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4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4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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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4년 차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거이 부자 숙청 사건과 한양 도읍 이전 결정이다. 태종은 한양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정도전의 주도로 선택된 수도였고,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장소라 꺼림칙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 왕조가 도읍했던 개경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지만 이것 역시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전 왕조의 수도였던 곳에 새 왕조의 도읍을 두는 것도 사실 마음에 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로운 도읍은 피를 너무 봐서 싫고, 기존의 도읍은 전 왕조가 몰락한 곳이라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하륜은 무악 즉 지금의 신촌 일대로 도읍을 옮길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도읍을 바꾸는 것은 나라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도읍을 바꾼다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정치적인 판을 새롭게 갈아엎겠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기존의 세력들은 연고가 있고 기득권이 많은 현재의 수도를 고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태종은 이런 신료들의 속내를 훤히 읽고 도읍을 옮기기로 결심한다. 그럼 선택지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 무악이냐 한양이냐. 눈치 빠른 신료들은 태종의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하륜의 의견에 동조하며 무악으로 옮길 것을 주장한다. 태종 역시도 무악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도읍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

한양이 불가하다는 이유 중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물이었다. 한양 땅에는 큰 수로가 없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됐기 때문이다. 풍수를 볼 때, 물과 산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산보다도 물의 형세가 더 중요하다는 내용도 실록에 있었다. 여기까지 책을 읽어보면 누가 뭐래도 도읍은 '무악'이겠구나 싶다. 무악은 물에 대한 문제도 없으며 뒤에는 안산이 위치하고 있으니 진산으로 삼기에도 무방하다. 거기다 한양 땅은 태종에게 있어 불쾌한 기억밖에 없는 데다,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하륜이 그토록 무악을 청하지 않는가? 이쯤 되면 태종이 못 이기는 척 무악으로 도읍을 결정할 법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태상왕 이성계의 반응이다. 태상왕은 태종에게 한양 천도의 당위성을 간접적으로 설파하고, 한양으로 갈 것을 완곡하게 부탁한다. 효자인 태종은 이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어쨌든 한양은 자기는 싫어도, 조선 왕조의 입장으로 살피면 국가가 시작된 장소였으니, 한양이 가지는 정치적 상징성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이쯤 되면 머리 좋은 태종이라도 소위 '결정장애'가 올 수밖에 없다. 복잡한 상황에서 태종은 엉뚱한 것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동전 던지기를 통해 도읍을 정하는 것이다. 개경과 무악 그리고 한양을 두고 동전 던지기를 해서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온 것에 '군말 없이'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신료들에게도 명분이 서고, 은근히 한양을 기대하는 아버지 이성계에게도 변명할 구색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유구한 수도 한양은 그렇게 태종의 동전 던지기로 결정된 수도다. 태상왕은 이에 매우 기뻐하였다. 태종은 결과를 수용하면서도 하륜의 눈치가 보였는지, '무악 일대에는 훗날 도읍이 될 땅이다.'라고 위로해준다. 그래서일까, 오늘날의 신촌 일대는 젊은 대학생들의 도읍(?)이 됐다.

한양으로 도읍을 결정했으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앞서 말한 수로가 없는 점과 경복궁에 대한 부분이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태종은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해결한다.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을 만들어, 동궐과 서궐 양궐 체계를 갖춘 것. 그리고 청계천 공사를 통해 인공 수로를 만든 것이다. 한양 주변에 자연적인 수로가 없다면 인공적인 수로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 태종은 이를 주장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인공수로 청계천인 것이다. 청계천 공사는 태종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로 인해 조선 말기까지 한양 백성들은 물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니, 태종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업적이다. 결정을 했으면 가타부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결정에 뒤따르는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해결하는 것. 그렇게 하여 문제 되는 일을 조속히 해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태종식 정치 스타일이다. 한양 도읍 선택과 수로에 관련한 문제, 그리고 청계천 공사는 이러한 태종의 강단 있는 정치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서울과 같은 도시는 사실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큰 강이 흐르며, 산세가 도심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는 도시. 다른 나라의 궁궐은 도심 외부에 위치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의 궁궐은 도심의 노른자에 위치하고 있다. 그만큼 한양의 위치는 탁월하다. 이러한 한양을 수도로 선택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고민과, 인문적 토론을 거쳐왔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서울이라는 도시는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서울은 조선시대의 한양에서 비롯한 것이니, 새삼 한양을 도읍으로 세운 태종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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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3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3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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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3년 차가 되자 태종의 정권도 서서히 안정됐다. 3년 차에 들어서자 기본적인 조선의 골격은 모두 정비했다. 문관과 무관을 정비했고 중앙과 지방행정을 대략적으로 정비했다. 대외적으로는 새롭게 들어선 명나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인증도 받았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풀었다. 따라서 태종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했다. 재위 1년 차와 2년 차에서는 공신들을 처벌하지 않았는데, 재위 3년 차 중반이 되자 슬슬 공신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태종은 지금까지 공신들이 저질러놨던 비행들을 빠트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이것들은 터질 운명이었다.

