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9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9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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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만큼 개혁을 강조하는 때가 있었을까? 국정 농단 사건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과거에 비해 높아졌으며, 이는 결국 나라의 개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늘날만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10년 전에도,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은 늘 있었고 존재했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산 이래로, 제도의 타락과 지도층의 부패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각 시대마다 필요한 개혁은 늘 존재했다.

  책에서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주관적으로 평가해보자면, 아기스의 개혁은 매우 바람직했다. 스스로 솔선하여 재산을 분배했고, 강경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였지만 결국 내부의 부하 아게실라오스가 문제였다. 아기스가 아게실라오스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를 빠르게 내쳤더라면 아마 그는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클레오메네스는 개혁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노력했던 인물이다. 다만 그의 개혁은 스파르타 내부에 집중하기보단 외부 원정에 너무 집중됐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외부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결국 외세인 마케도니아를 펠로폰네소스 대륙으로 불러들였고 이로 인해 스파르타가 전복됐으니, 애초에 그가 외부 원정에 대한 욕심을 줄이고 내치에 좀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들의 개혁은 매우 바람직하고 뛰어난 가치를 지향했지만,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미숙한 모습이 있었다. 그라쿠스 형제들의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민중들의 감정적인 선동에 너무 쉽게 동조했고, 이를 통해 너무 과격하게 밀어붙였다. 이렇듯 개혁은 방향이 옳더라도 방법론에서 오류를 범하면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참 어려운 문제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혁이라는 것은 전쟁으로 비유하자면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급진적인 개혁이더라도 그 개혁이 현실화되려면 숱한 반대를 뚫어야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개혁들은 미묘하게도 매우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그렇기에 단기적으로 성급하게 이루려고 한다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라쿠스 형제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감정적이기보다 좀 더 냉정하게 대응했더라면 아마 그들이 추구했던 개혁이 꽃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나라를 바꾸려는 개혁은 말이 쉽지 현실화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 필요한 개혁이 늘 존재했고,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렵고 복잡한 개혁이라는 화두에 대해 민감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마 플루타르코스가 이들의 열전을 쓴 이유도 독자들에게 있어 개혁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쓰지 않았나 싶다.

  개혁에 대한 인물들에 비해 퓌드로스와 마리우스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끝없는 욕망보다 현재의 행복을 생각하라는 교훈이다. 나는 마리우스를 보며 욕망도 세대를 거쳐 진화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마리우스의 끝없는 야욕은 결국 카이사르로 이어졌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보다 더욱 세심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자신의 야욕을 실천했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이라는 자리에 집착하였지만 카이사르는 독재를 꿈꿨다. 이런 카이사르보다 더 교묘한 인물은 그의 사후 등장한 옥타비아누스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보다 훨씬 정교한 야욕을 선보였다. 마리우스와 카이사르는 결국 자신들의 야욕으로 몰락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야욕으로 성공했으며, 결국 그 야욕을 지켜냈다. 그는 카이사르보다 훨씬 기만적이며, 훨씬 잔혹했다. 이렇듯 시대가 흐를수록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기교도 훨씬 정교해진다. 과거의 드라마에 비해 오늘날 드라마의 스토리가 막장인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시대이기에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은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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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 하 - 전면개정판 춘추좌전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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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하》 권에서 다루는 내용의 핵심은 북방 문화권과 남방 문화권의 대립이다. 춘추시대의 주도권은 대체적으로 북방 세력이 줄곧 잡아왔다. 주나라 황실 역시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앞서 패권을 잡았던 제나라와 진나라 등등도 전형적인 북방 세력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문공의 진나라는 주나라와 인접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북방에서 비롯한 중국 전통의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국가였다. 이 거대하고 막강한 진나라가 전국시대에는 3개로 쪼개지는데, 수많은 나라가 전국시대에 몰락함에도 진에서 비롯한 3개의 국가는 진시황의 통일 전까지 유지됐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전성기 진나라가 얼마나 강력한 국가였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북방 세력이 패권을 주도했지만 중기 이후로는 남방의 세력권 쪽으로 무게가 쏠린다.

