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인의 영문법 - 영어의 격格을 한 단계 높이는 책!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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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영어의 중요성은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세계화 시대, 정보화시대에서 영어는 범국제적 공용어의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다면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불편함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그렇기에 영어에 대한 교육법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영어는 초등학교 때부터 정규교육으로 배우기 시작하여, 대학교 진학 전까지 필수과목으로 배운다. 대학을 결정하는 수능시험에서도 영어는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초등 6년, 중고등 6년 동안 중요 과목으로 영어를 배운다면 외국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능숙하게 다뤄야 하는 게 당연한데, 실제로 정규 교과 과정만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어학의 습득은 실상의 활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학교교육에서 강조하는 영어는 철저하게 시험용 독해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대한민국 학생들은 단어를 많이 알고, 지엽적인 문법 지식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지식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요즘 일각에서는 이런 시험용 영어의 원인을 '문법' 교육에서 찾고 문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생각해봐라,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 복잡한 문법을 알고 배웠나? 아니지 않냐? 언어는 소통이 중요한데, 그렇기에 너무나도 디테일한 문법 공부는 지양해야 바람직하다." 일리는 있는 말이다. 실제로 어린아이가 모국어를 배울 때에는, 모국어의 복잡한 문법 규칙을 배우면서 언어를 깨우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엄마와 아빠와의 소통을 통하여 모국어를 '본능적'으로 배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요즘 해외여행은 굉장히 보편화됐는데, 과거와는 다르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외국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정확하지 않더라도 중요한 명사나 동사를 이야기하며 손짓 발짓을 섞는 소위 서바이벌 잉글리시를 구사하더라도, 혹은 문법과 상이한 문장을 이야기하더라도 상대방은 얼추 알아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문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조금 오버한 것 같다. 물론 언어는 소통과 활용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영어를 실생활에서 꾸준하게 활용한단 말인가? 한국어가 통용되는 한국에서 영어를 모국어처럼 활용하려면, 적어도 영어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자주 주기적으로 소통해야 하는데, 과연 이런 환경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물론 펜팔이나 채팅 등을 활용하면 된다고 하지만, 펜팔 역시 주고받는 데에 시간이 걸리며, 결정적으로 펜팔이나 채팅 등도 말이 아닌 문자 중심의 소통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상류층 자제들은 영어를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영어를 활용하며 습득하는 반면, 그런 환경을 조성할 수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시험용 언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실적인 부분을 떠나 다른 이유를 거론해보자면 언어를 습득하는 데 있어 문법이 필요 없다 할지라도, 정확한 언어 구사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문법 지식을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 시험에서 보여줬던 '문법을 위한 문법 지식을 묻는 지엽적인 문제'들 때문에 공부해야 할 문법의 범위가 쓸데없이 많아지는 것은 지양해야겠지만, 최소한의 문법 지식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정확한 소통을 나눌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문법 지식은 단어와 마찬가지로 그 범위가 매우 좁은 편이다. 고등학교 때 우리는 영단어를 미치도록 공부하는데, 사실 영미 문화권에서 일상생활에 쓰는 영단어는 최대 맥시멈으로 잡아 봐야 1000개 이하다. 즉 중학교 수준의 영단어만 알더라도, 영어 문화권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다. 마찬가지로 문법 역시 '진짜 소통을 위해 필요한 문법'은 범위가 매우 좁은 편이다. 외국인인 한국인의 입장에서, 과연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문법 지식 없이 생으로 영어를 정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시험용 영문법 책이 아닌,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영문법의 범주를 충족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내용이 조금 어렵다고 이야기하는데, 실제 이 책에서 다뤄지는 영문법 수준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저학년 수준이라 보는데 무리가 없다. 영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에서 나오는 문법 지식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영어를 어느 정도 공부했고, 취업을 위해 토익이나 토플, 시험용 영어를 공부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어려운 수준은 아니다. 예문도 평이하고 예문에 나오는 단어도 쉬운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책에서는 영문법에 배경을 설명하기 위하여 거론되는 수많은 언어들, 예를 들어보자면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등의 다양한 언어 지식들을 동원하여 설명하는데, 이런 다양한 언어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저자의 해박한 언어 설명을 읽으면서, 과연 이런 설명이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번역한 중국 고전들을 애독해왔는데, 얼마 전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이탈리아 저본을 바탕으로 번역했다 하여 의외의 눈으로 저자를 바라봤다. 중국 고전을 주로 번역하는 사람이 이탈리어 원어의 《군주론》이라니!! 합리적으로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아가 최근에 다양한 언어학적 지식이 담긴 본서를 펴냈는데, 과연 저자가 《군주론》 원전을 번역할 만한 실력이 있는가를 의심하며 이 책을 읽었다.

 

