화적 인물은 양국의 입장, 양국의 주관에 따라 서로 다른 과잉적 의미로 치닫게 된 게 오늘날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학 학계에서는 치우를 둘러싸고, 주류 사학에서는 신화적 요소라고 하며 역사적으로 검증할 사안이 아니라고 무시하고 있고, 재야 사학에서는 그를 동이족의 조상으로, 한때 중국을 호령했던 위대한 인물로 격상해서 해석하고 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결국 치우는 우리나라 민족의 모태이며, 중국에 대해 보이지 않게 종속적으로, 문화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의 불편한 마음을 해소한 고대의 영웅이다. 반면 중국은 오늘날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황제 그리고 염제와 더불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원래 중국은 염제와 황제만을 중국 민족의 원류로 인정하고 숭배하며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내려 했는데, 치우라는 인물을 포함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이질적이었던 이민족들을 포용하려 하였다. 이렇듯 치우라는 인물은 현재 중국의 시조로도, 그리고 한국의 시조로도, 중국의 소수민족의 시조(마야족)로 받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허구적이고 신화적인 인물을 둘러싸고 각국의 주관적인 해석이 불러온 '역사 과잉'의 모습이다.

 책은 매우 흥미롭지만 사실 교양 차원으로 읽기에는 버거운 책이었다. 온갖 전문적인 용어와, 학술적으로 치우친 설명이 가득했기에 일반인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역사에 관심이 많고, 나름 역사책과 중국 고전을 읽는 나조차도 이렇게 느껴지는데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있기에 저자가 주장하는 주장이 과연 정답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고, 매우 치밀하며 구체적인 해석과 사료, 그리고 문헌 고고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매우 신뢰가 갔다. 더불어 책 말미에는 치우에 대한 고전의 문헌들을 대부분 번역해놓고 있어서, 치우라는 인물이 어떻게 기록됐는지를 시대별로 살펴볼 수도 있었다. 교양 차원에서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지만,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주장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논증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신화적인 인물인 치우라는 인물을 이토록 구체화하여 풀어낸 점도 흥미로웠다. 책을 통해 중국이라는 나라가 역사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화하여 이용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본문의 전문적인 내용들은 주석으로 처리해서 책 말미나 챕터 말미에 배치했으면 어떨까 싶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평이한 서술과 주장을 읽다가 뒤이어 나오는 너무 전문적인 논거를 접하면 아무래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문가, 그리고 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면 할 말은 없겠지만, 주제의식이나 내용으로 봤을 때 일반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편집의 아쉬움이 컸던 것 같다.

얼핏 봐서는 '역사의 과잉'은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물론 역사는 중요하고,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도 안되지만 과대평가 역시 위험하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화를 불러오는데 역사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뒤틀린 역사 과잉 의식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역사에 있어 민족주의 의식은 민족 내에서 소속감과 유대감을 고양하는 효과가 있지만 이것이 과잉된다면, 이는 근거 없는 우월의식으로 빠지게 된다. 게다가 역사에 과대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왜곡과 날조가 가미된다면 이러한 사태 역시도 커다란 문제로 이어진다. 치우의 역사병이 전형적으로 이에 속한다. 중국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중화주의적 역사관도 위험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도 이에 대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온 국민들이 근거 없이 친근하게 느끼는 치우. 그가 누구인지 우리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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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 화이질서의 완성 아이필드 히스토리 History
단죠 히로시 지음, 한종수 옮김 / 아이필드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영락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솔직히 조선 태종 때문이었다. 두 군주는 비슷한 점이 아주 많다. 영락제도 묘호도 태종이며(훗날 성조로 격상됨),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점과, 외향적인 기질을 가진 점, 그리고 찬탈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점까지 두 군주는 비슷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집권하고 있던 점과,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난 점이 있다는 점도, 영락제에게 관심이 갔던 요인이었다. 사실 조선의 초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정치 상황 역시 알고 있어야만 한다. 조선은 명에 사대를 하던 관계였으므로,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명의 정치 상황에 굉장히 민감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호기심으로 책을 뽑아들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만족하고 읽었다.