《춘추좌전 하》권에서는 남방의 강대국인 초장왕의 초나라를 필두로, 오나라 합려와 부차 그리고 월나라 구천 등등이 차례로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다. 이들 나라의 특징은 전통적인 북방 문화권 출신이 아니라 이민족의 영토라 할 수 있는 남방 문화권의 나라다. 강성하는 남방의 신세력 초나라와 기존의 강대국 진나라는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춘추좌전 하》 권에서는 이 두 세력의 갈등을 주의 깊게 다루고 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대결 이후에는 중국의 패권이 완전 남방으로 넘어가는데, 초나라보다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오나라가 급성장하여 중원의 패자를 자처했고, 오나라는 더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월나라에 패권을 내주게 된다. 북방이 가졌던 중원의 패권을 남방의 세력들이 가지는 과정 속에서 중국의 국경 범위는 더더욱 넓어졌고, 이민족이라 할 수 있는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의 영토도 이 시기를 거쳐 중국의 국경으로 명확하게 인식됐다.

내용적인 부분을 잠시 두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춘추좌전》을 생각해보자. 공자가 편집한 본문은 노나라의 정치 상황을 짧은 메모 형식으로 기록했지만 좌구명의 해설과 평론은 노나라의 정치상황보다 주변국들의 외교와 패권의 이전 과정 등등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한 독자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노골적으로 평하자면, 《춘추좌전》에 있어 노나라의 역사는 노잼이었고, 주변 강국들의 첨예한 외교사는 꿀잼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공자가 편수했다는 《춘추》의 본문은 공자의 사후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좌구명의 주석은 그 이후의 국제정세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춘추좌전》은 월나라가 패권을 가지게 됐으며, 막강한 북방 세력인 진나라가 3개의 국가로 쪼개질 위기에 처한 부분에서 끝맺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춘추좌전》의 본문은 노나라와 공자의 입장을 대변하는데 반해, 좌구명의 주석은 노나라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보다 첨예한 국제관계에 더 중점을 뒀다고 볼 수 있다.

묵직한 사서를 다 완독하고 나니 역자가 서두에서 밝혔던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인물이 생각난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일본인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받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오늘날의 일본을 만드는 데 사상적으로 가장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는 근대 일본을 탄생한 메이지 유신의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평생에 걸쳐 13번 완독한 도서가 바로 《춘추좌전》이다. 유학을 배격하고 서구화를 부르짖으며 근대화를 꿈꾼 위인이 평생에 걸쳐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저술된 역사서를 13번이다 봤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다. 왜 근대화를 주장했던 그는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저술된 《춘추좌전》을 13번씩이나 탐독한 것일까? 사실 번역본 쪽수로 파악할 수 있듯, 《춘추좌전》은 분량이 엄청 방대한 고전이며, 한 번 완독하기에도 쉽지 않은 고전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이 책에 몰두한 것일까?

