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 석가모니
와타나베 쇼코 지음, 법정(法頂) 옮김 / 문학의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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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가면 늘 어머니뻘 되는 불자들이 기도 시주를 하며,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의 복을 구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저렇게 해서 과연 복이라는 것을 구할 수 있을까? 과연 불교란 저렇게 보시만으로 현세와 내세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종교인가? 의심하면서, 불교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를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불교를 알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고승이라고 불리는 스님들에게 문답을 하면서 배우는 경우도 있고, 시중에 나온 여러 불경들을 통하여 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결국 불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싯다르타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조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참되고 순수한 불교의 정수로 다가가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싯다르타 부처님에 대한 책을 검색하고, 최종적으로는 《불타 석가모니》 책을 선택하고 짬짬이 읽었다. 읽을 때만 해도, 과연 이 책만으로 부처의 진면목을 모두 알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읽고 나니 새삼 번역자인 법정 스님의 탁월한 안목을 칭송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 책은 부처의 삶을 최대한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었고, 부처의 삶뿐만 아니라 부처가 살았던 시대적인 흐름과 사회상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밝혔다.

 

책의 저자는 와타나베 쇼코라는 일본인이다. 저자는 2500년 전의 인물인 부처라는 실존 인물의 생애를 텍스트로 최대한 섬세하게 복원했는데, 치우치지 않은 관점이 인상적이었다. 서문에서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부처의 전기를 쓴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사실적인 기록이 너무 없다는 점, 한편으로는 현실적이지 않은 신화적인 기록들이 너무나도 넘쳐나기에, 이런 상반된 기록들 사이에서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구도자를 명료하게 그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대체로 종교적인 인물을 다루는 책은 신화적이고 미신적인 부분에 치우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부처님 사후 후대에 거쳐가며 숱하게 붙여진 신화적인 부분을 최대한 참고하여, 신화 속에 가려진 부처님의 실체를 찾아내는데 탁월한 추론을 보여줬다. 물론 저자의 탁월한 추론으로 밝힌 내용이 실제 부처의 삶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사실과 신화, 상반되는 자료들을 통해 2500년 전에 활동한 종교 창시자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구현한다는 측면에서 보여준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추론의 부족함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 요소로 볼 수 있다.

 

입체적인 부처님의 삶을 그려냈다고 해서 이 책이 종교에서 중요시하는 '신화적인 부분'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저자는 19세기 이래로 과학 기술의 진보에 말미암아 종교에서조차 신화적인 색채와, 초자연적인 색채를 걷어내는 일말의 행위들을 향해 통렬한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나 역시 특정 종교를 믿지 않은 것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 바로 종교가 가진 '신화적인 부분'에 거부감 때문이었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결과, 합리주의와 실증적인 사고 관념이 보편화된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 신화적인 색채, 초자연적인 색채가 가득한 종교는 그저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 역시 현대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종교를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관점을 통해 종교 안의 숱한 비현실적인 측면을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하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먹는다. 여기서 호랑이는 포기하고 곰은 인내하여 웅녀가 되어 천신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다. 오늘날 이 신화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냥 봐도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으니까. 그래서 역사 학자들은 단군 신화를 이렇게 재해석한다.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이 싸워서 곰 부족이 이겼고, 이런 곰 부족은 환웅을 섬기는 부족과 힘을 합쳐 고조선을 개국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아마 단군은 이 두 부족의 지도층의 결혼 동맹에서 태어난 인물일 것이다.'

 