책은 기존의 전기 형식을 따르기보다,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영락제의 인생을 풀어나갔다. 그 특정 테마는 다름 아닌 화이질서였다. 화이질서란 결국 중국의 중화사상의 일부인데, 중화의 주변에 있는 오랑캐들을 질서 있게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중화사상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역사적인 고찰을 시작으로, 영락제에 이르러 어떻게 제도적으로 완성되는지를 심도 있게 고찰했다. 책을 읽으며, 너무 특정한 부분으로만 인물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있었지만, 글을 읽어보니, 결국 영락제의 핵심은 바로 중화의 완성이었으며, 특히 영락 시기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완전한 화이질서에 입각한 '중화주의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니, 화이질서를 통해 영락제를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화의 개념을 단번에 깨부순다. 흔히 중화를 한족이 중심이 되어 지배하는 패권주의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해석이라고 꼬집었다. 이는 우리 머릿속에 은연중에 각인된 고정관념일 뿐이다. 본디 중화라는 개념은 중원에 천명을 얻은 국가가 다스리는 것으로, 민족과는 상관이 없는 개념이다. 중화라는 단어는 유학에서 비롯했는데, 역대 이래로 유학이 국학으로 채택되면서 역대 국가들이 중화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유학에서는 중화라는 개념을 두고, 한족과 이족을 철저하게 구분을 지어 설명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한족만이 중원의 주인이라고 못을 박진 않았다. 물론 태생적인 이유로 한족을 편들고 우월시한 부분은 있지만, 한족이더라도 '덕'이 없으면 오랑캐와 같아지고 오랑캐더라도 천명을 받고 덕이 있다면 중원에서 주인이 되어 천자가 될 수 있다고 틈을 열어놓았다. 그렇기에 역대의 이민족 왕조들은 이러한 유학의 중화를 방패 삼아 자신들의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따라서 중화라고 했을 때 한족의 패권주의가 연상되는 것은 근대 이후의 중국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투영된 해석이다. 명나라는 흔히 한족의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사실은 아니다. 역대 이래로 중국 대륙에 들어선 왕조 치고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지도층의 출신이 역대 왕조마다 다르다는 차이는 있어도, 이러한 지도층의 출신에 의거해 국가 전체의 민족 구성을 단일화하는 것은 너무나도 견강부회한 해석이다. 중화사상 역시도 마찬가지다. 중화사상은 한족만을 우대하는 사상이 아니라, 그 면모를 잘 살펴보면, 천명을 받은 중원의 주인 국가와 주변의 오랑캐 국가가 조화롭게 사는 것을 지향하는 이념이다.

따라서 원명 교체기 시대에서 중원을 장악한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남아 있었다.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중화를 시스템화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로 태어난 왕조의 존재 이유였으며, 천자의 임무이기도 했다. 화이질서는 이러한 중화의 사상을 대표적으로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중화의 이념은 주원장이 황제권의 강화와 공포정치를 통해 터를 닦아놨으며, 결국 아들인 주체, 영락제에 의해 완성됐다. 번왕이었던 그가 반정을 통해 집권을 하고 나서도, 그는 정치적인 스탠스를 중화에서 찾았다. 아버지보다 더 큰 제국을 건설하는 것. 더 많은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것. 그렇게 자신의 영락대가 유일무이한 시대로 존립하는 것이 평생의 목표였다. 비유해보자면 이렇다. 조선 태종 이방원이 반정으로 인해 정권을 잡아서,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생을 돌보고 정사에 엄중히 매진했다면, 명 태종 영락제 주체는 화이질서를 통하여, 자신의 정권의 정당성을 찾은 셈이다.

흔히 우리는 태종 이방원을 피의 군주라고 이야기한다. 확실히 그는 손에 숱한 피를 묻혀왔다. 그러나 영락제의 행동을 보고는 이방원이 오히려 너그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영락제는 피를 부른 군주였다.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는 남경에서 자신을 따르지 않은 정치세력들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했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가족, 친지, 친구 9족을 멸한 사례도 있었다. 집권 말기까지 그는 정략적으로 피해를 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지냈다. 태종 이방원 역시 정적들을 죽였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태종 이방원은 사람을 쓸데없이 죽이진 않았다. 죽여야 할 사람이 있으면 희생을 최소화하여 집행했다. 게다가 집권 말기에는 자신이 자행했던 정치적 보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심지어 역사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정도전의 아들까지도 품으려고 노력했다. 정치적 반대파와의 악업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시간이 지난 뒤, 정적들과 '나름의 화해'를 시도한 셈이다.

