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답사기
신정일 지음 / 푸른영토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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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그중 특히 남도 땅은 예로부터 권력과 거리가 멀었다. 삼국시대 말기에는 풍수의 대가 도선이라는 스님이 활동했는데 주로 남도 쪽에서 활동을 하며 명당 터에 사찰을 창건했다. 땅을 보는 데 뛰어난 혜안을 가졌던 도선국사는 왜 많고 많은 땅 중에서 하필 전남에서 활약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전남 지역이 예로부터 권력에서 소외되어서 민초들의 정신이 가장 잘 살아있는 곳이었으며, 그렇기에 민본 중심의 불국토를 건설할 수 있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도선국사의 활약 덕분에 신라 말, 그리고 후삼국 시대에는 남도의 명당 터에 유서 깊은 절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려왕조가 들어서면서 전남 지역은 또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후백제의 핵심부 중 하나인 나주를 공략했는데, 왕건의 나주 공략은 후삼국시대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인 전투였으며 후백제의 왕 견훤의 뒤통수를 때린 습격이었다. 공격은 적진 한복판을 기습하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그렇기에 왕건의 고충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겠다. 이때 호남 사람들이 보여준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을까, 훗날 왕건은 삼한을 통일하고 고려의 왕위에 올라 전남 지역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기용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사람이란 동물은 이렇듯 좋은 일보단 나쁜 일에 더욱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자신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 역시 호남 사람들의(나주) 호응 덕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왕건은 그들의 열의를 두려워했고 끝내 외면했다.


두 왕조를 거치면서 형성된 프레임은 조선왕조에도 유효했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뒤 삼한의 명산, 산신들에게 왕조의 안녕과 축원을 드렸는데, 유독 지리산에서만 좋지 않은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오늘날 지리산은 호남과 영남을 가르는 곳에 우뚝 서 있지만, 이 산의 역사적인 내력을 쭉 살펴보면 정치적으로 소외된 호남의 흐름과 무척이나 닮았다. 남한 땅에서 가장 거대하고 방대한 산자락이라 그런 것일까. 유독 이 산에는 반골 기질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갔다.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한 의병들, 실패한 동학농민운동의 농민들, 빨치산 부대 등등... 이념을 초월하여 순탄하게 살지 않았던 당대의 풍운아들은 지리산 산자락으로 도피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리산은 한 많은 그들을 넉넉하게 품어냈다. 그렇기에 지리산의 역사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호남의 흐름과 함께하고 있다. 이런 남도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사상이었던 동학이 피어났다.

원래 동학은 경상도 땅인 경주에서 최제우가 창시했다. 그러나 영남의 땅이 어떤 곳인가. 역대 이래로 정치의 최전선을 담당하던 곳이었으며 선비문화의 원류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렇다 보니 지역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보수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역사에 있어 극단과 극단은 때론 상통하기도 하는데 경상도와 동학이 이런 관계다. 사농공상이 철저하게 구분된 선비문화를 지키는 데 으뜸인 지역에서 가장 낮으며, 민중적인 사상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제우 역시 지역적 보수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충청도와 전라도를 전전하다 죽는다. 이후 2대 교주 최시형이 교리를 더욱 가다듬으며, 동학은 한층 더 민중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가장 낮은 남도의 땅에서, 낮은 자들을 대상으로 한 종교가 만났다. 이들의 만남은 필연적이었고, 이 필연은 역사의 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전봉준, 김개남, 그리고 손화중 등등의 동학도는 무장봉기를 통해 남도의 행정력을 마비시켰다. 그들은 수탈이 일반화된 남도의 구슬픈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고, 백제의 멸망 이후로 줄곧 대접받지 못했던 민초들은 이들을 열렬히 호응했다. 남도, 그리고 전라도 일대, 충남 지역까지 민초들의 울부짖음은 이어졌다. 동학군의 아우성은 당시 중앙정부의 무능을 상징했다.


그들은 열망했다. 사농공상이 없는 나라, 차별받지 않는 나라, 최소한 인간답게 살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 현대인인 우리가 봤을 때에는 당연히 누려야 마땅한 것들을 요구하고 열망했다. 세계가 평등사상으로 재무장하고 있을 때 조선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봉건주의 신분제를 고집했다. 참다못한 민초들은 동학을 빌려 사람답게 살 권리를 주장했다. 무능한 국가는 동학군을 두려워했고 결국 일본을 불러들여 민초들을 탄압했다. 체계적이지 못한 움직임, 지도부의 분열 등등으로 인해 동학군은 패배를 했으며 스러졌고 결국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다. 책은 그런 동학 혁명의 흐름을 유적지 위주로 디테일하게 추적한다.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동학은 굉장히 낯설다. 종교 하면 불교나 그리스도교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동학이라는 사상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전해지는 경전도 대중화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 안에 스며든 인간 중심의 사상 역시 사라져가고 있다. 잊힌 사상을 답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을씨년스러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답사 역시 그랬다. 당시 뜨겁게 타오른 장소들은 쇠락하여 흔적조차 마모된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저자는 텅 빈 공터에서 흰옷을 입은 한 무리의 환영들이 보이는 것 같다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나 역시 눈을 감으니 그 무리들이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했다. 냉정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근본적인 원인을 여럿 꼬집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동학은 이 땅에서 처음 태어난 인간 중심의 사상이다. 불교도 천주교도 유교도 인간 중심을 외치지만 근본을 따지고 보면 타국에서 건너온 외래 사상이다. 그런데 동학은 우리 땅에서 태어난 우리의 사상이다. 이 땅에서 처음 일어난 사상인만큼 한계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학을 따른 사람들은 지식인이나 교양인이 아닌 핍박 받은 백성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을 조직적으로 규합하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아쉬움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근대화 바람의 서막을 연 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점이 아닐까.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에게 온갖 한계를 거론하며 냉소적으로 일관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한계가 있더라도 용기 있게 길을 간 것에 대해 축복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 책은 표지를 보니 최근에 나왔으며, 일전에 리뷰했던 《신정일의 한국의 사찰 답사기》와 흡사한 것으로 봐서 세트인 것 같다. 두 권의 책 중 개인적으로 이쪽이 훨씬 좋았다. 전작인 사찰 답사기는 다소 가볍고 경쾌하게 글을 썼다면, 이번 책은 울분에 찬 감정의 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렇기에 읽는 내내 저자의 감정에 공감을 하며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동학과 천주교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이 두 사상의 근대화 공로에 대해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시각이나 편향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이 두 사상의 공통점은 바로 평등과 자유였다. 신분제 왕조 국가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평등과 자유. 이렇다 보니 문자를 아는 기득권 유자들은 이 두 사상을 싸잡아 비난했고, 후대인은 그들의 남긴 기록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


책을 덮으며 다시금 생각한다. 동학의 유적지를 하루빨리 돌아봐야겠다고, 어영부영하다가는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에 역사적인 장소가 모두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노파심도 나를 들볶는다. 타인이 쓴 답사기로도 이토록 가슴이 아린데, 정작 내 발로 찾아가 살피게 되면 아픔의 증폭이 얼마나 클 것인가. 오늘날 개인의 인권이 보편화된 이 시대에서 과연 그들이 목숨을 내걸고 열망했던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올바르게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확언할 수 없는 않는 화두를 가지고 조만간 남도 땅을 다시금 밟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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