종교의 신화 해석도 마찬가지다. 신화적인 기록은 현실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극도로 강조하기 위해 빗대어 표현하거나 에둘러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비현실적인 신화적인 기록이야말로 해석하기에 따라 가장 사실적인 기록으로 환원할 수 있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종교의 신화적인 영역을 함부로 자르고 재단하는 행위는 종교의 본질에 다가가는 데에 있어 한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종교를 탐구하고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오히려 신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궁극적으로 이 신화가 어떤 것을 상징하고 의미하는지를 읽어내는데 열정을 다해야 한다. 물론 허구적인 신화의 영역을 아무 지식 없이 해석한다는 것은 무모함에 가깝다. 따라서 비전문가인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에 의존하여 종교의 신화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책은 탁월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실적인 시각을 너무 강조하지도 않고, 신화적인 부분을 너무 강조하지도 않는다. 치우치지 않는 관점을 견지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기 중 신화적인 기록들을 해박한 지식으로 섬세하게 해석한다. 그런 저자의 결실을 법정 스님은 탁월한 문체로 번역해냈다. 한 마디로 책은 탁월한 저자, 그리고 탁월한 번역가가 만나서 완성된 훌륭한 부처님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종교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시각, 그리고 불교의 본질, 부처님의 시대에 상황과 시대 배경, 불교라는 종교가 고대에 인도에서 어떻게 성립되고, 여타 다른 종교들의 어떤 덕목들을 흡수했는지도 꼼꼼하게 배울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불교에 대한 철학적 지식과 배경지식, 그리고 나아가 부처라는 인물이 수도를 통해 어떤 것을 추구했는지도 명료하게 알 수 있었다. 일본인의 책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가장 큰 장점은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를 쓴다는 점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부피가 꽤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문장은 없어서 책장은 술술 넘어가는 편이었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다. 사찰을 다니고 불경을 나름 읽었지만, 고백하건대 불교를 전적으로 믿는 마음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책을 통해 부처님의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많이 반성했다. 그만큼 부처의 삶은 특정 종교를 떠나,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존경을 불러왔고, 이런 보편적인 존경심은 불교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성장한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진리를 밖에서 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찾는 진리는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불교라는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에 대한 공부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의 경전과 스님의 말씀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부처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으며 그저 시주를 으뜸으로 여기고, 스님의 말씀에서 '잠시의 힐링'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과연 이게 올바른 교인의 자세인가. 멀리서 구하려 하지 말자. 이 책 한 권이면 부처를 파악하는 데 있어 모자람이 없다. 법정 스님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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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군주론의 탄생
마일즈 웅거 지음, 박수철 옮김 / 미래의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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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빠르게 급변하는 시대라지만, 생에 대부분을 '변화'로 일관하며 살 수는 없다. 역설적으로 이런 시대일수록 삶에 있어서 최소한의 지켜야 할 원칙과 철학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래서 늘 고민이었다. 무엇을 변해야 할 것인지,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사유를 이어가다 보면 대체로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는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위선 때문이었다. 나름 지키고자 하는 덕목들을 순간에 의해, 상황에 의해 스스로 배신하면서 타협하고 합리화했던 위선이라는 녀석. 그런 위선은 대부분 욕망과 관련됐다. 청류한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마음과 세속의 욕망, 즉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 두 마음은 나의 내면의 양극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백하건대, 머리는 청류를 지향했지만, 마음과 실체적인 삶은 욕망을 추구한 적이 많았다.

 

이런 양면적인 모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마키아벨리를 처음 만났을 때, 운명처럼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마키아벨리를 평가하는 전통적인 시각은 크게 두 가지인데 근대 정치철학의 시초로 예우하는 시각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들을 수단화하여도 괜찮다고 평가하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나뉜다. 이런 시각차는 오늘날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마키아벨리의 저서와 평전을 대부분 읽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호기심으로 마키아벨리를 만났지만, 그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호기심은 존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록 오늘날은 그가 활동했던 시대와 다르고 환경은 달라졌지만, 마키아벨리라는 인간을 탐구하고 배우면서, 나는 그의 삶과 그의 사상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열정 어린 삶의 흔적과 파격적인 사상은 나에게 엄청난 영감을 선사했고, 그랬기에 나는 그를 '마음의 스승'으로 여기고,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마키아벨리를 조망한 평전이 최근 새롭게 출시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랬기에 나는 얼른 책을 구하여 단숨에 읽어나갔다.

 

