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2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2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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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2년의 주제는 국방 문제다. 중국 명나라의 상황도 상황이고 후반부에는 조사위의 난이 터졌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군사와 군대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놀랐던 점 하나는 조선 초기 태종의 시대는 국방을 매우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중기 문치주의에 빠진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조선 중기 임진전쟁이 일어나기 전 사림들은 당파에 젖어 국방의 일을 논하지 않았다. 쳐들어오니 안 오니를 가지고 싸우고 물어뜯었다. 태종의 시대는 다르다. 명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지만 혹에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국방을 철저히 하자는 입장이었다. 태종도 그랬고, 이 시대의 신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조선 중기의 신료들처럼 당파싸움에 열을 올려 국가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않았던 것이다. 상호 견제하던 사간원과 사헌부도 군대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을 모아 상소했다. 만약 태종이 조선 중기의 조정을 봤다면 무사 안일주의에 혀를 찼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따르면 군주는 군대에 관해 빠삭하게 알아야 하며, 국방 문제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상대적인 리더십을 주장한 고전 《장단경》에서도 마지막 부분에 병법의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태종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태종은 문치를 숭상하는 성리학을 정치의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국방과 군사 일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봉건시대 군주의 권력은 칼끝에서 나왔다. 군사가 있어야,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군사가 있어야 백성을 외세로부터 지킬 수 있다. 두 번의 왕자의 난의 성공, 그리고 조사위난의 제압도 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군대는 봉건시대에 정권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럼 오늘날의 군대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오늘날 권력은 칼끝이 아닌 시민들의 민주적인 결정에서 나온다. 그럼 군대는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다. 군대는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고, 우리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진정한 자유와 안위는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해야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국방은 늘 중요하다. 

 재위 2년의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다. 이는 '조사위의 난'으로 터져버렸다. 태종과 태상왕의 갈등을 보면서 나는 나와 아버지의 갈등을 떠올렸다. 밝히기 부끄럽지만 나도 거의 10년간 아버지와 반목해왔다. 물론 아버지가 잘못한 점이 명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태도도 잘 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늘 자랑스러운 분이셨었다. 공부도 잘 하셨고,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학교에 학과를 나오셨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뤄낸 꽃이라 더더욱 귀감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기로 우리 부자는 틀어졌다. 존경한 만큼 실망도 컸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그랬다. 부자 간에 평행선을 달렸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내 태도도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먼저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아버지도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기나긴 반목을 끝낸 것이다. 그 결과 우리 부자는 더없이 돈독해졌다.

 태종은 태상왕에게 매번 무시를 당했다. 무시를 당해도 공경을 계속했다. 그러다 태상왕이 조금이라도 인정해주면 날아갈 것 같이 기뻐했다. 조사위의 난이 끝나고 개경으로 온 태상왕에게 태종은 매일같이 문안을 갔다. 공경을 다 하고, 지금까지의 갈등을 풀어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한 행위가 가식인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부자가 반목했지만, 태종은 늘 노력했다. 아버지의 진노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무시당하더라도 아버지를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태종만큼 효도에 힘쓴 왕도 드물 것이다. 실록의 기록은 이를 증명한다. 물론 그도 답답했을 것이다. 세자의 자리는 원래 내 것인데, 왜 아무런 공도 없는 동생이 올라야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끝까지 강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심을 죽이고 아버지와 화해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나는 나의 오만했던 지난날이 더더욱 부끄러웠다.  

 주말, 책을 다 읽고 아버지께 전화했다. '시장에서 국수 한 그릇 먹어요.' 아버지는 흔쾌히 나왔다. 우리는 국수를 먹으며 좋았던 추억만을 회고했다. 나는 아버지의 큰 손을 조용히 잡았다. 어린 시절 나를 데리고 전국의 명산을 기행 시켜준 아버지, 공부를 가르쳐 준 아버지,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밤늦게라도 나가셔서 사 왔던 아버지...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늘 나를 생각하고 계셨다. 아마 이는 나와 대립했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걱정한다. 의가 틀어지고 사이가 안 좋더라도, 자식이 늘 눈에 밟히는 법이다. 공자도 《논어》에서 그러지 않았는가? 부모는 늘 자식의 안위만을 걱정한다고 태상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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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백작 2020-08-2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읽고 더많이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