 재위 3년까지 살펴본 바, '태종의 정치 스타일'을 대충 알 것 같았다. 앞서 고찰했듯 태종은 여러 가지 일을 복합적으로 처리하기보다, 지금 처리할 수 있는 일부터 집중하여 처리했다. 재위 1년에 중앙정부의 관직과 문반들을 정비했고, 재위 2년에 무관직과 국방에 관한 부분을 정비했다. 재위 3년에는 지방행정을 손봤다. 재위 1년에는 사관들과 주로 싸웠다. 재위 2년과 3년에는 대간들(언관)과 피 터지게 싸웠다. 싸움의 이유는 바로 왕권이었다. 성리학적 시스템의 국가는 근본적으로 신권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태종은 이러한 제도를 순순히 용납하지 않았고, 그러한 행동이 바로 대간들과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왕권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대간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쓸데없는 것으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주로 정치적 판단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간들과 싸웠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이 있더라도, 대간들을 최대한 배려해 주려고 나름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대간들은 태종에게 억눌리긴 했지만 자신들의 의견을 꼿꼿하게 주장했다. 사실 태종이 바람직하게 생각한 체제는 이런 것 같다. 사간원과 사헌부 그리고 의정부가 서로 상호 견제를 통하여 견제하는 것, 사간원과 사헌부는 의정부의 집정 대신과 공신들의 비리를 밝히고, 의정부의 정승들은 사간원과 사헌부의 권한이 너무 강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삼권분립처럼 권력 기관 간의 상호 견제를 추구하였던 것 같다. 중요한 점은 그 상호 견제에서 왕은 비교적 자유롭고 초월적인 권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태종의 입장이다. 태종은 군주 중심의 막강한 권력을 추구했지만, 그 권력을 최대한 공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눈길이 갔던 부분은 바로 조운선 34척 침몰 사건이다. 이는 오늘날의 세월호 사건과 비슷하다. 태종은 이 급보를 받자마자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책망했고, 인명피해가 얼마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후속 조치를 논의했는데, 하륜과 사적으로 고민을 나눴으며, 대신들을 불러서 경상도의 세금을 어떻게 운반할 것인지를 깊이 있게 토론했다. 그리고 그런 토의 결과, 경상도의 조운을 폐지하고 육상으로 운송할 것을 명했다. 이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한 셈이다. 재위 3년 말에 경상도에서 육상 운송이 힘들다고 조운으로 바꿔달라 주청이 왔는데, 태종은 불허했다. 여전히 태종은 조운선 침몰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태종이 오늘날 세월호 사건을 봤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구할 수 있었던 인명들을 그렇게 보내버린 정부의 조치를 보고 분명 혀를 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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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2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2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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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2년의 주제는 국방 문제다. 중국 명나라의 상황도 상황이고 후반부에는 조사위의 난이 터졌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군사와 군대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놀랐던 점 하나는 조선 초기 태종의 시대는 국방을 매우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중기 문치주의에 빠진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조선 중기 임진전쟁이 일어나기 전 사림들은 당파에 젖어 국방의 일을 논하지 않았다. 쳐들어오니 안 오니를 가지고 싸우고 물어뜯었다. 태종의 시대는 다르다. 명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지만 혹에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국방을 철저히 하자는 입장이었다. 태종도 그랬고, 이 시대의 신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조선 중기의 신료들처럼 당파싸움에 열을 올려 국가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않았던 것이다. 상호 견제하던 사간원과 사헌부도 군대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을 모아 상소했다. 만약 태종이 조선 중기의 조정을 봤다면 무사 안일주의에 혀를 찼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따르면 군주는 군대에 관해 빠삭하게 알아야 하며, 국방 문제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상대적인 리더십을 주장한 고전 《장단경》에서도 마지막 부분에 병법의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태종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태종은 문치를 숭상하는 성리학을 정치의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국방과 군사 일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봉건시대 군주의 권력은 칼끝에서 나왔다. 군사가 있어야,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군사가 있어야 백성을 외세로부터 지킬 수 있다. 두 번의 왕자의 난의 성공, 그리고 조사위난의 제압도 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군대는 봉건시대에 정권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럼 오늘날의 군대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오늘날 권력은 칼끝이 아닌 시민들의 민주적인 결정에서 나온다. 그럼 군대는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다. 군대는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고, 우리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진정한 자유와 안위는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해야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국방은 늘 중요하다. 