책에 내용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번역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 싶다. 2010년을 기준으로 이전에 나온 외국어 원전 인문학 책은 뛰어난 책이라고 하더라도 번역이 아쉬운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과거에 출판된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인문학 관련 서적'은 전공자가 아닌 비전공자를 고용하여 번역을 의뢰한 경우나 대학원생들을 고용하여 번역한 경우가 많아,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책은 원저자의 맛깔진 묘사와 표현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번역하고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인문학 관련 번역서일 경우, 명저라고 불리는 책이더라도 번역자의 실력에 따라 졸저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내용의 표현도 일품이었고 표현의 결을 살린 번역도 탁월해서 문장에 신경 쓰지 않고, 독서에 몰두할 수 있었다. 수려하게 번역된 책을 보면서, 어려운 출판계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인문학 서적이 발전하고 있음을 새삼 체감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책에서 언급한 바대로 표면상으로 볼 때, 모순적인 모습이 많다. 그런 부분을 대표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첫 번째, 사상적으로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을 옹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정의 반대라고 할 수 있는 군주정에 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이 책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으로 꼽는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공화정 이론을 《로마사 논고》로 정리하여 발표했는데, 《로마사 논고》는 고대 로마의 역사서인 《리비우스 로마사》를 공화정 이론으로 정리하여 풀어낸 책이다. 이렇게 모순적인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를 각각 남겼으니 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마키아벨리를 '기회주의적인 사상가'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피렌체의 정권이 교체되자, 마키아벨리는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 표적이 되어 직장을 잃고 의도하지 않게 시골에서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공직 취직'을 위해 권력을 잡은 자신의 정적들에게 아부하며,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군주론》이라는 저서는, 피렌체의 권력을 다시 되찾은 메디치 일가에게 헌정하기 위해 작성한 책인데, 이 책을 헌정하는 목적을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새롭게 들어선 신생 정부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상 '노골적인 구직 활동'이었다. 그렇기에 후대인들은 이런 마키아벨리의 이중적인 행동을 '그저 권력만을 쫓기 위해 입장을 바꾸는 굴종적인 인물'로 오해할 여지가 다분했다.

 

세 번째, 그는 진지함과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모습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흔히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정치철학자, 정치인으로만 생각하지만, 그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희곡 작가이기도 했다. 《군주론》, 《로마사논고》와 같은 정치적인 저서를 저술했기도 하지만, 《만드라골라》라는 명작 희곡을 만들기도 했으며, 실제로 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진지한 내용과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유머를 곁들인 내용이 골고루 담겨 있다. 물론 진지한 모습과 해학적이고 유머러스한 모습은 두루 갖출 순 있겠지만 서로 대조되는 부분이 많기에 현실 속에서 이런 능력을 골고루 갖춘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럼 마키아벨리의 삶에는 왜 극단적인 모순이 발견되는 것일까? 책을 읽으며 나는 그가 '경계인'이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역사에서 나라를 개국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문명이 발달한 노른자 땅에서 태어나기보다 국경지대나 문물의 교류가 활발한 곳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을 흔히 '경계인'으로 표현한다. 문명이 발전한 중앙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우수하고 뛰어난 교육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타 문물과 사상을 괄시하고 멸시하며 베타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행동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역대 왕조에서 정치의 타락은 대부분 이런 중앙 귀족들의 폐쇄적인 관념에서 탄생했다. 반면 경계인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기에, 중앙 출신보다 훨씬 현실적인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그리고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 당나라를 건국한 당 고종과 태종 등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나라의 대부분은 경계인들의 손끝에서 빚어졌다.

 

