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 하 - 난세 리더십의 보고 한비자
한비자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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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학문적 성격의 인문고전 《한비자》


인문학을 크게 분류하자면 문, 사, 철로 나눌 수 있다. 문은 문학, 사는 역사, 철은 철학이다. 일반적인 인문고전은 이들 세 영역 중 하나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정 저작들은 세 영역 모두를 아우르며 간학문적인 성격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한비자》는 정치사상서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철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역사와 문학적인 측면도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 고전은 역사와 철학에 치우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면 근대 정치사상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주 저작인 《군주론》과 《로마사논고》를 통해 정치철학을 내세우는데 자신의 사상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검증한다. 동양의 정치사상서인 《한비자》와 《맹자》, 《대학연의》 등등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그러므로 정치고전에서 철학과 역사는 각각 법조문과 판례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한비자》에서 철학과 역사에 관련된 부분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문학적인 요소가 보이는 점은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동양의 정치에서 문학은 하층민의 교화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런 역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학파는 유가다. 그렇기에 공자는 《시경》을 정리했으며, 《맹자》와 《대학연의》 같은 정치서에서도 시를 윤리적으로 해석하여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데 사용하였다. 《한비자》는 유가 사상서와는 다르게 시가 아니라 세간에 통용되는 우화나 민담 등을 참고하여 반영했다. 우화나 민담은 세간에 떠도는 사건들에 허구를 가미하여 스토리텔링 끝에 만들어진 것인데, 오늘날의 소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산문 문학이 발전하기 전 《이솝우화》가 제작됐는데 이런 점에서 우화나 민담은 소설과 산문문학의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리해보자면 《한비자》는 역사적 사례와 세간에 떠도는 민담과 우화를 적극 반영하여 법가 정치철학을 집대성한 책으로 인문학의 세 범주인 문, 사, 철의 속성을 고루 반영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비자》의 의의


인문학의 다양한 장르를 두루 내포하고 있는 《한비자》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유구한 세월을 거쳐 살아남은 고전은 급변하는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통용되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한비자》는 인생사에 있어서 어떤 불변의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로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에 대한 통찰이다. 한비는 인간을 긍정하고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견해는 도가사상과 비슷한데, 《노자》에서 이를 은유적이고 완곡하게 표현했다면 《한비자》는 직설적으로 폭로하듯 내뱉었다. 한비는 인간관계의 핵심을 이익으로 규정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위라도 할 수 있기에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서 군주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직록과 작위를 신하에게 내려서 신하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신하는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군주의 욕망(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한다. 군신, 양자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충성이나 인의 따위의 이타적인 부분이 개입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시민들은 생계를 위하여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근로활동을 이어간다. 기업들 역시 소득창출을 최고의 목표로 내세우고 활동하며 국가 간의 관계 역시도 명분보다는 실용을 최우선적으로 앞세운다. 그렇기에 이익에 입각한 한비자의 관계론은 오늘날 사회 풍조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현실성이다. 제자백가의 사상 전쟁에서 법가는 다른 사상들을 물치치고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난세 중의 난세인 춘추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나라는 진시황제의 진나라인데 그는 나라 내부를 법가의 사상으로 정비하였다. 즉 군주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을 필두로 내세운 진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여 중원의 제국시대를 알린다. 즉 중국의 통일은 법가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여타 다른 사상보다 법가가 현실적으로 탁월하다는 반증이다. 한비는 책에서 유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들은 과거의 통치술을 현세에 구현하려고 한다며 그들의 복고적인 성격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변하는 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이런 한비의 현실적인 주장은 급변하는 시세의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제도적으로 공정을 주장하는 부분이다. 법가에서의 법은 국가 통치의 기준임과 동시에 신민들 간의 공정을 의미한다. 법 앞에서 제국의 만민은 평등하게 포상과 처벌을 받는데 이는 고위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진행된다. 유가나 묵가에서는 강제적인 법보다는 인의와 같은 도덕, 겸애와 같은 박애를 내세워 처벌조차도 최소화하자는 입장인데, 법가의 주장과는 대조적이다. 법가의 입장에서는 인의와 겸애로 국사를 볼 경우 국정 농단과 신민들의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기에 예외 없는 강력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한비가 주장한 법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법이라는 것이 공평하게 집행되는가? 여전히 우리는 금수저, 흙수저를 거론하며 법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한다. 그렇기에 공정성, 투명성을 상실한 오늘날, 《한비자》에서 주장한 공정의 가치는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한비자》의 비판


《한비자》는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왔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커다란 교훈과 의의를 주는 고전이다. 이번에는 교훈적인 측면이 아닌 책에서 비판하고 싶은 부분을 독자의 입장에서 크게 세 가지로 꼽아보려 한다. 


첫 번째로 《한비자》의 내용은 결국 군주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 그리고 리더들이 《한비자》에 열광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 역시 처음 《한비자》를 접했을 때 강력한 리더십에 매료되어 무비판적으로 《한비자》를 좋아했었다. 다른 제자백가에 비해 《한비자》의 내용은 매우 명료하며 내용도 복잡하지 않다. 강력한 군주의, 군주에 의한, 군주를 위한 철학이 《한비자》의 전부니까 말이다. 그런 한비가 꿈꾸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절대 권력의 강력한 군주가 휘두르는 강력한 법제 시스템 앞에 백성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피지배층은 최고 지배층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도구로 전락하며, 모든 만민은 군주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극단적인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세상, 마치 여왕벌과 여왕개미 아래서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일벌과 일개미의 모습처럼 부국강병이라는 구호 앞에 개인의 자율이 침해받는 제국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비가 추구한 제국의 모습은 이런 극단적인 사회였다.