두 군주의 집권 말기도 굉장히 판이하다. 영락제는 과도할 정도로 화이질서 구축에 열정을 다 했다. 그는 지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화이질서에 들어오지 않는 몽골을 향해 무리한 원정을 감행했다. 신하들이 반대하고, 북경 천도로 인해 민심이 피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화이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그 결과 5차 몽골 원정에서 객사한다. 마치 고구려에 집착하던 당 태종의 말로를 보는 듯하다. 반면 조선 태종 이방원은 오로지 조선을 다지는 것에 일념 했으며, 자발적으로 양위를 통해 세종에게 권력을 승계했다. 물론 이는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그는 세종을 흔들 수 있는 요소들을 뿌리뽑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 결과 세종은 안정적인 권력 승계를 통해 치세를 이어나갔다.

책을 읽으며 나는 중원 대륙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확실히 중원 대륙은 문화와 사상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수많은 제자백가의 사상이 중국에서 태어났으며, 우월한 문화가 발흥된 곳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원 대륙은 문화와 사상의 무덤과도 같았다. 유학이라는 이념이 중원 대륙에 각인될 때, 중원을 지배한 것은 황제도, 한족도, 이민족도 아닌 바로 중화라는 사상이었다. 중원의 주인은 매번 바뀌었지만, 바뀐 주인들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중화주의를 표방했고, 화이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즉 표면적으로는 왕조의 황제가 주인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은 중화사상'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는 비단 중국뿐만이 아니라 중국을 기초로 한 화이질서의 국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우리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유학의 일원화는 결국 다양한 사상의 탄생을 가로막았으며, 중국 대륙과 화이질서의 국가에서는 '중화사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유령만이 배회하고 있었던 셈이다.

분명 영락제의 시대, 14세기 15세기는 유럽에 비해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더 발전했다. 영락제 시기에 벌였던 정화의 해외 원정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정화가 영락제의 명을 받들어 벌였던 해양 진출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훨씬 앞서서 일어났으며, 유럽의 대항해시대의 항해술보다, 명나라 정화의 함대가 훨씬 더 발전했다. 과장은 있겠지만 기록에 의하면 정화의 함대는 오늘날로 말하면 당대 최고의 항공모함이었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이런 선박 기능을 제조할 기술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우월한 문명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영락제는 이를 그저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 화이세계 구축을 위해 사용했을 뿐, 정작 경제적인 부분으로 확장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었던 명의 군주들과 청나라 군주들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매우 확대해석한 감이 있지만 결론적으로 영락제가 구현했던 중화사상과 화이질서는 동아시아를 보수화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책을 읽으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참 아쉬웠다.

우리는 흔히 사상이라는 것을 과소평가한다. 실체하지 않고, 관념상에 머물러 있기에, 그저 허울좋은 이념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체하지 않는 관념이 중화 대륙에서, 그리고 아시아 전역권에서 미친 영향은 이토록 강대했다.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강력하고 뛰어난 군주들조차 이러한 사상의 관념을 초월한 자는 없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영락제는 결국 중화라는 이념을 화이질서로 통해 시스템화하는데 성과를 거둔 군주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말이 왜 이렇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영락제라는 뛰어난 명군도 결국 중화라는 이념에 조종당하고 희생당한 군주였을 뿐이다.'

책은 매우 재미있었다. 일본 저자가 쓴 책으로, 확실히 하나의 주제에 입각하여 영락제를 풀어나가는데, 굉장히 흥미롭게 읽혔다. 내가 재미있었던 부분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집요하게 풀어낸 점이다. 게다가 문체도 군더더기가 없으면서, 핵심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가히 '일본스러운 모범 역사' 저서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개인적으로 저자가 마음에 들었던 점은 또 있는데, 바로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특정 상황의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단호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일본인들은 특히 타국의 역사에 있어서는 논점을 흐리지 않고 객관화하여 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다만 이러한 객관성이 자국의 역사를 비출 때에는 빛을 잃어가는 것이 늘 아쉬웠는데, 저자는 이런 시류를 매우 비판적으로 생각했다. 그가 자국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책에 나온 그의 역사관은 귀감이 될 만하다.