그들은 현실적이었기에,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맹목적으로 내려온 구습을 타파할 수 있었으며,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했다. 마키아벨리 역시 이런 '경계인'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사상에서 볼 수 있는 냉철한 현실감각은 경계인의 삶을 살아는 과정에서 꽃피운 결실이다. 그가 태어난 조국 피렌체는 당시 강대국들의 입김에 따라 흔들리는 입장이었고, 그런 가변적인 성격의 조국에서, 마키아벨리는 중인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다른 귀족들이 기대던 기득권이 없었고, 믿을 것이라곤 오로지 '자신의 능력'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반 없이 오로지 '능력'에만 의존하여 현실을 타파하려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위험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중세 르네상스 시대보다 훨씬 개방적인 오늘날에도 기득권 신분 유지의 핵심은 여전히 '세습'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마키아벨리의 삶에서 보이는 표면적인 모순은 '능력' 외에는 비빌 언덕이 없는 중인의 처절함이 빚어낸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랬기에 나는 그의 모순적인 모습을 읽으면서 분노한 감정보다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이 자리를 빌려, 마키아벨리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하려고 한다. 앞서 밝혔듯 마키아벨리의 삶은 모순점이 많다. 그래서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기회주의자'로 규정하고 비난하는데, 이는 마키아벨리를 파편적으로 인식한 결과가 아닐까. 마키아벨리의 삶은 모순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의 삶 안에는 한결같았던 부분도 많다. 그의 관심은 늘 '정치'와 '국가 권력'에 있었다. 그는 평생을 정치철학에 몰두했다. 국가를 어떻게 운용해야 바람직한지, 그런 국가 운영에 어떤 정체가 어울리는지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했다. 그가 고전에 능통하고, 독서에 열중한 이유도, 이런 정치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한 실용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마키아벨리의 고전 독서는 당대의 흔한 지식인들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교양의 수단으로 고전을 독서한 것과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그는 대부분의 경계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인 '현실주의' 사상을 극도로 중요시했다. 그렇다 보니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 교리로부터 자유로웠으며,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정치는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현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사상은 정치사상과 연결되어, 근대 정치사상의 씨앗으로 자리 잡는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이론 연구에만 집중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 공직에 대한 열정을 끝없이 불태웠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칩거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공직에서 꽃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취업을 위해서 적대하던 권력자에게 아부를 하기도 했으며, 시대와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음에도 불구하고 저술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야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마키아벨리는 왜 이렇게 한 평생을 정치철학에 몰두했으며, 공직의 일선에서 일하려고 노력했던 것일까. 이는 바로 애국심 때문이다. 이런 그의 뜨거운 애국심을 확인할 수 있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 영혼보다 조국을 더 사랑하노라.' 이 말은 마키아벨리가 죽기 직전에 남긴 문장인데, 조국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식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한 명문이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공직에 있을 때 공익을 우선하고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늘 국가의 발전만을 생각했으며, 개인의 영달이나 부귀를 축적하는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공직에서 내쳐질 때, 사익을 추구했던 일반적인 공무원들과 다르게, 뇌물이나 수수 혐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듯 그는 한평생을 조국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헌신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런 자신의 포부를 이루기 위해, 경계인으로써 열정을 가지고 삶을 살았던 위인이다. 이런 그를 손쉽게 '기회주의자'로 폄하할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의 삶을 읽으며 새삼 느꼈다. 인간사에 있어 모순과 극단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기에 내 안에 있는 모순과 극단에 괜히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이를 편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고 결론을 내렸다. 마키아벨리는 모순과 극단으로 가득 찼지만, 한편으로는 한결같은 열정과 야망이 있었다.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문체를 구사한 마키아벨리. 하지만 그의 삶은 전해지는 작품의 문체의 온도와는 다르게 뜨거움 그 자체였다. 그의 변하지 않은 꿈과 열정을 보며, 나의 삶에도 변하지 않는, 열정의 뜨거운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正道)'의 설정, 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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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권력은 간신을 원한다 - 한명회부터 이완용까지 그들이 허락된 이유
이성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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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중학교 근현대사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제출한 서술형 수행평가를 발표하며 모범적인 글을 쓴 사람을 불러 발표하게 했다. 수행평가의 주제는 '만약 내가 일제 치하 시대에 간다면 어떤 독립투쟁을 할 것인가.'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다는 꿈이 있어서 무장투쟁으로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거침없이 휘갈겼다. 중간 기말고사의 객관식 오지선다 시험과는 다르게 서술형 수행평가는 학생들의 창의적인, 그리고 자유로운 생각을 토대로 하여 평가하는 제도라고 생각하지만 주입식 공교육의 폐해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학생의 자유를 존중한 서술식 시험이었지만, 학교 그리고 선생님이 '원하는 모범답안'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이런 시험의 맹점을 어린 시절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쓸 때에도 내 멋대로 끄적이기보단, 어떻게 쓰면 선생님이 만족할 만한 정답일까를 고민했고, 그렇게 답지를 써서 이번에도 만점을 받았다.

 

