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2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2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종 이방원을 수식하는 단어는 많다. 철혈군주, 조선의 초석을 다진 군주, 군사 식견이 높은 군주 등등. 여기에 건축왕이라는 수식어도 빠트릴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청계천은 태종이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였다. 이성계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기까지 많은 명당들을 두루 둘러봤다. 우리나라의 토지는 산지가 대부분이기에 산세가 좋은 곳은 많지만 반대로 물의 지세가 좋은 곳은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한양은 앞에 거대한 한강을 끼고 있으며 뒤에는 산자락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니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한양 도성과 한강의 거리는 떨어져 있어 한양 도성 백성들이 실제로 한강물을 활용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한양도성은 지금의 종로구 일대인데, 지금은 청계천이 흐르고 있지만 조선이 건국할 당시에는 하천이 없었다. 이를 걱정한 태종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을 필두로 하여 청계천 공사를 감행한다. 이렇게 규모가 큰 공사의 경우 다른 왕이었더라면 신료들과 탁상공론식 토론을 거치며 미적지근 처리하는 게 일반적이었을 텐데 태종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여 공사를 속전속결로 감행한다.

 

하천 공사를 마친 뒤 태종은 내친김에 경복궁의 메인 누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경회루를 이어 건설한다. 이렇게 태종과 박자청은 1년에 거대한 공사 두 가지를 끝내는데, 리더인 태종의 뚝심과 실무자인 박자청의 탁월한 능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외에도 태종의 건축적 업적은 여럿 있는데 창덕궁 건설, 종묘 증축 등등을 꼽을 수 있다. 종묘의 경우 이성계가 집권할 당시 지어졌는데 당시의 모습은 길쭉한 일자 형태의 전각이 전부였다. 태종은 심심하게 보이는 일 자(一) 형 종묘 전각 양 끝에 월랑을 설치하여 종묘의 구조적, 미학적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종묘 안에 공신전과 영녕전 등의 전각을 건설했다. 또한 종묘 앞 구역에 가산(假山)이라는 인공 숲을 조성하여, 건축의 자연미와 인공미를 조화하는 식견을 보여줬다.

 

물론 이 모든 건축적 업적은 실무자 박자청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박자청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역대 임금의 사당인 종묘와 임금이 머무는 궁궐의 공사를 자기 멋대로 처리할 순 없을 것이다. 아마 실무적인 능력이 탁월한 박자청이기에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디자인을 태종에게 보여주고 태종의 결제를 받은 것을 바탕으로 공사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봐도 결국 건축의 최종 디자인은 태종이 결정하는 꼴이니 태종의 건축 안목이 탁월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실록에서는 박자청에 대하여 굉장히 부정적으로 기록한다. 박자청은 글을 배우지 않았지만 공사 현장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6조의 수장인 공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베타적인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학식이 없는 박자청이 변변치 않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실록을 작성하는 사관들도 박자청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으로 기록하고, 대간들도 수시로 박자청을 탄핵하지만 태종은 허울 좋은 학식보단 '능력'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 군주라 사대부들의 집중포화 속에서 박자청을 지켜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태종의 건축철학을 실제로 구현할 인물은 당시 박자청 외에는 전무했기 때문이리라. (비슷한 예로 태종은 무인이지만 우의정에 오른 조영무의 탄핵도 적극 막아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런 모습에서 사대부들의 베타적인 모습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요점을 추려보면 태종이 기획한 건축은 실용과 심미, 그리고 인공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졌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건축에 있어 이토록 탁월한 안목을 지닌 지도자는 거의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이 골격을 잡아 완성한 창덕궁과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그의 뛰어난 건축적 안목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전 세계에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번 권에서는 전체적으로 나라가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앙 제도 정비, 지방제도 정비, 군사제도 정비, 예법 정비, 그리고 왕실 종친들의 서열 정리, 청계천과 경회루를 중건하는 모습 등등... 태종 하면 그저 처남을 때려잡고 아버지를 압박해서 왕이 되어서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시각이 많은데, 실제로 태종은 정쟁을 하면서도 실질적인 조선의 발전에 대해서 늘 고민했던 리더였다. 정쟁과 정치는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오늘날 정치판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정쟁에 몰두하는 정치인은 많은 반면, 실질적인 정치를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태종은 이 두 가지, 정쟁과 치국을 동시에 행했다. 태종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정치 이념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사사건건 트집 잡는 대간들과 척을 지고, 정권을 위협할만한 세력들을 제거하는 정쟁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태종이 위대한 점은 이런 정쟁을 통해 획득하고 유지한 권력을 철저하게 치국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정쟁 속에서도 국가 제도를 정비할 수 있었으며, 창고를 부유하게 만들고, 예법을 정리했으며, 국가의 백년대계를 내다본 청계천 공사 등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일련의 정쟁 활동 속에서도 태종은 중심을 잘 잡았다. 자신을 압박하는 대간들을 억누르면서도, 연산군처럼 극단적으로 대간들을 없애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간들의 언로 행동은 바람직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치의 기본은 소통이니까.

 

그래서 태종의 정쟁은 나름의 기품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인 입장은 다르더라도 최소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느껴졌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태종의 모습이 아니라 더욱 신선했다. 물론 정도전을 비롯한 특정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한 뒤끝을 보여줬지만, 태종에게 있어 이런 증오의 대상은 극소수였다. 선조나 숙종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환국을 도모하여 쓸데없는 대규모 희생을 불렀다. 그러나 태종은 문제의 주모자만 처리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신하들은 태종에게 '살려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태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꺾인 세력인데 무엇을 더 무서워하는가?, 설사 반란이 일어난다 한들 진압할 자신감이 있으니 걱정 마라.' 이런 태종의 모습에서 다른 군왕들이 가지지 않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아무튼 노련한 정치력을 과시하는 태종과 안정된 정권을 확인하면서 난세가 치세로 바뀌고 있음을 물씬 느낄 수 있다.

 

국가와 통치에 대해서는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지만 문제는 내부에서 터진다. 바로 세자 양녕. 이 시기를 기점으로 양녕의 일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속화된다. 재위 11년에서도 양녕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기록이 종종 있었는데 12년에는 더욱 많아졌다. 세자의 사부인 이래의 완곡한 주청 밑에 사관이 '세자가 잡인들과 어울려 논다.'라고 써놨는데, 이를 통해 양녕의 일탈이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태종의 조치다. 다른 일은 칼같이 처리하는데 반해 양녕에 일 앞에서는 미적지근하고 감싸주려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일까. 날이 갈수록 국가의 기틀은 튼튼해져 가는 반면, 미래 권력을 이어받을 세자의 일탈 역시 깊어진다. 태종의 모토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좋다.'인데, 그런 점에 비춰봐도 너무 안일하게 보여서 안타까웠다.

 

아무튼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태종의 안일한 대처 덕분에 조선은 대한민국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세종의 집권 배경에는 양녕을 버리고 충녕을 선택한 태종의 결단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선택은 태종이기에 가능했으니까. 태종이 양녕을 꾸중하지 않은 것은 안타깝지만, 만약 꾸중한 결과 정신 차려서 양녕이 왕으로 등극했다면, 세종이란 존재는 조선에 없었을 것이며, 내가 쓰는 이 서평도 한자로 기록했을 것이다. 변수가 많은 역사에 있어서 상상은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본다. 미적지근한 태종의 태도가 세종의 집권으로 이어졌으니 맏이의 일탈을 지켜보며 노심초사한 태종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나온 역사를 알고 있는 후세인의 입장에서는 태종답지 않은 미적지근한 처리가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느껴졌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