첫 번째로 아마 그는 《춘추좌전》을 읽으며 중원의 패권이 이동하는 부분에 주목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춘추좌전》에 나오는 패권국은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었다. 게다가 기존의 문명화된 북방 지역에서 패권이 유지된 것이 아닌, 문화적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남방 세력으로 패권은 이전됐다. 이를 보고 그는 일본의 미래를 꿈꾸지 않았을까. '지금은 문화적으로 낙후됐고, 열등한 일본이지만 빠른 근대화를 통해 서구가 가지고 있던 국제적 패권을 우리도 가질 수 있겠구나.'라고  말이다. 실제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빠른 근대화에 성공했고, 그 결과 아시아의 맹주로 잠시 동안 군림했었다. 전통적으로 머리를 숙여왔던 중국인 청나라를 제압하고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진압하여서 일본의 위력을 세계만방에 알리게 됐다. 이런 일본의 변화에는 후쿠자와의 사상에서 비롯했고, 그런 후쿠자와의 사상은 아마 평생을 걸쳐 읽었던 《춘추좌전》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는 《춘추좌전》의 '춘추필법'에 주목했을 것이다. 《춘추좌전》이 고전으로 추앙받은 이유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바로 '춘추필법'이라는 역사서 집필의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춘추좌전》을 집필했다고 전해지는 좌구명은 공자의 《춘추》에 방대한 주석을 가하면서 주관적인 역사적 판결을 선보였다. 물론 그의 판단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 춘추필법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모범으로 남았고, 이로인해 사마천을 필두로 좌구명 후대의 역사가들은 자신이 기록한 사서에 '춘추필법'과 같은 역사적 품평을 남겼다. 후쿠자와도 이를 통해 일본의 역사에 있어 '춘추필법'과 같은 기준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일본인들은 후쿠자와를 개혁의 아버지로 부르며 1만엔 짜리 지폐에 초상을 새겨 그를 존경한다. 즉 좌구명이 《춘추》에 주석을 가해 《춘추좌전》을 완성했고 '춘추필법'으로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남았다면,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커다란 일본의 개혁에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주도하여서 일본인들에게 개혁의 정신적 지주로 칭송받았다. 아마 후쿠자와의 이러한 행적은 《춘추좌전》의 춘추필법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세 번째로 《춘추좌전》 저자의 정신에 주목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춘추좌전》의 집필은 '춘추필법'으로 대표된다고 하였다. 그럼 《춘추좌전》의 저자는 왜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해석한 것일까? 당시 중원은 난세 중의 난세였다. 그런 혼탁한 난세 속에서 저자는 '춘추필법'을 통해 사라지고 허물어지는 시대의 기준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저자의 기준은 유학적 이데올로기였다. 당시 패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윤리와 예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를 역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 기록한 것이 바로 《춘추좌전》이며, 그러한 집필이 '춘추필법'이다. 근대 일본도 마찬가지다. 당시 일본은 외세로부터 불평등 조약에 시달리고, 개혁을 하려는 세력과 개혁을 막는 막부 세력으로 인해 혼란한 정국이었다. 후쿠자와는 이런 혼란한 시국에서 근대적 개혁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춘추좌전》의 저자가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고 저술한 것처럼, 후쿠자와는 당시의 모순을 근대적 개혁으로 극복하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후쿠자와의 의식과 《춘추좌전》 저자의 의식은 시대의 모순에 항거하고, 막장의 시대를 바로잡을 '해결책'을 필사적으로 모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마 후쿠자와의 시대적 사명감은 《춘추좌전》이라는 고전의 탐독 아래에서 굳건해지지 않았겠는가.

전근대 유교사상을 배격하려고 노력한 후쿠자와와 그런 전근대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춘추좌전》은 얼핏 생각하면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오히려 후쿠자와는 유교 경전과 유교적 마인드로 저술된 역사서를 배격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벽돌 같은 책을 13번이나 읽었다는 부분, 평생을 걸쳐 탐독한 책이 자신이 배격하려는 사상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고전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떻게 탄력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이렇듯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적 서구적 개혁 안에는 유학적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춘추좌전》의 영향력도 들어 있었다. 나는 후쿠자와를 보면서 법고창신 즉, 옛것을 본받고 새롭게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떠올렸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주된 이유도 사실 법고창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후쿠자와는 매우 모범적인 고전 애독자였다. 그는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고전을 어떻게 활용하고 그 배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위인이었다.

끝으로 후쿠자와를 비롯하여, 현실 정치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역사책을 가까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오쩌둥이 《사기》, 《자치통감》을 주기적으로 애독한 것은 널리 알려졌으며, 나폴레옹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매우 좋아했다. 메이지유신의 영웅 후쿠자와는 《춘추좌전》을 평생 애독했으며, 조선의 세종, 태종, 영조, 정조 등도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물론 역사 독서가 무조건적으로 훌륭한 정치를 만들어주진 않는다. 독서 교양 없이도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를 좋아하는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역사 장르를 가까이했다. 왜 이런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인간에게 있어 철학은 빛과 같은 존재다. 인생이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우리는 빛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의 앞날을 비춰줄 수 있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 등불은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앞에 위치하기에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역사는 인류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길을 기록한 문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을 유지해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 역사는 인류가 지나온 길을 담고 있고, 그 기록은 인류의 행적을 그대로 담았기에 이상적이기보다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 활동은 이상을 지향하기도 해야 하지만, 그러한 이상은 현실을 바탕으로 지향해야지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렇기에 지도자들은 철학도 철학이지만 그보다 더 역사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렇게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권력자도 아니고 나는 평범한 일개 시민인데 그럼 역사를 배울 필요가 없지 않냐고.

