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역사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테마는 바로 조선과 《조선왕조실록》이다. 이런 조선 열풍을 불러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몇몇 가지를 언급해보자면 첫 번째, '역사저널 그날'과 같은 역사 대중매체의 영향, 두 번째 《조선왕조실록》을 재해석하여
출판한 저작물의 유행 등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저작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는데, 이런 실록 출판물 가운데에서
원조를 굳이 꼽아보자면 박영규가 정리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을 단권화하여 한 권으로
축약하였으며, 평이한 서술로 조선 정치사를 정리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지금도 꾸준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활약하고 있다.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필두로, 실록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들이 본격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가장
특기할 만한 대중서는 바로 박시백 화백이 만화로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20권의 전질로 구성됐는데, 글이 아닌
만화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루는 깊이와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돋보였던 수작이었다. 특히 이 책은 성인을 대상으로 만든 책이지만, 만화라는
특성 때문에 청소년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작이다.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역사 교사나 사학자들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때 대중들에게
보편적으로 추천하는 책으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으뜸으로 꼽으니,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춘 명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전질을 몇 차례 완독했는데 조선사를 다룬 책들 중 군계일학으로 꼽아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열풍 이후, 베스트셀러에 오른 실록 도서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이다. 나도 이 책을 사서
완독해봤는데, 이 책의 난이도는 매우 낮은 편으로, 조선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흐름을 잡기에는 유용한 책이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오류, 그리고 너무 쉽게 쓰인 서술, 얕은 깊이 등등의 단점이 있어서, 실록과 관련된 도서 중 가장 별로였다. 그리고 최근 재야 사학자 이덕일도
10권으로 구성된 《조선왕조실록》을 발간하고 있는데, 전작에 비해 '주관적인 해석'의 강도가 낮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앞서나간 해석이
군데군데 있어서 사람에 따라 호불호를 크게 가져오는 것 같다. 나도 개인적으로 읽어봤는데, 전작에 비해서는 균형감각이 있는 서술이 돋보였던
시리즈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전 번역가인 신동준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조선왕조실록》을 최근 펴냈다. 조선사와 실록에 크게 관심을 가진
나였기에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역시 구해서 완독을 해 봤는데 기존의 실록 도서와는 확실히 차별점이 느껴졌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해석에 있다. 나는 신동준이 번역한 고전들을 대부분 읽어봤고, 그렇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권력에 관념이 어떤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우선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의 가장 큰 특징은 복잡한 정치사를 권력의 향방에 따라 단순화하여 해석한다는 점이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은 총
2권으로 나와 있는데, 그는 조선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왕권이 우위였던 전반기, 두 번째 신권이 우위였던 후반기. 기존의
주류 사학자들은 조선의 흐름을 구분할 때 기본적으로 조선 초기 훈구의 시대, 조선 중기 사림의 시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시대, 숙종 이후
노론의 시대, 정조 이후 세도정치 시대로 틀을 잡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대를 구분하는 데 있어 척도가 되는 것이 '집권하는 신권 세력의
성격'이라는 점이다.
반면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은 신권을 중심으로 해석한 기존의 조선시대 흐름을 따르지 않고 정치사를 단순화하여, 왕권과 신권 이
두 가지 테마를 가지고 정치사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가 번역한 고전, 그가 번역한 역사서는 유독
권력에 주목하며, 그런 권력의 향방을 주요 테마로 삼아 해석하는 경향이 크다. 그리고 저자의 기본적인 사상은 왕조 국가가 중심이 된 조선에서는
정치의 주체인 왕의 권한이 강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조선 초기 왕권이 강한 시기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한 조선 중기와 후기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은 왕권이 강한 시기를 다루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호평하는 분위기고,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은 신권이 강한 시기를 다루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본 리뷰는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을 다루려고 한다.
1권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바로 세조와 연산군이다. 조선 전기, 전통적으로 왕권을 강화한 지도자를 꼽으라면 세 명이 떠오르는데 태종과
세조, 그리고 연산군이 그 주인공이다. 과거에는 이 세 인물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인식했다. 동생과 아버지 형과 싸우며 옥좌를 차지한 태종,
그것도 모자라 처남까지 죽이는 철면피 태종, 야욕 때문에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 그리고 극단적인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가 몰락을 자초한
연산군... 태종과 세종은 강력한 왕권을 주축으로 하여 반정에 성공했지만, 연산군은 막대한 왕권을 강화하려다 도리어 왕좌에서 내침을 당했다. 이
셋의 집권기는 수많은 피가 흩뿌려졌기에 사람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인식했지만 최근에 들어 태종에 대한 재해석이 일어나고 있다.
태종의 재해석은 최근 주류 사학과 재야 사학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데, 신권을 중심으로 조선을 해석하던 주류 사학과 독재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재야 사학이 같은 목소리로 태종을 재평가하고 있으니, 이는 그만큼 태종에 대한 시각도 변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싶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에서도 태종을 명군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태종은 세조와 연산군과 세트로 묶여 비난하기에는 급이
다른 인물이다. 태종이 철혈 살인마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태종은 처벌에 있어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태종은 사람을 아무나 죽이지
않았다. 그는 범범 행위를 저지르는 세력이나 백성들에게 갑질을 시전한 인물들에 한해서 사형을 내렸는데 불행하게도 여기에 처남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종은 처벌을 할 때, 관련자들을 소시지처럼 엮어서 우르르 죽이지 않고, 주모자만 죽여서 희생을 최소화했다. 이렇다보니 태종의
처벌은 후대의 군왕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키고 대규모 살육을 국문의 이름 하에 자행한 것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에서는 세조와 태종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내가 과거에 썼던 글과 거의 흡사했다.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그 왕권을 신료들과 나누지 않고 공정하게 사용했다. 그래서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안정된 조선을 물려줄 수 있었다.