일본 사람이 쓴 중국 황제 열전 중 개인적으로 가장 우위에 두는 작가는 바로 '미야자키 이치사다'다. 그가 쓴 저서인 《옹정제》, 《수양제》를 읽으며, 얇고 제한된 분량에 이렇게 밀도 있고 정밀하게 인물을 설명할 수 있구나라고 감동을 받았다. 얇지만 깊이가 있고, 문체도 좋았으며, 삶의 교훈적인 내용도 가득했다. 마찬가지로 저자인 단죠 히로시의 《영락제》 역시,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책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단죠 히로시의 《명 태조 주원장》 책도 번역됐으면 좋겠다. 아울러 이런 스타일로 조선 태종에 대한 평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라는 것은 결국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보기 위해 읽는 것이다. 그저 과거의 지식만을 위한 배움이라면 안 배우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영락제》를 읽으며 나는 시진핑이 계속 떠올랐다. 그가 오늘날 자행하는 중국 중심의 정책들은 결국 현대판 중화주의에 입각한 것이고  화이질서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내재됐다. 우리나라 역시도, 이러한 팽창주의의 중국을 이해하고 대응하려면, 뿌리 깊은 중화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선행되야만 할 것이다. 《영락제》는 그러한 중국의 중화주의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기에 최적의 도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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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인생을 위한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논어》는 참 특이한 고전이다. 보통 고전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고전에게는 특유의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위는 내용의 난해함을 포함하여, 시대적인 이질감 등등이 복합적으로 결합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논어》는 다른 고전들에 비해 평이하게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 《논어》를 읽었을 때에도 복잡한 고전들에 비해 평이하고 친근하게 다가왔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서양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동양의 《논어》 중 어떤 글이 쉽게 다가올 수 있을까? 동서 문화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논어》가 《니코마코스 윤리학》보다 더 쉽고 더 평이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논어》지만, 《논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한다. 당대의 서양철학에 비해 평이하고 추상적이라서, 접근하기는 비교적 쉽지만 이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체득하는 것에는 굉장한 노고를 필요로 한다. 서양철학은 처음에 접근이 어려울 다름이지, 그 어려운 문턱을 넘어서고 철학의 논리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논어》보다 더 빠르게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정리해보면 《논어》라는 고전은 입문은 쉬어도 그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고전이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고, 인생에 경험이 많은 분들일수록 《논어》를 좋아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논어》가 가지는 보수적인 성향도 한몫을 하겠지만, 그것을 떠나 젊은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경험적인 측면을 고찰하는 고전이 《논어》이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인생의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나이 든 사람들처럼 《논어》의 내용이 깊이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쉽게 다가오는 책은 맞지만 《논어》 안에 깊이에 대해서는 완전하게 느끼지 못 한 것 같다. 아마 인생 경험이 많아지면 《논어》로부터 느끼는 바가 더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인생의 책이 《논어》라고 하셨다. 그만큼 《논어》를 좋아했다. 나와는 취향이 전혀 달랐다. 어릴 때부터 나는 《논어》를 읽고 또 읽었지만 《논어》를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현실적인 《손자병법》이 더 와 닿았다. 《한비자》가 더 와 닿았고, 《귀곡자》가 더 와 닿았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은 《논어》는 이전과는 다른 깨달음을 선사했다. 첫 번째로 성현이라 불리는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따뜻하게 다가왔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는 권위적인 성현의 모습이 아니라, 노력하는 지성인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보통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실수도 하고, 무시도 당하고, 때론 변명도 하고, 정신승리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찌질한 모습은 너 나 우리에게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공자라서, 그가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다만 공자가 우리와 다른 점은, 우리는 어떤 일을 결심하고 진행할 때, 하다가 어려운 부분을 직면하거나 심지어 실패를 했을 때 그 일을 손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공자는 달랐다. 사실 공자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이상정치를 현실화하기 위해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결국 자신의 정치이론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는 현실에서 철저하게 실패를 맛본 사람이었다. 숱한 실패 속에서 그는 보통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찌질거렸다. 실패 앞에서는 성현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부분을 《논어》는 미화하지 않았다. 공자의 찌질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랬기에 공자가 더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 변명하고, 무시당하고, 실수도 하고, 정신승리를 하며 실패한 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자신의 정치이론을 구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자, 그는 교육을 통해 미래 세대에게 믿음을 걸었다. 이렇듯 그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집념의 결과, 그는 죽어서 동양의 사상을 지배했다. 현실 세계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그였지만, 죽어서 성공한 것이다. 공자는 우리와 같은 찌질한 모습을 가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와 다르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작은 차이가 그를 동양의 성현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로 평생 배움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부분이 감명 깊게 다가왔다. 오늘날 배움은 입신을 위한 수단적인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취직을 하는 순간 배움은 끝나게 된다. 그러나 공자는 이야기했다. 진정한 배움은 인생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라고, 지식적인 측면, 목적적인 성격을 넘어, 일상생활에서 바르게 실천하는 영역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배우고 아무리 고결한 인간이더라도, 인간이란 존재는 근원적으로 완벽하지 않기에, 틈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음공부는 평생 지속해야 하고, 나의 행동을 다잡는 것 역시 평생을 돌아봐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공부의 과정이다. 취직의, 취직에 의한, 취직을 위한 배움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의 목표이며, 이러한 목표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공자는 이를 깊이 있게 강조했다.