의기양양하게 발표를 끝내자, 학우 J의 순서가 돌아왔다. 그리고 J의 발표는 이런 문구로 시작했다. '저는 솔직하게 말해서, 그 시대에 산다면 독립운동에 기여하지 않고, 친일파로 행동할 것 같습니다.'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의 첫 마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J는 발표를 이어갔고, 나는 선생님의 표정을 살폈다. 선생님의 눈매는 경직되어 있었지만 발표가 계속될수록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미소를 띠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을 보며 '한 방 먹었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모범 답안, 그리고 J를 제외한 모든 학우들의 답안은 모두 독립운동에 기여한다는 답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J는 그런 우리와는 다르게 '친일파'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발표했다. J는 모범생이고 학교 성적도 전교권에 드는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이 저런 파격적인 발표를 했다는 것이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날이 지나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J의 행방이 궁금하다. 사회를 겪으면서 나는 '선생님이 원했다고 믿은 모범답안적인 삶'보다 'J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삶'이야말로 너 나 우리의 보편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피부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발끈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에 의하면, 지고지순한 애국자보다, 추악하고 더러운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은 추악하고 더러운 일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그런 상황을 방조하고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일반 사람들을 '애국자'의 반열로 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쉽게 말한다. 마치 우리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처럼, 추악하고 더러운 이름을 가진 역사적 간신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비판을 한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그랬다.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지위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일신의 안위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을 때조차 '나는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더러운 연못에 피는 연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나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는 것을, 그렇게 평범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인정한다. 나는 나를 과대평가했으며, 타인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이치를 어린 시절에 깨달은 J의 근황이 궁금하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용어 중에는 왕조시대에 사용했던 언어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는 사례를 몇몇 볼 수 있는데 이런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간신'이다. 간신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간사한 신하'라는 뜻이다. 이는 왕조국가의 주인인 왕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용어인데, 민주시대에 오면서 왕조 시대의 유산들이 숱하게 사멸했음에도 불구하고, '간신'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생명력을 얻어 널리 쓰이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왜 우리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단어를 여전히 사용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언어가 쓰이는 데에는 오늘날 여전히 활용되기 때문이다. 즉 민주 사회인 오늘날에도 '간신'과 같은 인간 군상이 보편적으로 발견되고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여전히 '간신'으로 지칭하기에, '간신'이란 단어는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책은 그런 간신을 테마로 하여, 조선사에 악명을 끼친 9명의 간신들을 분석하고 있다. 책에 언급된 간신들은 역사를 공부했다면 귀에 익은 인물들이다. '홍국영, 김자점, 윤원형, 한명회, 김질, 임사홍, 원균, 유자광 그리고 이완용까지...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매국노라고 할 수 있는 '이완용'의 이름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저자는 이런 간신들을 주제로 하여 책을 써 내려갔다. 언급된 이들은 모두 역사서, 그리고 후대에 간악한 간신으로 지칭된 인물들이다. 설사 간악한 간신이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꼬리표가 따라붙은 인물들이다.

 

우리는 흔히 간신을 떠올릴 때, '저 사람은 싹이 노래서 저렇게 행동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최고지도자인 군주에게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키울 것을 강조하며, 특정 간신의 유형을 만들어 경계시켰으며 이를 '제왕학'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기업이나 취직을 할 때 면접에 적극 반영되어, 싹이 노란 인재들을 걸러내는 용도로 여전히 사용 중이다. 그러나 저자는 간신을 두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는 말한다. 역사적 인물을 판단할 때 단편적인 선악을 잣대로 쉽게 판단하긴 어렵다고. 그리고 역사로 검증되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은 자신을 희생하여 커다란 대의를 지키려고 노력한 위인들보다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간신들의 모습과 더 흡사하다고. 어찌 보면 간신들 역시 역사의 피해자라고, 그들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욕망으로 간신이 되었지만, 더 큰 그림은 그런 간신을 만들어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활용하고 방관한 최고지도자(왕)에 있다고.

 

책에서 이야기한 조선의 대표적인 간신들의 전기를 보면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 번째, 언급된 간신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큰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두 번째, 그들이 자신의 욕망을 폭주시키며 달려갈 때, 왕들 역시 그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권위를 세우는데 급급했다는 점. 우리는 지금까지 간신을 이야기할 때 첫 번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며 간신'만'을 비난했다. 저자는 간신의 커다란 욕망도 문제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런 간신의 탄생을 만들어낸 환경에 있다고, 그러한 환경의 중심에는 권력을 지키고자 했던 지도자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고. 그렇기에 어찌 보면 간신들은 그 시대의 지도자들의 노회한 정치력에 희생된 재물이며, 간신들이 받고 있는 오명의 일부분은 사실 그 시대를 관장했던 군주에게 돌아가야 할 비난이다. 왕조시대에 있어서, 군주는 늘 깨끗해야 하며, 욕을 최소한으로 먹어야만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렇기에 군주들은 자신의 결점과 과오를 돌릴 대상이 필요했다. 결국 군주들은 간신이라 불리는 욕망의 화신들을 선택하여, 그들의 사욕을 채워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정치적인 이익을 챙겨낸다. 너무 음모론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사실 역사서에 기록된 실제 정치는 대부분 이렇게 흘러가지 않았던가?