 재위 2년의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다. 이는 '조사위의 난'으로 터져버렸다. 태종과 태상왕의 갈등을 보면서 나는 나와 아버지의 갈등을 떠올렸다. 밝히기 부끄럽지만 나도 거의 10년간 아버지와 반목해왔다. 물론 아버지가 잘못한 점이 명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태도도 잘 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늘 자랑스러운 분이셨었다. 공부도 잘 하셨고,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학교에 학과를 나오셨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뤄낸 꽃이라 더더욱 귀감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기로 우리 부자는 틀어졌다. 존경한 만큼 실망도 컸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그랬다. 부자 간에 평행선을 달렸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내 태도도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먼저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아버지도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기나긴 반목을 끝낸 것이다. 그 결과 우리 부자는 더없이 돈독해졌다.

 태종은 태상왕에게 매번 무시를 당했다. 무시를 당해도 공경을 계속했다. 그러다 태상왕이 조금이라도 인정해주면 날아갈 것 같이 기뻐했다. 조사위의 난이 끝나고 개경으로 온 태상왕에게 태종은 매일같이 문안을 갔다. 공경을 다 하고, 지금까지의 갈등을 풀어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한 행위가 가식인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부자가 반목했지만, 태종은 늘 노력했다. 아버지의 진노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무시당하더라도 아버지를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태종만큼 효도에 힘쓴 왕도 드물 것이다. 실록의 기록은 이를 증명한다. 물론 그도 답답했을 것이다. 세자의 자리는 원래 내 것인데, 왜 아무런 공도 없는 동생이 올라야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끝까지 강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심을 죽이고 아버지와 화해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나는 나의 오만했던 지난날이 더더욱 부끄러웠다.  

 주말, 책을 다 읽고 아버지께 전화했다. '시장에서 국수 한 그릇 먹어요.' 아버지는 흔쾌히 나왔다. 우리는 국수를 먹으며 좋았던 추억만을 회고했다. 나는 아버지의 큰 손을 조용히 잡았다. 어린 시절 나를 데리고 전국의 명산을 기행 시켜준 아버지, 공부를 가르쳐 준 아버지,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밤늦게라도 나가셔서 사 왔던 아버지...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늘 나를 생각하고 계셨다. 아마 이는 나와 대립했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걱정한다. 의가 틀어지고 사이가 안 좋더라도, 자식이 늘 눈에 밟히는 법이다. 공자도 《논어》에서 그러지 않았는가? 부모는 늘 자식의 안위만을 걱정한다고 태상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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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백작 2020-08-2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읽고 더많이 배웁니다~!^^
 