전근대까지 역사는 엘리트 교육을 지향했다. 동양의 역사는 수요층이 국가를 지도하는 최고지도자와 권신들이었다. 서양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지식인층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까라는 목적 의식하에 역사는 기록됐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역사서들을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리 있는 의견이다. 역사 고전의 주된 주제는 권력이다. 나는 권력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늘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며 살아온다. 직장생활을 하며 갑과 을의 관계는 권력관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익과 이익으로 맺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아래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권력관계를 빚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권력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집단과 사회활동에서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아무도 없다.

우리는 자유민이며 신분제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형식적 평등일 다름이다. 실질적으로 개개인이 평등한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다. 삼성 이재용과 나의 삶은 같은 인간이고 같은 대한민국이지만 절대 평등하다고 볼 순 없다. 이런 시대이기에 역설적으로 권력의 역사를 추적한 역사 고전은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있어 더더욱 빛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춘추좌전》과 같은 고전은 치국의 도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작은 직장 관계, 권력관계 내에서의 지혜로운 처세를 알려주기도 한다. 나를 둘러싼 작은 권력관계와 과거 왕조국가들의 권력관계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자. 작던 크던 권력관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 역사 고전을 가장 효용성 있게 읽는 것은 이러한 시각으로 읽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법고창신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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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8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8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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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우리는 소신 있는 삶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가치관은 소신 있는 모습을 향하기보다 타협과 방종에 가치를 두게 된다. 소신 있는 삶은 참 멋진 삶이지만, 현실적이지 않기에 망설이게 되며,  존경할 만한 삶이지만, 그 존경 이면에 숨겨진 어려움 때문에 선뜻 행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소신 있고 강단 있는 삶을 두고 이렇게 비꼬기도 한다. '선비 같은 삶.' 확실히 포키온과 카토의 삶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경지다. 이는 당대에도 그랬으며, 오늘날에도 이런 소신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렇기에 그들의 소신이 더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은 안토니우스와 데메트리오스와 같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뛰어난 위업을 세운 인물이지만 한편으로 친근한 이유는, 그들의 방종과 타협적인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체하지 못하고 타협해왔던 색욕과 식욕, 그리고 과도한 음주 등등은 우리가 고민하는 타협과 비슷하다. 일 끝나고 한 잔 마실까 말까, 오늘 저녁은 먹을까 먹지 말까, 군것질을 할까 말까, 지를까 말까, 저 이성에게 작업을 걸까 말까 등등 일상에서의 우리의 고민들은 그들이 행하고 누렸던 것들과 비슷하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우리는 수중에 자금이 제한적이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고 절제해야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원초적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힘이 있었기에 방종에 있어 절제가 없었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의 충족 끝에는 결국 몰락만이 있었다. 데메트리오스는 결국 포로가 되어 과식과 운동부족, 과음으로 죽었으며, 안토니우스는 집착했던 여인의 품에서 자결했다. 카토와 포키온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적어도 그들은 수치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평생 추구한 모습처럼 지조있게 죽었고, 죽음을 통하여 결국 자신들의 지조를 인정받았다. 그들은 생에 있어서는 패배자였을지 모르지만, 곧은 지조로 인하여 역사적으로는 승자가 됐다. 8권의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두 인물은 백로였고, 뒤의 두 인물은 까마귀였다.