강한 리더십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비가 주장하는 리더십을 따르게 될 시 필연적으로 한 사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로 이어진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결국 독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절대 권력은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개개인의 자유가 공리에 의해 침해받는 사회, 너무도 강력하여 도저히 견제할 수 없는 리더... 한비가 활동하던 전국시대에는 인권이 없는 시대였으며, 정치 제도 역시 군주정이 유일하였으므로 이런 극단적인 정치사상이 통용될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권력은 최고지도자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대다수의 시민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존립해야 하는가? 현대 사회에서 국가 권력의 존재 이유는 다수의 시민들의 자유를 보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다. 바람직한 공리주의 역시 개인의 자율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두 번째로 과연 나라의 부패는 제도 개선만으로 개선될 수 있느냐이다. 국가 문제를 접근하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가 인간에 대한 접근, 두 번째가 제도에 대한 접근이다. 한비는 철저하게 인간을 불신했기에 법과 술, 세로 대표되는 제도적 입장으로 치국에 접근한다. 반면 유가는 성선설을 주장했기에 바람직한 정치는 제도보다 지도자의 품성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두 입장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바람직한 국가는 사회 구성원의 의식과 올바른 제도가 고루 갖춰져야 한다. 구성원의 의식은 높아도 이를 보장할 수 없는 제도가 없다면 한계가 있으며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가졌더라도 이를 활용하는 사람이 악하다면 나쁘게 활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법가 사상의 가장 큰 맹점은 인간을 신용하지 않는 부분인데, 한비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한비가 추종하는 군주 역시 인간이라는 데에 있다. 법가는 군주의 권한을 극도로 높이는 입장인데 이런 무소불위의 군주를 어떻게 규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유가의 경우 전제왕권의 견제 역할로 지식인들을 설정하고 있으며 바람직한 군주는 바른 신하의 직간을 구분하고 수용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법가는 이런 행위를 군주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규정한다. 결국 무소불위의 권력을 규제하는 것은 군주 스스로에 몫인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한비의 철학에 따르자면 법가철학은 필연적으로 지도자의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리해보자면 한비는 군주의 권한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군주 중심의 절대 권력을 구축하게 되면 나라가 올바르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군주 역시 탐욕을 추구하는 인간이므로 결국 국가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한비의 정치철학은 《한비자》에서 우화로 예를 든 '모순'으로 표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바람직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부분과 의식적인 부분 두 영역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하며, 특히 지도층의 경우 권력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더욱 철저하게 내면을 수양해야 한다.


세 번째로 생각해 볼 점은 법가가 주장하는 성악설이 과연 옳은 것일까? 유가와 법가는 각각 성선설과 성악설을 주장하는데 이들의 주장은 너무나도 극단적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복잡하고 미묘하기에 선악 양면을 동전처럼 가지고 있다. 대다수의 국가와 공동체에서는 선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익이 가장 최우선이 된 사회 풍조에서 마냥 선하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인간 사회에서는 선과 악을 골고루 볼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속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한비가 주장하는 대로 인간이 악하고 이익만을 탐하는 존재라면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기 몸 하나의 보존만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와 봉사활동이 이어졌으며, 전국에서 대구 경북으로 자원하여 나간 의료진이 활약 역시 빛나고 있다. 이런 일련의 행동은 인간이 선을 지향하며 선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인간성을 부정한 한비는 과연 이런 모습을 보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결론


오랜만에 본 《한비자》는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다. 고전은 시대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보편적인 교훈과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한비자》는 중국 최초의 제왕학서, 동양 최초로 지도자의 리더십을 고찰한 책인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는 점으로 볼 때, 책의 가치는 세월이 지나더라도 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이번 회독은 신동준 선생님(이하 신동준)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신동준의 번역은 특히 동양 고전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데, 번역도 번역이지만 역대 《한비자》의 주석서를 비교 대조하여 설명한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또한 신동준의 번역서는 기존 학계와는 상이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데, 이번 《한비자》에서도 이 저술이 한비의 단독 저술이라는 점, 그리고 한비의 죽음이 이사가 아닌 요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역자는 수많은 동양 고전을 번역했지만 대체로 부국강병과 전제정치와 밀접한 법가사상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긍정하고 있다. 나는 법가에 대해 역자의 생각과 온도차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번역본을 통해, 역자의 해설을 통해, 법가의 유용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2019년 고인이 된 역자의 부고 소식을 접하면서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1년이 지난 지금, 역자가 가장 애정 하던 《한비자》 번역본의 개정쇄가 나와서 놀랐는데, 오랜만에 역자 특유의 힘찬 어조의 해설을 접하니 생각의 호불호를 떠나 무척 반가웠다.


내가 《한비자》를 접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서평도 이번을 포함하여 세 번 정도 쓴 것 같은데, 뭐든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듯 이번 서평을 끝으로 《한비자》에 대한 글은 당분간 쓰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한비자》에 대한 글을 쓴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서평을 작성했다. 아직 풀어내지 못한 생각 - 유가와 법가의 통치술 비교, 기능론과 갈등론적 시각으로 바라본 유가와 법가사상, 마키아벨리 저작과 한비자의 비교 등등 -이 많지만 훗날로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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