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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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태종을 생각할 때, 태종의 잠저 시절(왕이 되기 전)을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집권 시절 태종의 모습은 대강 이해하고, 잠저 시절의 왕자의 난만을 크게 부각한다. 그래서일까 두 번의 왕자의 난은 태종 이방원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태종이라는 인물을 고찰하려면, 잠저 시절도 중요하지만, 집권 시절의 모습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특히 그런 집권 시절의 첫 단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재위 1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재위 1년 때 태종은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정권을 잡았다고 막 나가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즉위는 정통성을 확보하지도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마이웨이를 갔다간 자신을 도와줬던 공신들이 언제 배신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태종의 모습은 《한비자》의 21편 <유로>에서 초 장왕의 이야기를 연상한다. 초나라 장왕은 즉위한 지 3년이 되도록 명령을 내린 적도, 정무를 처리한 적도 없었다. 우사마가 곁에 모시고 왕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새 한 마리가 남쪽 언덕에 멈추어서는 3년 동안 날갯짓도 하지 않고 날지도 않으며 울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있습니다 이 새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장왕은 이렇게 답했다. '3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비상하기 위함이요, 날지 않고 울지도 않은 것은 백성을 살피려는 것이요, 지금은 비록 날지 않아도 한번 날면 반드시 하늘을 가를 것이며 비록 울지 않아도 한 번 울면 반드시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오. 그대는 그만두시오. 나는 이것을 알고 있소.' 반년이 지난 뒤 왕은 정사를 돌봤고, 나라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병사를 일으켜 전쟁에서 승리했고, 천하의 패자가 됐다. 이로 인해 이런 말이 나왔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음성은 잘 들리지 않는다.'

태종의 재위 1년도 이와 같다. 폭풍전야처럼 고요하지만, 그렇다고 태종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공신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수집하고 있었다. 비록 이때에는 크게 공신들과 다툼이 없었고 침착했지만 군주의 세를 신하가 범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태종이 《한비자》가 주장하는 법, 술, 세에 관한 현실 정치론을 몸소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

태종의 정치는 보편적으로 유학을 추구했다. 하지만 태종은 유학적인 내용으로만 정치를 해석하지 않았다. 재위 1년 동안 그가 주로 본 책은 《대학연의》다. 《대학연의》는 유학의 제왕학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리공담으로만 구성된 책은 아니다. 《대학연의》를 이루는 두 가지는 역사와 철학이다. 유학 철학은 이상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역사는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내가 생각해봤을 때 태종은 《대학연의》를 이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철저하게 현실적으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대학연의》에서는 외척에 의해 나라가 전복되는 사례를 두루 고찰하여 '제가의 요체'에 담아 놨었다. 태종은 분명 이를 주목했을 것이다. 그리고 재위 1년 실록에서는 외척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권세를 등에 업고 방자하다는 내용이 1월 1일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태종의 생각을 의미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결국 태종이 훗날 외척을 배척하게 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태종이 성급하게 처리했던 변남룡 부자의 사형 에피소드도 《정관정요》 권 8 민생론에 나오는 '장온고 사건'을 연상한다. 《정관정요》에 따르면 당 태종 이세민은 장온고를 성급하게 사형한 뒤 후회하며, 사형을 처리할 때 다섯 차례에 걸쳐 거듭 심리하고 결과를 보고하게 했다. 태종의 사례도 거의 비슷하다. 변남룡 부자를 성급하게 죽인 태종은 언관의 상소를 받는데 상소의 내용은 사형을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태종은 깊이 있게 반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태종은 매사에 신중에 신중을 가하며 국사를 이끌어갔다.
 
결과적으로 재위 1년의 태종은 자신의 힘을 주기적으로 과시하며 신하들을 억누르는 폭군의 이미지가 아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신중에 신중을 가하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내가 생각해 볼 때, 이때의 태종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과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기에는 태종이 풀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명과의 대외 외교, 시국의 안정, 새로운 정치 구상, 공신들 파악, 아버지와의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 등등 이러한 일을 한꺼번에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지 않고 침착하게 국정에 임한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 드라마 '용의 눈물'을 봤다. 재위를 이어받은 태종은 상왕인 정종에게도, 태상왕인 태조에게도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 유동근 특유의 울림 화법은 태종을 강경하게 묘사하는데 큰 일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드라마의 허구였다. 앞서 고찰했듯 실제 재위 1년의 태종은 이렇게 '막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신중하고 공경을 다해 태상왕과 상왕을 모셨다. 태상왕에게 무시를 당해도, 그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오늘날 태종의 폭군 이미지는 드라마 '용의 눈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역사를 최대한 반영했다는 정통 사극도 역사적 왜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을 제대로 고찰하려면 내려오는 역사적 문헌을 진지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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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에 가장 가까운 탈무드
마이클 카츠.거숀 슈워츠 지음, 주원규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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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모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꼽으라면 《탈무드》다. 흔히 알려져 있듯 《탈무드》는 스토리텔링 우화 중심의 구성을 가졌기에 나이와 상관없이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당시 내가 읽던 책은 마빈 토케이어가 편집하여 정리한 책인데, 당시에 유행했던 마빈 토케이어의 편집본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탈무드》를 대표하는 책으로 꼽는다. 국내의 유대인 관련 저서, 탈무드 관련 저서는 직간접적으로 마빈 토케이어의 편집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케이어의 편집본은 우화 중심의 책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나이가 들고 성인이 되면서 나는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탈무드》의 완역본을 읽고 싶었다. 그러나 검색 이후 방대한 양의 분량을 보고서는, '언젠가는' 국내에서 완역이 이뤄지길 기도하면서, 《탈무드》에 대한 관심을 마음 한편으로 넣어뒀다.