소개한 인물 네 명 외에 내가 가장 눈에 들어오던 인물은 바로 옥타비아누스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실질적인 1대 황제로 불리는 로마의 지도자. 다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그의 열전이 없다. 아마 분명 기록했겠지만, 전해오는 과정에서 분실했을 것이다. 이 정도의 거물을 플루타르코스가 다루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안토니우스의 열전 속에서 보이는 옥타비아누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어린 나이지만 그는 매우 교활했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았다. 자신의 세력이 미약할 때에는 키케로를 이용하여 안토니우스와 대립했지만, 결국 안토니우스와 야합한 뒤에는 이용 가치가 없어진 키케로를 안토니우스에게 죽이라고 허용했다. 어떻게 보자면 키케로를 죽인 것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관리하려고 자신의 누이를 이용했다. 누이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지조 없는 안토니우스 같은 인물에게 고귀한 옥타비아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를 홀대했고, 지조 있는 옥타비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 로마인들의 공분을 샀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런 자신의 누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안토니우스에 대한 여론을 조작했다. 뿐만 아니라 안토니우스에 대한 시민들의 악감정을 조장하고자 날조, 기만, 사기 등등을 동원했다. 게다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소리 소문 없이 제거했다. 그가 왜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있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답게, 그 역시도 매우 현실 정치에 능숙한 인물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옥타비아누스의 기만적인 행위를 가감 없이 비판했다. 로마의 독재는 이런 인물이 열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플루타르코스는 새삼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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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전쟁 - 야만과 문명이 맞선 인류 최초의 게릴라전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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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으며, 관심이 갔던 인물은 바로 노예 반란을 이끌었던 스파르타쿠스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스파르타쿠스의 단독 열전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당대의 유명한 정치인들의 열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크랏수스, 카토, 폼페이우스, 키케로, 카이사르 등등의 쟁쟁한 인물들의 열전에서 그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인으로 로마의 밑에 위치한 카푸아 지역의 검투사였다. 저자는 스파르타쿠스가 술라의 동방원정 때 징용되어서 들어온 이민족이라고 추측했다. 그 뒤 그는 어떤 잘못을 하여서 로마의 대역죄를 지었고, 그 결과 검투사가 됐던 것 같다. 그는 동료 검투사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 베수비우스 산에서 로마군을 격퇴하고 북쪽으로 진군하며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지만 결국 부하들의 반발로 이탈리아 남부로 향했다. 북으로 향하는 도중 로마 정규군을 크게 이겼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자만하지 않고 로마의 정예병과 최대한 접전을 피하며, 남부로 피신했다. 남부에서 반란군은 내분에 빠지는데 크릭서스가 이끄는 켈트족과 골족 세력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머물길 원했으나,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를 넘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는 결국 자신들이 생존할 유일한 방법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로마와 근접한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끊임없이 로마의 정예병에 시달려야 하고 장기전으로 흐를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북쪽을 향해 진군했다. 로마는 이런 반란군의 분열을 이용하여, 남부에 남은 크릭서스의 군대를 박살 내고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를 다시 공격했다. 놀란 스파르타쿠스는 북진을 포기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분열된 세력을 수습하여 전력을 정비했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정예군단을 다시 한 번 격파하여 반란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에 로마는 가장 모략적이고 음험한 정치가 중 한 사람인 크랏수스를 스파르타쿠스의 토벌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크랏수스는 반란군을 이탈리아 남부로 몰아냈고, 방어벽을 세워 장기전으로 반란군을 괴롭혔다. 스파르타쿠스는 시칠리아 섬으로 도주하여 재기를 꾀했지만 해적들에게 속은 덕에 섬으로 건너가지 못 했고, 결국 그는 크랏수스의 포위망을 벗어나 반도의 중부로 진군했다. 뒤를 쫓는 크랏수스의 군대와 조우한 스파르타쿠스는 최후의 전쟁에서 크랏수스를 향해 돌격하였고, 결국 이 돌격이 실패함으로 반란군은 패배했다. 그 뒤 크랏수스는 잔존 반란군을 토벌했으며, 살아남은 반란군 일부는 스파르타쿠스가 행하려 했던 계획인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탈출하려고 도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로마의 모순점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반란을 통해 우리는 로마인과 외부 민족의 차별적인 대우, 자유민과 노예의 차별적인 대우를 유추할 수 있다. 흔히 문명국이라고 생각하면 화려한 외면과 뛰어난 내면적 규율을 떠올리지만, 제국주의 로마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더없이 위대했지만, 내면적인 부분에는 부패가 가득했다. 흔히 공화정 로마는 하층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최대한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았고, 이것이야말로 공화정 로마의 가장 뛰어난 점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자유는 철저하게 로마인에 한정됐다. 타민족과 타도시 출신의 사람들은 로마인 시민이 누리는 정치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노예처럼 착복당했다. 게다가 로마 안에서도 노예 계급은 여전히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수탈당했다. 

