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화가 김홍도 - 붓으로 세상을 흔들다
이충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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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풍류의 커다란 축을 읊어보자면 가장 으뜸이 바로 시(詩)이고 그다음이 서예(書)이며, 말미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미술(畵)이다. 그렇기에 지식인 층 가운데에 풍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세 가지에 두루 능통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세 가지 영역 중 가장 대우받는 것은 바로 시(詩)다. 중화문명의 영향이 짙은 동북아시아 국가에서는 유학의 아버지 공자가 시를 유난히 좋아하고 많이 읊었기에, 옳은 사대부가 아니더라도 즉석으로 시문을 짓지 못한다면 주변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지도층은 풍류가 아닌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도 시문을 짓고 읊는 것에 공력을 다했다. 서예 역시 마찬가지다. 유학과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글씨란 글쓴이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사회의 기득권층은 태어나고 자라면서부터 글씨 연습을 시작으로 글공부에 물꼬를 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와 서예의 공통점은 바로 문자(文)와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근대 이전에 시대에서는 문자란 지배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였으므로, 미술(畵)보다는 훨씬 격조 있는 대우를 받았다. 풍류의 말미를 차지하는 미술은 지배층이 좋아하고 향유하는 문화였지만, 글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두고 속된 말로 천박하는 등의 비하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시각이 무비판적으로 투영된 것인지, 예스러운 문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고문과 시문을 읽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 외의 서예나 그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이름난 절집들을 답사하면서 명필들이 남긴 편액을 읽고 분석하면서 서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편액과 주련을 읽어나가면서 풍류의 나머지 한 영역인 그림에도 호기심이 일어났는데, 서예는 그래도 사찰의 스님들이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기본 지식을 습득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림 쪽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속 시원하게 알려주는 이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림 영역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나는 모르는 분야를 새롭게 배울 경우, 그 분야의 역사를 우선으로 공부하는 습관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의학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자 한다면, 의학에 대한 역사를 먼저 공부한다. 이럴 경우 고대 이래로 현대까지 의학이라는 분야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나는 미술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기 전에 도서관에 들려 우리나라의 미술사를 개략적으로 설명한 책을 한 권 선별해서 차분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선 후기에 다다랐을 때,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과 민화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단원 김홍도에 흥미가 갔다. 그래서 거시적인 미술사적을 잠시 뒤로하고 겸재와 단원에 대한 책을 검색해봤는데, 최근에 김홍도의 전기가 발간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얼른 구해 읽어나갔다.


나를 비롯한 미술에 문외한인 일반 사람들은 그저 교과서에서 민화의 대표작을 통하여 김홍도를 만난 것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김홍도는 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오늘날 그가 남긴 자필은 전하지 않기에 그의 삶을 복원한다는 것은 어려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시중에 파는 책들 가운데에서 김홍도의 삶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기술한 서적은 의외로 찾기가 힘들다. 도서사이트에서 검색 결과 그림 작품에 집중한 책이 대부분이던데, 앞서 강조했지만 나는 배움에 있어 역사성을 우위에 두고 있기에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화가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고 싶었다. 화가의 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삶을 먼저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홍도의 삶을 서사적으로, 역사적으로 풀어낸 이번 신작에 기대가 컸다.


처음 책을 펼치면서 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너무 어렵게 쓰여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초반부를 읽어보니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무난하게 읽히는 것으로 봐서 대중적인 눈높이를 적절하게 설정한 것 같다. 책은 평전이 아닌 전기이기에 김홍도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평가는 결여되어 있다. 그저 주어진 사료를 적절하게 분석한 뒤, 이를 토대로 김홍도의 삶을 풀어내고 있는데, 전통적인 문인들의 전기의 경우 그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을 통하여 그들의 삶을 해석하여 재구성한다면, 김홍도의 경우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을 분석하여 작가(김홍도)의 심경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자가 쓴 김홍도의 모습은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읽는 내내 공감을 하면서 읽어서 그런지 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책을 통해서 김홍도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알 수 있었다.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출중했지만 상류층 양반들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생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는 표암 강세황과 심사정이라는 스승을 필두로 이인문, 강희언, 김응환 등등의 벗이 있었으며, 장사를 크게 했던 지인들로부터 커다란 후원을 받았다는 점 등등... 그는 중인이었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 하나로 신분의 한계를 넘은 벼슬을 제수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당시의 평범한 중인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다.


물론 그의 인생도 굴곡이 많았다. 임금의 어전을 그린 공으로 벼슬을 얻은 그였기에, 벼슬길에 있어서는 괄시를 받기도 했으며, 녹봉이 없이 일을 한 경우도 꽤 있었다. 신분제 사회에서의 괄시, 그림을 그리는 직업에 대한 천대, 경제적인 곤궁함, 조정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녹봉은 나오지 않는 열정페이의 현실 등등...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김홍도는 현실의 난제한 어려움을 그림에 대한 예술혼으로 승화시켰다. 물론 세간에서 유명세를 치른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보냈으며, 벗들과 나름의 풍류를 즐기기도 했지만 '치란무상'이라는 고사처럼 김홍도의 삶 역시 영화와 쇠락의 시기가 롤러코스터처럼 반복됐다.


김홍도의 일생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래도 이 사람은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보통 일반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김홍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이 일치하며, 그 일에 몰두하며 한평생을 살다가 갔으니 그의 삶이 개인적으로 너무도 부러웠다. 또한 그의 주변에는 그를 도와줬던 많은 인맥들이 있었다. 양반이었지만 중인을 차별하지 않았던 스승 표암 강세황과의 인연, 평생지기라고 할 수 있었던 이인문과의 우정, 함께 산수를 거닐며 그림을 그렸던 김응환,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줬던 수제자 박유정, 그리고 곤궁하고 어려웠던 시기에 경제적인 지원을 해줬던 거상들 인맥까지... 사람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그 재능을 세상에 꽃피울 수 없는데, 김홍도의 경우 출중한 재능과 더불어 좋은 인맥들과의 만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기에 붓으로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을 해 보자면 김홍도와 같이 출중한 재능과 인맥을 가진 사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무런 인맥이 없이 평범하게 살다 간 일반적인 민초들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저려온다.


보통 김홍도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민화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그는 생각 외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겸재 정선과 마찬가지로 산수화도 그렸으며, 양반들이 좋아할 만한 유교 경전에 나오는 그림, 산신도, 그리고 왕실의 그림과 임금의 어전, 그리고 동물을 묘사한 그림도 그렸다. 전기를 쓴 저자의 상세한 묘사와 설명이 있었기에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자세하게 감상할 수 있었지만 역시 기본 지식이 없이 관찰하기에는 민화 만한 것이 없었다. 민초들의 굴곡진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묘사, 역동성, 그리고 해학성 등등... 특별한 설명이 없더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르가 바로 민화였으니까. 김홍도의 민화 속에는 양반층에게 속되다고 폄하된 조선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었으며 민화 속에서 외면받은 민초들을 향한 작가의 애정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책에서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장르는 민화였다. 이토록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준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김홍도를 '민화의 으뜸'으로 손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최신의 학계 내용을 반영하여 김홍도의 삶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의 출생지를 비롯하여 위작에 대한 부분, 그리고 정조와의 관계에 대한 이견 등등은 최근의 연구결과를 적극 반영한 것이라 더더욱 흥미가 갔다. 저자가 설명하는 그림의 해설도 거북하지 않고 부드럽게 다가왔으며, 김홍도의 대표작들을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두께에 비해 책장도 술술 넘어갈 정도로 평이한 서술이 주를 이루지만, 수록된 그림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천천히 읽기를 조심스럽게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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