확실히 책에서 저자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 문법을 영문법과 비교하여, 영문법만의 특징을 고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지식은 해박한 것 같지만, 과연 저자의 분석이 타당한 것인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영어를 제외하고 이 책에 언급된 수많은 언어들에 대한 지식이 나에겐 없기에, 솔직히 저자의 분석이 맞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언어 덕후들이라면 흥미를 가지고 저자의 논의를 분석하겠지만, 비전공자인데다 언어학적 지식에 대한 열의가 짧은 나에게는 간단한 문법 규칙을 설명하는데 너무 범위를 넓혀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끝으로 책 말미에는 저자의 기상천외한 논리가 나온다. 바로 '콩글리시'를 국제적으로 널리 퍼트려서 미국 뉘앙스 중심의 '아멩글리시'를 몰아내자는 대목이 나오는데, 모두가 콩글리시를 부정하고 아멩글리시 위주의 발음을 흉내 낼 때, 저자는 역으로 콩글리시를 적극 활용하여,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자고 주장한다. 하긴 생각해보면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인 입장에서 미국 중심의 아멩글리시는 방언처럼 느낄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방언과도 같은 미국식 영어가 본토의 영어를 몰아내고 국제어로 자리 잡은 이유는 바로 '국력의 차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콩글리시가 아멩글리시를 몰아내려면 '적어도' 한국이 지금보다는 훨씬 강대국이 되고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미국에 대한 의존을 끊어내야 하는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저자의 취지는 알겠지만, 다소 앞서간 생각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 덕분에 상상해봤다. 만약 콩글리시가 발전하고 이를 토대로 진화하여, 영어의 어순이 한국어와 같이 주어 - 목적어 - 동사의 구조가 된다면 훨씬 매력적인 언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라틴어 계열 언어 중에서 영어가 숱한 사촌 언어들을 제치고 국제어로 발돋음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영국과 미국의 강성함이 주요한 원인이지만, 영어라는 언어 자체의 탄력성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영어는 다른 라틴어 계열에서 나온 언어들에 비해 훨씬 간략하고, 문법 규칙도 간소화됐다. 그런 영어니 만약 훗날 한국어의 장점을 흡수하여 진화한다면... 상상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 아 물론 영어가 한국어의 문법을 대폭 수용하여 진화한 콩글리시가 탄생한다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할 수 있는 '한글'을 따라오진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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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 - 신권과 붕당이 요동치던 조선의 쇠퇴기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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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이 왕권이 강했던 조선 전반부를 조망했다면 이번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는 사림의 당파 정치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조선 중후반부를 다룬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 다루는 지도자는 '임진전쟁'으로 유명한 선조부터 순종까지인데, 이 시기는 대체적으로 조선 전반부에 비해 왕권이 약했다. 왕권이 약해지게 된 원인은 사림의 진출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본격적으로 사림이 정계에 등장하게 된 시기는 조선 전기 성종 대에서 시작됐다. 당시 성종은 훈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사림을 적극 고용하여 세력 균형을 도모하였는데, 성종 대에는 두 세력 간의 균형이 유지됐지만, 연산군의 무리한 왕권 강화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선 조정에서 신권 세력은 왕권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 뒤 사화가 있음에도 사림은 굴하지 않고 훈구 세력을 공격하여, 결국 선조 시기에는 집권 여당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때부터 신권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선조는 조선 시대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군왕인데, 그의 시기에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고 당파 정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며, 이런 신권의 우위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왕권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남는다. 왜 선조 시기에 왕권은 크게 무너진 것일까. 첫 번째로 선조의 출신이다. 선조는 알다시피 방계 혈통으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군주였다. 전근대 특히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강한 조선에서 특히나 사회의 최고 지도층인 왕실에서는 혈통을 굉장히 중시할 수밖에 없는데, 적통이 아닌 방계로 왕위를 이었으니 이는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신권을 강화할 수 있는 최적의 빌미였다. 두 번째로 대외적인 국난을 들 수 있다. 일본과 싸운 임진전쟁과 정유전쟁에서 선조가 보여줬던 무능한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왕권을 실추하기에 충분했다.

 

선조 이후로도 조선 왕실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무너지는 명나라와 흥하는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자처하며 실리적인 행보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 코드인사를 감행했던 점,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였던 점, 무리한 왕권 강화를 가시화하기 위해 궁궐 사업에 열중한 점 등등의 아쉬운 행보를 보여 결국 인조와 서인에 의해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대중들에게 있어 연산군과 다르게 광해군은 명군으로 인식하는 시각이 많은데, 이런 재평가의 계기는 영화 '광해'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광해군을 새롭게 해석한 저서들도 종종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저서는 한명기의 《광해군》이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도 광해군을 대체적으로 현명한 군주로 평가하는데, 개인적으로 광해군은 외치에 있어서는 현실적이고 탁월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지만, 내부 정치에 있어서는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 지도자인 것 같다.

 

인조는 만년 야당인 서인들과 함께 광해를 타도하며 일어섰지만, 그의 정부는 신정부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아마추어적인 행정력, 오락가락하는 정책, 현실에 맞지 않는 사안들, 거기에 자신의 권력욕을 지키기 위한 치졸한 모습, 병자전쟁과 정묘전쟁에서 보여준 대책 없는 모습 등등... 이런 사건들은 하나둘씩 왕권을 약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인조 사후 효종과 현종은 송시열을 필두로 한 거대 서인 세력과 타협하며 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신권이 우위에 있는 조선 조정의 흐름을 끊은 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희빈으로 유명한 숙종이다.

 

숙종은 여당 서인과 야당 남인을 사이에 두고 극단적인 환국을 도모하여 실추된 왕권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강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감행한 환국은 여당과 야당을 더욱 감정적으로 갈라놓았는데, 그렇기에 그의 후대인 영조와 정조는 극단적으로 갈러진 신권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탕평을 강조하였다. 숙종 사후 영조와 정조의 시기는 조선 중흥의 시기로 손꼽는다. 그러나 이 시기도 근본적으로 성리학 사상 내에서 국가 발전을 도모하다 보니, 근대로 격변하는 시대적 흐름을 쫓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영조와 정조는 죽음이 다가오자 후계자에 대한 지나친 걱정 때문에 노론 중에서도 외척 세력을 지나치게 의존했다. 이런 결과 정조 이후의 군주들은 외척이 중심이 된 세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순조 이후 주목할 만한 왕은 고종인데,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는 현재 학계에서 고종에 대한 해석이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고종은 시기적으로 조선이 망하기 직전의 지도자라 망국의 이미지 때문에 비난하는 시선이 대부분이지만 사학자들 가운데에서는 고종의 정치력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에서는 비난과 호평을 절충하여,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고종이 세간으로부터 욕을 먹는 이유는 고종 특유의 우유부단함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인 능력을 떠나 민주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쫓아가지 못한 부분이 가장 크지 않나 생각한다.