 이 당시 공화정 로마제국에 벌어진 사건은 다음과 같다. 1,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 세르토리우스의 이베리아 반도 반란,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의 반란, 그리고 이탈리아 소도시의 동맹시 전쟁,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지중해 연안 해적 창궐. 즉 로마는 화려했지만, 화려한 제국주의를 지탱하면서 발생한 수많은 모순들이 전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은 기득권층의 부패를 상징하는 사건이며,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도 동방 민족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시각으로 인해 일어났다. 로마와 이탈리아 소도시가 싸웠던 동맹시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로마의 무지막지한 갑질을 상징하는 사건이며, 시칠리아 노예 반란은 계급 갈등을 상징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전쟁들은 결국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로마의 반작용에서 비롯한 것이다. 

 반란은 아마추어적일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적인 반란이기 때문에 반란에 어울리는 감성은 냉정이 아니라 열정이다. 반란을 지탱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군중심리고, 이런 군중심리는 결국 열정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아마추어적인 반란군은 늘 의욕에 앞서 로마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는 최대한 로마의 정규군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애초에 급조된 반란군으로 정예화된 로마군과 전면전을 펼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는 몇 번의 전투로 정규군을 이겼지만, 이기면 이길수록 더욱 강력한 상대를 보내서 응수하는 로마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결국 로마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피신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었고, 여의치 않자 시칠리아에서 농성을 하려고 했었다. 반란이라는 것은 주동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수동적인 뉘앙스가 강했다. 그는 로마의 주도적인 군세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집단을 설득하지 못하자 주장을 고집하기보다 군중들의 의견을 따라서 남부로 가는데 동의했다. 그는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지만 이를 자신의 집단에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그의 반란군에서는 의견을 달리한 이탈 등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란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의 사후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를 자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신봉했으며, 로마의 지식인층도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임페라토르(뛰어난 공적을 이룬 장군에게 주는 칭호)에 어울리는 최후라고 하며 칭찬했다. 흔히 우리는 공화정 로마를 매우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카토와 키케로 등등은 자유를 신봉하는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들을 '자유의 수호자'처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역대의 로마 지성인들은 그렇게 평가했으니까.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화정 로마는 매우 부당한 국가다. 자국 로마인들에게는 자유의 국가일지 모르겠으나, 수많은 식민지의 사람들과 노예의 입장에서는 그저 악독한 수탈자에 불과할 뿐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런 부당한 체제를 옹호하는 카토와 같은 인물을 스파르타쿠스는 가장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의 자유는 기득권의 자유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은 제국주의 기득권 체제에 반발한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아닐까?

