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 전쟁 - 야만과 문명이 맞선 인류 최초의 게릴라전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으며, 관심이 갔던 인물은 바로 노예 반란을 이끌었던 스파르타쿠스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스파르타쿠스의 단독 열전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당대의 유명한 정치인들의 열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크랏수스, 카토, 폼페이우스, 키케로, 카이사르 등등의 쟁쟁한 인물들의 열전에서 그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인으로 로마의 밑에 위치한 카푸아 지역의 검투사였다. 저자는 스파르타쿠스가 술라의 동방원정 때 징용되어서 들어온 이민족이라고 추측했다. 그 뒤 그는 어떤 잘못을 하여서 로마의 대역죄를 지었고, 그 결과 검투사가 됐던 것 같다. 그는 동료 검투사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 베수비우스 산에서 로마군을 격퇴하고 북쪽으로 진군하며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지만 결국 부하들의 반발로 이탈리아 남부로 향했다. 북으로 향하는 도중 로마 정규군을 크게 이겼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자만하지 않고 로마의 정예병과 최대한 접전을 피하며, 남부로 피신했다. 남부에서 반란군은 내분에 빠지는데 크릭서스가 이끄는 켈트족과 골족 세력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머물길 원했으나,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를 넘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는 결국 자신들이 생존할 유일한 방법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로마와 근접한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끊임없이 로마의 정예병에 시달려야 하고 장기전으로 흐를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북쪽을 향해 진군했다. 로마는 이런 반란군의 분열을 이용하여, 남부에 남은 크릭서스의 군대를 박살 내고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를 다시 공격했다. 놀란 스파르타쿠스는 북진을 포기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분열된 세력을 수습하여 전력을 정비했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정예군단을 다시 한 번 격파하여 반란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에 로마는 가장 모략적이고 음험한 정치가 중 한 사람인 크랏수스를 스파르타쿠스의 토벌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크랏수스는 반란군을 이탈리아 남부로 몰아냈고, 방어벽을 세워 장기전으로 반란군을 괴롭혔다. 스파르타쿠스는 시칠리아 섬으로 도주하여 재기를 꾀했지만 해적들에게 속은 덕에 섬으로 건너가지 못 했고, 결국 그는 크랏수스의 포위망을 벗어나 반도의 중부로 진군했다. 뒤를 쫓는 크랏수스의 군대와 조우한 스파르타쿠스는 최후의 전쟁에서 크랏수스를 향해 돌격하였고, 결국 이 돌격이 실패함으로 반란군은 패배했다. 그 뒤 크랏수스는 잔존 반란군을 토벌했으며, 살아남은 반란군 일부는 스파르타쿠스가 행하려 했던 계획인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탈출하려고 도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로마의 모순점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반란을 통해 우리는 로마인과 외부 민족의 차별적인 대우, 자유민과 노예의 차별적인 대우를 유추할 수 있다. 흔히 문명국이라고 생각하면 화려한 외면과 뛰어난 내면적 규율을 떠올리지만, 제국주의 로마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더없이 위대했지만, 내면적인 부분에는 부패가 가득했다. 흔히 공화정 로마는 하층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최대한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았고, 이것이야말로 공화정 로마의 가장 뛰어난 점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자유는 철저하게 로마인에 한정됐다. 타민족과 타도시 출신의 사람들은 로마인 시민이 누리는 정치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노예처럼 착복당했다. 게다가 로마 안에서도 노예 계급은 여전히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수탈당했다. 

 이 당시 공화정 로마제국에 벌어진 사건은 다음과 같다. 1,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 세르토리우스의 이베리아 반도 반란,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의 반란, 그리고 이탈리아 소도시의 동맹시 전쟁,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지중해 연안 해적 창궐. 즉 로마는 화려했지만, 화려한 제국주의를 지탱하면서 발생한 수많은 모순들이 전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은 기득권층의 부패를 상징하는 사건이며,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도 동방 민족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시각으로 인해 일어났다. 로마와 이탈리아 소도시가 싸웠던 동맹시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로마의 무지막지한 갑질을 상징하는 사건이며, 시칠리아 노예 반란은 계급 갈등을 상징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전쟁들은 결국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로마의 반작용에서 비롯한 것이다. 