 

아무쪼록 선조 대에 시작해서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지배한 세력은 사대부로 대표할 수 있는 신권 세력과 특정 세도 가문이다. 이들은 시대에 따라 사림,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등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당파의 이익을 위해 다른 당과 싸우기도 하였고, 때로는 왕권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책에서 나온 신권정치를 개인적으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눠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집권 여당에 대해서인데, 여기에는 조선 초기 여당이라 할 수 있는 훈구, 숙종 시대까지 여당을 유지한 서인 집단, 영정조 시기에 우위를 점한 노론이 대표적이다. 이들 집권 여당의 장점은 야당에 비해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랬기에 권력 유지에 있어서는 탁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들의 단점은 부정부패인데, 이는 고인 물이 썩는다는 속담이 있듯 만년 집권의 대표적인 폐해였다. 이런 부정부패에는 인사권을 동원하여 자기세력 사람들을 대거 등용하는 모습, 뇌물, 청탁 등등이 있다.

 

반면 야당 측을 살펴보자면, 야당을 대표할 수 있는 세력은 조선 초기 성종 대에서 명종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사림세력(넓게 포함하자면 선조 시기의 사림 세력도 포함된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비주류 서인 세력, 숙종 시기까지 만년 야당을 담당한 남인 세력, 영정조 시기에 활동한 남인과 소론이 대표적이다. 이들 야당 정권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집권 여당의 부정부패를 감지하고 이로 인해 거대한 집권 여당을 공격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점이다. 군주들은 이런 야당을 통해 여당의 독점을 견제하고자 적극 노력했으며, 때로는 야당과 여당을 모두 품으며 탕평을 외치기도 하였다. 그럼 이런 야당의 가장 큰 단점은 무엇일까? 대체적으로 말만 앞서고 행동에 있어서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를 꼽아보자면 조선 초기 훈구 대신들의 비리를 공격한 사림들인데,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보다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외쳤지만 정작 그들이 여당이 되었을 때에는 당파 싸움으로 분열되어 조정이 사분오열로 찢어졌다. 인조반정을 이룬 서인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서인들은 광해군의 북인 코드인사 때문에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로 인해 인조와 함께 반정을 일으켜 여당이 되었지만, 정작 그들이 권세를 잡고 보여준 행정력은 그들이 비판한 광해군 때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마찬가지로 숙종 시기에도 만년 야당의 무능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숙종은 기사환국을 통해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을 여당으로 세웠다. 그러나 집권 여당이 되어 보여준 남인들의 모습은 서인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에 실망한 숙종은 갑술환국을 감행하여 실각한 여당인 서인을 다시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신권의 여당과 야당의 모습은 사실 오늘날 정치에 있어서 여당과 야당의 모습과 비슷하다. 대체로 여당은 현실감각이 있으나, 현실 안주와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여 문제고, 야당은 의지는 있으나 그 의지를 실행하는 방법이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성이 결여됐으며, 결과적으로 행정에 있어서 서투른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그렇기에 왕조 국가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신권에 양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는데, 저자인 신동준 역시 기본적으로 왕조 국가에서는 왕의 권력이 강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지도자 개인의 지도력을 극도로 강조하는 사상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왜 그럴까? 일제 치하 이후 우리는 군부독재 시절을 겪었다. 이 시기는 국가적으로 볼 때에 외형적인 발전은 분명 있었지만, 시민들의 자유는 굉장히 제약적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시민들은 오늘날 독재를 연상하는 사상 등에 있어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시스템은 사실 위험한 제도다. 인간은 부정부패와 타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막대한 권력을 가지게 됐을 때 그 권력을 사유화하여 사용한 지도자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수두룩했다. 우리가 독재를 생각하면 독재자가 자기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연상하는데 이 역시 독재 시스템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그러나 이런 독재 시스템도 장점은 분명 있다. 독재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명령 체계가 일원화되어 있기에 비상시나 난세에서는 빛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화정이 발달한 고대 로마에서도, 전쟁 등의 국난이 다가오면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명령 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독재관'을 임명하는 제도가 있는데, 독재관은 동양의 왕과 대등할 정도의 권력을 가졌다. 물론 로마의 독재관은 자신의 임무가 끝나면 바로 사임을 하였기에, 특정 개인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누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유화할 가능성은 없었다.

 

조선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왕에게 권력을 몰아준 독재 왕조 체제였다. 그럼 단지 왕이 뛰어난 정치력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가지기만 한다면 성군이 되는 것일까? 아니다. 바람직한 독재자는 막대한 권력을 획득한 뒤, 그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공적으로 사용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조선 왕조의 군왕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교육받는 '제왕학' 역시 바꿔 표현해보자면 '바람직한 독재 권력'에 대한 공부였다. 조선왕조에서 독재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인물을 대표적으로 꼽아보자면 세종이다. 세종은 태종이 강화한 막강한 왕권을 이어받아, 권력을 백성들을 위해 최대한 사용했다. 이런 세종과 같은 독재자는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케이스며, 그렇기에 우리는 조선하면 세종을 떠올리고, 여전히 세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결국 바람직한 독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에 있어 권력의 주도권을 가져야 하며,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 인간이란 존재는 막대한 힘과 이익 앞에서 탐욕을 이겨내기 힘든 존재이기에 독재 시스템은 일말의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유화할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민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아무튼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의 성격을 정리해보자면, 첫 번째로 권력구도를 통한 해석, 두 번째로 현실주의적인 시각, 세 번째로 최고지도자 중심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저자의 해석은 사람에 따라 호불호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지만, 방대한 실록을 압축하여 적절하게 단권화한 부분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조선 지도자들의 업적을 살펴보며 오늘날 우리의 사회 지도층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시중에 실록과 조선사에 대한 얄팍한 저서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이 시리즈는 나름 내용에도 충실하고 깊이가 있으며, 역사학계의 최신 동향과 논의 등등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기에 역사에 대해 초보자를 비롯하여, 지식이 있는 사람들도 생각을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오래간만에 묵직한 책을 통하여 조선사의 흥망을 깊이 있게 조망하니 한편으로는 후련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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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 평전 - 문무겸전의 전략가
백상태.장석규 지음 / 주류성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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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생소한 이름이다. 학창 시절에 조선사를 공부할 때에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조선의 두 전란과 깊은 관계가 있고, 무너진 조선을 세우려고 하는데 최선을 다한 인물이란다. 광해군의 실리적인 외교 정책도 그의 영향이었다고 하며,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도 그가 주축이 되어 제압했다고 한다. 공로만 봐서는 굉장히 뛰어나고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정작 한국사에서 그의 존재는 개미만큼 미약하다. 그의 이름은 '장만'이라고 한다.