다시 《탈무드》와 만나게 된 건 최근이다. 바로 리뷰하는 책인 《원전에 가장 가까운 탈무드》를 통해서인데,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풍문으로 들었던 《탈무드》에 대한 지식을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유대인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알 수 있었다. 책은 마빈 토케이어의 《탈무드》와 전혀 다른 구성이었다. 토케이어의 책이 흥미 위주의 우화로 구성됐다면, 이 책은 비록 축약본이긴 하지만 원전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서 내용을 전개하고 있었다. 책의 앞부분에는 50여 쪽을 할애하여, 《탈무드》라는 고전에 대한 예비지식(어떻게 학습해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유대인들에게 《탈무드》란 어떤 책인지, 《탈무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놀랐던 점은 우리는 흔히 《탈무드》를 유대인의 고전과 경전으로 생각하는데, 실제 《탈무드》는 경전과 같은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탈무드》는 시대를 거듭할수록 진화하며, 새로운 시각, 새로운 해석으로 권위 있게 내려오는 해석들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고전과 경전의 특징은 고정된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고전에 기록된 글은 성현이 한 말이기에 감히 의심을 품어서는 안되며, 후학들은 그저 성현의 말을 최대한 수용하는 쪽으로 텍스트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 《탈무드》는 달랐다. 물론 《탈무드》에도 권위 있는 주류의 시각이 존재하긴 했지만, 세대를 거듭하며 생기는 주석은 이런 주류의 시각을 곱게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렇기에 《탈무드》는 고정적이기보다 개방되고 열린 텍스트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이어져온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위대한 사상과 경전은 거창한 무엇이나 형이상학적인 부분에서 탐구를 시작한다. 그러나 《탈무드》는 거창한 것에서 논의를 진행하지 않고, 일상의 관습이나 풍습에서 시작한다. 요즘 흔히 말하는 소확행, 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한 철학인데, 이런 점도 나에게 참 와닿았다. 철학자들의 지적 사유나 고전의 사상을 따라가다 보면 물론 흥미 있고 재미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감이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는데, 《탈무드》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소확행을 추구했다고 해서 《탈무드》가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탈무드》의 내용은 매우 함축적이며, 수많은 지시대명사가 난무하고, 문체는 은유와 비유가 난무한다. 거기에 우리와 익숙하지 않은 배경에서 태어난 문헌이라는 점도 수월한 접근을 방해한다.