 반란은 아마추어적일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적인 반란이기 때문에 반란에 어울리는 감성은 냉정이 아니라 열정이다. 반란을 지탱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군중심리고, 이런 군중심리는 결국 열정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아마추어적인 반란군은 늘 의욕에 앞서 로마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는 최대한 로마의 정규군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애초에 급조된 반란군으로 정예화된 로마군과 전면전을 펼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는 몇 번의 전투로 정규군을 이겼지만, 이기면 이길수록 더욱 강력한 상대를 보내서 응수하는 로마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결국 로마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피신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었고, 여의치 않자 시칠리아에서 농성을 하려고 했었다. 반란이라는 것은 주동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수동적인 뉘앙스가 강했다. 그는 로마의 주도적인 군세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집단을 설득하지 못하자 주장을 고집하기보다 군중들의 의견을 따라서 남부로 가는데 동의했다. 그는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지만 이를 자신의 집단에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그의 반란군에서는 의견을 달리한 이탈 등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란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의 사후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를 자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신봉했으며, 로마의 지식인층도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임페라토르(뛰어난 공적을 이룬 장군에게 주는 칭호)에 어울리는 최후라고 하며 칭찬했다. 흔히 우리는 공화정 로마를 매우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카토와 키케로 등등은 자유를 신봉하는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들을 '자유의 수호자'처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역대의 로마 지성인들은 그렇게 평가했으니까.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화정 로마는 매우 부당한 국가다. 자국 로마인들에게는 자유의 국가일지 모르겠으나, 수많은 식민지의 사람들과 노예의 입장에서는 그저 악독한 수탈자에 불과할 뿐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런 부당한 체제를 옹호하는 카토와 같은 인물을 스파르타쿠스는 가장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의 자유는 기득권의 자유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은 제국주의 기득권 체제에 반발한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아닐까?

 비슷한 사례로 중국의 후한 시대에 황건적의 난을 꼽을 수 있다. 흔히 우리는 한나라를 되살리려고 노력했던 제갈량과 같은 인물들을 두고 위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황건적의 난은 그저 하층민이 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해 일어난 폭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토록 악랄하게 수탈한 한나라를 복원하려는 제갈량이야말로 역적이 아닐까? 황건난이 왜 일어났을까? 바로 하층민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극을 달해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황건난과 스파르타쿠스의 전쟁은 결국 봉건주의 시대에서 인간이 외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였던 셈이다. 수탈이 보편화된 고대의 하층민이라고 해서 눈감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지나친 수탈과 억압이 아닌 적당한 수탈에 그쳤더라면 과연 그들이 난을 일으켰을까? 결국 이런 야만적 모순을 가졌던 로마 공화정은 카이사르로 인해 제정 국가로 발돋움한다. 지성인들과 로마 시민의 입장에서는 자유의 몰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노예 그리고 식민지 사람들 입장에서는 체제 전복이 크게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노비이자 패배자였던 스파르타쿠스였기에 현전하는 기록은 매우 미비하다. 그렇기에 책의 대부분은 저자의 유추에 의하여 구성됐다. 그렇기에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조심스럽지만, 책 말미에 참고 자료를 살펴보면 저자가 미비한 기록의 인물을 복원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단점은 저자의 유추로 구성된 내용이지만, 역으로 장점 역시도 저자의 탁월한 추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기록이 미비한 고대사 영역은 현전하는 미비한 기록을 바탕으로 많은 부분을 역사가의 주관적 유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고대사를 다루는 모든 저작에도 해당하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논란이 많은 고조선 역시와 삼국시대 연구를 생각하면 될 듯싶다.) 아무튼 나는 저자의 의견을 흥미롭게 읽었으며, 분석과 유추 역시도 타당한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저자의 다른 고대 전쟁 저작인 《살라미스 해전》과 《트로이 전쟁》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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