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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 하 - 전면개정판 ㅣ 춘추좌전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9월
평점 :
《춘추좌전 하》 권에서 다루는 내용의 핵심은 북방 문화권과 남방 문화권의 대립이다. 춘추시대의 주도권은 대체적으로 북방 세력이 줄곧 잡아왔다. 주나라 황실 역시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앞서 패권을 잡았던 제나라와 진나라 등등도 전형적인 북방 세력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문공의 진나라는 주나라와 인접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북방에서 비롯한 중국 전통의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국가였다. 이 거대하고 막강한 진나라가 전국시대에는 3개로 쪼개지는데, 수많은 나라가 전국시대에 몰락함에도 진에서 비롯한 3개의 국가는 진시황의 통일 전까지 유지됐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전성기 진나라가 얼마나 강력한 국가였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북방 세력이 패권을 주도했지만 중기 이후로는 남방의 세력권 쪽으로 무게가 쏠린다.
《춘추좌전 하》권에서는 남방의 강대국인 초장왕의 초나라를 필두로, 오나라 합려와 부차 그리고 월나라 구천 등등이 차례로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다. 이들 나라의 특징은 전통적인 북방 문화권 출신이 아니라 이민족의 영토라 할 수 있는 남방 문화권의 나라다. 강성하는 남방의 신세력 초나라와 기존의 강대국 진나라는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춘추좌전 하》 권에서는 이 두 세력의 갈등을 주의 깊게 다루고 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대결 이후에는 중국의 패권이 완전 남방으로 넘어가는데, 초나라보다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오나라가 급성장하여 중원의 패자를 자처했고, 오나라는 더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월나라에 패권을 내주게 된다. 북방이 가졌던 중원의 패권을 남방의 세력들이 가지는 과정 속에서 중국의 국경 범위는 더더욱 넓어졌고, 이민족이라 할 수 있는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의 영토도 이 시기를 거쳐 중국의 국경으로 명확하게 인식됐다.
내용적인 부분을 잠시 두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춘추좌전》을 생각해보자. 공자가 편집한 본문은 노나라의 정치 상황을 짧은 메모 형식으로 기록했지만 좌구명의 해설과 평론은 노나라의 정치상황보다 주변국들의 외교와 패권의 이전 과정 등등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한 독자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노골적으로 평하자면, 《춘추좌전》에 있어 노나라의 역사는 노잼이었고, 주변 강국들의 첨예한 외교사는 꿀잼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공자가 편수했다는 《춘추》의 본문은 공자의 사후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좌구명의 주석은 그 이후의 국제정세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춘추좌전》은 월나라가 패권을 가지게 됐으며, 막강한 북방 세력인 진나라가 3개의 국가로 쪼개질 위기에 처한 부분에서 끝맺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춘추좌전》의 본문은 노나라와 공자의 입장을 대변하는데 반해, 좌구명의 주석은 노나라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보다 첨예한 국제관계에 더 중점을 뒀다고 볼 수 있다.
묵직한 사서를 다 완독하고 나니 역자가 서두에서 밝혔던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인물이 생각난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일본인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받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오늘날의 일본을 만드는 데 사상적으로 가장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는 근대 일본을 탄생한 메이지 유신의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평생에 걸쳐 13번 완독한 도서가 바로 《춘추좌전》이다. 유학을 배격하고 서구화를 부르짖으며 근대화를 꿈꾼 위인이 평생에 걸쳐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저술된 역사서를 13번이다 봤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다. 왜 근대화를 주장했던 그는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저술된 《춘추좌전》을 13번씩이나 탐독한 것일까? 사실 번역본 쪽수로 파악할 수 있듯, 《춘추좌전》은 분량이 엄청 방대한 고전이며, 한 번 완독하기에도 쉽지 않은 고전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이 책에 몰두한 것일까?