 

장만은 조선 중기,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활약한 재상이며 장군이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전쟁, 그리고 여진과의 전쟁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도 쿠데타에 의한 정권 교체가 있던 혼란한 시기였다.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남한산성에 가서 성곽을 종주하는 습관이 있는데, 성곽을 돌 때마다 명분론에 젖었던 조선 중기 후기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남한산성은 명분에 휩쌓인 조선에게 국제적으로 치욕을 안겨준 상징적인 장소였다. 조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사대부들의 나라, 선비의 나라, 문치가 중심이 된 나라 등등이 일반적으로 떠오른다. 옆에 나라인 일본은 칼의 나라라면 조선은 붓의 나라였다. 그러나 본디 국가는 문무 어느 한쪽에 치우칠 경우 폐단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일본의 막부정권은 극도로 무를 숭상한 결과 무모한 침략전쟁을 일으켜, 자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전체에 막심한 피해를 가져왔다. 조선의 경우 문치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태평성대에 젖어 국방을 소홀히 하고, 명분에 휩쌓인 성리학적 관념만을 종교적으로 추종하는 사태에 이르러, 화를 자초했다. 일본과 7년 동안 싸운 전쟁, 그리고 정묘년과 병자년에 청나라와 싸운 전쟁은 이웃 나라의 야욕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자국 안보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조선에게서 일차적으로 원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더 큰 문제는 두 번의 전란을 거치면서도 조선 지식인층의 인식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조 정권 이후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며, 명분에 젖은 성리학을 파고드는데 더욱 열중한다. 이런 답답한 흐름을 바라보며, 과연 조선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철학자들이 없는 것일까, 조선의 실리주의자는 없었던 것일까. 붓으로 필화를 자랑하는 선비들이 아닌, 현실에 문제점을 적극 개선하고자 노력한 실천 중심의 인물은 없었던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조선의 현실주의자를 찾는 과정에서 나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굴욕적인 화평으로 해결하고자 주장했던 주화파의 우두머리이자 현실주의자인 최명길에 주목했다. 그리고 최명길을 파면서 만나게 된 인물이 바로 최명길의 장인인 '장만'이었다.

 

체 게바라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마음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키우자.'라고, 장만은 체 게바라의 명언과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조선의 리얼리스트였으며, 불가능한 꿈인 조선의 부강을 꿈꾸며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조정에 남아있던 성리학에 경도되어 말과 붓으로 정치를 한 사대부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장만은 동아시아 나라들이 세력 교체로 불안한 시기, 조선의 국방을 책임졌다. 선조 정권 대에는 중앙에서 문관직을 역임했고, 나아가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 행정 관련 업무를 관장했다. 전란이 종결된 후 장만은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여진과의 충돌을 막는데 최선을 다했고, 발흥하는 여진의 세력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끼며, 만주 일대의 지도를 만드는 등, 방비에 최선을 다했다.

 

광해군이 집권을 시작하자 장만은 광해군에게 여진의 강성함을 경고하며, 전란이 일어날 시, 명과 여진의 상황을 보며 중립외교를 펼쳐야 할 것을 주장했다. 외교적으로 실리적인 입장을 보여줬던 광해군은 아마 장만의 주장을 직간접적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장만은 조총부대를 훈련시키고, 북방 방어 전선을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광해군의 내부적인 폭정이 높아지고, 서인들을 주축으로 한 인조반정의 싹이 트기 시작할 때 군권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던 장만은 사위인 최명길에게 '예전의 군주에 대한 은혜 때문에 전면에 나서진 못하겠지만, 너희가 백성을 구하고자 한다면 정변을 묵과하겠다.'라고 말하며 실질적으로 반정을 묵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려 '나라가 흩어지고 나면 누구와 정치를 논하겠냐.'라고 외치며 광해군이 정신을 차리고 내치에 더욱 힘쓸 것을 강조했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와 서인 정권은 광해군 정권 때 활약하던 인물들을 대거 숙청했지만, 당시 조선의 국방을 논할 때 장만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여전히 장만을 중용했다. 장만은 신정부를 위해 현실적인 성격의 상소를 올렸지만, 인조와 서인정권은 여전히 명분론에 젖어 있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인조는 도망가고 장만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안산에서 이괄의 군대를 격파한다. 그는 이 싸움 도중 한쪽 눈이 실명했는데, 이는 오랜 야전 생활 때문이었다. 그 뒤 장만은 북방 경계를 위하 안주에 방어진을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이귀는 의주를 고집했다. 결국 인조는 안주와 의주 사이에 있는 구성에 주둔지를 세운다. 인조와 이귀는 군대와 백성에게 명망이 높은 장만을 경계하고 시기하였는데, 이괄의 난과 같은 무신 반란이 언제 또다시 일어날지 몰라서, 군벌 세력들의 군사 훈련을 일부로 저지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의 국방력은 크게 약화되는데, 이는 결국 정묘년과 병자년에 청의 군대 앞에 무기력하게 당한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 정치에 현실성 없는 판단에 실망한 장만은 사직서를 무려 7번이나 올렸는데 매번 거절당했다. 정묘전쟁이 터지고, 인조 조정은 또다시 장만에 기대를 거는데, 장만은 약화된 조선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화친론이 대두되고 결국 청나라와 형과 아우의 맹약을 맺은 조건으로 조선은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대신들은 장만을 두고 탄핵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렇게 벼슬에서 물러나 살다가, 조정에 복귀한 뒤, 노쇠함 때문에 다시 벼슬을 물렸다. 이후 장만은 자택에서 죽었는데, 그의 실리주의적인 사상은 사위 최명길과 부하 장군 정충신 등이 이어나갔다.

