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4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4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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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4년 차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거이 부자 숙청 사건과 한양 도읍 이전 결정이다. 태종은 한양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정도전의 주도로 선택된 수도였고,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장소라 꺼림칙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 왕조가 도읍했던 개경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지만 이것 역시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전 왕조의 수도였던 곳에 새 왕조의 도읍을 두는 것도 사실 마음에 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로운 도읍은 피를 너무 봐서 싫고, 기존의 도읍은 전 왕조가 몰락한 곳이라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하륜은 무악 즉 지금의 신촌 일대로 도읍을 옮길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도읍을 바꾸는 것은 나라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도읍을 바꾼다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정치적인 판을 새롭게 갈아엎겠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기존의 세력들은 연고가 있고 기득권이 많은 현재의 수도를 고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태종은 이런 신료들의 속내를 훤히 읽고 도읍을 옮기기로 결심한다. 그럼 선택지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 무악이냐 한양이냐. 눈치 빠른 신료들은 태종의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하륜의 의견에 동조하며 무악으로 옮길 것을 주장한다. 태종 역시도 무악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도읍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

한양이 불가하다는 이유 중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물이었다. 한양 땅에는 큰 수로가 없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됐기 때문이다. 풍수를 볼 때, 물과 산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산보다도 물의 형세가 더 중요하다는 내용도 실록에 있었다. 여기까지 책을 읽어보면 누가 뭐래도 도읍은 '무악'이겠구나 싶다. 무악은 물에 대한 문제도 없으며 뒤에는 안산이 위치하고 있으니 진산으로 삼기에도 무방하다. 거기다 한양 땅은 태종에게 있어 불쾌한 기억밖에 없는 데다,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하륜이 그토록 무악을 청하지 않는가? 이쯤 되면 태종이 못 이기는 척 무악으로 도읍을 결정할 법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태상왕 이성계의 반응이다. 태상왕은 태종에게 한양 천도의 당위성을 간접적으로 설파하고, 한양으로 갈 것을 완곡하게 부탁한다. 효자인 태종은 이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어쨌든 한양은 자기는 싫어도, 조선 왕조의 입장으로 살피면 국가가 시작된 장소였으니, 한양이 가지는 정치적 상징성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이쯤 되면 머리 좋은 태종이라도 소위 '결정장애'가 올 수밖에 없다. 복잡한 상황에서 태종은 엉뚱한 것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동전 던지기를 통해 도읍을 정하는 것이다. 개경과 무악 그리고 한양을 두고 동전 던지기를 해서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온 것에 '군말 없이'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신료들에게도 명분이 서고, 은근히 한양을 기대하는 아버지 이성계에게도 변명할 구색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유구한 수도 한양은 그렇게 태종의 동전 던지기로 결정된 수도다. 태상왕은 이에 매우 기뻐하였다. 태종은 결과를 수용하면서도 하륜의 눈치가 보였는지, '무악 일대에는 훗날 도읍이 될 땅이다.'라고 위로해준다. 그래서일까, 오늘날의 신촌 일대는 젊은 대학생들의 도읍(?)이 됐다.

한양으로 도읍을 결정했으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앞서 말한 수로가 없는 점과 경복궁에 대한 부분이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태종은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해결한다.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을 만들어, 동궐과 서궐 양궐 체계를 갖춘 것. 그리고 청계천 공사를 통해 인공 수로를 만든 것이다. 한양 주변에 자연적인 수로가 없다면 인공적인 수로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 태종은 이를 주장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인공수로 청계천인 것이다. 청계천 공사는 태종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로 인해 조선 말기까지 한양 백성들은 물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니, 태종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업적이다. 결정을 했으면 가타부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결정에 뒤따르는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해결하는 것. 그렇게 하여 문제 되는 일을 조속히 해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태종식 정치 스타일이다. 한양 도읍 선택과 수로에 관련한 문제, 그리고 청계천 공사는 이러한 태종의 강단 있는 정치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서울과 같은 도시는 사실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큰 강이 흐르며, 산세가 도심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는 도시. 다른 나라의 궁궐은 도심 외부에 위치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의 궁궐은 도심의 노른자에 위치하고 있다. 그만큼 한양의 위치는 탁월하다. 이러한 한양을 수도로 선택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고민과, 인문적 토론을 거쳐왔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서울이라는 도시는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서울은 조선시대의 한양에서 비롯한 것이니, 새삼 한양을 도읍으로 세운 태종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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