 

책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간신이 나오지 않으려면, 개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간신이 나올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바람직한 지도자는 이런 건강한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시민들 역시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권력이 정당성이 없으며, 깔끔하지 않으면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간신으로 진화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니까. 여기서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태생적으로 나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너, 나, 우리 등등의 일반 사람들을 가리킨다. 간신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간신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는,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솔선하여 깔끔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같은 조선이더라도 세종 시절에 정권을 위협하는 간신들이 나왔다는 기록은 없다. 책을 읽으며 또다시 지도자라는 자리에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나 지도자가 되어선 안된다. 힘의 유혹, 그리고 권위의 유혹, 그리고 사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구성원들의 타락을 막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말이 쉽지 너무나도 이상론적인 조건이다. 현실 사회에 이런 사람이 최고 지도자가 되어서 활약한 시대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 보니 역사를 통틀어 명군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반대로 암군들은 수두룩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27명의 지도자 중 뛰어난 임금이 몇이나 있는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빠르게 진도를 뽑을 수 있겠지만, 이쪽 방면에 흥미가 없더라도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읽는데 무리는 없다고 본다. 평이하게 서술됐음에도 불구하고, 신선하고 독특한 해석을 담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나는 지금까지 시중에 판매된 대중 역사서 대부분을 읽었다. 최근 역사라는 장르가 대중화되어 다양한 저술이 나오고 있다는 점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다양한 책이 나오다 보니 '수준 이하의 책'이나, 웹 검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부풀려 써낸 '영양가 없는 책'이 많아서 우려가 있었는데,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역사서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으로 자신있게 손꼽을 수 있다. 최근 나온 신간들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간신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었으며, 간신 너머에 있는 권력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기업이나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분들에게는 반드시 일독을 권하고 싶은 도서다.

 

마지막으로, 책의 내용과 구성은 다 좋은데 제목이 아쉽다. 제목은 '모든 권력은 간신을 원한다'인데, 과연 모든 권력이 간신을 원하는 것일까. 앞서 에를 든 세종과 같은 사례를 보더라도, 비교적 투명한 권력, 그리고 정당성이 있는 권력은 간신을 만들어내는 환경을 조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권력이 간신을 원한다는 제목의 문구는 너무 비약적이다. 제목 앞에 '모든'이라는 수식어를 빼고 《권력은 간신을 원한다》 정도로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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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 하 십팔사략 2
증선지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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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하》 권은 상권에 이어 수나라와 당나라, 오대십국을 거쳐 송나라와 요나라, 금나라와 원나라의 중원 통일까지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은 흔히 《자치통감》을 참고로 한 축약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자치통감》이 상고시대부터 오대십국까지 다루고 있다면, 《십팔사략》은 오대십국을 넘어 송나라와 요나라, 금나라와 원나라 통일기까지 다루고 있어서 훨씬 넓은 시대를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은 송말원초의 격동기 시대에 저술된 저작이다. 그렇다 보니 저자인 증선지는 책에서 송나라의 분량을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이 할애하여 다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 저자가 활동했던 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기가 송나라였기에 그런 것 같다.

 

 

대체로 시대사를 서사적으로 다룬 편년체 역사서는 저자가 살고 있는 시대와 가까워질수록 더 자세하게 기록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전해지는 책도 많을뿐더러 전해지는 기타 자료들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예로 들어보자면, 단군 고조선의 기록이나 삼국시대의 기록보다는 조선시대나 근현대 기록이 많이 전해지기에 이 시대를 다룬 TV 방영물이나 저작들이 다른 시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또한 저자인 증선지의 출신은 송나라였다. 조국 송나라가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는 원나라에 멸망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기록을 더욱 상세하게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분량을 많이 할애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저자의 노력 덕분에 《십팔사략 하》권을 통해서 혼란한 오대십국의 상황과 송나라와 요나라 금나라의 패권전쟁의 흐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십팔사략》은 조선시대에 아동용 역사서로 폄하되었지만, 조선 초기에만 해도 국왕의 역사교육 교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십팔사략》을 통독한 인물은 바로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세우고, 행정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태종 이방원이다. 사람들은 흔히 태종 이방원을 무인(武人)적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로 착각하는데, 실제 역사서에 나오는 태종은 무인이라기보다 문인(文人)에 가깝다. 태종은 고려 말 과거에 급제했는데, 조선 군왕을 통틀어 지적 능력을 객관적으로 검증받은 인물은 태종 이방원이 유일하다. 똑똑한 태종은 경연(왕이 공부하는 수업)에 나가 신하들이 권하는 책을 보지 않고, 강습 교재를 자기가 선택했던 군왕인데, 오늘날로 말하면 자기주도적인 학습을 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런 태종이 중국사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십팔사략》을 선택해서 통독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 전한다. 똑똑한 태종이 숱하게 많은 역사책 중 《십팔사략》을 골라잡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분량이 적으면서 핵심을 담고 있는 점 때문이었다.

