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5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5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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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 봉의 《군중심리》는 심리학 책이지만,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이 책을 히틀러가 애독하여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겠는가. 르 봉은 이 책에서 지도자는 군중을 이끌 수 있는 신념과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두 태종이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태종은 정치적으로 민생안정이라는 목표를 왕권 강화로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의 신념은 왕권 강화였으며, 그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위엄을 세웠던 군주였다. 또한 르 봉은 지도자란 논리와 이성적인 측면보다 과장과 감정적인 측면으로 군중을 사로잡는다 했는데, 태종 역시 마찬가지다. 태종은 노회한 다수의 기득권 신료들을 제압하는데 있어, 이성과 논리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성적인 측면으로 신료들을 설득하고 굴복시켰지만, 때로는 터무니없는 말장난이나, 우격다짐과 같은, 감정적인 측면에 호소하여 신료들을 움직였었다. 흔히 책상물림이나 서생들은 지도자는 늘 지성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이것은 그 시대 유학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러한 이성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을 섞어서 신료들을 다뤄왔다. 사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사람의 진심을 이끌어내는 것에는 이성적인 측면보다 감성적인 측면으로 호소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르 봉은  《군중심리》에서 이를 강조했고, 태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재위 5년에서 돋보이는 태종의 모습은 바로 이성과 감성의 변덕이다. 여러 상소문 중 형벌이나 범죄, 그리고 토지제도와, 군사에 대한 글을 볼 때 그의 두뇌는 한없이 이성적으로 바뀌었다. 복잡한 탄핵 사건을 보면 문서 그대로를 믿기보다, 자신이 풀어놓은 정보통과 비교하여 치밀하게 분석한 뒤, 결과가 관련 기관의 내용과 상이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정확한 보고를 요망한다. 더불어 국경과 관련된 일에도 그는 이성을 유지한다. 여진을 두고 소리 없이 명과 싸울 때, 그는 시시각각으로 다른 국제정세를 이성적으로 분석하며, 명과의 외교전에 임한다. 우리는 늘 조선시대를 사대의 나라, 명에게 찍 소리도 못 낸 조공국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시대는 몰라도, 태종의 시대에는 여진의 통치권을 두고 명과 소리 없는 외교전을 팽팽하게 펼쳤다. 물론 이 결과는 물자와 영토가 빵빵하고 국제적으로도 위엄이 있는 명이 이겼지만, 어쨌든 조선은 쉽게 여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태종이라는 군주는 명을 무조건적으로 받들지도 않았고, 나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여 명과 맞선 셈이다. 이러한 태종의 북진정책을 이어받아, 세종 대에는 여진을 개척해 국토를 넓혀 현재의 국경을 유지하게 됐다. 아마 태종 시대에 명의 황제가 영락제가 아니었다면, 태종 대에 여진의 통제권을 확보하고 국경을 북쪽으로 더 넓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듯 태종은 국가 중요 사안과 국방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럼 그가 감성적으로 변할 때는 언제였나.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2월이다. 태종은 궁 밖으로 나갈 때마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사냥을 했던 군주다. 사냥을 접할 때에는 거의 탐닉하다시피 집중했는데, 이전할 한양 수도를 둘러본다는 핑계로 2월 한 달을 사냥에 매진한다. 그의 사냥에 대한 열정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의 감성은 여가를 즐길 때만 보인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민생을 걱정할 때에도 나타나는데, 가뭄으로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며 그는 한없이 감정적으로 변했다. 오죽했으면 한 계절이 끝나도록 조회를 보지 않아서 대간들이 소를 올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예민하게 신경 썼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가뭄도 심하고 덮친 격으로 재해까지 심했던 한 해였다. 그래서 태종은 지방에 구휼을 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다 했다. 그뿐 아니라, 매년 여름만 되면 옥에 있는 죄수들이 더위에 피해를 입을까봐 석방하거나 신경을 쓰라는 내용이 많은데, 이런 부분으로 미뤄봐도 그가 아주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감정적인 모습은 종친들과 공신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을 과도하게 감싸주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모습에서 완벽해 보이는 그도 결점이 있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렇듯 태종은 이성과 감성, 냉정과 열정을 야누스처럼 넘나들며, 통치했던 군주였다. 차가울 때에는 그 누구보다 차가웠으며, 뜨거울 때에는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 이성과 감성에 충실했던 태종은, 어떨 때 이성적이어야 하는지, 어떨 때 감성적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간혹 어리석은 지도자를 보면 이성적이어야 할 때 감성적으로 대응하고, 감성에 호소해야 할 때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지도자의 결점인데, 태종은 그렇지 않다. 물론 그 역시도 이성과 감성을 잘 못 적용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있어서는 이성과 감성을 적절하게 컨트롤하였다. 그래서 태종은 일을 잘 아는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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