《탈무드》의 탄생은 성서로부터 시작됐다. 성서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미드라시가 생겨났고, 이러한 미드라시를 분류별로 정리한 것이 미슈나다. 미슈나는 축약적이고 함축적이라 이를 다시 구체화하면서 게마라가 등장했는데, 《탈무드》는 미슈나와 게마라를 통칭하는 것이다. 즉 《탈무드》는 성서의 의미를 현실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그렇기에 다른 철학이나 고전보다 더욱 현실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탈무드》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바로 율법, 정법 등등의 규범적인 부분으로 대표되는 할라카와 구전되는 이야기,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는 아가다로 나뉜다. 국내에 대세를 이루고 있던 토케이어 《탈무드》는 아가다에만 집중했다. 그렇기에 토케이어의 《탈무드》는 결국 반쪽짜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토케이어의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으며, 토케이어의 자의적인 견해로 편집한 우화가 많다고 한다. 토케이어는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탈무드》를 알리려고 노력했다는데, 그런 배경 때문인지 그의 저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토케이어의 《탈무드》는 이야기가 중심으로 전개된다. 마치 유대판 《이솝 우화》를 보는 느낌이다. 물론 《탈무드》의 구성에서 우화는 커다란 의미를 가지지만 우화 자체가 《탈무드》의 전부는 아니다. 《원전에 가장 가까운 탈무드》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어떻게 《탈무드》라는 텍스트를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점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왜 이 우화가 등장한 것일까. 이 우화의 궁극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과연 이 우화는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유효하지 않다면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가? 등등... 즉 《탈무드》 공부의 핵심은 '생각'에 있음을 강조한다. 우화 텍스트를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함축된 우화를 두고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지를 강조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핍박받은 유대인들은 현실에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나라를 되찾고 전 세계의 부를 거머쥐었다. 우리는 단차원적으로 유대인을 분석하여, 그들의 창의성을 쫓으려고 노력하지만, 이런 가벼운 태도는 견강부회라고 생각한다. 유대인의 힘은 그들의 정신에서 나온다. 유대인의 정신. 그것은 곧 그들의 지적인 정수라 할 수 있는 《탈무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대인을 좀 더 깊이 있게 알기 위해서는 《탈무드》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유대인의 교육법이나 유대인의 부를 이야기하는 서적은 많지만 유대인의 정신을 깊이 있게 탐구한 저작은 드물다. 심지어 출판계를 지배하고 있는 《탈무드》 역시도 올바르지 않는 책이 대부분이니, 이런 환경에서 유대인의 본질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 책의 발간은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책은 강조한다. 《탈무드》에 기록된 텍스트보다 사고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유대인들은 이런 사고력과 지적 전통을 유구한 시간을 거쳐 계승했고, 그랬기에 오늘날의 민족적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자식을 위해 유대인 교육법을 고민하는 부모라면 유대인 교육을 어설프게 논설하는 책을 읽기보다 이 책을 자녀와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책은 미국에서 출간됐는데 두 명의 랍비가 공동으로 집필한 《탈무드》 안내서다. 원저의 제목은 'SWIMMING IN THE SEA OF TALMUD'인데, 유대인들은 흔히 《탈무드》를 바다에 비유한다고 한다. 그만큼 《탈무드》는 깊고 풍성하며,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책은 방대한 《탈무드》를 원전의 체계에 맞게, 그리고 랍비들이 교육법을 고스란히 수용하여 내용을 전개한다. 책은 《탈무드》의 원전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원전의 내용과 흡사한 현대의 사례를 제시하여 과거의 규범과 오늘날의 현실을 비교하여 독자의 사고를 유도한다. 물론 이런 현대의 사례는 전적으로 저자들의 주관적 관점이므로, 이를 넘어 나만의 사례, 내가 생각한 사례와 함께 엮어 생각한다면 더욱 폭넓은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장점으로 인해 이 책은 모범적인 《탈무드》 입문서로, 서구권에서 널리 읽힌다고 한다.

500페이지 가량의 책에 유대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탈무드》를 모두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책을 통해 《탈무드》의 전체적인 윤곽, 그리고 《탈무드》가 가지고 있는 느낌 등등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책을 단숨에 읽어나갔다. 그러나 속독을 하면서 깨달았다. 이 책은 속독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천천히 시간의 여유를 두고, 음미하며, 사색하며 읽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 천천히 책을 음미하며 랍비들의 방식대로 다시 읽을 생각이다.

국내에 《탈무드》가 하루빨리 완역이 됐으면 좋겠다. 과거 나는 《리비우스 로마사》, 《대학연의》, 《자치통감》, 《탈무드》 4권의 고전이 완역됐으면 좋겠다는 글을 썼는데, 이 중 《탈무드》 외에는 모두 완역됐거나 완역이 확정됐다. 물론 《탈무드》는 방대한 양이라서 이를 한국어로 완역하려면 굉장한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늙어서 죽기 전에는 완역본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볼 수 있기를 막연하게 희망해본다. 아무튼 그전까지 완역의 아쉬움을 이 책으로 달래야겠다. 또한 이 책의 발간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간직했던 때묻은 토케이어의 《탈무드》를 마음 놓고 버릴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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