 

이렇듯 장만은 당시 명분론에 휩쌓인 성리학자들이 탁상공론을 하던 조정에서 문관직과 무관직, 그리고 지방직과, 중앙직을 두루 경험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국방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세종대왕 때 개척한 4군을 점령한 여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국토를 회복했으며, 이괄의 난을 제압하여 무너지는 조정을 다시금 바로 세웠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정세를 바라봤고, 이런 그의 사상은 당대 주류의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마인드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장만은 조선의 리얼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고, 명분론에 휩쌓인 나라에서, 현실주의적인 대안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으니, 그의 이런 노력은 가히 불가능한 꿈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현실주의자 장만 장군이 왜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사상사의 흐름 때문이다. 알다시피 조선은 망국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적 사고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흐름이 이어졌으니, 조선 시대의 위인 자리는 성리학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긴 위인들의 차지였고 현실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장만이나 최명길 등등은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만 갔다. 그래서 나 역시 장만의 삶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다. 이런 인물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이를 통해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명분론에 휩쌓인 인물들이 가득했다는 나의 편견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장만의 삶을 읽으면서 느낀 사실은 능력이 뛰어나고 탁월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난다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고로 영웅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시기를 잘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장만의 삶 역시 그렇다. 만약 장만이 명분론을 강조하는 환경이 아닌 실용을 추구하는 환경에서 활약하였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적어도 장만의 실용주의 정책을 지지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났더라면, 어쩌면 정묘전쟁에서 조선군이 그토록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조선의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인조 정권은 북방 정책에 있어서 잔뼈가 굵은 데다 현장에서 활동한 장만의 의견과, 글만 읽고 군사일에 관해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백면서생 이귀의 의견을 두고 고민하다 결국 절충하는 방안을 채택했는데, 이는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다.

 

국방과 전쟁은 백성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사안이다. 왕조 국가는 자국의 신민들에게 일반적으로 무거운 세금을 거둔다. 그럼 백성의 피땀을 거둬들이면서 국가는 백성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까? 무엇보다도 신민들에게 최소한의 안정된 생활권을 보장해야만 했다. 이런 최소한의 생활권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바로 '안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세금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내는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삶을 국가가 지켜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민주 사회이든 왕조 사회이든 근본적으로 피지배층이 세금을 내는 원인은 '삶의 안정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렇듯 전쟁은 이토록 중요한 백성의 안위를 두고 싸우는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현실 경험과 감각에 뛰어난 전문가의 의견을 주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조선은 반대로 성리학적 이념에 젖은 그리고 당대의 권세가였던 문인의 의견과 전쟁에 있어 잔뼈가 굵은 장군의 의견을 절충하는 센스를 보여준다. 이런 상황을 보며 사람이 능력을 펼치고 뜻을 이루는 데에는 환경적인 조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국내 평전을 읽을 때 주의하는 점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 인물의 평전 중 일부는 문중의 위인을 의도적으로 드높이고자, 편찬한 평전이 있는데, 이런 책을 읽을 때에는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런 부류의 평전들은 대체적으로 다루는 인물이 자신의 선대의 어른이다 보니, 공을 너무 부풀리고 나쁜 점은 언급하지 않는 편파적인 기록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도 이런 부분에서 엄밀하게 살펴보자면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이 책은 장만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장만의 먼 후손이 주축이 되어 저술된 평전이다. 그래서 장만에 대한 호평이 가득한데, 책에 나온 대로만 평가하자면, 장면은 문무를 겸비하고, 신분제가 엄격한 조선 사회에서 차별 없이 사람을 대했다고 하니 인품도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장만이란 인물이 뛰어난 인물이지만 잊힌 영웅이이게 이를 대중들에게 크게 조망하고자 장점을 강조한 점은 백번 이해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더라도 단점은 있기 마련인데, 책에서는 장만의 아쉬운 부분, 그리고 단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다. 장점과 더불어 단점을 객관화하여 언급했더라면, 장만 장군이 오히려 더 인간적인 인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책을 통하여 장만이라는 거대한 인물을 자세히 알게 된 점은 고마웠지만, 책에서 묘사하는 장만의 모습은 입체적이고 인간적이기보다 위인전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물처럼 다가와서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아무튼 사소한 아쉬움이 있는 책이지만, 조선의 리얼리스트를 알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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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 - 강력한 왕권이 살아있던 조선의 전성기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 2019년 3월
평점 :
품절


최근 역사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테마는 바로 조선과 《조선왕조실록》이다. 이런 조선 열풍을 불러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몇몇 가지를 언급해보자면 첫 번째, '역사저널 그날'과 같은 역사 대중매체의 영향, 두 번째 《조선왕조실록》을 재해석하여 출판한 저작물의 유행 등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저작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는데, 이런 실록 출판물 가운데에서 원조를 굳이 꼽아보자면 박영규가 정리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을 단권화하여 한 권으로 축약하였으며, 평이한 서술로 조선 정치사를 정리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지금도 꾸준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활약하고 있다.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필두로, 실록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들이 본격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가장 특기할 만한 대중서는 바로 박시백 화백이 만화로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20권의 전질로 구성됐는데, 글이 아닌 만화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루는 깊이와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돋보였던 수작이었다. 특히 이 책은 성인을 대상으로 만든 책이지만, 만화라는 특성 때문에 청소년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작이다.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역사 교사나 사학자들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때 대중들에게 보편적으로 추천하는 책으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으뜸으로 꼽으니,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춘 명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전질을 몇 차례 완독했는데 조선사를 다룬 책들 중 군계일학으로 꼽아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열풍 이후, 베스트셀러에 오른 실록 도서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이다. 나도 이 책을 사서 완독해봤는데, 이 책의 난이도는 매우 낮은 편으로, 조선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흐름을 잡기에는 유용한 책이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오류, 그리고 너무 쉽게 쓰인 서술, 얕은 깊이 등등의 단점이 있어서, 실록과 관련된 도서 중 가장 별로였다. 그리고 최근 재야 사학자 이덕일도 10권으로 구성된 《조선왕조실록》을 발간하고 있는데, 전작에 비해 '주관적인 해석'의 강도가 낮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앞서나간 해석이 군데군데 있어서 사람에 따라 호불호를 크게 가져오는 것 같다. 나도 개인적으로 읽어봤는데, 전작에 비해서는 균형감각이 있는 서술이 돋보였던 시리즈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전 번역가인 신동준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조선왕조실록》을 최근 펴냈다. 조선사와 실록에 크게 관심을 가진 나였기에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역시 구해서 완독을 해 봤는데 기존의 실록 도서와는 확실히 차별점이 느껴졌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해석에 있다. 나는 신동준이 번역한 고전들을 대부분 읽어봤고, 그렇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권력에 관념이 어떤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우선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의 가장 큰 특징은 복잡한 정치사를 권력의 향방에 따라 단순화하여 해석한다는 점이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은 총 2권으로 나와 있는데, 그는 조선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왕권이 우위였던 전반기, 두 번째 신권이 우위였던 후반기. 기존의 주류 사학자들은 조선의 흐름을 구분할 때 기본적으로 조선 초기 훈구의 시대, 조선 중기 사림의 시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시대, 숙종 이후 노론의 시대, 정조 이후 세도정치 시대로 틀을 잡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대를 구분하는 데 있어 척도가 되는 것이 '집권하는 신권 세력의 성격'이라는 점이다.