 

 

태종은 아들 세종과는 다르게 책을 진득하게 정독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중요한 핵심 위주로 공부에 있어 효율을 중시한 리더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과서를 펼쳐 놓고 단권화 작업을 마친 뒤 핵심 요약집 위주로 공부를 하는 스타일인데, 이런 태종의 성향에 가장 안성맞춤이었던 책이 바로 《십팔사략》이다. (물론 태종도 《대학연의》라는 책을 비롯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반복적으로 정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반면 태종의 아들 세종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세종은 뚝심 있게 기초부터 탄탄히 깊게 정독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아버지와는 다르게 294권짜리 거작 《자치통감》을 경연에서 완독하여, 중국사에 대한 지식을 공부했다.

 

 

신동준 선생님이 번역한 《십팔사략》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번역도 번역이지만 역자의 '보설(輔說)' 부분이다. 아무래도 《십팔사략》은 각 시대의 대표적인 사건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에 그치고 있어 디테일한 깊이를 기대할 순 없는데, 역자는 그런 단점을 보설을 통해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역자는 친절하고 자세한 해석을 곁들여 《십팔사략》이 놓치거나, 생략하고 있는 부분들을 끄집어내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역자는 보설을 통해 단지 고전을 해석하고 보충 설명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십팔사략》에 나오는 사건들을 오늘날의 현실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역자의 저술을 많이 읽어봐서 개인적으로 신동준 선생님의 사상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는데, 기존 학계의 관점과는 다르게, 파격적인 가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통속적인 견해를 따르고 되풀이하기보단, 기존의 학계가 주목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많이 제시했다. 그렇기에 역자의 보설은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어서 개성적인데, 사람에 따라 역자의 해석이 호불호를 불러올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부고 소식을 접했다. 바로 역자인 신동준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기사였는데,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최근 신동준 선생님은 비영리집단 올재에서 《자치통감》 일부를 펴냈다. 올재에서는 《자치통감》을 신동준 선생님과 함께 완역할 계획이라고 공포했는데 알다시피 《자치통감》 완역은 굉장한 노고가 들어가는 작업이다. 그래서 심적으로 많이 응원을 했는데, 번역 도중 갑작스러운 부고로 인해 완역 작업에 차질이 생겼다고 하니 안타까울 다름이다. 또한 나는 신동준 선생님이 번역한 고전들을 대부분 읽었고 소장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동준 선생님의 철학과 내 생각은 상이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동양 고전 보급에 노력하신 분이고, 기존의 학계의 목소리와는 이색적인 주장을 많이 보여서 깊은 인상을 줬었다.

 

 

그래서 나의 호불호를 떠나서 연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소리 없이 응원했는데,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접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울적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토록 열정을 가진 번역자분이 몇이나 있을까. 선생님의 번역을 기다리는 고전들이 아직도 수두룩한데, 이번 《십팔사략》을 끝으로 신선하고 인상적인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동양 고전 애호가로써 너무나도 안타깝다.