첫 번째로 아마 그는 《춘추좌전》을 읽으며 중원의 패권이 이동하는 부분에 주목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춘추좌전》에 나오는 패권국은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었다. 게다가 기존의 문명화된 북방 지역에서 패권이 유지된 것이 아닌, 문화적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남방 세력으로 패권은 이전됐다. 이를 보고 그는 일본의 미래를 꿈꾸지 않았을까. '지금은 문화적으로 낙후됐고, 열등한 일본이지만 빠른 근대화를 통해 서구가 가지고 있던 국제적 패권을 우리도 가질 수 있겠구나.'라고 말이다. 실제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빠른 근대화에 성공했고, 그 결과 아시아의 맹주로 잠시 동안 군림했었다. 전통적으로 머리를 숙여왔던 중국인 청나라를 제압하고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진압하여서 일본의 위력을 세계만방에 알리게 됐다. 이런 일본의 변화에는 후쿠자와의 사상에서 비롯했고, 그런 후쿠자와의 사상은 아마 평생을 걸쳐 읽었던 《춘추좌전》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는 《춘추좌전》의 '춘추필법'에 주목했을 것이다. 《춘추좌전》이 고전으로 추앙받은 이유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바로 '춘추필법'이라는 역사서 집필의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춘추좌전》을 집필했다고 전해지는 좌구명은 공자의 《춘추》에 방대한 주석을 가하면서 주관적인 역사적 판결을 선보였다. 물론 그의 판단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 춘추필법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모범으로 남았고, 이로인해 사마천을 필두로 좌구명 후대의 역사가들은 자신이 기록한 사서에 '춘추필법'과 같은 역사적 품평을 남겼다. 후쿠자와도 이를 통해 일본의 역사에 있어 '춘추필법'과 같은 기준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일본인들은 후쿠자와를 개혁의 아버지로 부르며 1만엔 짜리 지폐에 초상을 새겨 그를 존경한다. 즉 좌구명이 《춘추》에 주석을 가해 《춘추좌전》을 완성했고 '춘추필법'으로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남았다면,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커다란 일본의 개혁에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주도하여서 일본인들에게 개혁의 정신적 지주로 칭송받았다. 아마 후쿠자와의 이러한 행적은 《춘추좌전》의 춘추필법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세 번째로 《춘추좌전》 저자의 정신에 주목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춘추좌전》의 집필은 '춘추필법'으로 대표된다고 하였다. 그럼 《춘추좌전》의 저자는 왜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해석한 것일까? 당시 중원은 난세 중의 난세였다. 그런 혼탁한 난세 속에서 저자는 '춘추필법'을 통해 사라지고 허물어지는 시대의 기준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저자의 기준은 유학적 이데올로기였다. 당시 패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윤리와 예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를 역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 기록한 것이 바로 《춘추좌전》이며, 그러한 집필이 '춘추필법'이다. 근대 일본도 마찬가지다. 당시 일본은 외세로부터 불평등 조약에 시달리고, 개혁을 하려는 세력과 개혁을 막는 막부 세력으로 인해 혼란한 정국이었다. 후쿠자와는 이런 혼란한 시국에서 근대적 개혁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춘추좌전》의 저자가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고 저술한 것처럼, 후쿠자와는 당시의 모순을 근대적 개혁으로 극복하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후쿠자와의 의식과 《춘추좌전》 저자의 의식은 시대의 모순에 항거하고, 막장의 시대를 바로잡을 '해결책'을 필사적으로 모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마 후쿠자와의 시대적 사명감은 《춘추좌전》이라는 고전의 탐독 아래에서 굳건해지지 않았겠는가.
전근대 유교사상을 배격하려고 노력한 후쿠자와와 그런 전근대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춘추좌전》은 얼핏 생각하면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오히려 후쿠자와는 유교 경전과 유교적 마인드로 저술된 역사서를 배격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벽돌 같은 책을 13번이나 읽었다는 부분, 평생을 걸쳐 탐독한 책이 자신이 배격하려는 사상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고전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떻게 탄력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이렇듯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적 서구적 개혁 안에는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춘추좌전》의 영향력도 들어 있었다. 나는 후쿠자와를 보면서 법고창신 즉, 옛것을 본받고 새롭게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떠올렸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주된 이유도 사실 법고창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후쿠자와는 매우 모범적인 고전 애독자였다. 그는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고전을 어떻게 활용하고 그 배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위인이었다.
끝으로 후쿠자와를 비롯하여, 현실 정치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역사책을 가까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오쩌둥이 《사기》, 《자치통감》을 주기적으로 애독한 것은 널리 알려졌으며, 나폴레옹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매우 좋아했다. 메이지유신의 영웅 후쿠자와는 《춘추좌전》을 평생 애독했으며, 조선의 세종, 태종, 영조, 정조 등도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물론 역사 독서가 무조건적으로 훌륭한 정치를 만들어주진 않는다. 독서 교양 없이도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를 좋아하는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역사 장르를 가까이했다. 왜 이런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인간에게 있어 철학은 빛과 같은 존재다. 인생이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우리는 빛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의 앞날을 비춰줄 수 있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 등불은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앞에 위치하기에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역사는 인류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길을 기록한 문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을 유지해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 역사는 인류가 지나온 길을 담고 있고, 그 기록은 인류의 행적을 그대로 담았기에 이상적이기보다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 활동은 이상을 지향하기도 해야 하지만, 그러한 이상은 현실을 바탕으로 지향해야지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렇기에 지도자들은 철학도 철학이지만 그보다 더 역사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렇게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권력자도 아니고 나는 평범한 일개 시민인데 그럼 역사를 배울 필요가 없지 않냐고.
전근대까지 역사는 엘리트 교육을 지향했다. 동양의 역사는 수요층이 국가를 지도하는 최고지도자와 권신들이었다. 서양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지식인층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까라는 목적 의식하에 역사는 기록됐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역사서들을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리 있는 의견이다. 역사 고전의 주된 주제는 권력이다. 나는 권력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늘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며 살아온다. 직장생활을 하며 갑과 을의 관계는 권력관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익과 이익으로 맺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아래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권력관계를 빚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권력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집단과 사회활동에서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아무도 없다.
우리는 자유민이며 신분제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형식적 평등일 다름이다. 실질적으로 개개인이 평등한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다. 삼성 이재용과 나의 삶은 같은 인간이고 같은 대한민국이지만 절대 평등하다고 볼 순 없다. 이런 시대이기에 역설적으로 권력의 역사를 추적한 역사 고전은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있어 더더욱 빛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춘추좌전》과 같은 고전은 치국의 도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작은 직장 관계, 권력관계 내에서의 지혜로운 처세를 알려주기도 한다. 나를 둘러싼 작은 권력관계와 과거 왕조국가들의 권력관계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자. 작던 크던 권력관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 역사 고전을 가장 효용성 있게 읽는 것은 이러한 시각으로 읽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법고창신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