 

반면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은 신권을 중심으로 해석한 기존의 조선시대 흐름을 따르지 않고 정치사를 단순화하여, 왕권과 신권 이 두 가지 테마를 가지고 정치사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가 번역한 고전, 그가 번역한 역사서는 유독 권력에 주목하며, 그런 권력의 향방을 주요 테마로 삼아 해석하는 경향이 크다. 그리고 저자의 기본적인 사상은 왕조 국가가 중심이 된 조선에서는 정치의 주체인 왕의 권한이 강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조선 초기 왕권이 강한 시기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한 조선 중기와 후기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은 왕권이 강한 시기를 다루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호평하는 분위기고,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은 신권이 강한 시기를 다루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본 리뷰는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을 다루려고 한다. 1권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바로 세조와 연산군이다. 조선 전기, 전통적으로 왕권을 강화한 지도자를 꼽으라면 세 명이 떠오르는데 태종과 세조, 그리고 연산군이 그 주인공이다. 과거에는 이 세 인물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인식했다. 동생과 아버지 형과 싸우며 옥좌를 차지한 태종, 그것도 모자라 처남까지 죽이는 철면피 태종, 야욕 때문에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 그리고 극단적인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가 몰락을 자초한 연산군... 태종과 세종은 강력한 왕권을 주축으로 하여 반정에 성공했지만, 연산군은 막대한 왕권을 강화하려다 도리어 왕좌에서 내침을 당했다. 이 셋의 집권기는 수많은 피가 흩뿌려졌기에 사람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인식했지만 최근에 들어 태종에 대한 재해석이 일어나고 있다.

 

태종의 재해석은 최근 주류 사학과 재야 사학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데, 신권을 중심으로 조선을 해석하던 주류 사학과 독재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재야 사학이 같은 목소리로 태종을 재평가하고 있으니, 이는 그만큼 태종에 대한 시각도 변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싶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에서도 태종을 명군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태종은 세조와 연산군과 세트로 묶여 비난하기에는 급이 다른 인물이다. 태종이 철혈 살인마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태종은 처벌에 있어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태종은 사람을 아무나 죽이지 않았다. 그는 범범 행위를 저지르는 세력이나 백성들에게 갑질을 시전한 인물들에 한해서 사형을 내렸는데 불행하게도 여기에 처남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종은 처벌을 할 때, 관련자들을 소시지처럼 엮어서 우르르 죽이지 않고, 주모자만 죽여서 희생을 최소화했다. 이렇다보니 태종의 처벌은 후대의 군왕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키고 대규모 살육을 국문의 이름 하에 자행한 것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에서는 세조와 태종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내가 과거에 썼던 글과 거의 흡사했다.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그 왕권을 신료들과 나누지 않고 공정하게 사용했다. 그래서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안정된 조선을 물려줄 수 있었다. 세조 역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공신들을 우대했고, 공신들의 불법 행위를 대부분 묵인했다. 그랬기에 세조 대에는 왕권이 강했지만 세조 사후에는 비대해진 훈구 세력들이 조정을 장악하였고, 이는 후대의 왕인 예종과 성종의 집권기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도 태종과 세조는 정치력의 차이가 확연했다.

 

