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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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문화를 상징하는 정서는 '한'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한의 정서란 슬픔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의 정서는 슬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거나 이겨내기 위해 슬픔이란 감정을 또 다른 무언가로 승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은 숱한 어려움과 외침 속에서도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한의 정서가 발달했다. 민족의 노래라고 불리는 아리랑은 이러한 '한의 정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위인인 추사 김정희의 삶과 작품도 마찬가지다. 추사의 삶과 예술 속에는 한민족의 DNA라고 할 수 있는 '한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추사의 초년기와 중년기 시절은 매우 행복한 시기였다. 추사의 본관 경주 김 씨 가문은 당시 순조 시대에 수렴청정을 했던 정순왕후의 집안이다. 정순왕후는 정조 사후 수렴청정 당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한 여군이었다. 그렇기에 추사 부자도 정순왕후의 혜택을 받아 순탄한 공직 생활을 이어나갔다. 과거를 공부하며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는 추사의 초년기는 문인 특유의 낭만이 가득한 시기였다. 문화적으로 앞선 청나라의 학자들과 교류를 통해 추사는 경학과 금석학 고증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 뒤 대과 급제 이후 벼슬길도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고, 정치판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자 결국 추사 부자는 실각했고 기나긴 귀양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조선, 사대부의 자손에게 벼슬길이란 살아가는 이유이자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정치적 실권을 한순간에 잃었으니 추사의 아픔은 오죽했을까? 당시 정치판은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고, 보복적인 정쟁이 일상화된 시대였다. 추사는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예술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실각에 굴하지 않고, 응어리진 한을 예술적 활동으로 승화하였다. 그 역시 사대부 출신이니 입신과 권력에 대한 욕심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말년의 추사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예술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기존의 사대부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인 삶을 과감하게 포기했고, 예술적 삶을 추구하면서 조선의 예술을 한 단계 드높이는데 일조했다. 

 그의 성격은 깐깐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년기와 중년기에는 선진 청나라의 해외 견학 때문인지 국내의 작품과 작가들을 평하는데 있어 극도로 냉정했다. 이런 깐깐함 덕분에 추사는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허심탄회하게 인정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정치적인 실각 이후에는 그의 모난 성격은 세월의 풍파 앞에서 점점 둥글어졌다. 한 가지 의미심장한 것은 추사는 타인에게도 엄격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냉정하고 엄격했다. 그렇기에 타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칭송할 때 그는 자신의 작품을 무조건적으로 칭찬하지 않았다. 저자가 말하듯 추사의 성격은 완벽주의자들의 성격과 닮아 있었다. 그랬기에 추사의 작품은 시대가 흐를수록 다른 양식과 다른 모습으로 구현됐다.

사실 나는 예술에 관해서는 소양이 짧은 편이라서, 저자인 유홍준 교수가 설명하는 작품 설명을 모두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 했다. 책을 통해 잘 인쇄된 추사의 작품들을 보면서 저자의 시각으로 최대한 쉽게 설명해준 밥을 그저 떠먹기만 한 셈이다. 그래서 추사의 작품에 대해서 뭐라 전문적으로 글을 쓰진 못하겠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추사의 작품은 앞서 말한 대로 고정적이기보다 늘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청나라 고증학 학자들에게서 배운 '입고출신 - 옛것을 본받고 새롭게 하라 - 정신'에 충실했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와 그림 작품들은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틀을 존중하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천재성을 그는 작품 활동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랬기에 그의 정치적 삶은 비루하고 우울했지만, 그의 예술적 삶은 낭만이 가득했고,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들었다. 아마 유홍준 교수도 이런 추사의 해학적, 낙천적, 풍류적인 모습을 인생에 귀감으로 삼았기에 추사를 공부하고 그의 평전을 작성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예술에서 보여준 추사의 천재성은 보통의 범인들이 본받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자질이다. 그렇기에 나와 같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추사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은 예술적인 천재성이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치적 실각 이후에 추사는 다른 양반들처럼 인생을 낭비하는 삶을 살지 않았으며, 자신의 예술에 모든 것을 불태웠다. 추사의 천재성은 재능도 재능이지만, 피나는 노력의 공도 빠트릴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에게는 엄격하고 나 자신에게는 관대하다. 그러나 추사는 타인에게도 깐깐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더더욱 깐깐했다. 이런 깐깐함은 스스로 예술을 대하는데 있어 피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그랬기에 그는 조선 후기의 예술을 한 단계 더 드높일 수 있었다. 이런 추사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에게도 뜻깊은 귀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 후기 정치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추사와 다산과 같은 인재들이 쓰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추사와 다산이 정치에서 활동했다면 과연 그들이 오늘날에 이룬 것처럼 각각 예술과 학문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냈을까?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덧없는 것이지만, 나는 추사와 다산과 같은 인물들이 오히려 정치판에서 소외됐기에 예술과 학문에서 빛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정치에 있었다 한들, 조선의 구조적인 정치판은 그들만의 노력만으로 개혁하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이미 조선 후기 정치의 구조적인 모순은 한두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뛰어난 명군인 정조 역시도 조선의 구조적인 개혁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하물며 추사는 성격 자체가 너무나도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완벽주의자이기에 정치와는 더더욱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 추사가 실각한 것은 어쩌면 그의 인생에 있어서도, 조선의 예술에 있어서도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적지 않은 평전을 읽은 경험을 바탕으로 책의 품평을 내리자면 이 평전은 참 잘 만든 것 같다. 우선 추사의 작품 도판을 깔끔하게 수록하여서 추사의 다양한 작품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책의 최대 장점이다. 또한 유홍준 교수의 편안한 글 솜씨 역시도 평전의 품격을 높이는데 일조하는 것 같다. 유시민 작가는 글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단순함, 명확함, 평이함에 있다고 하였다. 유홍준 교수의 글은 평이하고 친근하며 핵심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평이함과 친근함을 넘어 그의 글에서는 현학적이며 기교로운 문체 역시도 중간중간에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교가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시민이 말하는 단순성을 가짐과 동시에 자신만의 현학적인 기교가 돋보인다. 대중성과 개성을 두루 갖춘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강약 조절이 매우 성공적이기에 그의 글은 편안하면서도 나름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중은 그의 글을 좋아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역시도 이러한 이유로 밀리언 셀러가 되지 않았겠는가 생각해본다. 정리해보자면 이 책은 편집도 수준 이상이며, 저자의 필력도 어느 정도 보장하는 책이다. 또한 책의 표지도 내 취향이라 참 마음에 든다.

사실 나는 유홍준 저작을 웬만하면 다 구매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역시 전질을 구매했고, 문화를 설명하는 그의 책은 거의 소장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전작이라 할 수 있는 《완당 평전》 역시도 소장하고 있다. 두 책을 비교해보건대, 확실히 《추사 김정희》가 더 대중적이다. 게다가 컬러 도판과 편집도 《추사 김정희》쪽이 훨씬 보기가 좋은 것 같다. 또한 전작인 《완당 평전》에는 몇몇 군데에 오류가 있다고 했는데, 최신판에서는 그런 부분들을 수용하고 참고하여 저술했다고 하니 완성도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조선의 인물을 다루는 평전은 대부분 정치적 인물에 치중됐는데 전혀 다른 관점의 예술적 인물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나 역시 최근 정치적인 인물들의 평전만 읽었는데, 예술적인 추사의 삶을 읽으며 제대로 힐링한 것 같다. 권력의 정점에서 휘두르는 삶도 멋져 보이지만, 교양 있는 명사들과 기품있게 소통하는 삶 역시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아름다운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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