세조 역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공신들을 우대했고, 공신들의 불법 행위를 대부분 묵인했다. 그랬기에 세조 대에는 왕권이
강했지만 세조 사후에는 비대해진 훈구 세력들이 조정을 장악하였고, 이는 후대의 왕인 예종과 성종의 집권기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도 태종과 세조는 정치력의 차이가 확연했다.
책에서는 세조를 명군으로 인식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책에서는 이 당시 북방의 정세가 혼란하기에 시대는 강력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세조의 집권을 정당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세조의 조카 단종은 정치에 있어 전면적으로 활약을 한 적이
없었다. 만약 단종이 정치력이 떨어지고 정사를 돌보는 데 있어 방탕한 모습을 보이거나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이는 반정의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단종은 피지 않은 꽃이었다. 물론 반정의 원인은 실권을 장악한 김종서 등이 수양(세조)을 배제한 것에 있었다. 이때 수양의
시각에서는 군주는 어리고, 실권은 신료들에게 있는데, 실권을 쥔 김종서 일당이 공정하게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닌 자기 혈족들과 친족들 위주로
코드인사를 통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를 빌미로 권력구도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렇게 김종서 일파를 쳐냈다면, 자신이 주축이 되어 정치를 주관하며, 조카인 단종이 바로 서기까지 정치를
보필하는 선까지만 갔다면, 수양은 치세의 능신으로 남을 수 있었다. 수양이 주장했던 주나라의 주공처럼, 조카가 성장하여 정치의 일선에 나서기까지
공정하게 정치를 운영한다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의 이름은 후대에 충신으로 꼽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양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야망'에 충실하여, 결국 조카의 자리를 내쫓고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물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정치력은 나쁘지 않았다. 국방정책도
나름 괜찮았고, 행정 제도 정비에도 공적을 남겼으며, 검소했고,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정치력 자체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일탈을 눈감아주고, 그들의 세력을 비호하여, 거대한 공신 세력을 만든 점은 그의 정치에 있어서 커다란 결점이다. 즉 세조는 왕위에 '굳이'
스스로 올랐어야만 했냐는 도덕적인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집권기에 국방을 안정하고 행정을 정비한 공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권
세력의 권신화를 불러온 장본인이니, 정치력에 있어서도 공과가 뚜렷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태종이나 세종과 같은 급인 명군으로 두기에는 무리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연산군은 막대한 왕권 강화를 꾀하다 반정으로 인해 왕좌에서 폐위된 지도자다. 신동준은 연산군을 위해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펴서 연산군을 옹호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번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 연산군 챕터에서도 연산군의 왜곡된 해석에 대해 아쉬워하는 대목아
많다. 사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실록의 기록을 모두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연산군 실록>은 반정 세력인 중종과 그 신하들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기에 자신들의 반정을 정당화하여 기록한 내용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왜곡은 필연적이다. 다만 과연 연산군에게는 죄가 없을까.
조선조에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는 앞에서 살펴본 태종과 세조 그리고 숙종이 있다. 물론 이들 집권기에도 소소한 반역은 있었지만, 연산군 때처럼
대부분의 신료들이 힘을 모아서 반정을 주도한 경우는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권을 누르는 과정에서 연산의 행동이 오버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실록에서는 연산이 신하들을 누르는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저자는 이런 실록의 기록을 믿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실록에서
주장하는 입장 역시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물론 기록하는 이의 주관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그런 주관으로부터 나름의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한 문헌이다. 이런 사관들의 직필 정신이 살아 있었에,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를 대표하는 역사 문헌으로 손꼽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연산군의 기록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기록을 모두 불신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록에 나온 악독한 연산의 행위들을 참고해볼 때, 연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을 너무 일방적으로 탄압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 태종도 왕권을 강화하는 입장이었지만 신권을 대표하는 최고 기구인 의정부를 살려두고, 언론과 숱한 마찰을 빚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언관들의
언로를 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조 역시 왕권을 강화했지만, 공신들과 신료들을 불러 술을 함께 마시며 신권을 위무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아마
연산은 이런 융통적인 행동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아무튼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의 테마인 왕권의 전성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태종과 세조, 연산군을 대표적으로
알아봤는데, 책은 태조에서부터 명종 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내용과 해석을 떠나 이 책의 장점을 또 하나 꼽아보자면 바로 가장 최신의 논쟁들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세종의 치적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는데, 《조선왕조실록》 관련 저서 중 따끈한 신간이라서 그런지 최근에 있었던 역사적인 논쟁이나 해석, 최신 학설
등등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수록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실록을 읽는 데 있어 필요한 지식들도 테마로 정리하고 있으며, 각 왕의 왕릉에 대해서도
챕터 끝에 정리하고 있으니, 분량에 비해 굉장히 알차게 구성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