책에서는 세조를 명군으로 인식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책에서는 이 당시 북방의 정세가 혼란하기에 시대는 강력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세조의 집권을 정당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세조의 조카 단종은 정치에 있어 전면적으로 활약을 한 적이 없었다. 만약 단종이 정치력이 떨어지고 정사를 돌보는 데 있어 방탕한 모습을 보이거나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이는 반정의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단종은 피지 않은 꽃이었다. 물론 반정의 원인은 실권을 장악한 김종서 등이 수양(세조)을 배제한 것에 있었다. 이때 수양의 시각에서는 군주는 어리고, 실권은 신료들에게 있는데, 실권을 쥔 김종서 일당이 공정하게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닌 자기 혈족들과 친족들 위주로 코드인사를 통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를 빌미로 권력구도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렇게 김종서 일파를 쳐냈다면, 자신이 주축이 되어 정치를 주관하며, 조카인 단종이 바로 서기까지 정치를 보필하는 선까지만 갔다면, 수양은 치세의 능신으로 남을 수 있었다. 수양이 주장했던 주나라의 주공처럼, 조카가 성장하여 정치의 일선에 나서기까지 공정하게 정치를 운영한다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의 이름은 후대에 충신으로 꼽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양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야망'에 충실하여, 결국 조카의 자리를 내쫓고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물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정치력은 나쁘지 않았다. 국방정책도 나름 괜찮았고, 행정 제도 정비에도 공적을 남겼으며, 검소했고,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정치력 자체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일탈을 눈감아주고, 그들의 세력을 비호하여, 거대한 공신 세력을 만든 점은 그의 정치에 있어서 커다란 결점이다. 즉 세조는 왕위에 '굳이' 스스로 올랐어야만 했냐는 도덕적인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집권기에 국방을 안정하고 행정을 정비한 공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권 세력의 권신화를 불러온 장본인이니, 정치력에 있어서도 공과가 뚜렷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태종이나 세종과 같은 급인 명군으로 두기에는 무리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연산군은 막대한 왕권 강화를 꾀하다 반정으로 인해 왕좌에서 폐위된 지도자다. 신동준은 연산군을 위해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펴서 연산군을 옹호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번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 연산군 챕터에서도 연산군의 왜곡된 해석에 대해 아쉬워하는 대목아 많다. 사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실록의 기록을 모두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연산군 실록>은 반정 세력인 중종과 그 신하들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기에 자신들의 반정을 정당화하여 기록한 내용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왜곡은 필연적이다. 다만 과연 연산군에게는 죄가 없을까. 조선조에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는 앞에서 살펴본 태종과 세조 그리고 숙종이 있다. 물론 이들 집권기에도 소소한 반역은 있었지만, 연산군 때처럼 대부분의 신료들이 힘을 모아서 반정을 주도한 경우는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권을 누르는 과정에서 연산의 행동이 오버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실록에서는 연산이 신하들을 누르는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저자는 이런 실록의 기록을 믿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실록에서 주장하는 입장 역시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물론 기록하는 이의 주관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그런 주관으로부터 나름의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한 문헌이다. 이런 사관들의 직필 정신이 살아 있었에,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를 대표하는 역사 문헌으로 손꼽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연산군의 기록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기록을 모두 불신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록에 나온 악독한 연산의 행위들을 참고해볼 때, 연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을 너무 일방적으로 탄압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 태종도 왕권을 강화하는 입장이었지만 신권을 대표하는 최고 기구인 의정부를 살려두고, 언론과 숱한 마찰을 빚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언관들의 언로를 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조 역시 왕권을 강화했지만, 공신들과 신료들을 불러 술을 함께 마시며 신권을 위무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아마 연산은 이런 융통적인 행동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아무튼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의 테마인 왕권의 전성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태종과 세조, 연산군을 대표적으로 알아봤는데, 책은 태조에서부터 명종 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내용과 해석을 떠나 이 책의 장점을 또 하나 꼽아보자면 바로 가장 최신의 논쟁들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세종의 치적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는데, 《조선왕조실록》 관련 저서 중 따끈한 신간이라서 그런지 최근에 있었던 역사적인 논쟁이나 해석, 최신 학설 등등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수록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실록을 읽는 데 있어 필요한 지식들도 테마로 정리하고 있으며, 각 왕의 왕릉에 대해서도 챕터 끝에 정리하고 있으니, 분량에 비해 굉장히 알차게 구성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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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수정증보판) - 겸애와 비공을 통해 이상사회를 추구한 사상가, 국내 최초 완역판
묵자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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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을 접할 때 가장 먼저 접하는 철학은 대부분 유가, 유학 철학이다. 유가 철학은 중원 그리고 중원을 넘어 한반도와 일본 베트남 등등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던 철학이었고, 그랬기에 일반적으로 고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철학이 유학과 관련된 철학이다. 중국을 떠나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을 떠올리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유교 사상이니, 그만큼 동아시아 국가에서 유가 그리고 유교 철학은 보편적으로 전통을 상징하는 철학으로 인식됐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동양철학을 처음 접할 때 유교 철학의 저서로 입문했었다.

 

그렇게 유교 철학을 읽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는 유교와 유가 철학이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뒤 제자백가로 알려진 여러 학파들의 저서를 읽으면 다양한 사상의 이론을 접하게 됐다. 다양한 제자백가 사상을 읽으면서 나는 크게 두 가지로 중국의 사상을 분류했는데, 하나는 유가로 대표할 수 있는 이타적인 철학, 또 하나는 법가로 대표할 수 있는 이기주의 철학이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갈래의 철학이 많지만, 난세의 시기에 여러 갈래의 학문이 일어서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론을 고민하면서 다양한 사상들이 태어났고, 그런 사상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후세에 현실적으로 영향을 막대하게 미친 사상은 유가와 법가였기에, 나는 이 두 사상을 바탕으로 제자백가를 이해하려고 했다.

 