 세 번째로 공자 철학의 휴머니즘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사실 공자 철학의 복고적인 부분은 오늘날에 비춰볼 때 이질적인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시대는 '변화'가 트렌드다. 기술의 발전은 점점 가속화되고 있으며, 사회의 구조적인 부분들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혁신하고 있다. 예전에 당연하게 여겼던 가치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변혁의 속도를 알아야만 한다.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의 가장 메인 요소는 바로 '인공지능'이다. 다가올 미래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더더욱 사라지고 자동화되고 기계화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인간은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 번째로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기술이나 사회 변혁으로 위협받는 휴머니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사회의 가치와 관념이 급격하게 변화할 때에는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이 위협받았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도 마찬가지였다.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예의와 법도가 무너지지 않았지만, 전국시대에는 그러한 인간 중심의 관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할 사회가 인간을 경시하고 힘과 패권만을 추구했다. 즉 약육강식의 짐승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공자는 시대가 잊어버린 휴머니즘을 강하게 외쳤다. 이런 공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늘날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인간이 하던 많은 업무를 기계가 대신할 것이다. 사회 구조는 더더욱 발전할 것이고 사회 기술은 더더욱 발전할 것이다. 이러한 변혁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휴머니즘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 중심의 사회. 인간이 목적이 되지 않고, 인간 그 자체가 존중받는 사회를 지향해야만 한다. 휴머니즘의 관념 속에서 물적 기술적 발전을 이룩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기에 공자가 외쳤던 휴머니즘은 오늘날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논어》를 이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논어》에서 추구하는 바람직한 '군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오늘날의 관념에 비춰 본받을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고 싶다. 다만 《논어》라는 책은, 교훈을 떠나 인생의 고비를 넘나들며 이따금씩 주기적으로 펼쳐 보고 싶긴 하다. 왜냐하면 《논어》는 따뜻한 책이기 때문이다. 언제 펼쳐봐도, 《논어》는 따뜻했다. 온정을 품고, 인간적인 매력이 물씬 나는 책이었다.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열정이 그대로 스며있었다. 나의 외할아버지가 가장 열정적으로 읽었던 책이다. 그래서 《논어》를 볼 때마다 외할아버지의 뜨거운 온도를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생에 있어 가장 원초적인 뜨거움을 갈구할 때마다 나는 《논어》를 읽을 것 같다. 다음번에 읽을 《논어》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나이가 지금보다 더 들어서 읽을 것이니, 느끼는 바가 더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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