 비슷한 사례로 중국의 후한 시대에 황건적의 난을 꼽을 수 있다. 흔히 우리는 한나라를 되살리려고 노력했던 제갈량과 같은 인물들을 두고 위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황건적의 난은 그저 하층민이 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해 일어난 폭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토록 악랄하게 수탈한 한나라를 복원하려는 제갈량이야말로 역적이 아닐까? 황건난이 왜 일어났을까? 바로 하층민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극을 달해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황건난과 스파르타쿠스의 전쟁은 결국 봉건주의 시대에서 인간이 외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였던 셈이다. 수탈이 보편화된 고대의 하층민이라고 해서 눈감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지나친 수탈과 억압이 아닌 적당한 수탈에 그쳤더라면 과연 그들이 난을 일으켰을까? 결국 이런 야만적 모순을 가졌던 로마 공화정은 카이사르로 인해 제정 국가로 발돋움한다. 지성인들과 로마 시민의 입장에서는 자유의 몰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노예 그리고 식민지 사람들 입장에서는 체제 전복이 크게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노비이자 패배자였던 스파르타쿠스였기에 현전하는 기록은 매우 미비하다. 그렇기에 책의 대부분은 저자의 유추에 의하여 구성됐다. 그렇기에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조심스럽지만, 책 말미에 참고 자료를 살펴보면 저자가 미비한 기록의 인물을 복원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단점은 저자의 유추로 구성된 내용이지만, 역으로 장점 역시도 저자의 탁월한 추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기록이 미비한 고대사 영역은 현전하는 미비한 기록을 바탕으로 많은 부분을 역사가의 주관적 유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고대사를 다루는 모든 저작에도 해당하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논란이 많은 고조선 역시와 삼국시대 연구를 생각하면 될 듯싶다.) 아무튼 나는 저자의 의견을 흥미롭게 읽었으며, 분석과 유추 역시도 타당한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저자의 다른 고대 전쟁 저작인 《살라미스 해전》과 《트로이 전쟁》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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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7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7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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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중 가장 두툼한 7권은 두툼한 만큼이나 가장 뛰어난 영웅들을 다루고 있다.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영웅 중의 영웅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의 카이사르가 책의 메인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리스의 가장 유명한 명연설가 데모스테네스와 로마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웅변가인 키케로도 나온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조국과 맞설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영웅인 세르토리우스와 에우메네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여섯 인물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과연 인간의 인생에 있어 '성공의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다.

 여섯 인물 중 흔히 속세에서 성공했다고 인정하는 인물은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밖에 없다. 카이사르의 경우 암살로 죽었으므로, 저자인 플루타르코스의 말대로 성공을 장악했지만 누려보지 못했기에 과연 그것이 성공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성공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그는 성공한 인생으로 분류해야 할 듯싶다.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는 뛰어난 연설 능력이 있었지만,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자결과 암살로 죽음을 맞이한다. 세르토리우스와 에우메네스도 군공을 세우고 자신들의 영지에서 실력을 과시했지만, 그리워하던 조국의 군대와 싸움을 계속했으며,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 했다. 결국 그들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는 살아있는 도중 가장 완벽한 성공을 거뒀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반쪽짜리 성공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일까?

  먼저 능력의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여섯 인물은 능력으로 보면 가장 탁월한 인물들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카이사르의 위대함은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며,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도 칼이 아닌 뛰어난 화술에 의지하여 당대의 가장 거대한 적을 상대해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세르토리우스와 에우메네스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다. 세르토리우스는 당대의 명장인 폼페이우스조차 버거워하던 사람이었고, 에우메네스 역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함께 종군했던 장군들과 맞서 호각을 이뤘다. 이렇듯 여섯 인물의 능력은 누가 봐도 출중하다. 여섯 인물이 두루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성공의 성사를 능력에서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여섯 인물이 모두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성공의 조건에는 탁월한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두 번째로 내면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여섯 인물은 모두 품성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의지력이 뛰어났고, 성욕과 식욕, 그리고 쾌락을 멀리했으며, 온갖 생리적인 욕망으로부터 인내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재물에 욕심이 없었으며, 자신의 야망과 희망만을 먹고살았던 이상주의자였다.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지휘를 할 때 스스로 앞장섰으며, 모든 생활에서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군중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런 모습을 재현하는데 있어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행동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재물에 연연하기보다, 재물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부하들과 시민들의 관심을 사는데 적극적이었다. 데모스테네스는 명연설가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가했다. 올바른 교육도 받지 못하고 건강하지도 않은 그였지만,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명연설가로 거듭났다. 키케로는 연설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그 재능을 더 갈고닦았으며, 건강하지 않은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세르토리우스 역시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지 않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불평하지 않으며 부하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사실 이 편에서 가장 품성이 좋은 인물을 꼽자면 세르토리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돈에 관해서도, 여자에 관해서도, 인품에 관해서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장군이었다. 에우메데스도 세르토리우스와 비슷하게 인품과 돈에 있어서 초연한 성격이었다. 이런 내면적인 모습들을 종합해보자면 결국 생리적인 욕망에 절제할 수 있으며, 자신의 결점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품성으로 요약된다. 여섯 인물은 이런 품성을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결국 결론적으로 보자면 여섯 인물은 능력과 품성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그럼 성공한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와 나머지 네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이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정치적인 시각의 유무'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는 전쟁을 할 때에나 정치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기가 막히게 알았다. 그랬기에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일을 우선순위로 하여야 할지, 어떻게 난국을 돌파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아가 처벌해야 할 적이 누구인지, 싸움을 끝내고 나면 누구와 동맹을 맺고 누구를 숙청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했다. 카이사르가 말년에 암살을 당한 이유도 결국, 평생을 유지하던 맹수와도 같은 정치 감각을 느슨하게 하였기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만약 젊은 시절처럼 긴장을 풀지 않았더라면 브루투스의 반역 정도는 쉽게 예상했을 것이다.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는 뛰어난 정치적 안목이 있었지만 그 정치적 안목을 실현하는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문인 특유의 미적지근한 모습으로 기회를 놓치는 모습도 보여줬다. 심지어 키케로는 카이사르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미적지근하였고 살려줬다. 세르토리우스와 에우메네스도 탁월한 능력에 비해 정치적인 시각은 떨어지는 느낌이다. 애초에 두 사람이 정치적인 시각이 뛰어났다면 어쩌면 나라를 떠나 망명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나무와 숲을 두루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각개 전투에서도 승리를 해야겠지만 최종적으로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각개 전투보다 전쟁의 핵심을 가르는 곳에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 쓸데없는 곳에서 승리하더라도 핵심 전투를 놓치게 되면 결국 많이 이겨놓고도 전쟁에 질 수 있다. 초한전쟁에서도 볼 수 있듯, 항우는 매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유방의 결정적인 전략 전술에 말려들어 천하를 놓쳤다. 두 발 전진하기 위해 한 발 후퇴할 수도 있는 것이 전쟁이고 인생이다.

