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9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9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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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권의 핵심은 바로 붕당 견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태종은 이해에 군권에 집착하고, 양위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지만 이런 사건들은 결국 '신료들의 사사로운 붕당을 견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흔히 태종의 2차 양위 소동을 민씨 형제들의 처벌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 행위라고 해석하는데, 내가 읽어봤을 때 이해의 태종은 민씨 형제를 넘어서, 신료들의 붕당 자체를 근절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주된 표적은 민씨 붕당이었지만, 그와 함께 이숙번의 당여들에게도 경고를 날린 점을 살펴보면, 애초에 태종의 2차 양위는 신권의 붕당 자체를 근절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권은 유독 '정치 9단 태종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민씨 붕당을 꾀어내어 잡아들여 처벌하는 모습도 그렇고, 벼르고 벼르던 기회주의자 이무를 단칼에 죽인 모습도 인상적이다. 태종의 은밀한 '처벌 가이드라인'을 확인한 대간은 민씨에 붙었던 역당들을 굴비 두릅처럼 엮어서 모두 역모로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 재미있는 것은 태종의 반응이다. 언관들을 유도하여 민씨 일당에 붙었던 인물들을 대거 재판장으로 끌어낸 태종이지만, 처벌에 있어서만큼은 굉장히 미온적으로 반응했다. 언관들은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사형으로 다스릴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태종은 주모자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이번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했다. 중요한 것은 붕당을 이룬 중심세력일 뿐이지, 부화뇌동하며 붙은 잔챙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한 셈이다.

  사실 《태종실록》을 읽다 보면 태종은 공신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편이다. 같은 죄를 지어도 공신의 자제들은 쉽게 용서해주고, 솜방망이 처벌을 했던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기에, 이무와 같은 공신이 민씨 일당으로 거론됐을 때에도 조정 신료들은 습관적으로 사형을 주장했지만 속으로는 '공신이니까, 용서해주겠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무와 친했던 하륜도 이무를 두둔하며 살려줄 것을 주장했는데, 그런 하륜에게 태종은 '너도 행실 똑바로 해, 너도 역모로 다스릴  수 있는 여지가 많아.'라고 일갈하며, 이무를 사형시켜 버렸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번 사건은 보통 때와는 반대로 거물급 공신을 죽이고, 잔챙이들을 살려준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태종은 왜 공신 중에 공신인 이무를 죽였던 것일까.

  실록에서 태종은 이무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즉 무인년 방석과 방번, 정도전 일당을 죽일 때, 정도전 쪽과 자신의 쪽을 저울질하며, 붙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즉 이중적인 행동으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행동을 보였던 셈인데,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에도 이무는 민씨 일가들을 주살할 것을 권하면서 뒤로는 귀양간 민씨 일가들의 편의를 봐주고, 민씨 일가들이 죄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이것 외에도 분경 문제, 인사 청탁 문제 등등의 소소한 잘못이 있었지만, 결국 이무가 주살된 주요 원인은 기회주의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태종은 이무를 공신으로 대우하고 굉장히 예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무는 민씨 일가의 붕당에 협조하여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미래 권력인 세자에게 아부했으니 태종의 입장에서는 화가 났던 것이다.

  이무는 태종이 죽인 최초의 고위 공신이었다. 이무의 처결로 인해 태종은 공신들에게, '아무리 공신이더라도 선을 넘고, 왕권을 넘보는 자가 있다면, 신분을 막론하고 베어버릴 것이다.'라며 강력한 경고를 날렸다. 지금까지는 공신에 관대했던 태종이지만, 아무리 공신이더라도 사적인 붕당을 이룬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을 이무의 죽음을 통해 대외에 선포했다. 흥미로운 점은 민씨 당여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태종이 이숙번의 당여들에게도 일갈했다는 점이다. 또한 태종이 양위를 선언하며 신료들을 꺼릴 무렵, 이숙번과의 독대 과정에서 태종이 은퇴를 이야기하자 이숙번은 '50살에 이르러 은퇴를 해도 늦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태종은 그럴듯하게 여기고 정사에 복귀한다. 여기서 이숙번의 대화는 관점에 따라서 신하의 입장에서 군주의 은거 시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역모에 해당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태종은 그런 이숙번에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훗날 이숙번은 정치적으로 실각하는데, 그때가 바로 태종의 나이가 50살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아마 태종은 이때의 이숙번의 발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태종이 공신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나는 광해군의 역모 사건이 떠올랐다. 광해군과 태종은 권력에 대한 정통성이 결여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서자 출신의 광해군보다 태종의 정통성이 높긴 하다만, 장자가 아니라는 점,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점 때문에 두 군주의 정통성은 취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태종과 광해군은 결여된 정통성을 극복하기 위해 왕권 강화를 주도했다. 그런 왕권 강화에서 신권의 숙청은 필연적이다. 다만 신권을 제압하는 과정은 공통적이지만 방법은 매우 상이했는데, 태종의 경우 붕당을 이룬 주모자를 처벌하고, 붕당의 주변인들은 살려줘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 반면, 광해군은 주모자와 주변인 모두를 처벌했으며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건을 확대하여 쓸데없는 희생을 불렀다. 결국 이런 무리한 광해의 숙청은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결국 신료들의 반정으로 이어졌다. 만약 광해가 태종의 숙청을 참고하여, 희생을 최소화하고 상대의 붕당을 포용하는 인사정책을 펼쳤다면,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태종은 신권 숙청을 하였지만, 내부적 반발이 거의 없었으며, 특히 이번 민씨 형제들과 이무 숙청을 계기로 강력한 통치체제를 완성했으니, 신권 숙청의 방법론, 그리고 결과로 살펴볼 때 광해의 정치력은 극단적이고 미숙한 반면 태종의 정치력은 노회하고 안정적이다. 아무튼 태종은 이번 사건을 통하여 더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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