유가의 사상을 집중하여 공부하는 과정에서 묵자의 사상을 발견하고 관심을 가졌다. 사실 유가와 묵가는 성격이 비슷하다. 둘 다 이타주의적인 철학을 대표하며, 둘의 철학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그렇기에 흥미를 가지고 《묵자》를 읽었는데 확실히 유가 철학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이 많이 보였다. 게다가 《묵자》를 자세히 읽어보면 유가 철학에서 지향하는 개념들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고 (ex 군자라는 개념), 또 유가 철학에서 경전으로 받드는 《시경》, 《서경》 등등의 경전들을 인용한 흔적도 보인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설에 의하면 《묵자》의 저자인 묵적은 유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 출신이라고 하며 생산 계층인 하층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유가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추측해보자면 묵가의 창시자로 불리는 묵적은 이타주의 철학인 유가를 공부했지만, 유가가 가지고 있는 맹점, 즉 허례허식적인 모습, 그리고 이타를 적용하는 데 있어, 친족과 혈족들로 대표되는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챙기라는 차별적인 이타관을 보고 굉장히 비판적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묵가는 유가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유가 철학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환에서 생겨난 사상이 아닌가 생각하며, 유가와 묵가 두 사상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생각한다. 유가의 철학은 신분에 대한 위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사상의 수요층은 사대부나 지식인층, 즉 기득권 세력을 염두에 두고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묵가는 이런 유가의 이타주의적 철학을 확장하여 지배층을 넘어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유가의 세력과 묵가의 세력은 거의 대동소이했다고 한다. 이 말은 묵가의 철학이 성행했을 당시에는 유가의 철학만큼이나 세가 강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피지배층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묵자》로 살펴볼 수 있는 묵가의 철학은 유가의 철학보다 이타주의적인 성격을 더욱 확장하고 강화하였으며, 유가가 가지고 있던 맹점, 군사적인 부분에 대한 문제점도 나름 극복하고 있다. 유가에서는 지도자가 군대를 움직이기보다 인심을 얻고 덕을 앞세워 적을 교화하라고 권면하는데, 사실 이는 현실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이상적이다. 반면 묵가에서는 침략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을 권고하는 입장이지만 만약 상대가 야욕을 앞장세워 무력으로 나에게 공격을 할 시에는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며, 《묵자》에서도 공성과 방어에 대한 병법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즉 전쟁을 지양하는 점은 유가와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터졌을 시에는 무력으로 자국의 안보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묵자》는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전쟁에 있어서 명분으로 뜬구름을 잡고, 전쟁에 있어서 구체적인 방침을 제시하지 않는 유가의 입장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묵가의 창시자 묵적은 그 자신이 피지배층이었으며, 하층민 출신이었기에, 당대의 피지배층이 겪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묵가의 철학은 유가의 철학과 궤를 함께하지만 유가보다 훨씬 진보적이며,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 이런 피지배층의 지지를 받았던 묵가의 철학은 왜 사상 경쟁에서 패배한 것일까? 왜 유가 철학은 전통적으로 굳건하게 지지를 받고 발전했지만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 이후로 사라진 것일까?

 

전국시대에 유가의 싸움닭이라고 할 수 있는 맹자는 자신의 저서 《맹자》에서 이단에 대한 이야기를 거론하는데, 특히 묵가에 대해 적나라한 공격을 펼치고 있다. 왜 맹자는 그토록 묵가를 경계한 것일까? 바로 자신이 신봉하는 유가 철학과 묵가 철학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철학이라는 공통점.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묵가는 유가가 규정하고 제도화한 질서를 무너트리는 입장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질서를 수호하는데 앞장선 유가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특히나 묵가의 사상은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데다 유가와 비슷한 개념인 겸애를 내세우고 있어서, 하층민들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 유가의 사상은 인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군주는 군주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백성은 백성답게를 강조하며 각자의 위치와 본분에 맞게 행동할 것을 권하고 있고, 이런 계급주의적인 발상은 당대의 지도자층에 기호에도 걸맞은 철학이었다. 철학과 사상이 주류로 자리 잡으려면 지도층의 수요도 중요하지만, 결국 핵심은 백성의 민심을 얻는 것이 포인트였다. 그런 점에서 유가 철학은 묵가 철학에 비해 열세였고, 그랬기에 맹자는 그토록 묵가 철학을 경계하며 이단으로 치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통일이 되었을 때, 한 고조 유방은 유가의 학파를 근본으로 내세우며 국가의 으뜸 학문으로 여겼다. 한 고조는 천하를 통일하였지만, 당시 공신들은 하층민 출신이 대다수라 황제가 있는 궐에서 예의를 모르고 서로 핏대를 높여 싸운 적이 많았다. 이를 걱정하던 한 고조가 숙손통을 통하여 유교 철학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황실의 권위를 세웠다. 무식하던 공신들은 새로운 유가적 의례를 배우고 따르기 시작했고 예의를 갖추는 신하들을 바라보며 한 고조는 "황제라는 자리가 귀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라며 유학자들을 칭찬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가 철학이 전국시대 사상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점이다. 유가 철학이 승리했다는 점은 반대로 말하면 유가가 그토록 질시하고 시기하던 묵가 철학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대의 독재자인 황제의 입장에서는 지배층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피지배층의 입장에 선 묵가 철학보다, 지도층의 권위와 의식을 강조하는 유가 철학이 더 구미에 당기기 마련이었다. 세월이 지나 한나라의 전성기인 무제 시절, 무제가 유가 철학이야말로 나라의 근본 학문이라고 다시금 규정하였는데 이 결정은 2000년의 동아시아 사상을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나라가 건국된 이래로, 유가와 도가를 제외한 다른 제자백가 철학들은 종적을 감춘다. 물론 묵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가의 철학은 여러 저서가 발간되고 훗날 성리학과 양명학 등등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오늘날 유학은 동양고전의 메인을 담당하고 있다. 반면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에서 사상 경쟁에서 패배한 이후 발전을 멈췄으며, 오늘날 전해지는 문헌이라고는 《묵자》가 전부다.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전해오는 《묵자》 텍스트도 당대에 온전한 묵가의 사상이기보다, 유가 사상가들의 의견이 덧붙여진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애잔한 마음이었다. 《묵자》가 주장한 사상은 무엇보다도 당대의 하층민들의 고충을 가장 많이 반영했으며, 당대 하층민들의 목소리를 가장 잘 이해한 철학이었다. 그런 철학이 사상 경쟁에서 패배하여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측은지심이 깊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늘날 《묵자》라는 텍스트가 전해지는 것에는, 묵가의 철학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전국시대 이래로 많은 위인들이 노력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전해지는 와중에 텍스트의 일부가 분실되기도 하고 더러는 유학자들의 손에 수정되기도 하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하는 《묵자》 텍스트를 통하여, 당대의 묵가 사상을 파악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묵자》라는 텍스트가 세월 속에 사라졌다면, 우리는 전국시대에 하층민의 목소리를 대변한 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온전한 텍스트는 아닐지라도 현전하는 《묵자》를 통해 우리는 동양에서 가장 이타적인, 가장 진보적인 철학이 기원전 전국시대에 있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에 하층민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초월적인 겸애를 주장하며 하층민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였던 급진적인 사상 " 이것이야말로 《묵자》가 오늘날 후대인에게 주는 깊은 울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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