 

 

선생님, 열정적으로 번역 작업을 하신 덕분에, 동양 고전에 더욱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못다 한 작업이 있으셔서 아쉽겠지만, 부디 그곳에서는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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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 상 십팔사략 1
증선지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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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완독을 시작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책들을 참고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 바로 《십팔사략》이다. 《십팔사략》은 말 그대로 '18가지 역사서를 간략하게 정리한 책'이라는 뜻으로, 송말원초 과거를 준비하던 증선지가 저술한 저서라고 한다. 비록 그는 과거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런 회환을 저술을 통해 승화하였으니, 이는 고난을 겪은 사마천과 좌구명이 각각 《사기》와 《춘추좌전》을 지은 것과 유사하다. 《십팔사략》은 다른 중국 고전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역사만화가로 유명한 고우영 씨가 그린 만화 중에는 《십팔사략》을 주제로 한 작품이 있으며, 그 외에도 《십팔사략》을 간략하게 압축하여 중국사를 정리한 책이 시중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십팔사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기존에 유통되는 책들은 모두 원저자가 쓴 내용을 그대로 번역한 책이라기보다, 편저자의 구미에 따라 변형, 축약 등등의 2차 가공을 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널리 알려진 고전이지만 원전을 올바르게 번역한 책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번에 동양 고전 번역으로 유명한 신동준 선생이 원문을 포함하여 《십팔사략》을 새롭게 번역했다. 마침 《자치통감》도 완독하고 있는 데다 《십팔사략》의 원전과 번역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렇기에 그런 나에게 이번 번역본은 가뭄에 만난 단비와도 같았다.

 

 

아무리 압축을 했다고 해도 《십팔사략》은 중국의 18개의 왕조들의 역사를 축약한 책이므로, 분량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번역본은 상권과 하권으로 나눠서 출간했는데, 상권은 중국의 하은주 시대와 진나라, 서한과 동한, 위진남북조까지 다루고 있고 하권은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를 시작으로 오대십국과 송나라와 남송 요나라 금나라 시대를 거쳐 원나라의 통일까지 다루고 있다. 예로부터 《십팔사략》은 어린 아동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역사서로 취급됐다. 지식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들이 배우는 교재이기에,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 책의 수준을 매우 낮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본다면, 어떤 분야의 지식을 가르칠 때에는 그 분야의 지식들 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쉽게 가르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수학을 배울 때에도, 인수분해나 미분과 적분 등을 바로 배우지 않고, 사칙연산 즉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등을 배우며 구구단을 외우게 한다. 영어 역시 마찬가지다. 중학교 시절 우리가 외우던 영단어는 인사말이나 기본적인 표현, 기본적인 생활 단어를 외우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전문적인 단어와 복잡한 구문을 배운다. 그럼 중학교 영어교과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 중 어느 과정이 더 중요할까? 나는 중학교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영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영단어나 구문은 중학교 수준에서 배운 단어와 구문만 잘 알고 있더라도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다. 한국인 역시 일상생활에서 학술지에서 나올 법한 전문용어보단, 평이한 단어를 자주 쓰니까. 이런 사례를 잘 생각해본다면, 한 분야의 지식을 배울 때 처음 배우는 기초적인 내용은 그 분야에 익숙한 한 사람의 눈에는 쉬운 내용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를 할 때 기초를 튼튼히 하라는 말을 수없이 듣는데 이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자치통감》과 《십팔사략》을 둘 다 찬찬히 읽어본 바, 비유하자면 《자치통감》이 대학원생들이 보는 전문적인 교재라면 《십팔사략》은 중고등학생이 읽는 교재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우리는 고전하면 어렵고 복잡하고 딱딱한 책으로 생각하는데, 《십팔사략》은 표현이 단순하고, 복잡한 서술이 나와있지 않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독자들이 받아먹기 좋게 잘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자치통감》 에 비해 제한된 종이에 18개 역사서를 압축하여 쓰다 보니 《자치통감》과 《사기》와 같은 깊이는 없지만, 《십팔사략》은 이 두 책보다 훨씬 방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으니 말하자면 폭이 넓으면서 시대의 대략적인 사건을 잘 요약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상권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선사시대부터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다. 특히 내가 주목한 부분은 복잡한 남북조 시대였는데, 이 시기는 5호 16국이라고 표현하듯 난세 중에 난세인데다 많은 나라들이 궐기하여 복잡한 시대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 위촉오 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위를 바탕으로 하여 건국된 사마염의 진나라다. 그러나 이 진나라가 내부적으로 몰락하면서 중원의 북방에는 이민족이 밀려와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고, 한족들은 남하하여 남쪽에서 왕조를 이어나갔다. 책에서는 한족 출신의 남조 국가들을 정통으로 보고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이민족 북조 국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가 얼마나 혼란한 시대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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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블루 2024-06-24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