  성공도 마찬가지다. 개별적 능력과 인품이라는 나무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능력과 인품을 똑바로 활용할 수 있는 숲과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이런 지혜가 바로 '정치적 시각 -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결국 성공이라는 것은 나 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그렇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능력과 인품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이해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숱한 경험과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과 역사를 통해서 빚어지는 것이다. 나는 역사를 읽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인간과 집단, 그리고 권력관계에 대한 통찰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높은 성공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더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역사의 사례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7권의 핵심은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세르토리우스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능력도 있고, 인품도 있는 매력 있는 인물이다. 또한 조국 로마를 어쩔 수 없이 등졌지만, 로마에 대한 충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이런 모습은 아테네의 악동인 알키비아데스를 연상한다. 능력이 탁월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부터 추방을 당하지만 끊임없이 조국에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와 세르토리우스의 차이점이라면 알키비아데스는 조국이 자신을 비판하면 참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지조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는 로마의 정규군과 싸우면서도 로마를 걱정했으며 로마에 충성을 다하고자 했다. 비록 정치적으로 대세 군벌들 편이 아니라 배척받는 처지라서 조국과 대치하였지만, 그의 꿈은 그토록 그리던 조국에서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이런 소박한 마음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장군을 적으로 간주한 것은 로마의 패권주의 군벌 세력들이었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이 흔들리고 세력을 가진 군벌들이 독재를 통해 정치를 농단하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는 결국 이런 군벌 세력의 피해자였고, 살기 위해 칼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비참한 운명, 암살당하는 그의 최후가 매우 안타까웠다. 다른 영웅들처럼 야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라 소박한 인물이었기에 더더욱 안타까웠다. 그가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정말 위대한 장군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세르토리우스의 전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 결국 인간의 성공을 결정짓는 요소에는 '운'이라는 부분도 간과할 수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성공을 꿈꾸지만, 이토록 획득하기 어려운 것 또한 성공이다. 게다가 성공을 얻는 것도 힘들지만 유지하는 것 역시도 매우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다. 카이사르는 성공을 얻었지만 성공을 유지하지 못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성공을 하였지만 성공 이후 과도한 음주로 인해 자신의 명을 단축시켰다. 이렇듯 그들의 커다란 성공은 그들의 명을 단축시켰으니, 커다란 성공일수록 이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부자는 삼대를 넘기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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